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전후 경산에서의 사랑과 평화의 이야기
(사)경산메노나이트 근대문화 유산보존회(이사장: 권용근 목사)에서는 2024년 11월 19일 오전 10시30분에 대신대학교 신관5층 세미나실에서 [경산메노나이트 근대문화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에 대한 이야기는 6·25전쟁 중에 경산지역에 와서 전국을 상대로 구제사업과 교육사업, 그리고 농촌계몽사업을 통해 난민들을 구제하고 대한민국 근대화 발전에 기여했던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의 헌신적인 봉사의 이야기이다.
이런 사실들은 경산에 자리한 우리교단 영남신학대학교 전 총장 권용근교수가 지난 2022년 논문으로 발표한 바 있으며 이전엔 영남신학대학교 교회사 교수였던 정성한 교수도 언급한 바 있다. 이러한 지역사 발굴에 관심갖고 경산시와 협력의 일환으로 이번 모임도 마련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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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이 이야기는 전국에서는 물론 경산에서도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였지만 다행스럽게 당시 현장 수만평의 땅과 건물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지난 몇 년 동안 영남신학대학교에서 이 내용을 찾아내고 (사)경산메노나이트 근대문화 유산보존회가 구성되므로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지고 경산시의 보존 용역을 받아 보존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특별히 이 현장이 보존 가치가 있는 것은 1949년에 대구 팔공산에 있었던 공산 게릴라들이 박사마을을 습격하여 마을에 있는 남자 전원을 학살했고 다음 해 1950년에는 인근 감옥에 있던 공산주의자들에게 부역했던 1800여명의 부역자들을 군경이 평산 마을에 있는 코발트 폐광에 넣고 죽였다. 그 다음 해 1951년에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은 경산 신천 마을에 와서 20년 동안 눈물겨운 봉사를 통해 난민들을 구제하고 대한민국 근대화 개발에 큰 공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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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측, 권용근 전 영남신학대학교 총장 | ||
그런데 박사리에도 위령비가 있고 평산리에도 또 다른 위령비와 유적지가 보존되어 있음에도 메노나이트 선교사들의 현장은 생생하게 남아 있음에도 지역주민과 지자체 단체의 무관심 속에 버려져 있었다. 또한 전국적으로 다부동 전적지 같은 6·25전쟁 역사의 현장은 잘 보존하고 기념하는 곳과 박물관은 많으나 같은 시대에 순수하게 헌신적으로 봉사했던 현장과 그들의 이야기는 보존되고 개발된 곳이 없다.
그리하여 (사)경산메노나이트 근대문화 유산보존회에서는 이번에 두레마을 대표인 김진홍목사와 백석대학교 석좌교수인 이상규 박사를 초청하여 [경산메노나이트 근대문화 컨퍼런스]를 개최한다. 이 두 분의 강사는 당시 메노나이트 기술학교 교목과 학생으로 있었기에 생생한 이야기들을 들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많은 분들의 참여를 통해 어려웠던 과거의 역사를 기억해 냄으로 문화시민으로서의 자긍심을 더 높이고 6·25 전란 속에 피어난 사랑과 평화의 아이콘으로서 세계적인 평화의 도시로서 경산이 발전하기를 뜻있는 시민들은 열망하고 있다.
경산과 메노나이트
“메노나이트”Mennonite라는 이름은 ‘종교개혁’(1517)때 나타난 ‘개신교’(복음주의)의 종교 운동이다. ‘종교개혁자’들 보다도 더 근원적인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로,- 그 ‘대표자’가 바로 ‘메노 시몬스’Menno Simons 였다. 이들은 ‘성서’聖書에 기초한 ‘삶’을 주장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는 ‘자원봉사’와 ‘선교적 삶’을 살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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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1, “예수”는 ‘신’神의 능력을 가진 ‘사람’으로,- ‘신’의 깜냥만으로도 새로운 ‘땅’과 새로운 ‘하늘’을 열 수 있었지만, 그는 모든것을 포기抛棄하고, ‘희생’犧牲 이라는 ‘고통’苦痛을 선택하여, ‘부활’復活 이라는 놀라운 행위行爲로 그의 ‘존재’存在를 마무리 지었다. (The Politics of JESUS.1972. 일러스트 자료).
