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정화를 찬성한 어떤 바울신학도의 성명서를 읽고
2015년 11월 10일(평생 윤리학을 공부하는 학생 박종균)
본교의 학생들이 어떤 바울신학도의 글을 읽고 술렁거렸다. 내 주변의 학생들은 지극히 냉소적인 반응들이었기에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대통령부터 집권여당의 국민대표들에 이르기까지 매일같이 이어지는 망언망행에 매우 익숙해져 있던 터라 그런 부류의 사람의 뻔할 뻔자의 글이려니 하고 넘겨버렸다. 국민대표라는 작자의 입에서 “역사학자 99%가 좌파다” “국정화에 반대하면 非국민”라는 개소리(나치주의자에 대한 이런 식의 표현은 너무 교양 넘친다. 만일 그런 개소리를 프랑스에서 했더라면…역시 우리나라는 미치광이들이 살기엔 참 좋은 나라다)까지 나오는 마당에 더 이상 놀랄 일이 뭐가 있겠는가. 며칠이 지났을까 학생들이 또 술렁거렸다. 바울신학도의 글에 대한 어떤 신약학 학자의 반박 글이 있었고 그에 대한 바울신학도의 반박 글이 가히 충격적이네 어쩌네 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주말에는 같은 학회 소속의 교수들까지 염려의 말들을 전화로 주고 받게 되었다. 서울에 있는 제자들로부터 그 바울신학도가 속해 있는 학교가 매우 혼란스럽다는 말도 전해들었다. 그 신학도는 그 글로인해 영웅이 되다시피했으며 심지어 찌라시<조선>의 어떤 주필의 글에서 인용되기까지 했다는(나는 정신 건강상의 이유로 한국의 찌라시들은 상종하지 않기에 어떤 글에서 정확히 인용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소 과장 섞인 루머까지 들을 수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모든 일을 마치는 주말에 내 조교님에게 부탁해 문제의 글들을 보여 달라하였다. 읽은 후의 소감은 혹시나 했는데 역시나 였다.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역사인식은 뉴라이트 논리 그 자체였다. 단지 새로운 건 내가 전혀 모르는 그 신학도가 대학시절 공부를 무척이나 많이 했다는 간증 정도? 골수 흑백논리주의자 신학도의 글에선 수구꼴통들(이것 역시 심한 표현은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권력자에 순종하지 않으면 종북세력이라 규정하는 깡패 논리에 비하면 훨씬 교양 있는 표현이라 생각한다)의 고전적이고 전형적이며 거의 유일한 논리인 “친일-반민주는 근대를 달성한 애국주의, 민족-민주화는 종북좌파”만 반복해서 강조될 뿐이었다. 물론 자신의 간증문은 그걸 멋지게 포장해보려는 과도한 장식이었지만 말이다. 한상범 교수의 말씀을 인용하지 않을 수 없다. “매카시즘의 논리 그것이 최후의 카드…우리나라 우익은 민족주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일제시대에 전부 친일파로써 투항을 했던 매국노들이니까 이 사람들의 유일한 논리는 반공이에요.. 반공으로서 아직까지 정당화했거든, 반공할 것이 없으면 용공분자를 만들어내는 거에요. 반공하나밖에 없어요. 유일한 생명선이 반공밖에 없어요.”
결론부터 말하자. 그 신학도의 표현대로 그는 “역사를 독점하고, 친일/군사독재를 미화하고, 역사를 왜곡하는 시도에 적극 동조하고 역사발전의 역행하는 시대착오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며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일종의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맞다. 이렇게 자신의 말로 자신을 더 이상 잘 표현할 수가 없다. 이점에서만은 높이 평가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그가 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교수들을 향하여 독단적이라고 주장한다. 역사교과서를 독재적 방식으로 획일화를 찬성하는 자가 그 독재적 방식에 반대하는 동료들을 향해 사고의 다양성을 통제하는 독단이라 비판하는 궤변에 사유의 바탕이 흔들릴 지경이며, 높이 평가하려던 초심이 여지없이 붕괴되고 만다.
