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교회 75주년(1950-2025년)과 주현신목사

                         시냇가 하늘 숲, 교회를 새롭게, 세상을 이롭게

과천교회는 과천국민학교 교사였던 박인규, 윤태식 씨가 노회에 청원하여 부림교회의 조원국 전도사를 청빙하여 시작한다. 1950년 경기도 시흥군 과천면 막계3리에 위치한 이기증 씨 자택에서 조원국 전도사와 이기증씨 일가 10명이 첫 주일예배를 드린 것이 그 시초다. 그 후 과천면 관문리 262번지 일대 529평 매입했고 몇 번의 성전을 건축했다. 1960년 1월 24일 45평 규모 예배당을 기공하고 1967년 예배당 헌당 및 제1대 당회장 조원국 목사를 위임한다.

 

이 기간동안 교회는 많은 시련을 겪는 데 우선 1950년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상당기간 예배를 드리지 못한다. 그럼에도 원 뿌리는 흩허지지 않고 종전후 재건을 한다. 75주년 역사를 회고하는 ”질문하는 교회, 응답하는 공동체“ 의 기록에 의하면 과천교회는 마을목회로 시작했음을 알린다. 그러나 지금으로부터 75년전의 마을이라는 개념에는 한 가족과 같은 씨족사회라는 목가적 분위기와 함께 마을을 둘러싼 전통은 무속과 무지가 혼재했다.

그리고 가난이라는 굴레와 함께 교육의 소외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성경구락부(성휘중학)이다. 교인들이 교사를 겸하면서 1968년 까지 지속된다. 여기서 배출된 학생들이 약 600명인데 저학력과 가난을 극복하려는 신앙인들의 노력이다. 가난한 농촌사회를 탈피하지 못한 체 한국전쟁으로 인하여 교회는 서울영락교회의 지원을 10년동안 받았지만 1966년 과감하게 자립선언을 한다. 그리고 자력으로 45평 교회를 교인들 힘으로 건축하고 초대부터 17년간 시무했던 조원국 목사를 위임목사로 세운다.

 

그러나 1972년 조원국목사가 질병으로 쓰러지면서 3년후 은퇴를 하고 후임 김찬종 목사가 부임하기 전까지 약 10여명의 목사와 전도사들이 강단을 지킨다. 그리고 1978년 과천은 서울 위성도시로 수도권으로 편입되면서 신도사로 지정된다. 그렇게 해서 1979년 김찬종목사를 3대 위임 목사로 청빙힌다. 당시 통계로 년간 등록교인수가 2천단위가 넘었을 때도 있다는 증언도 있다. 김목사는 교사 출신으로 그 년배의 지식인으로 교수하는 데 능한 분이고 목회적으로는 성공신화를 이룬 분이지만 교권에 대한 집착으로 인하여 두 번의 아픔을 맛본다.

754명의 목사를 모신 교회

김목사의 호소력짖은 설교는 단순히 테크닉만이 아닌 내용적으로도 장로교 원리나 교회론에 있어 자신만의 탁월한 내용을 갖은 분으로 알려졌다. 역대 많은 설교집을 낸 것으로 유명하다. 그렇게 해서 교회도 재건축하게 되고 교인숫자가 1만명을 넘긴다. 이는 과천지역의 변화와 인구이동으로 인한 것이기는 해도 김찬종목사와 교인들의 열정적인 전도와 구령이 가장 큰 힘이었다. 이에 대하여 75년사 준비위는 1980년대의 한국교회 키워드는 성장이었다고 한다. 바로 그런 한가운데 과천교회가 있는 것이다.

75년사를 집필하기 위한 준비위는 이미 펴낸 40년사(1990년) 창립 기념 화보집(2000년) 그리고 60년사(2011년) 그 후 역사를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를 고민한 흔적을 본다. 따라서 이미 기록된 것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이후 주현신목사 부임 15년네 초점을 맞추기로 한다. 그렇게 해서 편집위원회도 다양하게 교역자 평신도 남녀 특히 젊은 세대들을 포함한다. 그렇게 해서 내부 토론과 정리 집필을 이어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75년사는 역사연대기가 아닌 스토리탤링식의 기법으로 앞으로 100주년까지 25년을 조망하면서 과정에 머문다.