사진; 2, 1959년,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들머리에 세운 ‘벅수’法首로,- “예수”의 표정을 ‘패러디’parody 하였다. (MCC, 사진 자료).
경산의 ‘용어더미’라는 ‘시냇물’을 따라 한 참을 돌아 들어야 만,- ‘논’과 ‘밭’ 사이로 <‘깐치밭골’>로 갈 수 있는 두메산골 마을이 있었다. ‘깐치밭골’은 본디, ‘배추김치’의 ’겉절이’가 아닌,- ‘겉절리'(것저리)라는 ‘전통마을’로, ‘까치’의 발자국 처럼 길게 골짜기를 이루고있어, 옛 사람들은 ‘깐밭골’ 이라고도 하였다. ‘깐치밭골’은 ‘일제강점기’때 ‘신천동’新川洞이 되었고 <‘농촌진흥운동’> 이라는 연결고리에 얽매여, “경상북도 농도훈련소”農道訓鍊所의 중심 역할을 하였다. 1936년에 생겨난 일 이다. 그리고는 ‘6,25 전쟁’을 거치고, “새마을운동”의 ‘모티브’가 되었다.
‘6.25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메노나이트’ Mennonite(메노派)라는 ‘농민혁명’으로 널리 알려진, <‘기독교’ 단체(教團)>가 ‘조선땅’을 찾아왔다. 그들은 ‘경상북도 농도훈련소’ 옛 터에 <“메노나이트 직업학교”(MVS)>를 세우고, 구제救濟사업, 직업학교, 전쟁미망인 지원, 농촌진흥사업을 펼쳤다. 그들은 다른 ‘선교사단체’와는 달리, ‘조선’의 고유한 ‘민속문화’를 반겼고, 소중하게 여긴 <"종교인"宗敎人(修道者)>들 이였다.
그들은 1959년,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들머리에, “예수”를 똑 닮은 <나무 ’벅수’>를 만들어 세우고 귀중하게 여겼다. 다른 ‘선교단체’와는 ‘차별’差别되는 점點 이였다. <‘메노나이트 직업학교’>의 옛 터는,- “경북대학교” 농과대학이 되었다. "예수"도 ‘벅수’法首가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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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의 메노나니트
2010년 7월 22일은 세계 기독교 역사를 새로 쓴 날이다. 루터란 세계연맹(LWF·Lutheran World Federation)이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제11회 총회시 지난 16세기 당시 루터교가 아나뱁티스트(재세례파)들을 무참히 박해한 일에 대하여 회개를 선포했기 때문이다. 총회는 아나뱁티스트 후예인 메노나이트 교회 대표자들이 참석했고 루터란 지도자들은 이들에게 사죄했다. 대표적인 개혁자들인 루터와 칼뱅과 그 후예들의 반대와 핍박으로 500년간 살아온 회한이 정리된 것이다.
아나뱁티스트는 종교개혁 시대에 출현했던 개혁적 분파다. 형식에만 그쳤던 유아세례를 거부하고 세례는 개인의 철저한 신앙고백에 근거해 시행돼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몸 전체가 물속에 들어가는 침례를 실시했다. 이 때문에 반대파들은 이들을 유아세례에 이어 또 한번의 세례를 받는다고 비꼬며 ‘Anabaptist’, 즉 ‘재세례파’라는 별명을 붙였다.
개혁시대 초기 이들은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유아세례 거부뿐 아니라 당시 마르틴 루터 등이 추구하던 정교일치를 비판하고 철저한 정교분리 원칙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교회와 국가가 서로 대치상태에 있다고 주장하고 사회의 권력구조가 교회 속으로 전이돼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아나뱁티스트들은 교회를 세속사회로부터 분리된 자발적 공동체로 정의하고 당시 전통과 관습에 도전했다.
