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미산업선교회가 뿌린 씨앗

                  고 권영숙과 고애신전도사

이 글은 고 권영숙이라는 여성 노동자에 대한 생애와 그가 활동한 구미와 대구에서의 운동에 대한 자취를 추적하면서 나온 내용이다. 그 이면에는 고애신이라는 통합 교단 여전도사가 1978년에 구미산업선교에서 만난 열매였다. 권영숙이라는 여성의 정신과 열정은 구미에서 대구로 이전하여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그리고 대구에서의 민중교회 참여와 노동상담소 활동으로 대구 경북지역에서 여성노동운동의 초석을 놓은 것으로 기록된다.

   

     

             권영숙동지추모사업회

권영숙동지추모사업회는 2011년 노동운동가 권영숙의 삶과 투쟁을 기리고 그 정신을 계승하여 노동해방을 실현하는 데 기여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대구지역 여성노동자 및 비정규직 노동자의 권리 보장을 위한 노동운동 지원 사업을 하며 매년 기리고 있다. 1970년 이후 대구지역 노동운동사를 정리한 자료집 출간 작업, 권영숙 동지의 삶을 실현하는 개인이나 단체에 시상하는 ‘권영숙 상’을 제정해 시상하고 있다. 권영숙은 2002년 민주화운동명예회복위원회로 부터 유공자로 추서된다. 

 

 

 

 

권영숙(1957-2010)

안동 남후면 상하리서 5남 2녀중 6번째로 출생해 동네 아곡교회를 다닌 다. 이 교회 100주년 기념비에는 부친 권석술과 오빠등 가족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공부를 잘한 권영숙은 명문 안동여고에 입학하여 경북대에 합격하지만 여성이 무슨 대학이냐는 가족들의 냉대로 교인 소개로 구미의 대기업 코롱회사에 취업한다. 당시 둘째 오빠는 권영직(1942)으로 영신과 장신대를 졸업한 통합측 목사로 대구서 목회를 하면서 NCC와 인권위 활동을 하였다고 한다.

1976년 구미서 공장 생활을 하면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며 오빠 권영직목사의 소개로 1977년에 시작된 구미산업선교를 소개받는 다. 권영숙은 수소문을 하여 고애신전도사를 만나게 되고 의식화되여 고전도사의 동지가 된다. 당시 그 년령대로 구미공단에 입사한 여성으로 고졸은 고학력으로 다른 여공들에 비하여 똑똑한 여성으로 기억한다. 그러나 1978년부터 서울과 인천에서 시작된 동일방직과 YH사건 방림방적과 원풍모방등 도시산업선교회에 대해 기업과 공안세력의 공격이 나오면서 경서노회와 구미의 교회들이 자기들이 설립한 구미산선활동을 접는 다. 

고전도사의 자료에는 당시 ‘1977년 구미산선 사업보고서 및 사업계획서’ 에 이런 내용을 자세히 기록하고 있었다. 고전도사가 구미산선에 부임해 3년도 체 되지 않아 서울에서 일기 시박한 노사분규로 인한 산선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로 이윽고 고전도사에게 여성노동자들을 만나지 말 것을 지시한다. 기업체 사장이 장로이거나 당시 시내 중심의 교회들은 결국 산선활동을 중단하도록 요구한다. 이에 반발하고 저항한 권영숙은 해고를 당하게 되자 구미의 서통이란 곳으로 이직을 한다.

서통은 당시 선파워라는 건전지 회사인데 이 회사에서 권영숙과 다른 노동자 4명은 고애신과 함께 ‘1979년노동자 의식 구조설문 조사’을 한다. 목적은 노동자들의 의식을 파악하고 운동을 위한 기초 조사였다. 하지만 그것이 화근이 되어 권영숙이 부당해고를 당하게 되고 이후 2년에 걸쳐 복직을 위한 합법과 비합법을 넘나드는 투쟁을 하게 된다. 당시 ‘구미는 박정희 대통령 고향으로 도산은 절대 안된다’ 는 인식으로 결국 산선활동은 어렵게 된다.

