“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역사답사” (고성휘 원장의 프로젝트 수업-3)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역사답사"

 이 글을 쓴 학생은 내 큰 아들인데 지금은 고2가 되어 버렸다. 참 아쉽다. 시간이 멈춰서 보송보송한 얼굴을 계속 봤음 좋겠는데 어느덧 수염이 덥수룩한 청년이 되어간다. 애고ㅗㅗ

(강화, 인천, 군산을 다녀와서)

===우리 가족은 여름휴가를 역사답사를 하는 것으로 결정했다. 역사답사는 내가 대학생이 될 때까지 하기 힘든 일일것 같았다. 그래서 그나마 시간이 있을 때 우리나라의 역사상 가장 힘들고 억울했던 시기를 택하여 갔다 오기로 하였다. 이미 조선시대까지는 많이 보아 왔지만 개항기 이후의 역사는 생소하기 때문에 더욱 흥미로웠다. 그래서 나와 내 동생은 7월 29일 목요일 오전 10시에 출발하여 강화의 역사지를 방문하고 강화의 자랑이라는 간장꽃게를 먹고 저녁 무렵 집으로 돌아오기로 계획하였다.

ㄱ. 강화 : 나는 개항기 때 강화도에서 벌어진 신미양요와 병인양요와 같은 서구 열강의 침입과 우리나라 사람들이 막으려고 노력했던 그 과정 등을 살펴 볼 것이다. 강화의 역사를 이해하기 쉽게 하기 위해 강화역사관을 견학하고 구체적인 사실을 보여주는 장소로 고려궁지-광성보-덕진진-초지진을 차례차례로 가서 충분히 견학을 하기로 함.

===그 다음날인 7월 30일 금요일 오전 10에는 인천으로 출발하기로 하고 인천을 가기 전에 인천 역사박물관을 먼저 갔다가 인천항을 보기로 하였다. 일본의 2중갑문을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러나 아빠가 갑문을 통해 들어오는 배를 보기 위해서는 너무나 많은 시간이 걸려 끝까지 보기는 힘들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갑문을 사진으로만 보고 그 대신 다른 건물들을 보기로 했다. 거기에서 차이나타운을 들러 맛있는 중국요리를 코스별로 먹어보기로 하였다. 역사답사를 마친 뒤 먹는 맛있는 음식들은 하루 종일 고생한 내 몸을 행복하게 만들 것이다.

ㄴ. 인천 : 일제강점기의 초기, 중기의 모습, 일본인들의 수탈과정을 알아보려고 했다. 특히 관심을 끄는 것은 일제의 갑문이다. 그리고 일본의 은행거리와 청나라 다른나라의 조계지의 범위를 살펴보려고 한다. 우선 인천 시립 역사박물관에서 인천의 개항시기부터 일제강점기의 초기 모습을 공부하기로 함. 차이나타운과 일본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의 조계지와 일본이 만들었던 은행들을 보고 제물포구락부까지 역사유적을 보기로 함.

===7월 31일과 8월 1일에는 군산을 다녀오기로 하였다. 군산은 멀기 때문에 하루 만에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라서 피서 겸 그리고 새만금도 볼 겸해서 갔다 오기로 했다. 거기에는 군산 유로 빌리지 36이라는 펜션에서 묵기로 했는데 참 깨끗해 보였다. 거기서 맛있는 삼겹살을 먹기로 했다. 우리 가족은 여행할 때 항상 가는 길을 지도를 찾았어야 했는데 지금은 네비게이션이 있어서 지도를 찾는 수고는 덜었다.

ㄷ. 군산 : 일제 강점기의 중기에 해당하는 시기에 만든 항구도시로서 군산은 일제의 조계지만 있던 지역이다. 일제의 잔재가 가장 많이 남아있으며 일제가 개발해 놓은 길거리들과 주택들을 많이 볼 수 있다 하였다. 그래서 일본 가옥과 일본이 뚫어놓은 길, 뜬다리 부두 등을 보면서 우리나라가 일제의 수탈에서 얼마만큼 고통을 당했는지 알아보기로 함.

1. 강화도

ㄴ. 광성보, 덕진진, 초지진

이 세 개의 진들을 보면서 나는 조선후기왕조의의 무력함을 느꼈다. 영조 이후에는 무기 개발을 하나도 안했다. 신미양요 때 미국은 포탄을 썼다 하지만 조선은 포환을 썼다 물론 다른 무기도 질부터 성능 까지 조선과 미국은 상대가 안됬다. 이런 이유로 신미양요 당시 미군은 달랑 3 명이 죽었지만 조선군은 무려 몇 백명이 사망하였다고 한다. 세도정치 때문에 조선은 무기 개발, 선진 과학은 물론 다른 나라들이 갖추고 있는 모든 것을 누리지 못하고 우리들만의 작은 우물에서 살고 있었다.

조금만 게으르면 한순간에 많은 것을 잃어버린다는 것을 알고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며 실력을 닦아야한다고 생각이 들었다.