그의 울분에 찬 성명은 평소 불만의 표출인 듯싶다. 과거 ‘세월호 참사’나 ‘광복70주년’을 계기로 자기 학교 교수회가 발표한 성명에 대해 억수로 못마땅했던 모양이다. 그 뒤틀린 심기가 국정화 논쟁을 빌미로 터져 나온다. 나아가 그런 성명서가 무슨 실제적인 개혁을 이루었는가를 질타한다. 이 대목은 순수하게 이해해주고 싶으나 뭔가 뉘앙스가 그렇지 않다. 사실 교수회가 성명서 하나 발표하는데 그쳤지 국가적 책임을 방기한 다까끼 마사오의 딸의 절대권력과 시녀 언론권력이 그런 엄청난 국가적 재난에 대해서조차 이념적 프레임을 덧씌움으로 거짓 여론을 조작하고 그런 간교한 전술로 위기를 모면해나가는 일을 목도하면서도 성명서 내는 정도에서 머물렀으니 그 말은 외연적으론 맞다. 그러나 바울신학도가 세월호 참사에 대한 동료 교수들의 성명 발표가 마치 자신이 칭송하는 다까끼의 딸 정권에 대한 비판처럼 보였고 그래서 그런 성명서조차도 종북적 행위로 비춰졌다면 이것은 치유불능의 매카시즘 환자라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월호참사만 떠올리면 피눈물이 솟구치기에 여기서 참는다.
대체 무엇이 그를 그토록 흥분시켰을까. 동료교수들이 “일방적인 진리주장”을 하고 있어서? 성서를 자기 허락도 받지 않고 마음대로 해석해서? 아니다. 그럴 리 없다. 그 자신이 성서해석의 권리를 독점한 위치에 있지도 않거니와 매주 선포되는 말씀 속에 나타난 해석의 자의성, 부적절성과 비합리성을 두고 말할라치면 흥분된 공격의 대상은 대중매체를 통해 어떠한 여과장치도 없이 남발 생산되는 목회자들의 메시지에 더더욱 조준되었어야 했다. 과연 그들을 향해서도 울분어린 성명서를 발표한 적이 있었는지 의심스럽다. 권력의 언저리에 있는 목회자들에 대해서도 동일한 성서해석의 잣대를 들이댄 적이 있었을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국정화 문제에 감히 거룩한 진리를 적용시킨 것이 분노스러웠다면, 성서 말씀을 걸핏하면 매국과 독재를 찬양하는데 써먹는 골수 낡은 라이트와 뉴라이트 목사들을 향해선 왜 관용했을까. 뉴라이트를 위시한 소위 한기총의 극우파 근본주의자 목사들의 상상 초월적 궤변에는 왜 침묵했을까. 혹 그가 뉴라이트파 극우 근본주의 열심당원이어서 그런건 아닐까. 대체 성서신학 파트에서 그의 동의 없이 발표된 것도 아니고 역사신학 파트에서 발표된 것에 분노한 이유는 무얼까. 성서해석 때문이 아니라는 것은 그의 성명서 전체를 읽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세월호참사 뿐만 아니라 교과서 국정화 문제 역시 이념의 프레임으로 재단하고 있다. 그런 관점에서 매사 빨간 색이냐 아니냐로 세상을 편을 갈라 보는 것이다. 그에게는 세월호 참사, 검인정 교과서냐 획일교과서냐의 문제, 어떤 성서해석이냐의 문제는 본질적인 것이 아니다. 오직 관심은 빨간색이냐 그렇지 않느냐가 모든 사태의 본질적 관건인 것이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나는 너무도 많이 겪어봤다.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대화를 기대하는 것은 애당초 포기하는 게 자신의 건강에 유익하다. 어떤 말에도 귀 기울일 리 만무하다. 자신의 색안경 자체가 정당화의 요구가 불필요한 공리이기 때문이다.
