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유구영 선생 20주기를 회고하며

                고 유구영 동지 20주기를 회고하며  

유재무(예장뉴스)

   
 

지난 4월 22일(금) 오후에 영등포선선에서 열린 고 유구영(이하 구영이)선생의 20주기 “노동열사 스무번째 봄날에” 행사에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그를 기억하고 사랑하는 분들과 추억을 공유하고 싶어서 이 글을 남긴다. 구영이를 처음 본 것은 1979년 여름 종로 5가의 기독교회관에서 허춘중 목사의 뒤를 이어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 서울지구 회장을 할 때인 것 같다. 나는 당시 군 제대후 성수동교회 선배 송진섭(전 안산시장)을 따라서 자연스럽게 장청운동과 NCCK-EYC 활동을 했다.

그때 구영이는 고대 기독학생회 활동을 마치고  KSCF(한국기독학생총연맹)의 대학부 간사를 하고 있었다.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각종 집회에서 만났고 한눈에 볼 때 범상치 않은 청년이었다. 그런데 몇년 후 영등포 산업선교회(산선)에 가니 당시 원풍에서 80년에 해직된 장석숙 동지가 “K에 얼굴 빤지르르한 새끼, 여기 방 빌려주지 말아야 돼, 밤에 주전자에 막걸리 받아 쳐 먹고 뚜껑을 치고 노래했는 지 다 찌그러뜨리고 담뱃불로 이불 태웠다” 고 난리를 떨어 웃던 기억이 난다.

한국기독청년협의회(EYC)와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은 같은 층에 있어서 시국행사에도 그렇고 특히 영등포산선에서 모임 때등 자주 보면서 그렇게 지냈다. 나중에 영등포산선에서 구영이와 같이 실무자로 일했던 새문안 출신 이영우나 조성우(연동교회) 연대기독학생회 김철기(기감)  이대수(기장목사) 가 75학번으로 기독학생회 일을 같이 하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구영이와 비슷한 학번들과 활동을 하여 형동생하며 지냈다. 그러나 구영이와 더 가깝게 인연을 맺어 준 곳은 영등포산선이었다. 내 처는 원풍출신으로 80년 합동수사본부에 의해 강제해직(이로 인하여 민주화운동 유공자가 됨)되고 영산에서 노동자 준 실무자로 있었다. 그리고 나는 80년 장청 부산대회에서 만난후 그와 연애를 하고 있었다. 구영이도 K 간사를 하다가 영산으로 부임하여 노동자들 의식화와 현장 투쟁조직을 하였다. 그러다가 나는 88년도에 강원도 태백으로 가면서 영산과 구영이와는 떨어지게 되었다.

나는 1983년 장신대를 졸업하고 내가 있던 청담교회에서 고 조남기 목사(K 이사장 역임)의 주례로 결혼도 하고 그해 가을에 성수동에 제3일 교회(성수삼일 전신)을 세웠다. 예장에서는 가장 먼저 생긴 노동자교회(민중교회)였다. 이 교회는 더 이상 영등포산선과 같은 센터활동을 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당시 학생운동 출신들의 수평이전에 힘입어 가장 가난하고 억압받던 노동자들을 통한 사회변혁을 기대하며 교회라는 합법적 조직을 통하여 의식화를 하기 위한 방편의 운동이었다.

우리는 또 하나의 교회가 생기는 것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다. 우리를 지도한 인명진 목사도 개신교의 특성은 목사가 마음먹은 교회를 할 수 있다면서 이 아이디어를 낸 사람이고 돈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우리 예장의 동지들은 대구(안기성) 안양(박진석) 대전(김규복)에 윤창현(태백) 김영락(울산)에 노동자 교회를 세워거나 부임했다. 나는 성수동교회 출신이고 사는 곳도 뚝섬으로 당시 노동자들이 많이 살고 있는 곳에 노동자 야학을 위하여 노동자교회를 하게 된 것이다.

교회를 하면서도 나는 장신대의 현대신학연구회 후배들중 산업선교를 지원하는 후배들을 훈련하는 일을 인명진 목사를 도와서 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는 대학원 더 다니는 심정으로 약 2년간 더 훈련을 더했는데 1년은 노동훈련, 1년은 현장학습과 선배들 사역지에 가서 노동자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정서와 생활을 배우며 생활하였다(이 첫 모임의 이름은 예장노동목회협의회였으나 이후 예장민중교회연합회로 다시 예장도시민중교회협의회에서 지금은 일하는 예수회(회장 장창원 목사)가 된다. 