75년사 편집위원으로는 최갑홍, 최학근장로, 제희원안수집사, 김지혜,제갈임주집사, 이모민사모, 임문주전도사,노현민,김창환,주현신목사다. 제목은 ”질문하는 교회, 응답하는 공동체“ 로 판에 박힌 무슨 교회 몇주년책자라고 한정짓지 않았다. 어떻게 보면 문집같으면서도 고루하게 사람이나 나열하는 식의 편집이 아니고 새로운 시도를 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 한 사람에게 의뢰하여 쓴 것도 아니고 위원들이 긴 시간 준비하고 토론하고 대표집필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책의 장정이나 화려함도 없다. 손에 들어갈 정도의 작은 북으로 간편성과 낭비를 줄인 것도 돋보인다.

 

이들은 과천교회 75년중 1950년부터 초창기는 초대 교역자들과 교인들의 그야말로 생존기로 살아내기였고 이후 30년은 성장기로 김찬종목사의 사역시기다. 이후 30년은 성장을 딛고 성숙하는 시기로 주현신목사가 부임후 지역사회와 밀착하며 교인들의 영적 성장을 돕는 목회중이다. 이전의 공간으로 규모로는 수용과 성장의 한계에 이르자 재건축을 결정하면서 약 1년 7개월 광야교회로 인근 학교의 실내육관에서 예배를 드리면서 온 교회가 드린 정성과 수고는 이루말할 수 없었으며 기적적으로 1984년 입당할 때 까지 성장은 정체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역대 교역자

초대는 조원국 목사로 전도사로 51년 부임하여 73년까지 시무한다. 이후 황태주 목사는 1974년에 부임하여 2년간 시무한 서노회 희성교회로 이임한다. 그리고 1979년 김찬종 목사가 부임한다. 그리고 2010년 12월 정년 퇴임한다. 김목사는 1939년생으로 58년 진주 사범학교를 졸업후 남해 일대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냈다. 이후 부산장신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부산 수정교회 교육전도사, 서울 동광교회 목사를 지냈다. 서울남노회 노회장과 과천시교회연합회 회장, 범양선교회 총무, 교회연합신문 이사장을 지냈다.

이후 2010년 부임한 분이 주현신목사로 신학생 시절 이미 과천교회서 김찬종목사님을 부름을 받아 교육전도사를 지냈다(1996-98년) 이후 호주 멜번한인교회(2003-2010년)서 목회를 하다 김찬종목사 은퇴를 기하여 청빙받아 현재 목회중이다. 주목사는 서울 사대를 나와 교사를 하다가 전교조활동을 하며 이후 회심하여 장신대 신대원을 89기로 졸업한다. 주목사가 부임한 후 교회도 크게 재건축을 하고 교육관도 완성한다. 또 지역사회를 섬기는 마음목회로 낮은 곳에 임하는 목회중이다.

주 목사 부친은 인근 안양의 호계동 대영교회서 목회하시다가 정년은퇴 하신 분이다. 서울교도소 앞에 있어 교도관 가족들이 많이 출석한 교회로 알려져 있다. 2025년 초에 소천하셨으며 노회에서 청목회등 개혁적 목회를 후견하시면서 아들을 잘 양육시킨 분이다. 주목사도 부친처럼 단신이지만 알찬 목사로 인정받는 다. 청빙시 그의 설교영상을 보고 마음을 바꾼 분들도 있다고 한다. 작은 고추가 맵다고 목회로나 가르치는 데 전문가다. 그의 손을 거친 주보나 예배순서 하나하나 설교, 광고등 어디하나 허술한 데가 없으며 준비된 목회를 도입한다.