그는 종북프레임으로 총회장의 명의로된 성명서까지 시비 건다. 자신이 동의하지 않았는데 임원회가 무슨 권한으로 성명서를 발표했느냐는 거다. “권한 남용”의 죄목까지 묻고 있다. 이건 정말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이명박이 수많은 국민들이 반대했던 4대강 개발을 제대로 된 의견수렴 없이 자기 맘대로 강행한 직권남용, 미디어 악법을 날치기 통과해 언론을 장악하고 ‘종편’떡고물로 언론을 권력의 개로 만들어버린 짓거리에 대해 늘 분기탱천하는 사람이다. 국민들 다수가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공과 사도 분별 못하는 다까끼의 딸이 대체 무슨 권한으로 교과서를 획일화하려는 짓을 강행하고 있을까. 매우 많은 국민들이 반대함에도 의견수렴 없이 힘으로 밀어붙이는 권력자들은 대체 무슨 권한으로 지네 맘대로 직권을 남용하는 것일까. 50%를 약간 상회하는 득표율이 전체 국민들의 일반의지일 수 있을까. 최근에 야당 국회의원이 제기한 부정선거의 적나라한 팩트들로 인해 나는 정권의 합법성에 대해서도 지극히 의심한다. 역사 쿠데타를 강행할 정도의 강심장들이라면 선거조작은 식은 죽 먹기로 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이번 역사 쿠데타 파동이 내게 준 교훈이다. 그 국회의원에 대해 현 정권은 “헌정질서 파괴”니 “표를 던져준 국민들에게 대한 모독”이니 정치적 수사만 나열할 뿐 팩트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다. 권력의 개노릇하는 수구 언론은 이 문제 자체가 여론화되는 걸 철저히 차단시키고 있다. 나도 덩달아 흥분하니 살짝 삼천포(삼천포 시민들을 폄하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로 빠졌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자. 차라리 “내 아빠는 사실 독재자의 탈을 쓴 신이랍니다. 참 신이시고 참 인간이시랍니다. 아빠를 신으로 인정하고 섬겨줬으면 좋겠어요”라고 언론에 자기 이름으로 자기 돈으로 광고를 내면 될 것을 왜 학생들이 공부해야 할 교과서를 아빠를 위한 동화책으로 만들려고 그 난리를 치냐 이 말이다. 도올 선생의 말대로 자기 아빠 교과서를 별도로 스페셜하게 만들던가. 바울신학도는 정말 비판해야할 대상에겐 눈을 감고 엄한 총회장, 총회임원들을 질타한다. 독재적 권력을 마구 휘둘러대는 권력자들에 대해선 단 한마디도 내뱉지 않으면서 교단 임원에 대해서 자신의 동료교수들만큼이나 만만하게 보고 있다. 누구 마음대로 그 따위 짓거리를 했냐는 으름장을 놓는다. 결과론적이긴 하지만 그의 성명서에 찌라시와 뉴라이트가 적극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데서 그의 목적은 달성된 듯하다. 극우의 전사로 우뚝 주목받고 싶은 목적 말이다.
그는 반대의견과 의미 있는 토론이 봉쇄되었다고 엄살을 피운다. 70년대 유신시대 초등 고학년과 중고시절을 보내고 80년대 초반 정확히 독재자 전두환의 통치 아래서 학창생활을 한 나로서는 그가 대체 뭔 소리를 하고 있는 건지 웃기기만 하다. 그 시절 학교 선생으로부터도 교수들로부터도 근현대사에 대한 유일한 역사관 이외에 다른 견해를 들어본 적이 없다. 오로지 독재자가 지시한 역사관만 주입식으로 외우지 않았는가. 대학 교양 한국사 시간에도 대원군과 명성황후 이야기 정도에서 진도가 종결된 것으로 기억한다. 일제 강점기의 역사 자체가 기피의 대상이었다. 바울신학도는 운이 좋은 건지 나빴던 건지 80년대 매우 학문적으로 자유로운 우수학교에 다녀서 마음껏 사회경제사, 민중사를 공부할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점은 참 부럽기 그지없다. 내가 철저한 외눈박이 시절 그는 그렇게 다양한 사관을 섭렵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아 내가 깜박했다. 컬러풀한 사유에서 이제 외눈박이 사유로 전향한 것을 오히려 그는 무한히 자랑스러워 한다고 했던가. 저주스런 다양성에 축복스런 획일성인가. 그럼에도 다양성을 위해 획일성을 지지한다는 희안한 논리를 펼치고 있으니.
