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시 소도교회
내가 장신대를 졸업하고 성수동 뚝섬에서 성수삼일교회라는 이름으로 PCK 가운데서 가장 먼져 민중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다가 1988년 강원도 태백으로 목회를 나갔다. 폐광촌의 작은 태백서부교회에서 있다가 광산의 폐광으로 관내 태백산 입구 소도교회로 부임을 하였다. 소도교회는 당시 건축된지 10년이 지났지만 종탑이 뽀족하지 않고 기와로 중간을 자른 모양이 특이했다.
당시 건축을 한 김정수장로(함백광업소 소장)는 하늘을 향하여 바벨탑처럼 치솟기 보다는 겸손하게 하늘이 주는 은혜를 담는 다는 의미로 그렇게 했다고 말씀하신 바 있다. 이 교회는 초대 고 박수병전도사님이라고 계셨는 데 신자들이 늘자 이제 목사 모셔서 목회하라고 하고 자원 은퇴를 하셨다. 부임하니 교회에서 작은 액수지만 은퇴한 전도사님께 매월 생활비를 드리고 있었다.
교인들과 마음이 안맞아 전임자가 공석으로 임시 강단을 보다가 급하게 부임을 했는 데 당시 광업소 소장을 지내고 지역의 유지이며 의보공단 이사장이신 김정수 장로가 내 설교를 한번 들어보고는 좌파는 아닌 것으로 보고 내락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이면에서 전임자를 따르는 이들이 김장로를 따르는 이들이 물리적으로 전임자를 내보낸 것을 아쉬워 하는 교인들을 달랠겸 해서 그들에게 맡겨는 데 그 분들이 원해서 내가 부임을 하게 된다.
광산촌교회지만 나름 자립도 하고 교회건물도 좋아 약 100여명이 모이는 곳으로 나름 재미있게 목회를 했다. 철저하게 장로교회의 전통과 가르침에 중심을 갖고 구역과 성경공부 심방으로 목회를 했다고 자부한다. 그런데 김정수 장로를 따르는 이들과 나름 신앙적 열정은 있으나 이를 싫어하는 이들이 화합이 안되여 있었다. 김장로 부인 김경자 권사는 아이들과 서울 반포에 거주하여 주일만 내려오시고 하여 서울권사라는 별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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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백 광산박물관에서 소도교회 김정수 장로와 우리 부부(2000년) | ||
김장로님과 사촌동생 김홍열장로가 교회의 정신적 지주였고 그 외 안부집사 권사들이 계셨는 데 교인간의 정서와 관계는 물과 기름사이였다. 그러나 잘견디고 노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고 친구도 볼겸 서울로 공부도 하러 오르내리는 등 내적 발전에 열중하였다. 특히 장신대 현신 출신 윤창현목사와 이상진목사가 있어 외롭지 않았고 광목회를 통하여 나름 지역이나 노회에서 개혁적 활동까지 지경을 넓혔다.
어느 때 여름휴가로 홍콩을 다녀왔는 데 막내를 집에 두고 갔는 데 친구들이 사택에 어론들이 없으니 자유롭게 놀러오가는 중에 막내 친구가 교회정문으로 급하게 나가다 그만 차에 치여 즉사를 하고 말았다. 교회에는 외국간다는 말도 안하고 나왔는 데 도중에 올 수도 없고 하여 일정을 마치고 오니 난리들이 났다.
민세로 너무 놀라서 경기를 하는 중이었다 죽은 아니 아버지가 술을 먹고 교회에 와서 행패를 부리는 등 감장을 할 수가 없었다. 거기다가 태백에 태성대학이 들어오면서 한 교수집사가 나오고 신진 인사들이 나오자 목사가 배운 사람 새신자만 좋아한다고 하여 비판을 하고 따로 무리지어 회합을 하는 등 외부 기도원과도 연계가 된 것을 기화로 몇사람을 치리하고는 사임을 선포하고 나왔다.
그러나 이미 사고로 아이에게 트라우마가 생겨 주변에서 환경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하여 사임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 데 마침 의정부에 한 교회서 청빙을 받고 치리에 대한 책임차원에서 사임한다고 한 것이다. 그렇게 나는 태백의 소도교회를 부임할떄도 그렇고 이임을 할 때도 교인들과 불편한 상황으로 떠나게 된 것이다.