모두 어렵게 신학교 졸업하고 고생하고 교회들 가서 편안하게 생활비 받으며 살기를 잠시 물리고 무보수의 이런 훈련을 받는 다는 것 자체가 사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과정에서 1986년인가 청주 옥화대에 계시는 “하나의 집” (조지송 목사가 거주)에서 훈련모임을 하고 청주산선 정진동 목사를 뵈러 가는 길에 당시 구영이가 청주 산다는 말을 듣고 수소문하니 저녁에 트럭을 몰고 왔다. 반갑게 만나서 악수를 하는 데 손이 얼마나 거칠었는지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알다시피 구영이는 얼굴이 잘생긴 청년이다. 무슨 옷을 입어도 어울리고 살짝 웃는 모습은 그야 말로 매력 일품인데 고생을 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짠했다.

그는 구수한 충청도 말씨도 그렇고 약간 욕이 섞인 말투는 카리스마도 있어 보였다. 아마 무슨 배달을 하는 모양이었다. 고대 나오고 왜 이런 고생을 하나? 하고 마음이 안 좋게 돌아섰다. 그 후 서울로 와서 영산에 있던 신철영, 송진섭 선배에게 구영이가 청주서 험한 일을 하던데 영산같은 데서 일을 해야 하지 않냐고 하는 말을 여기저기 한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하게 얼마 후 구영이가 영산의 간사로 올라왔다. 무척 반가웠다. 또 구영이 잘아는 이영우(훗날 김영삼 대통령 비서관)도 같이 일하게 되어 영산에는 오랜만에 젊은 실무자들로 활력이 넘쳤다. 그간 원풍, 해태, 남영, 롯데 노동자들이 주류였던 곳에서 인명진 목사 구속후 80년 이후 활동을 할 수 없었다. 오랜 공백기를 지내고 톰보이 등 새로운 현장 노동자들과 연결되고 노조를 조직하고 현장 싸움을 지도하는 등 노동자들과 밤낮없는 시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 후 호주에게 귀국한 인명진 목사가 구로동에 갈릴리교회를 개척하였다. 영산은 이미 과거와는 다른 양상의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는 데 산선의 주인들이 바뀌것이 었다. 야학도 직접했고 이념성향의 노동자 정치선동을 위한 신문도 내는 등 과거 대형 노동조합과 지도활동과는 다른 차원의 조직활동과 의식이 고양되고 있었다. 회원에서 성향과 규모 그리고 구로동 가리봉 등의 학생운동 출신들이 수평이전한 현장과 연결도 있었다. 그리고 당시 전반적인 노동운동도 이념적으로 주사파등과 같인 노선중심의 투쟁을 하고 있었고 영산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런 기조에서 볼 때 영산의 선배인 인명진 목사의 과거 산선운동과는 많은 차이가 생겼고 급기야 이견의 충돌이 왔고 실무자들과 갈등이 생겼다. 그러나 당시 총무였던 이근복 목사나 신철영 송진섭 선배는 후배 실무자들을 지지하고 그들의 편에서 확실히 서있었다고 보여진다. 그런 연고로 이근복 목사는 인명진 목사로부터 내부 실무자들을 확실히 장악하지 못하고 일을 한다는 비판을 하기도 하였다.

그런 저런 일로 인명진 목사는 이념중심의 노동운동을 하는 구영이와 영우를 내보려고 하였다. 즉 기독교적 가치관과 신앙중심의 운동이 아니라는 것 이다. 인명진 목사의 성격을 잘 아는 나는 구영이에게 그런 귀뜸을 했더니 상관없다는 듯이 “그만 둔 선배가 무슨 참견” 이란 식이었다. 사실 인 목사는 좋게 말하면 영산을 그만 두웠어도 영산에 대한 미련을 지금까지도 버리지 못한 분인 것은 사실이다. 자신의 의견이 묵살되자 인명진 목사는 다시 영등포노회의 산선위원이 되시면서 결국 구영이와 영우는 그만 두게 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문제는 지금와 보면 인명진 목사나 구영이는 자신의 철학으로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한 것으로 본다. 