주현신 목사는 누구와도 비교불가다.

목회외에 다른 데 시간을 보내는 분이 아니다 이 정도 교회면 교권정치나 그 흔한 부장 자리에 목을 메지도 않고 총대에도 연연하지 않는 다. 총회나 종로 5가 근처에서 한번도 본적이 없는 목사로 맡겨진 목양에만 최선을 다하는 분이다. 기억하기로는 장신대 이사를 한 것 정도가 총회 활동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많은 시간을 교회에서 목양에 필요한 준비에 여념이 없다. 그의 설교를 듣거나 보면 알 수 있다. 내용을 들으면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으며 완벽한 문장으로 주제와 흐르러짐 없이 전체가 조화를 이룬다.

 

요즘 같은 인터넷 시대에 쉽지 많은 유명 목회자들의 설교를 들을 수 있지만 장마에 먹을 물이 없다고나 할까? 크게 감동이 되거나 은혜가 쉽지 않다. 그러나 주목사의 설교는 다르다. 서울장안에 내노라하는 목회자들이 많치만 아마도 주현신목사의 설교내용이나 전달력 강단 매너는 손가락에 꼽을 수 있다. 이런 점은 과천교회 교인이라면 공감할 것이다. 또 음대를 나오지 않고서도 전문가 수준의 음악성은 찬송가 선곡에서부터 빈틈이 없는 완벽한 예배에 감동한다는 평이다.

 

또 그는 겸손한 목사다. 동역자들과 경쟁하지 않고 겨루지 않는 다. 그의 설교를 인용한 어느 교인의 글을 빌릴 것 같으면 “단순할수록 아름답고, 간결할수록 강렬하다, 본질이 살아난다, 목표가 또렷해야, 목적이 뚜렷해야 성취를 이룬다” 라는 말을 인용하고 있는 데 주목사를 가장 잘 표현한 글귀라는 생각이다. 자신이 실력있고 내용이 차있고 자신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무언가 체워지지 않고 허세를 좆는 게 일반인데 주목사는 결코 그런 자리를 탐하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 것이다.

실력있고 의리있는 목회자

설교만이 아니라 잘 준비된 예배준비로도 유명하다. 찬송가 하나하나와 음악배치와 배열도 그렇고 전문 음악인 다운 면모를 보인다. 또 설교가 흠잡을 때가 없음에도 설교집은 못봤고 알차고 넘치는 내용의 설교를 하는 데도 외부 강단 나가는 것을 즐기지 않는 다. 보통 목회 좀 한다 치고 부목사들 좀 있다 하면 어디 품앗이 집회 할 때 없나 하고 두리번 거리는 데 주목사가 어디가서 설교하고 강연했다는 소리는 듣도 보지도 못했다. 그만큼 내공이 있는 목사이고 철이 난 목사이고 속이 꽉찬 목사로 손색이 없다.

 

이번에 과천교회 75년사를 보면서 영상이나 교회 홈피 그리고 교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주목사는 부임할 때나 지금이나 한결같다는 평이다. 보통 익숙해지고 능숙해지면 건성건성하게 되고 준비도 없고 했던 얘기 또 하고 신변잡기나 하는 데 주목사는 아직도 원고화한 내용으로 설교한다. 그리고 목회를 철저하리 만큼 계획하고 실천하는 지도자다. 그가 세운 교회력과 목회력에 부합하는 강사 선정이나 내용도 어디 하나 버릴 수 없이 알찬 내용들이다. 실제로 교인들이 조직으로 관리되지 않고 목회자와 설교로 영적으로 연결된 것 같은 느낌이다.