2. 인천

이번엔 인천을 가서 개항기 시기와 일제 강점기의 초기의 모습을 보러 갔었다. 여행 루트는 차이나 타운-한.중 문화원-일본우선주식회사- 대불호텔-청.일 조계지 계단- 청나라식 건물-일본 제 1 은행-18은행-58은행-각국 조계지 계단-제물포구락부 로 총 11개의 순서를 정하여 답사하기로 하였다. 인천 여행자 안내소에 들러서 인천시 중구의 지도를 받아 여행일정을 정하였다. 그 지도대로 답사를 하게 되었다.

근대건축전시관에서 본 인천항 2중 갑문이다. 모형으로만 볼 수 있어서 아쉽지만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좋았다. 두 개의 갑문 사이로 배가 드나들고 직사각형 안으로 들어와 짐을 내려놓고 싣고 했다. 이를 선거라고 아빠가 말씀하셨다. 그 당시 아주 파격적인 근대시설이라 하였다. 일제는 수탈하기 위해서 이런 시설까지 가리지 않고 설치해 놓는다. 이들의 치밀한 욕심에 화가 나기도 했고 그것을 금방 잊는 우리나라 사람들에게도 무한히 화가 났었다.

외국인들의 사교클럽이었던 제물포 구락부이다. 구락부는 클럽을 우리말로 옮긴 것이라 한다. 여기를 들어오기 위해선 상당한 위치를 가진 사람들이어야 했다고 한다. 이들은 한편으로 일본의 독주를 견제하려는 목적으로 모이기도 했고 여기에 소속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위엄이 굉장했다고 한다. 내가 그 시대에 살았다면 여기에 들어갈 수 있었을 까?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 나오는 구락부 옆에 사는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나라가 망해가는 모습을 보았을까 아니면 신세계를 보았을까?

3. 군산

한참 피서 철이라서 내려가는 데 만 무려 8시간 이상 걸렸었다. 처음에 우리는 월명동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하지만 너무나 사람도 없고 있는 사람도 길을 몰랐었다. 얼마나 없으면 3차선이나 되는 긴 도로에 횡단보도만 덩그러니 그려져 있고 그 옆에 신호등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참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정말로 영화에서 보는 전염병이 돌아서 황폐해진 마을 같았었다. 그래서 우리끼리 길을 나섰다. 우선 부잔교를 보려고 하는데 아는 사람이 단 한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우리에게 “부잔교가 머죠, 그런게 우리 마을에 있었나요?” 라고 물어보는 사람이 쌓였었다. 그냥 숙소에 가려고 생각한 순간 우연찮게 보인 해양공원으로 가서 물어 보기로 했다. 거기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옛날에 만들어진 것 같으면서도 우리가 찾는 거라고 느낌이 확 왔다. 그래서 가보니 아니나 다를까 부잔교였다. 우리는 헐레벌떡 뛰어가서 사진을 찍고 안내판을 보고 군산 지도를 받았다. 그 때 좀 일찍 나오지 계속 우릴 지켜보던 사람이 한참 뒤에나 나와서 하는 말이 “저 해설사인데요 해설해드릴까요?” 참 웃겼지만 해설 하는 사람이 없어서 듣기로 했다. 그래서 부잔교에서 행해진 일본의 수탈행위를 들었다. 일본 놈들이 쌀을 강제로 수탈하며 가져갈 때 흘린 쌀이 바닥으로부터 30센티가 넘었다고 한다. 종자씨 까지 다 빼앗긴 우리민족의 아픔을 같이 느낄 수 있었다.

4. 답사를 통해 알게 된 점, 느낀 점

이것으로 우리 가족은 역사 답사를 마쳤다. 참으로 긴 3박 4일의 여정이 였다. 우리는 올라오는 내내 일본의 치밀한 침략이 얼마나 우리의 역사를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는지 그 수치에 내내 가슴이 아팠다. 우리가 조금만 방심하면 우리의 역사가 이미 우리가 주체가 되지 못하는 역사가 되어버린다. 우리가 주체적이고 능동적으로 이끌어간 역사가 아니였을 때 우리는 억울하게 우리의 많은 부분들을 강제로 빼앗길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이 역사 답사를 통해서 역사를 능동적으로 이끌어 가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우리는 과거의 수치 스러움을 영원이 묻어두려고 하지 말고 보니 우리나라가 얼마나 많은 수치를 당했고 얼마나 많은 것을 뺏겼는지를 항상 기억해야 한다. 만약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한지 알면 지금처럼 일본과의 일을 지나면 잊고 또 지나면 잊지 말아야 한다. 독도 문제가 그 예 중 하나이다, 일본과 우리나라 사이에 독도 문제를 가지고 싸울 때 우리나라 사람들은 혈서를 쓴다느니 서명운동을 한다느니 하며 일을 벌이고 있다.

물론 이런 점은 좋은 현상이지만 중요한 것은 이런 현상이 오래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군산에서 느낀 점이지만 우리와 달리 일본은 아주 많이 계획적이고 치밀했었다. 그래서 우리는 심한 모욕을 당하고 많은 것을 빼앗길 수밖에 없었다. 왜? 우리가 철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한다면 사람들이 욕을 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이런 점을 받아들이고 고쳐야 할 것들은 알고 고쳐나가야 우리가 발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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