그 와중에 내가 못다한 목회를 이어서 할 사람이 누구인가? 생각하다가 현신 후배 박충호목사가 안양에서 임지을 구하는 것을 알고 김장로님에게 말씀드려 소개를 하여 부임케 했다. 그렇게 사임을 하면서 후임자를 소개하고 떠나는 경우가 흔치 않은 데 나는 후임자를 소개자 소개까지 한 것은 나름 목회적으로는 교회서 인정을 받았다는 자부심이다.
그후 박충호목사는 상주 신봉교회로 이임하면서 현신 동지 조남호목사를 소개하여 부임한다. 그러니까 3대 목사가 모두 현신 출신으로 간 것도 흔치 않은 일이다. 그후 조남호목사도 할만큼 하고는 태국선교지로 나갔다. 그리고 현재는 다른 분이 와서 가장 오랜기간 목회를 하고 있다. 김장로는 연로하여 원주에서 사시다가 지금은 코로나 이후 회복이 안되셔서 요양원 신세를 지고 계시다고 한다.
한편 태백에서 같이 목회하던 황지중앙의 이상진목사는 가장 먼져 자원 조기 은퇴를 하여 제 2의 고향인 원주에서 거주하고 상장중앙교회 윤창현목사가 1년전 은퇴를 하여 철암에 가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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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광산노동자들의 투쟁
노동자역사 한내 (hannae.org)
1987년 7월 7일 ~ 8월 20일 1986년에서 1987년 대투쟁을 향하여
1987년으로 넘어가기 전 1986년 11월에 자행된 국군보안대의 ‘박인균 폭탄테러 조작음모’는 광산노동자들 투쟁의 징검다리가 되었다. 테러를 당한 당사자인 박인균은 물론이고 10여 명의 노동자들, 전도사들까지 군보안대에서 1주일간 모진 고문을 당하는 고통을 겪었지만, 이는 도리어 광산노동자들이 자신의 처지를 다시 한 번 돌이켜보게 했고, 이를 계기로 1987년 봄철 노조민주화 투쟁, 민주개헌운동, 노동자대투쟁으로 한걸음 성큼 다가갈 수 있었다.
1986년 봄철 들어 종교계를 중심으로 광산노동자운동을 실질적으로 지원하는 단체들이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5월 사북성당에서 ‘가톨릭 광산지역 노동문제 상담소’가 문을 열었고, 도계성당에는 ‘가톨릭 광산인권 문제 상담소’, 태백시에는 ‘기독교청년협의회’의 광부모임이 활성화됐다. 한편, 강원대 제적생으로 서울 동일제강에서 노조결성 투쟁을 하다 8개월간 복역하고 나온 박인균이 이 해 5월부터 광산에 정착해 젊은 노동자들과 서클활동을 시작했고, 연진탄광 파업에 선동 유인물을 제작·배포하는 등 적극적으로 광산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러나 워낙 운동의 황무지였던 광산지역인지라 그의 활동은 바로 군보안대에 포착됐고, 군보안대는 박인균과 선진노동자 모두를 옭아 넣기 위한 프락치공작을 시작했다.
1986년 6월, 장익수라는 가명으로 박인균에게 접근한 국군보안대 정보원 장창국(장성출신, 당시 29세)은 11월 7일 오후 2시 동료노동자를 소개시켜주겠다며 박인균을 태백시 통리동 연화다방으로 불러냈다. 장창국은 친구들이 통리역 근처에서 개구리를 잡고 있다며 미인폭포로 유인한 뒤 “너는 나를 의심하는 것 같다”고 해 이야기를 하다 보니 오후 5시가 넘고 있었다. 이때 장창국은 깎아지른 절벽 부근으로 유인해 갑자기 나무 밑을 파보라고 해서 박인균이 이상하게 생각하며 파보자, 거기에서 가로 40cm, 세로 25cm 정도의 푸른 가방이 나왔다.