그후 구영이는 전노협과 민노총의 초석을 놓는 노동운동의 선봉에 선다. 그리고 구영이가 아프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언젠가 보니 얼굴이 하얗게 창백한 모습을 보기도 했다. 내 생각에는 영산에서 거의 먹고 자고 노동자들을 만나는 생활을 하다가 건강을 잃은 것 같았다. 그후 나는 강원도 태백의 광산촌으로 가서 가끔 구영이를 만나곤 했는 데 볼 때 마다 무슨 큰 위로도 못하였다.  목사임에도 그를 위하여 기도도 해주고 싶었고 위로해주고 싶었는데 당시만 해도 낯을 가려서인지 그렇게 하지는 못했다.

그런데 영산에서 이번에 유구영 선생 20주기 행사를 한다고 하여 생각이 내가 기억하는 추억을 남기려고 새민족교회 홈페이지에 가보니 부인인 신윤복 장로가 쓴 글이 눈이 띄었다. 구영이가 임종 전 네 분의 목사들에게 기도를 받았고 장례후 목사님들을 방문했다는 글이다. 나는 구영이나 부인에게 무척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질병의 고통과 절망속에서 목회자인 나라는 존재는 없었을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장례식도 그렇고 그의 기일에도 한 번도 가보지 못했는데 그 후 내 처 동지인 원풍 고 이옥순 장례식에 갔더니 그 곁에 구영이 묘가 있었다. 그의 묘 앞에는 누군가가 자주 찾아온 것 같이 잘꾸며져 있었고 카드와 꽃이 있었다. 잘생긴 얼굴로 웃고 있었다. 그렇게 구영이와는 생전에도 바쁘다는 이유로 세상을 뜨고서는 사자라는 이유로 깊은 교제 없이 그렇게 스쳐간 인연이었다.

나는 2009년 일본에서 돌아와 1983년에 내가 세웠던 성수삼일교회에서 다시 목회를 하게 되었다. 그리고 부활절, 성탄절 연합예배와 연합행사에 가보면 기장의 향린교회와 예장은 새민족교회가 늘 주역이었다. 그후 우리교인 몇이 간병인 교육을 받으러 갔다가 책임자가 민중교회를 아는 분인 것 같아요. 라고 하면서 잘 대해 주었다고 하는 말을 들었다. 그 후 김영철 목사가 새민족에 부임을 하여 사정을 물으니 엣 동지 김종구목사 동생과 구영이 처가 장로가 되었고 간호사 출신인 그가 간병인 교육시설을 운영한다고 들었다.

그후 새민족에는 후배 황남덕 목사가 부임을 하였다. 언제든지 한번 만나면 구영이와의 인연도 그렇고 처와 인사를 해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지금 까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리고 지난 22일 추모행사에도 함께 하지 못했다. 이 글을 정리하면서 통화만 했는 데 반갑게 인사만 했다. 이제야 구영이와 학생 때 부터 같은 교회을 다니면서 사귀고 결혼까지한 사이인 것도 처음 알았다.

구영이 세상뜬지 20년이 되고 문집도 낸다고 하여 구영이에게 좀더 따뜻한 친구로 목회자로 위로하고 격려하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면서 그와의 인연을 남기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글을 황 목사에게 보내고 다시 정리하면서 구영이와의 추억이 있는 분들과 나누고 싶어서 이 글을 남긴다.

구영아 너무 빨리 생을 마감한 이 친구야 너무 늦게 너의 질고와 고통에 대하여 내 마음으로부터 깊이 기억하고 기도한다. 너와 조혼하여 많은 고생을 했을 네 처가 20년이라는 험한세상을 헤쳐나오는 동안 많은 고생과 수고를 했을 것인데 미안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니 처가 우리교단 새민족교회 장로가 되었다는 것에 대하여 나는 너무 감사하고 반갑구나……. 4월 늦은 봄날에 너를 기린다.

   
 

유구영 열사가 걸어 온 길   허영구

1957년 청주 출생, 청주 고등학교졸업후 고대 행정학과 입학, 1978년 유신철폐 고대 교내시위 주동, 수배, 제적, 1979년 긴급조치 9호 위반 구속, 1982년 보성금속 주물공장 입사, 청주직업훈련원 수료, KC전기 입사, 영등포산업선교회 교육 간사, – 1986년 전노추 사건으로 수배, 영등포기계공단 대한중전기 입사,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 선봉대장, 1990년 전노협 사수투쟁, KBS, 현대중공업 투쟁 지, 1991년 강경대, 박창수 열사 사인규명 투쟁, 1993년 전국노조대표자회의(전노대) 정책실, 1994년 민주노총(준) 정책위원회, 1995년 민주노총 정책 부국장, 1996년 5월 2일 투병 중 운명