개혁파들보다 더 급진적 개혁을 추구하던 이들은 평화주의를 지향했다. 마태복음 5∼7장에 이르는 예수의 산상수훈을 그대로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철저한 제자도를 추구했으며 이에 대한 대가는 당연한 것으로 여겼다. 이에 근거한 침례의식, 정교분리, 공동체, 제자도, 평화주의 등은 당시 기독교 환경에서는 혁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들은 이단과 반역자로 몰리며 루터파와 가톨릭교회 둘 다에게 핍박을 받았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나뱁티스트 이단’을 두 발을 묶은 채 물에 빠뜨려 살해하기도 했다. 교회역사가 후스토 곤잘레스는 "순교자의 수는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다. 그 숫자는 아마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회심하기 전 3세기 박해 기간에 죽은 이들보다 많을 것"이라고 기록했다.
최근 한국교회에 이 같은 아나뱁티스트 신앙에 대한 재평가와 함께 아나뱁티스트 신앙을 배우자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그 배경은 한국교회가 본질을 잃어버리고 있다는 안타까움에서 기인한다. 정교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교일치를 추구하고, 공동체 정신을 상실해가며 세상에 영향을 주지 못하는 제자들만 넘쳐난다는 것이다. 산상수훈에 대한 설교는 많지만 산상수훈에 따라 사는 사람은 적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삶이 고귀하게 비친다는 것이다.
현대 기독교나 사회는 왜 이 아나뱁티스트들의 사상과 행적에 귀를 기우리는 것을 까? 그것은 "화해를 바탕으로 한 평화주의, 공동체 지향, 제자도 추구 등이 현대 한국교회의 병폐를 치유할 요소가 되기 때문이라고들 말한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예수 정신의 근본을 잃어가며 종교화되는 교회를 향한 치료제라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적어도 오늘날 한국교회에 개혁이 필요하다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다. 목회자를 비롯해 평신도 역시 본질 회복에 대한 목마름으로 넘쳐난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이 회자되는 이유는 그들은 말 대신 삶으로 예수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랭커스터 소재 아미시학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은 아나뱁티스트의 삶을 보여준 대표적인 사례다. 피해자 가족은 즉각적으로 범인을 용서한다고 알렸고 그 어떤 보복이나 원망의 목소리도 내지 않았다. 미국 언론들은 현대문명을 거부하고 살아온 이들을 별난 사람으로만 치부하다 용서의 모습 앞에 경의를 표했다.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김경중 총무는 "현대 아나뱁티스트의 특징은 제자도와 비폭력 평화주의로 요약할 수 있다"며 "하나님으로부터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남을 용서하며 사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고 말했다.
현대 아나뱁티스트는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시파에서 그 명맥을 잇고 있다. 신앙 색깔은 조금씩 다르지만 선조들이 추구했던 신앙적 전통은 그대로 계승하고 있다. 메노나이트는 가장 큰 규모의 교단으로 메노나이트세계교회 총회 소속 신자만 160만명에 이르고 있다.
아나뱁티스트 영성은 전 세계 신학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20세기 걸출한 신학자이자 기독교 평화주의자로 알려진 고(故) 존 하워드 요더(John Howard Yoder) 전 노트르담대학 교수는 현대 메노나이트파 대표적 신학자다. 요더의 신학은 스탠리 하우어스(듀크대), 글랜 스타센(풀러신학교) 등 기독교윤리학 대가들에게 이어졌다. 하우어스와 스타센 교수는 자신을 각각 ‘아나뱁티스트적 감리교도’ ‘아나뱁티스트적 침례교도’로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메노나이트파의 경우는 한국과도 인연이 깊다. 김경중 KAC 총무는 "한국전쟁 당시인 1952년 메노나이트 봉사자들이 국내에 입국해 대구와 경산 지방에서 71년까지 활동했었다"며 "이들은 구호 원조활동뿐 아니라 직업학교를 세워 사람을 키웠다"고 말했다. 이후 이들은 강원도 춘천으로 이주한 것으로 알려졌다.
2001년 KAC가 설립돼 아나뱁티스트 신앙과 전통을 국내에 소개하고 있으며 서울과 춘천에 아나뱁티스트 교회가 설립돼 있다. 침례신학대학교 출신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아나뱁티스트 모임 등도 형성돼 있는 가운데 경산에서 교파는 다르지만 그리스도인으로 평화와 구제의 사역을 한 선교역사를 발굴하고 역사화한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