 

또 외부 강사도 유명인사도 없지 않치만 무명이라고 들어야 할 내용이 있으면 과감하게 강단에 세운 것을 보게 된다. 그의 목회여정 가운데 가장 감동적인 것은 동역자에 대한 사랑과 관용이다. 고 오규만목사는 전임 김찬종 목사 시무할 때인 1996년 부임하여 2000년에 사임을 하는 데 과천교회가 고잔평강교회로 개척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질병으로 사임하자 후임 주현신목사가 2012년에 부목사로 다시 청빙해 2015년에 소천할 때 까지 극진히 섬겼다.

남과 경쟁하지 않는 마을 교회

한번 거쳐간 사람을 사정이 있다고 해서 어렵다고 해서 다시 사역의 기회를 주는 경우는 흔하지 않다. 그렇게 병들과 어려운 동역자 가족을 돌본 것이 감사하다. 필자는 오규만 목사 사후 1주기 추모예배가 있던 과천교회에 갔었는 데 그 때까지 동역자에 대한 의리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다. 또 호주서 귀국한 변창배목사를 2012년 협동목사로 청빙하고 총회 사무총장으로 선임되도록 사역과 기회를 주었다. 듣기로는 호주 멜버른교회서도 변목사에게 서부지역 교회사역의 기회를 열어 주었다고 한다.

 

한가지를 보면 열가지를 안다고 일단 지역교회의 목회자로 거기서 시간과 정성을 드려 최선을 다하는 목회자가 그 외 노회 총회 교계 지역은 나중이고 그에게는 큰 의미가 있어 보이지는 않는 다. 그러나 단 하나 정성을 기우릴 것이 있는 데 2018년 뜻있는 동역자들과 ‘아드 폰테스’(처음처럼) 라는 개혁적 목회자 운동이다. 이 조직을 만들고도 초대 회장 자리는 양보하고 아마 현재 회장인 것으로 아는 데 소문이나 내고드러내는 운동이 아닌 회원들의 목양의 장에서 개혁가들의 초기 정신을 잊지 말자는 운동으로 안다.

 

과천교회가 한국전쟁중인 1950년대 이 곳 과천에서 시작할 때만 해도 장로들의 이야기를 들을 것 같으면 처음 교회 터를 놓기가 쉽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선교사들도 3번이나 개척을 시도 했지만 모두 쫒겨 갔다는 전설이 있다고 증언한다. 그러나 끊질긴 믿음의 선조들이 터전을 놓은 것이다. 지금은 안양까지 가는 대로가 크게 뚫렸지만 이전만 해도 과천교회 앞으로 도로가 났던 것으로 안다. 그후 과천에 정부 청사가 들어오고 아파트들이 들어서면서 인구가 늘고 과천교회도 크게 부흥한다.

옛말에 “한양이 가까답더니 과천부터 긴다? 라는 말이 있는 데 옛날은 1번 국도가 수원 안양을 지나 과천을 거쳐 압구정으로 가서 한남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양으로 가는 길목의 거리다. 산과 계곡이 어우러진 자연경관 속에서 오랜 역사와 문화를 간직한 곳으로 관악산과 청계산, 우면산이 있어 나무꾼놀이와 경기소리 같은 무형 문화이 있다. 한 때 백제의 영토였으나 고구려 장수왕 때는 율목군으로 조선시대에는 율진군으로 불리다가 이후 과주로 되고 1413년(태종 1)에 과천현이 된다. 1912년 설립된 과천공립보통학교가 현재는 과천초등학교다.

 

한 때 인천부 관할로 있다가 1896년에 경기도가 되고 서울 팽창으로 1978년 과천신도시계획으로 1986년 시로 승격된다. 이후 정부과천청사·서울대공원·국립현대미술관·국사관 등이 들어서면서 서울의 행정기능을 분담하고 있는 위성도시가 된다. 그후 2012년 말, 정부과천청사를 비롯한 대부분의 정부기관이 정부세종청사로 이전하기 시작하면서 과천청사에는 법무부 및 공무원 교육원 등이 남고, 수도권에 분산되어 있는 지방정부 부처들이 입주했다. 그렇게 과천교회도 급성장을 하여 과천을 대표하는 교회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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