장황한 그의 얘기를 인내심을 갖고 읽어간다. 이제 드디어 검인정 교과서의 문제를 실증적으로 짚고 있는 대목에 이르렀다. 서점에 가서까지 검인정 교과서를 구입하려는 그 열정을 높이 산다. 열정 면에서는 나랑 비슷한 구석이 있는 것 같다. 나도 작년 논란이 된 교학사 <한국사>를 구경하러 서점을 찾아 댕긴 적이 있었다. 그 교과서 저자 중 이명희, 권희영 같은 사람이 대체 어떤 사람인가 검색해보고 그들이 쓴 아티클도 읽어 보았다. 현재 국정화를 주도하는 무리 중에 그들이 포함된 건 충분히 예상했던 바다. 국정화 교과서를 만들겠다는 건 한마디로 뉴라이트 교과서로 획일화시키겠다는 노골적인 의지의 유사 표현이니 말이다.
아무튼 그는 자신이 대학시절 사회과학을 공부할 때 배웠던 그런 개념들, 역사 공부를 할 때(사회경제사, 민중사) 배웠던 개념들이 검인정 교과서에 등장하는 것을 두고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심지어 역사가의 전문성과 자율성에 맡기는 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임을 검인정 교과서들을 통해 똑똑히 보라고 외친다. 자기가 운동권(?) 시절에 태산같이 습득했던 그 방대한 미스테리아를 현재 대한민국 대중 중고생들이 고스란히 배우고 있다니 나는 개인적으로 그간 철저하게 폄하했던 교육부의 공로에 탄복하고 그간 그들의 지대한 업적을 무시했던 나 자신에 대해 가슴을 치고 반성해야 할 지경이다. 그런 교육부의 역사 교육 때문에 촛불시위에 학생이 직접 나서는 민주시민 의식을 발휘할 수 있었다는 말이 된다(물론 바울신학도는 왜곡된 역사 교과서 때문에 한국의 중고생들이 종북주의자라도 된 것처럼 호들갑 떨고 있지만 말이다). 무협지같이 아무리 황당무계한 이야기라도 너무 논리의 비약이 심하면 재미가 없는 법이다. 그건 이야기라고도 할 수 없는 노릇이다. 그는 4.19 학생의거, 부마항쟁, 5.18민주항쟁과 같은 자유의 역사는 아예 관심이 없는 모양이다. 회심한 좌파, 뉴라이트들은 소실 적에 마르크스-레닌주의, 죠세프, 마오쩌뚱 공부를 통해 실천적으로 무슨 흉측한 짓거리를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떤 큰 잘 못을 저질렀길래 그 시절에 대한 통회하는 심정으로 오직 역사를 빨강/비빨강으로만 보는 눈을 갖게 되었을까. 회심인가 변질인가. 부정선거를 밥 먹듯 하던 독재자 이승만에 저항했던 1960년 당시 이 땅의 어린 학생들, 엄혹한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부산지역의 대학생, 고등학생들, 신군부에 대항했던 광주의 어린 학생들은 대체 어떤 좌파적이고 용공적인 역사 교육이 주입되었길래 목숨을 걸고 거리에 나설 수 있었을까. 그는 뜬금없이 먹거리 주권을 외치던 시민운동을 자신이 한때 대학시절 심취했던 계급투쟁과 연결 짓고, 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의 민주적 참여의식을 마치 공산혁명을 의식화시키는 현행 검인정 교과서와 관련이 있는 것인 양 호도한다. 서구사회의 시민사회운동을 모조리 계급혁명으로 뚱쳐버리는 단순 사고에서 뉴라이트 사고의 정수, 극우 근본주의자들, 가스통 올드 보이들의 집단 광기를 적나라하게 보는 것 같다.