가방 안에서는 지름 10cm, 길이 30cm 정도의 깡통 안에 여러 개의 사제 다이너마이트가 도화선이 꽂혀 있는 채 나왔다. 장창규는 이것을 박인균에게 가져가라고 했지만 박인균이 화를 내며 빨리 폐기하라고 야단을 치자 숨길 장소를 찾는 척하다 갑자기 쇠깡통으로 박인균의 뒤통수를 힘껏 내리쳤다. 박인균은 그대로 20m 가량 되는 절벽에서 떨어졌지만 다행히 절벽 사이에는 좁은 길이 나있어 양손으로 바위를 짚으며 바로 선 채 떨어졌다.
그러나 손과 발, 정강이, 옆구리 등이 바위에 무수히 찢어지고, 엄지발가락은 살이 떨어져 속뼈가 보였으며, 엉덩이가 돌에 짓찧어져 꼬리뼈가 부서졌다. 박인균은 혹시 장창국이 위에서 사제폭탄을 던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폭포 아래의 작은 탄광촌으로 기어가 주민들의 도움으로 도계성당과 선린교회에 연락을 할 수 있었다. 도계성당 김창수 신부가 연락을 받고 6시 30분경에 도착해 박인균을 성당으로 데려간 직후 경찰들은 이미 박인균을 찾고 있었다. 성당으로 옮겨진 박인균은 중상임에도 밖으로 나가면 연행된다며 병원 이송을 거부하고 있다가 밤 11시경 어머니와 이모, 광부 유태호와 함께 태백시 당직병원인 김정형외과로 출발했다.
그러나 이미 태백시 일원에는 밤 8시부터 비상경계령이 떨어져 있었다. 11시 30분경 택시가 통리검문소에 도착하자 총과 철모로 단독군장을 한 10여 명의 경찰이 “이놈이다” 하며 소총을 그의 가슴에 들이대고 노리쇠를 후퇴시켰다. 어머니가 아들을 두 팔로 감싸안자 “이 년 끌어내” 하며 강제로 어머니를 끌어낸 후 박인균의 팔을 등 뒤로 꺾어 수갑을 채우고 재갈을 물린 채 태백경찰서로 연행, 담요로 말아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방치해 두었다.
같은 시간 연락을 받고 김정형외과에서 미리 기다리던 선린교회 신성식 목사, 황지교회 원기준 전도사가 연행되고, 태백시 기독교청년협의회 권오규 총무, 동해광업소 홍병윤, 장성교회 정영희, 석탄공사 최진석, 함태광업소 정문호 등 10여 명이 강제 연행돼 모진 고문을 받았다. 이들에게는 ‘상동의 미군부대 폭파준비’ 등의 내용이 적힌 ‘태백 광산촌 테러분자’라는 조작문서에 서명을 강요했다. 조작문서 속에는 화약은 누구, 화선은 누구, 뇌관은 누구 식으로 이미 모든 것이 적혀 있어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절차만 남아 있었다. 결국 박인균이 몇몇 탄광노동자로부터 사제폭탄을 넘겨받아 장창국에게 줘서 폭탄테러를 하려다 장창국이 거부하자 실랑이 끝에 미인폭포로 떨어지고, 장창국이 이 사실을 보안대에 신고했다는 것이 각본의 전모였다.
이후 3일 밤낮의 고문에도 이들이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인권위원회 윤창현 목사 50여 명이 강릉 보안대에 찾아가 석방요구를 전개하는 등 투쟁이 확산되면서 이 사건은 오히려 탄광지역 노동자들의 분노를 폭발시켰다. 결국 1주일 만에 연행자 전원을 석방하고 장창국을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할 수밖에 없었지만 장창국은 4개월 뒤 사건이 잠잠해지자 석방돼 잠적했다.
이런 엄혹한 탄압 속에서도 광산노동자들의 대투쟁을 향한 발걸음은 한걸음씩 나아가고 있었다. 특히 1987년 봄철에 접어들면서 광산지역 노동자들의 노조민주화 투쟁이 서서히 불타오르기 시작했다. 함백석공에서는 민주노조 위원장을 당선시켰고, 고한의 월산탄광, 삼척탄좌, 성동탄광 등에서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어용집행부에 대한 비판서들이 나돌기 시작했다.