   
 

정부와 기업, 노회와 교회의 저지로 산선 사역이 막힌 고애신은 이후 서울로 올라오고 후에 함께 실무자로 일한 전점석(대구 출신 인하대 졸업, YMCA지역 운동가 현재 대구 거주) 은 이후 YMCA활동을 하게 되여 부산, 울산등에서 활동한다. 그러나 권영숙은 대구로 거쳐를 옮기고 1980년 침산동의 한국경전기에 취업해 노조를 결성하고 사무장이 된다. 그러면서 대구 민중교회인 달구벌교회를 나가면서 대구지역 노동운동을 시작한다.

이후 1987년에는 한국LBI라는 회사에 취업하고 대구에서 노동자의 집 상담실장, 희년공동체 대표를 맡아 척박한 땅 대구 경북의 노동운동의 초석을 놓는 다. 1989년에는 달구벌교회서 만난 3공단 출신 이상정과 결혼하여 1990년 딸을 낳는 다. 그러면서 민중교회 기독교 여성 노동운동과 시민운동의 모태가 된다. 그러나 연약한 몸으로 2009년 까지 대구에서 활동하면서 쌓인 과로와 암으로 2010년 세상을 떠난다.

당시 서울이나 영등포 인천에서의 여성노동운동의 배후에는 산업선교라는 합법적인 기독교단체는 국가와 공안세력등으로 부터 온갖 음해와 탄압으로 공격을 하지만 산선도 만만치 않게 투쟁을 한다. 그러나 지방 그것도 경상도 구미에서 설립기관인 종교단체가 이것을 이겨내기는 커녕 당시 교회에서 주류세력인 장로나 사장들에 맞서기는 어려웠다. 이러한 시기의 권영숙의 전기는 경북이나 대구의 전설로 남아있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대구지역의 시민운동 혹은 민주화운동가들에게서 회자되던 권영숙의 역사가 다시 부활한 것은 최근 안동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 논문으로 제출된 천용걸이라는 연구자의 노력 덕분이다. 그는 구미공단 자료는 물론 고애신전도사가 구미에서 철수하면서 가져온 자료와 각종 논문과 자료를 조사하여 “1970년대 구미공단 형성기 여성노동운동” 부제 -권영숙과 구미산업선교회를 중심으로-로 석사학위를 받는 다.

   
 

고애신(1952-)

고애신은 1952년 생으로 동대문구 답십리교회서 성장하여 마천동으로 이사하여 부친이 상일교회 장로로 거기서 학창시절을 보낸다. 친구 오빠 권유로 장신대 학부 기교과를 1970년에 입학해 당시 주선애 교수로부터 망원동(당시 서울 분뇨를 한강에 방류하던 지역)을 소개받고 이 낙후된 빈민촌에 동기들과 봉사하게 되고 이후 망원교회가 설립되고 고 이상양전도사가 담임목회자로 부임하지만 곧 소천하고 이후 류영모목사가 사역을 한적이 있었다. 이렇게 망원교회는 고전도사에게나 장신대 학부생들의 봉사현장이 된다.

졸업후는 음성교회 여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영등포산선의 조지송목사로부터 경서노회 구미산업선교회로 갈 생각이 있느 냐는 부름에 응답하여 관례에 따라 노동훈련을 받고 1977년에 파송받아 구미교회에 다니면서 구미 지역 여성노동자들과 독서회와 한자공부 노래부르기등으로 소구룹활동을 한다. 노동자들과 함께 하는 배경에는 친 언니 고성신이 대한모방 노조활동으로 일찍부터 영산에 드나들면서 평생 ‘가난한 사람들과 살겠습니다’ 라는 서원을 한적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산1977년 영등포에서 노동훈련을 마치고 구미로 갔지만 여성  혼자 산선활동을 한다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다. 경서노회가 조직한 구미산업선교위원회 임병길위원장의 산하에서 활동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78년을 지나며 서울의 YH나 동일방직, 원풍모방 사건이 나오자 전국적으로 노동운동도 그렇고 "도산이 들어가면 도산한다" 라는 사회적 분위기로 구미공단에서의 산선활동도 불온시 당하며 노회로부터 노동자들을 만나지 말라는 공문을 받는 다.