그의 눈에는 검인정 교과서가 유물사관, 공산주의 역사이론을 바탕에 깔고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전복하려는 위험한 공산주의적 교과서로만 비친다. 그래서 폐기되어야 마땅하고 새로운 교과서 즉 자유민주주의 사상만으로 채워진 올바른 역사 교과서가 출현되기 위해 역사 전쟁을 치르자고 선동한다. 오직 빨강/비빨강으로만 쳐다보는 언제나 낡았지만 다른 한편 늘 새로운 역사 인식만을 위한 교육을 위해 성전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것이다. 이번의 역사 교과서 논쟁은 그에게 고지를 이미 점령하고 있는 공산주의자들과의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에 다름 아니다. 그의 결기에서 과거 서북청년단, 나치 유겐트, 오늘날 IS의 광기가 느껴진다. 한국전쟁이 이념전쟁이었고 역사 문제도 결국 이념 문제이니 이건 새로운 한국전쟁을 시작해야 한다는 말이다. 그렇다 낡은 라이트와 뉴라이트들은 국가 권력, 경제 권력, 언론 권력, 종교 권력을 등에 업고 총동원령 태세에 들어간 것이다. 이 문제를 역사 논쟁으로 생각했던 나는 공포에 휩싸인다. 긴급조치 씨리즈와 계엄령이 떨어질지도 모를 일이다. 국가 비상사태이니 말이다.
그러나 검인정 교과서와 전쟁을 불사하며 내세운 저들의 올바른 역사관이란 대체 무엇인가. 그의 글을 읽는 우리를 분노케 하는 대목이 바로 이 지점이다. 그가 내세우는 올바른 역사란 극우적인 낡고도 새로운 라이트 역사관이다. 자신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역사적 사실을 날조할 수 있는 그런 신앙역사관이다. 그런 골수 이념적으로 편향된 역사관은 애당초 팩트는 문제시될 리 없다. 자유민주주의를 부각시키고 사회주의를 깨뜨릴 수만 있다면 팩트따위는 문제되지 않는 역사학의 요건조차 갖추지 못한 신앙역사관이다. 자신들의 신앙을 충분히 반영하는 교학사 교과서를 바울신학도는 자랑스럽게 옹호한다. 검인정 교과서의 이념성을 두고 전쟁을 치르자는 위인이 라이트의 극단적 이념성으로 날조된 역사를 옹호하는데 자유의 정신을 활용한다. 왜냐 그들의 역사는 날조되고 왜곡된다할지라도 선험적으로 선한 역사이기 때문이다. 좌파의 역사는 빨강이니 당연히 악한 역사인 셈이다. 그것은 역사관을 빙자한 종교적 신앙이다. 한국전쟁은 이념전쟁이고 이념전쟁은 1950년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 훨씬 이전인 1920년대 항일 무장 투쟁 당시부터 이미 시작되었다는 상투적 논리를 말뚝 박는다. 그래서 자주 드는 예가 스와보드니(자유)시 참변이다. 이로 인해 독립군의 좌우 진영이 총부리를 겨누는 형국이 되고 결과 간도를 배경으로 하던 좌우 무장 독립운동은 동시에 궤멸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은 좌우의 대결 보다는 의지하고 싶었던 제국주의 소련과 일본 간의 야합으로 인해 배신당한 약소민족의 비극이라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배후의 큰 그림보다는 자신들이 원하는 것만 보려고 한다. 그러니 일제강점기 역사를 볼 때도 민족의 편에 섰느냐 친일매국의 편에 섰느냐가 포커스가 아니라 그때도 이념적으로 어떤 쪽에 섰느냐가 정통/이단, 옳고/그름, 선/나쁨의 관건이 되는 것이다. 이런 프레임에서 친일 매국노들이 좌파만 아니었다면 오히려 그들은 해방 후에 애국적 자유민주주의 잠재태들로 존중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왜곡된 정답을 위해 거침없이 역사를 날조한다. 좌/우 협력이나 협조의 역사는 삭제해버리거나 날조를 일삼고 결국은 좌우의 협력이란 역사적으로 존재하지 않은 것으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좌파 진영의 독립투쟁은 해방을 위한 투쟁이 아니라 온전히 계급투쟁에 몰두한 빨갱이들에 불과했다고 기만한다. 한국전쟁이라는 이념전쟁이 일제 강점기 내내 일어난 것이며 해방이후는 물론 민족적 상잔을 거쳐 해방 70주년을 맞이한 현재도 계속되기에 이념전쟁의 모범 답안을 위해서라면 왜곡과 날조는 기꺼이 아름다운 해석이 되는 것이다. 