다시 일어서는 탄광노동자들
1987년 6월, 전두환 정권의 집권연장에 대한 분노가 폭발되던 바로 그 시점에서 막장의 오랜 굴종의 삶들이 일어서기 시작했다. 비록 그 규모와 횟수는 대도시의 투쟁과는 비교되지도 않았지만 갱도 위에서, 막장 안에서 탄가루를 뒤집어 쓴 노동자들이 보내는 희망은 확실히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었다.
전국적 개헌투쟁이 최고조에 달하고 있던 1987년 6월 21일, 태백시 변두리 소도동 함태국민학교에서 열린 ‘태백 기독청년회 체육대회’ 자리에서 1986년 ‘박인균 폭탄테러 조작음모 사건’에 연루되었던 오성탄광의 유태호(그후 태백시장), 함태광업소의 정문호 등이 중심이 되어 시내를 향해 시위를 시작했다. 주로 광산노동자들로 구성된 이들 시위대가 광부들의 집단 거주지인 소도동을 행진하여 태백시 중심인 황지동 근처로 들어섰을 때 형사들이 이를 제지하기 시작했지만, 분노한 주변 노동자들이 이들의 제지를 뚫어버리고 밤 9시까지 시가행진을 계속했다.
태백 광산지역에서 처음 일어난 정치적 가두시위이자, 노동자가 중심이 된 광산 최초의 정치투쟁이었다. 같은 날, 사북에서도 20여 명의 노동자들이 월산탄광 해고자 노민구 등 선진노동자들을 선두로 중산에서 사북까지 2시간 동안 가두시위를 벌였다. 20명 모두 광산노동자들이었고, 동원탄좌 노동자도 8명이나 참가하고 있었다. 이러한 열기를 모아 6월 26일 오후 6시에도 60여 명의 노동자들이 황지교회에서 시청까지 500여 미터를 행진했고, 택시기사, 트럭기사들이 경적을 울리며 이들의 투쟁을 지원했다.
6월 29일, 오후 6시에 ‘민주개헌 강원도민운동 정선지부’ 결성식이 개최되어 1,000여 명의 노동자들이 시내로 몰려들고 있었다. 그러나 오전에 발표된 노태우의 기만적 6․29선언은 시위대 내부를 교란시켜 결국 시위는 성당입구를 봉쇄한 경찰을 뚫지 못하고 30분 만에 해산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투쟁을 통해 태백지역 광산노동자들의 투쟁은 확실히 다시 일어서기 시작했다.
[1987년 노동자대투쟁 이전의 광산노동자 투쟁]
△세방광업소(1/13) 해고자 구성모 등 7명과 동료·가족 등 노조사무실 점거농성 중 강제연행
△미성탄광(3/9~11) 100여명 체불임금 요구하며 파업
△오성탄광(4/10) 80여명 체불임금 요구하며 파업
△경일탄광(4/14) 프락치공작 항의로 4명 해고
1987년 광산노동자 총파업투쟁 개괄
강원산업, 대성탄좌, 동원탄좌, 삼척탄좌 등 4개 민영탄광과 석탄공사 산하 4개 광업소 등 총 361개 탄광에는 대략 6만여 명의 노동자들이 고용돼 있었다. 투쟁은 강원도 태백시에서 집중적으로 시작해 8월부터는 전국 탄광으로 이어졌고, 이들의 주요 요구는 임금과 상여금 인상에서 도급제 폐지, 어용노조 퇴진 등 근본적인 문제로 옮겨갔으며 투쟁양상도 국도, 철로, 철도역사 점거 등으로 매우 과격하게 전개됐다.
1987년 당시 광산노동자들이 안고 있었던 문제는 크게 네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다른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물가와 저임금을 들 수 있다. 1986년 광산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은 월 384,004원으로 타 업종에 비해 높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제조업 노동자의 10여 배에 달하는 노동강도, 상존하는 재해위험, 다른 지역보다 10% 이상 비싼 물가 등으로 1987년 광산노련이 자체적으로 집계한 최저생계비 457,991원의 80%에 불과했다.