세월이 참 많이 흘렀습니다. 환한 웃음과 인자한 얼굴로 맞아주던 유구영 동지가 떠난 지 20년이 지났습니다. 하기야 민주노총이 창립된 지 20년이 지났으니 짧지 않은 세월입니다. 서울지역노동조합협의회(서노협)과 전노협, 전노대, 민주노총(준)을 거치며 민주노조총단결 투쟁에 앞장섰던 동지이기에 너무나 아쉬움이 남습니다. 민주노총건설의 감격만이 그의 생의 마지막 기억이 된 것이 한스럽습니다.

밑바닥에서부터 단결투쟁의 초석을 놓은 동지였는데 1996~97 노개투 총파업의 감격도 못 보고 바로 그해 떠나고 말았습니다. 동지가 그렇게 몸담고 싶었고 정책부국장으로 하고 싶은 일들이 많았는데 말입니다. 노동자정치세력화에도 누구보다 열정을 가졌던 동지였습니다. 그러기에 민주노동당의 전성기를 거쳐 지금처럼 노동자진보정치가 어려운 시기에 더욱 생각나는 동지입니다.

그가 대학을 졸업하고 공장으로 들어가고 전두환 군사정권에 맞서 민주노조를 건설하는 과정은 이 땅 노동운동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합법적으로 대중적 노동운동을 펼칠 수 없었던 시기에 온 몸을 바쳐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그로 인해 큰 병을 얻었습니다. 투병 중 일요일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회생기도회가 열렸습니다. 그러나 너무나 아쉽게도 병마는 그를 비켜가지 않았습니다.

1995년 11월 11일 민주노총을 건설하고, 다음 해인 1996년 5월 1일 첫 노동절 행사를 끝낸 다음 날 동지는 운명했습니다. 이제 막 민주노총이 앞으로 나아가려 할 때 말입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전국적으로 수많은 투쟁과 민주노조건설의 토대 위에 세워진 민주노총의 깃발이 막 휘날리던 순간에 떠난 동지는 얼마나 아쉬웠겠습니까?

주변에 있었던 우리들은 너무나 안타까웠습니다. 격랑의 시대를 거쳐 온 노동자 투쟁의 선봉대장이었고, 선한 얼굴의 동지가 그것도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다니 서러웠습니다. 회생기도회에도 참가하면서 그의 회복을 바랐습니다. 지방에서 요양을 하고 있을 때도 많은 동지들이 함께 걱정하고 안타까워했습니다. 그 아픔 못지않게 민주노총으로서는 훌륭한 역랑을 지닌 동지를 잃는 아픔이었습니다.

강산 두 번 변할 만큼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너무 멀게 느껴지는 것은 시간의 길이보다 속도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민주노총 20년 역사도 그렇습니다. 민주노총 건설에 목숨을 바친 동지들에게는 너무 부끄러운 오늘입니다. 불꽃처럼 살다간 동지들 앞에 면복이 없는 오늘입니다. 세월만 보내고 나이만 먹은 게 아닌지 말입니다. 치열하게 살다 먼저가신 동지들을 생각할 때 노조간부로, 노조활동가로 관성적이고 일상적인 나날을 보낸 게 아닌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20년 세월이 흘렀지만 유구영 동지는 모란공원에서 선한 미소로 우리를 반겨주고 계십니다. 그러나 그 당시보다 훨씬 많은 열사들이 모란공원에 모셔진 것은 아직 노동자들의 평등세상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겉으로만 화려한 자본주의 세상, 다수의 노동자들에게는 엄혹한 세월입니다. 아니 야만의 세월입니다.

그러나 유구영 동지 앞에서는 자본과 권력의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는 일입니다. 살아남은 우리들이 20년 전 변혁, 계급, 연대, 투쟁, 민주…전노협정신으로, 민주노초 창립정신으로 투쟁하며 살아가고 있는지 자문해야 할 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먼저 가신 열사들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셈입니다. 민주노총을 혁신하고 강화하지 않은 채 그 성과만 누리고 있지는 않는 지, 그래서 민주노총이 더 어려워 진 것이 아닌 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유구영 동지가 실천하며 꿈꿨던 초심에서 다시 출발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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