바울신학도는 과연 검인정 교과서를 서점에서 찾듯이 뉴라이트 역사책을 뒤져 봤을까. 검인정에 분노하는 자가 뉴라이트 교과서의 이념적 역사왜곡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언급이 없다는 것이 그의 극우 편향성을 고스란히 드러내 준다. 극우적 왜곡은 선한 왜곡인가. 스스로 역사획일화 쿠데타의 돌격대로 자처할 필요까지 없을 정도로 노골성이 드러났는데도 유치원생이 봐도 명석판명하게 “당신은 극우다”라는 말을 듣고 싶어 조급증을 드러낸 것이다. 바울신학 공부하기에도 바쁜 그가 굳이 독재자 딸이 밀어붙이는 쿠데타의 지원병을 자처했을까. 무엇이 저열한 쿠데타를 그의 눈에 성전처럼 비치게 했을까. 전쟁의 대의명분. 그렇다 자신의 말대로 뉴라이트, 가스통 할배들이 주장하는 바로 그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다. 그래서 뉴라이트 교과서의 날조된 역사난동을 자유민주주의 회복의 기회로 인식했던 것이고(그래서 교학사 교과서 문제에 대해서는 침묵했을 것이다), 자유민주주의의 완전한 구현을 위한 뉴라이트의 역사 쿠데타를 비판하는 동료 교수들에 대해서는 분노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글을 긁적거리는 중에 택배가 도착했다. 사랑하는 조성진 군의 쇼팽콩쿠르우승 기념 음반… 갑자기 글을 이어갈 마음이 확 사라진다. 그의 두 번째 글까지 도달할 수 없겠다. 조성진의 음반의 유혹이 너무 크다. 간단히 마무리해야겠다. 그와 뉴라이트 수구집단에서 부르짖는 자유민주주의에 대해서다. 그들은 대체 자유민주주의를 어떤 의미로 사용하고 있는 것일까. 결코 학문적 영역에서 논의되는 그 자유민주주의와는 무관하다. 그들의 자유민주주의, 과거 독재자 다까끼 마사오가 한국적 민주주의라 강변했던 그런 류의 사이비 민주주의다. 먼저 자유주의란 것이 뭔가. 개념적으로 다양하게 정의되지만 아이들이 배우는 교과서에 나와 있는 대로 간단히 정리하더라도 그것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를 옹호하는 사상이고, 이를 위해 국가의 권력과 기능이 제한되어야 할 것이 강조되는 사상이다. 그래서 자유민주주의는 사적 소유권과 재산권이 옹호되며, 아울러 양심, 표현, 정치 활동의 자유 즉 시민권에 대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이 기본이다. 한편 민주주의란 권력이 한 개인이나 소수의 손아귀에 독점되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지배 또는 인민 모두의 지배(한 사람의 지배를 철저하게 거부하는)를 추구하는 사상이다. 현재 고등학생이 배우는 윤리 교과서도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편향된 교과서라서 자유민주주의를 그렇게 기술하고 있는가?
수구 라이트들에 의해 규정되는 자유민주주의의 뜻을 새겨보면 로크나 루소, 롤스 같은 사람은 완전한 자유민주주의에 위배되는 종북주의자들이 되고 만다. 사실상 자유주의와 민주주의는 서로 조화되는 사상도 아니다. 양자 사이엔 긴장적 요소들이 내장되어 있다. 자유주의자들은 원래부터 민주주의가 달가울 리 없었다. 그래서 양자는 갈등을 내재한 접합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말하자면 밑으로부터의 민주주의를 향한 민중적 요구를 자유주의는 최소한으로 수용하여 대의제라는 형식으로 통해 제도화한 것이 자유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 민주주의가 ‘자유’라는 수식어로 제한되어야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서 여전히 논쟁 가운데 있다. 그리고 지금도 민주주의는 현재 진행적으로 그 방향성이 새로이 모색되고 있다. 그런데 한국의 극우주의자, 올드뉴라이트들 그리고 바울신학도가 찬양하는 자유민주주의란 뭔가. 엄밀히 말해 그것은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라 아블라스터(Anthony Alblater)의 말을 억지로 빌리면 냉전적 자유주의라 말할 수 있다.