둘째로, 이들의 임금체제는 성과급의 일종인 도급제였는데, 일정한 시간 내에 달성한 작업량을 기준으로 임금이 지급되는 제도다. 매장량이 풍부한 광업소에서는 ‘갱도급제’나 ‘가다도급제’가 채택돼 작업량이 임금수준에 그다지 큰 영향을 미치지 않지만 영세탄광의 경우 ‘막장도급제’를 채택, 노동자들을 쥐어짜고 있었다. 즉 각 막장에 배치된 2~5인의 한 조가 캐낸 탄의 양에 따라 임금차이가 심하고, 양을 측정하는 계원과의 사이에 알력을 만들어 냈으며, 임금을 좀 더 받기 위해 하루 20분인 식사시간도 줄이고, 안전에도 소홀할 수밖에 없었으며, 심지어는 일요일조차 무급 처리되는 병폐를 안고 있었다.
셋째는 전국 광산노동자 6만여 명 중 70%에 해당하는 45,000여 명이 노조에 가입돼 매우 높은 조직률을 보여주지만, 노조의 부패가 심각했다. 노조간부들의 각종 비리는 너무도 심각해 노조 위원장이 사장보다 더 많은 돈을 착복한다는 소문이 공공연해 파업이라든가 노동자들의 투쟁이 일어나면 간부들이 먼저 도망가는 것이 관례처럼 되어 있었다.
넷째는 진폐증을 포함한 산업재해다. 1985년에만 탄광사고 사망자가 185명이었는데, 이 중 낙반과 붕괴로 115명(62%), 출수와 운반사고로 16명(8.6%), 화학폭발 사고로 15명(8.1%), 가스누출로 14명(7.6%) 등 제대로 갖추어지지 않은 시설에 의한 사고가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1986년 10월까지만 재해건수 5,405건에 재해자가 5,516명에 달했고, 이 중 162명이 사망했다. 또한 공기 중에 떠도는 먼지가 폐 속에 쌓여 화학작용이 일어나면 규소섬유가 쌓이면서 발생하는 진폐증은 직업을 그만두고 휴양을 해도 증상이 계속 악화되는 치명적인 병이었다. 광산노동자들에게는 5~6년 내에 이 병에 안 걸리면 ‘행운아’로 취급될 정도여서 통계에 의하면 매년 3,000여 명 이상이 이 병에 걸리고 있었다.
이러한 열악한 조건 속에서 첫 투쟁은 1987년 3월 대의원선거에 출마했다 해고된 월산광업소 노민구, 동하기업 해고자 김수현, 성동탄광의 구성모 등 8명이 7월 16일 동원탄좌 노조사무실을 점거하고 무기한 단식농성에 돌입하면서 시작됐다. 이들의 투쟁은 18일 5명이 복직되고, 2명은 복직협의를 하기로 하면서 수습됐지만 투쟁의 불씨는 확실하게 지펴지기 시작했다. 이들이 단식농성에 들어간 같은 날 동해탄광 노동자 400여 명이 태풍 셀마로 회사운행차가 정지돼 생긴 공휴일을 무급 처리한 것에 항의하며 노조사무실 점거투쟁에 돌입했고, 7월 16일에는 한보탄광 통보광업소에서 투쟁의 불길을 이어받았고, 7월 21일에는 동해탄광 조광업체인 태극광업에서 투쟁이 전개되는 등 걷잡을 수 없이 확산돼 갔다.
이러한 투쟁은 석탄광만이 아니라 활석광, 석회석광, 금광, 경북지역의 흑연선별공장 등으로 확산됐으며, 투쟁의 양상에서도 국도, 철도 점거투쟁과 경찰과의 투석전 등 적극적인 공세를 취했다. 이러한 광산 노동자들의 투쟁은 8월 12~13일을 고비로 석탄공사 도계광업소 등 대규모 업체에서는 일단락돼가는 한편 소규모 탄광으로 옮겨가기 시작해 8월 20일경에 이르러 투쟁이 마무리되고 있다.
[1987년 7~9월 탄광노동자들의 투쟁]
⦁ 참고자료 : 안재성, <타오르는 광산> (돌베개, 198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