그러나 당시 소구룹으로 성경공부, 한자공부, 독서회등으로 많은 소구룹으로 여성노동자들과 교류가 있었다. 그런데 노동자들은 우리는 고전도사님을 만날 수 없다는 편지를 하기도 한다(모두 회사와 교회의 권유로 억지로 쓴 것으로 밝혀짐) 그러나 당시 고 권영숙(1958년) 이라는 당시 코롱에 다니던 노동자가 있었는 데 연약하지만 의지가 굳고 총명한 여성 청년을 만난다. 이러한 역사의 또 다른 주인공 고애신이 등장하게 된 것은 연구자가 논문집필을 위한 노력으로드러난 것이다.

이런 내용이 드러난 것은 현재 대구서 활동하는 분이 2024년 가을에 안동대학교 석사 과정에서 권영숙과 관련된 논문을 쓰는 과정에서 구미산선을 시작한 고애신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여 현재 살고 있는 용문에 와서 구술 인터뷰를 하고 당시 자료를 넘겨받게 된다. 고전도사는 구미서 철수하면서 자료들을 영등포산선에 인계해 보관한 것도 있지만 본인이 소장한 것도 있었던 것이다.  

고애신과 나는 같은 URM출신으로 오래전부터 교류는 했지만 자세한 사정은 몰랐다. 그러나 영산출신인 내처와는 교류가 있었다. 그는 10년전 용문소재 우리교단 여교역자 안식관 총무로 부임한 후 일하다가 정년 퇴직하여 용문에 사는 데 처남이 용문에 살아 갈 때면 연락을 하고 만나고 하는 사이다 그런 가운데 최근 이런 말을 듣게 되 그 논문을 받아 읽고 기록으로 남겨야 겠다는 마음으로 이런 내용을 구성하는 것이다.

고애신은 구미에서 철수한 후 서울로와 일반교회인 자양동에서 사역중 사회선교협의회 천영초간사로부터 사선 간사 후임으로 오라는 청을 받아 종로 5가 기독교회관에서 총무 고 김경남목사와 함께 일했다. 그후 여교역자회 훈련원 간사로 부임하여 고 박창빈목사의 소개로 프리츠목사를 통하여 독일 팔츠주에 1년 반동안 공부할 기회를 얻기도 하였고 이후 EZE의 지원을 받아 여교역자 훈련을 하게 된다. 당시 미국서 박사학위를 하고 온 고 선순화목사와 함께 일한다.

그리고 당시 교단에서 시작된 여성안수 운동에 앞장서 손은하목사와 함께 활동하면서 당시 기독교농민회, 기독노동자회가 출범하는 것에 맞춰 기독교의 진보적 여성단체인 ‘기독여민회’ 를 만들게 된다. 초대 회장으로는 손은하목사가 고애신은 2대 회장을 지낸 다. 당시 전유희 동지등과 기독여성 시민운동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 것이다. 이후 여교역자회의 김화자목사 후임으로 여교역자회 사무총장을 지내고 다시 김화자목사 후임으로 용문의 안식관 관장으로 부임한다

그리고 정년 퇴직하여 용문에서 노후를 보낸다. 육체적 건강은 그만한데 기억력이 감퇴하여 옛 생각을 점점 하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고 한다. 그런 가운데 당시 구미에서의 짧은 사역이 중단되여 어디 말도 글도 쓰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데 권영숙 연구를 추적하다 고전도사에게 까지 찾아와 자료들이 공개되고 논문까지 나오게 된 것은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고백이다.

필자도 고전도사와 오랜 교류를 하였지만 과거의 활동에 대하여 오래전이기도 하고 자세히 묻지도 듣지도 못했는 데 이 논문을 보면서 우리가 잊혀질 뻔한 선배들의 사역들이 알려지게 된 것은 너무 귀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되어 이를 기초로 하여 글을 남기는 것이다. 이 논문은 앞으로 복사하여 영등포산선과 경서노회, 장신대 도서관에 기증할 예정이다.