말하자면 공산주의자로 지목되거나 그걸 가능성이 있는 자들에게는 가차 없이 자유를 박탈시키는 자유주의다. 자유주의의 원칙은 오직 반공적 사고를 하는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다. 사상의 자유를 불허하는 자유주의, 자유민주주의를 용납하지 않는 자유주의다. 극우주의자들이 들먹이는 자유는 한마디로 반공주의에 다름 아니다. 그러니까 친일파 매국노들에 의해 애국민족지사들에 대한 박해, 이승만 독재 하에서 벌어진 부정선거, 다까끼 마사오의 군사 쿠데타와 유신 쿠데타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권유린, 심시어 전두환의 5.18대학살도 공산주의자들과의 전쟁이요, 그들의 만행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위대한 수호행위가 되는 것이다. 모두에서 언급한 한상범 교수의 말대로 그 누구든 독재권력에 걸림돌이 되는 자들을 공산주의자로 규정만 하면 그 다음은 자유민주주의의 이름으로 억압과 박해, 고문과 학살을 가해도 용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자체가 벌써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행위이고 그것은 자동적으로 용공이나 종북으로 규정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가장 비합리적이고 비이성적이며 잔인무도했던 이념프레임이 우리사회에서 작동되는 가장 강력한 국가적 억압 장치의 수단이자 동시에 이데올로기 장치로서 그 역할을 기막히게 수행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강고한 신앙적 기계장치에 민주화 10년 동안 약간의 균열이 생기자 낡은 라이트와 뉴 라이트가 대동단결하여 “전쟁‘이라는 극언까지 내뱉으며 광분하는 것이다. 반공프레임이 사라지고 지역차별주의가 소멸된다면 일제 강점기부터 현재까지 줄곧 우리 사회의 지배계급으로 군림해오던 그들의 기득권이 유지되기 쉽겠는가.
진짜 그만 쓰련다. 조성진 군의 연주를 들으며 되지 못한 글을 앞에 두고 쓸데없는 댓글을 쓰고 있으니 이놈의 한심한 한국 사회. 나는 닉슨 대통령이 그깟 사소한 일로 하야한 미쿡이 부럽다. 국민을 위한 국가기관이 노골적으로 선거에 개입한 사실이 드러났음에도 부정선거가 자행되었음에도 권좌를 추호의 흔들림도 없이 지키고 있고, 그 사건에 대해 수사의지를 가진 검찰총장과 현장의 수사관을 종북세력으로 규정하고 찍어내는 한국이 부끄럽다. 동구의 가난한 나라 루마니아에서 화재로 인한 수십 명의 사망사건을 두고 국민에 의해 내각이 총사퇴 당하는 민주적인 모습이 부럽다. 세월호 참사에서 보여준 정부의 무능함과 그 무능한 정권의 개 노릇이나 하는 언론이 또 다른 권력으로 뻐기고 설치는 한국 사회가 부끄럽다. 교과서를 감히 빨갱이스럽게도 자유발행하고 다양한 견해를 자유롭게 개진할 수 있는 공론장이 확보된 프랑스, 독일, 영국 같은 국가가 부럽다. 그러나 독재자의 딸이 선봉에 서서 선진국 북한을 추종하여 역사 교과서를 획일화 하겠다고 설치는 이 선진적인 국가가 부끄럽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팽 콩쿠르에서 우승한 조성진 군이 있어 행복하고 독재적 전횡에 아랑곳하지 않고 지금도 거리에서 촛불을 밝히는 민주 시민들이 있기에 행복하다. 단 한 개의 촛불이라도 꺼지지 않는 한 대한민국은 희망적이다.
2015년 11월 10일 아들로부터 조성진 군의 기념 음반을 선물 받은 역사적인 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