   
 

평가와 결론 

격동의 70년대-눈부신 ‘경제성장’의 그늘에서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열악한 현장에 내팽개쳐졌던 여성노동자들. 그 어린 가슴에 타오른 불꽃들이 ‘우리도 인간이라’라는 함성으로 터져 나왔을 때, 그 저편에 가렸던 생생한 이야기들중 이미 열려진 것 외에도 많을 것이다. 권영숙의 내용도 그중 하나인 것이다. 그동안 뭍혀져 있던 것들을 지역사회와 학생들이 발굴해 낸 것이다.  

우리나라는 이제 세계 선진국 대열이지만 그 이면에는 이름 없는 노동자들 특히 여성노동자들의 눈물과 땀의 결실을 부정할 사람은 없다. 한국의 산업화는 단순히 노사가 겪는 일반적 갈등이나 분쟁이 아닌 국가가 개입한 국가폭력적 양상이 특징이다. 특히 70년대는 유신체제라는 박정희 일당독재로 언론이나 대학 지성세계와 눈과 입과 귀를 막고, 통치권자 한 사람이 치닫는 길을 무조건 따라가야만 했던 시기였다.

그 통치권자가 추구한 목표는 고도의 경제발전이이었다 박정희(박正熙)대통령이 설정한 국가목표 그 자체는 타당한 것이었는 지 모르나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방법에는 많은 문제점을 내포했다. 군대식의 억압과 통제, 국가지상주의로 인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모순과 갈등이다. 특히 성장일변도의 정책으로 노동자들은 희생당했다. 

특히 성장의 그늘에 묻혔던 이들은 여성노동자다. 정부는 부(富)의 축적우선으로 분배는 나중이라고 했지만 지금도 그렇고 분배는 여전히 최소한이다. 경제발전의 역군은 점점 더 가난으로 그러나 기업은 더 커졌다 여전히 정부는 노동권의 제한, 노조의 어용화, 노동의 천시 풍조 통제와 감시는 여전하다. 그렇게 한강의 기적을 이룬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신의 정당한 몫을 위하여 몸부림쳐온 것이다.

70년대 노동쟁의(勞動爭議) 대부분은 나이 어린 여성 노동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것이 정설이다. 청계 피복((1971~79), 태광산업 농성투쟁(1972~74), 반도상사(1974), 제일제당 노조결성투쟁(1977), 동일방직 노조투쟁(1976~79), 방림방적 체불입금(1977), 남영나일론 임금투쟁(1977), 인선사 노조쟁의(1977~78), 해태제과 노동운동(1979), YH무역 폐업반대투쟁(1979) 등 70년데에 있었던 굵직한 노동운동이 모두 여성근로자들의 투쟁이다. 

   
 

청계천변의 불꽃 전태일 

한국의 노동문제에 관해 남다른 관심을 갖고, 불우한 근로자들의 실태를 고발한 것은 이태호(李泰昊)라는 분이 1978년 8월, ‘불꽃이여 이 어둠을 밝혀라’ 라는 책자로 ’70년대 여성노동자의 투쟁’ 이라는 부재가 붙은 이 책은 박정희(朴正熙)정권하, 공장 여성근로자들의 처지와 그들의 투쟁과 몸부림을 소개했다. 당시에는 국내에서 발간을 못하고 가명으로 일본에서 간행되엇다가 84년 말에 한국어 판이 나온다.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 이씨는 암울했던 시절, 70년대의 한국노동운동에 첫 불을 당긴 청계천 피복공장의 한 근로자 전태일(全泰壹)군의 분신자살 사건을 소개 하고 있다. 1970년 11월 13일, 서울의 거리를 가로로 꿰뚫고 흐르는 청계천 부근의 어떤 피복공장에서 무서운 일이 발생하였다. 나이 어린 재단사 한 사람이 온몸에 석유를 뒤집어 쓰고 성냥불을 그어 몸에 붙이고 있었다. 전태일이라고 하는 이 청년은 화염엠 휩싸인 채 골목에서 도로를 향하여 뛰쳐 나가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고 외쳤다. 

때마침 그 자리에 있던 도 한 사람의 노동자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그 불길 속에 책 한 권을 집어 던졌다. 그것이 바로 한 살마의 생명을 앗아간 분신과 함께 행하여진 ‘근로기준법’의 화형식이었다. 청년이 입고 있던 옷은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변했다. 그의 몸은 숯처럼 시커멓게 탔다. 그의 뱃가죽을 주은 불길은 가장 오래도록 타면서 역겨운 살냄새를 짙게 풍기고 있었다. 잠시 후 청년은 몸을 꿈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리고 이그러진 눈꺼풀을 움직여 눈을 부릅뜨고 피를 흘리면서 다시 한번 부르짖었다. 

"내 죽음을 헛되이 하지 말라!" 그는 다시 길 위로 넘어졌다. 이에 한 사람이 점퍼를 벗어 덮텨 불길을 껐다. 이것은 불과 약 3분 사이에 벌어진 사건이었다. 전태일은 부근의 병원으로 옮겨져 응급치료를 받았다. 그의 전신이 붕대로 감겨졌다. 그의 어머니 이소선(李小仙)은 뒤늦게야 연락을 받고 달려 왔다. "어머니 놀라시면 안돼요" 전태일이 그의 어머니에게 말한 첫마디였다. 

"어머니 저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습니다. 이 세상의 어두운 곳에서 버림받고 있는 목숨들, 불쌍한 노동자들을 위해 죽어 가고 있는 저에게 반드시 하느님의 은총이 있을 것입니다. 어머니 걱정마세요. 조금도 슬퍼하지 마세요. 제가 이루지 못한 일 기핌코 어머니가 이루어 주세요" 그는 어머니에게 이 약속을 지켜줄 것을 세차례도 넘게 다짐하였다. 죽어가는 자식의 마지막 당부를 듣는 어머니는 입술을 깨물엇다. 

"그래. 아무런 걱정하지 마라. 내가 살아 있는 한. 꼭너의 뜻을 이룰께" 어머니가 아들에게 맹세했다. 얼마 후 청년은 규모가 큰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아, 배고파…’ 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남기고 그날밤 숨을 거두었다. 그때 나이 22살이었다.  시골에서 제대로 학교 한번 다니지 못했던 전태일군은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 부모와 동생들 셋과 함께 서울로 옮겨 왔다. 쌍문동 산꼭대기에 6평짜리 단간 판자집을 지어 여섯 식구가 막노동을 하면서 겨우 연명했다. 그들의 보금자리인 무허가 판자집은 4차례나 헐리는 수난을 겪기도 했다. 

   
 

10살을 갓넘어서부터 동대문시장과 서울역등에서 온갖 힘든 일을 해준 대가로 얼마 안되는 푼돈을 벌어 오던 그는 재단기술을 배워 청계천 평화시장의 재단사로 들어 갔다. 여기서 나이 어린 여공들이 숨막히는 작업환경속에서 참으로 어려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장을 목격했다. 그는 근로기준법을 공부했고, 동료직공들의 어려운 생활실태를 조사하여 기업주와 정부 노동당국측에 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호소는 아무도 알아주기 않는 하찮은 몸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죽이고 가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지금도 전태일의 남동생 전태삼은 노동현장을 누비며 먼져간 전태일형과 노동자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의 유지를 받들고 있다. 

그리고 대구 전태일 가족이 잠시 살았던 터를 대구 민주시민들이 앞장서 매입하여 전태일의 친구들이라는 단체를 조직하여 기념관으로 개관했다. 이 일에 앞장선 분은 연세대 출신 치과의사 송필경선생으로 지금도 대구에서 개업의로 대구 시민운동을 위하여 사재를 털어가며 외부 강사 초청강연등으로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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