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힘을 주시고(설교)
시23편; 행 4:5-12; 요일 3:16-24; 요 10:11-18
부활절 네 번째 주일/노동주일
김영철목사(새민족교회)
오늘은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이자 노동주일입니다. 다가오는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을 앞두고 이 땅의 노동자들을 위해 기도하며 노둥문제를 깊이 생각하는 주간이기도 합니다. 특별히 영등포산업선교회에서 이번 노동주일을 ‘비정규직 노동자희망주일’로 지키자고 제안했습니다. 이제 노동자들의 절반을 차지하는 비정규직노동자의 문제는 우리 사회의 핵심적인 과제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용의 불안은 생존의 문제이고, 그러한 생존의 문제가 걸리게 되면 삶의 모든 다른 차원은 뒷전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말하자면 인간으로서 기본적인 ‘존엄’을 지키기 어려운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22명의 해고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몰아간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의 경우를 보게 되면 이러한 현실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교회가, 우리 사회가 이러한 노동자들을 향하여 무슨 위로와 힘을 줄 수 있을까? 곰곰이 생각하게 되는 주일이기도 합니다.
저도 짧은 기간이지만 노동현장에서 일해 본 적이 있습니다. 노동이라는 말이 대단히 신성하게 여겨지던, 모든 것에 우선한다고 추상적으로라도 생각하던 시절이었지만, 직접 경험한 노동의 현실은 참으로 어두웠습니다. 10개월의 공장생활을 돌아보면 ‘황량함’ ‘지루함’ ‘먹고 사는 일로 아웅다웅하는 다툼’ ‘앞날에 대한 희망없음’ 등의 단어들이 떠오릅니다. 가장 많은 시간을 사용하는 자신의 삶의 현장이 그러할진대 어떻게 그곳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나름대로 의미있고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노동으로 자기 자신을 실현하고 사회적 가치를 높인다는 것은 사치스러운 말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오늘날 ‘노동’이란 개념은 새롭게 정의되고 있습니다. 과거에 산업현장에서 일하는 육체적 노동만을 ‘노동’이라고 생각한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체적 노동 뿐만 아니라 정신적 노동, 지식노동, 예술노동 등 모든 인간의 활동들을 노동이란 개념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이 가진 지적 육체적 능력으로 어떠한 재화나 가치를 생산하는 총체적인 활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면에서 노동문제는 노동자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인간들의 보편적인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포스트모던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노동문제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담론이 제기되었습니다. 최근 관심을 끌고 있는 재독철학자인 한병철 카를스루에 조형예술대교수의 <피로사회>(문학과 지성사)는 “자본주의화 된 인간은 스스로를 착취한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어 2010년 독일에서 출간되어 열광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이 책이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얘기의 심각성으로 따지면 엄청나게 두껍거나 어려운 책이라고 생각하는데 실제로 분량도 짧고 책도 얇으며 내용도 간단명료한다는데 있는 것 같습니다. 한병철은 과거를 규율사회, 20세기 후반 오늘의 포스트모던 사회를 성과사회로 구분합니다. 규율사회는 ‘~해서는 안 된다’는 금지나 또는 ‘~해야 한다’는 명령에 의해 움직입니다. 그런데 성과사회에서는 모두가 ‘할 수 있다!’라고 외치며 질주하는 긍정 과잉 사회입니다. 성과사회는 불행한 사회가 아니라 오히려 지나치게 행복을 추구하는 사회입니다. "타자의 강요 없이 자발적으로" 스스로에게 동기 부여를 하고 능력을 계발하는 사람들의 자기 착취가 피로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지나친 자기긍정과 계발이 도리어 자신을 피로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의 노동현실 우리의 사회는 바로 자기 자신이 자신을 착취하는 ‘피로사회’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더구나 생존의 벼랑으로 내몰린 비정규노동자들에게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입니다.
부활절 네 번째 주일의 우리에게 성서말씀 특별히 시편의 말씀으로 주어진 시편23편은 이러한 사회현실에 처한 노동자들에게, 하나님의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설교 제목의 부제를 ‘노동자들에게 주시는 시편23편’이라고 붙여 보았습니다.
1. “주님이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어라”
무엇보다도 시편23편을 통해 주시는 위로와 권면은 부족함이 없다는 풍성함에 대한 말씀입니다. 우리의 세상은 사실 풍성하게 살 수 있도록 주어졌습니다. 자연의 풍성함, 물질의 풍성함이 있습니다. 세계는 우리가 나누어 가지기에는 풍성한 것으로 채워져 있었던 것입니다.
<예언자적 상상력>이란 책에서 구약의 모세전통과 다윗전통을 구분하며 성서를 새롭게 볼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의 구약신학자 월터 부르그만은 구약성서에서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시고 난 뒤 세상에는 언제나 아름다고 풍성함이 넘쳤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성서에 부족하다는 단어가 처음 나오기 시작한 곳이 바로 요셉이 이집트에서 7년 풍년을 만났을 때 곡식 창고를 크게 지어 비축했다가, 7년 흉년이 들었을 때 이를 비싸게 팔아 이집트파라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주고 본인은 국무총리라는 벼슬을 얻게 되었을 때라고 했습니다. 말하자면 세상에는 모든 사람들이 살 수 있는 땅과 자원들이 풍성하게 주어졌지만 이를 독점하려는 사람들로 인해 부족함이 생기는 것입니다.
독점의 욕심을 없애고 서로 나누는 세상이 된다면 이 세상은 결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주님이 우리의 목자가 되시는 상황입니다. 세상창조의 원리대로 살아가며 열심히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주님은 결코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입니다.
2.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신다”
주님께서는 오늘의 노동자들에게 아름다운 자연과 참된 쉼을 주십니다. 자기자신을 스스로 착취하는 ‘피로사회’에서 우리가 탈출하여 새로운 사회를 열어나갈 길은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것은 참된 쉼입니다. 진정한 안식입니다. 오늘날 작게 쓰며, 느리게 사는 삶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생명과 평화를 근본적으로 부정하는 자본주의적 국가사회체제를 몸으로 거부하며 자유와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경쟁과 성과주의를 거부하고 기계적인 노동에 자신의 몸을 내맡기기를 거부하는 참된 쉼이 필요합니다. 그런면에서 성서에서 ‘안식’이란 개념이 참 중요합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는 어떻게 보면 주님 안에서 ‘안식’을 체험하며 누리는 시간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주님이 인도하시는 풀밭 물가로 가 편안함과 안식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3. “새 힘을 주시고, 바른 길로 나를 인도하신다”
오늘 우리는 모두다 힘이 빠져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정신이 혼미해져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도 잊어먹고 살아가게 됩니다.
피로사회의 특징인 과잉 긍정이 가져오는 자기 착취의 이면에서는 보다 심오한 사회적 비극이 전개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연대의 불가능성’입니다. 자기 착취가 ‘개별화’와 ‘고립’ 속에서 이루어지면서 낙오된 개인들에게 치명적인 병, 즉 우울증, 주의력결핍과잉행동장애, 소진증후군 같은 신경성 질환이 생깁니다. 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행복해지길 원했고, 그래서 질주했고, 그 과정에서 지쳤고, 그리하여 낙오했습니다. 누구의 책임입니까? 바로 나의 책임입니다. 실패한 자기 긍정은 필연적으로 자기혐오와 자기 부정으로 귀결합니다. 더구나 애초부터 개별자였던 나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예전에 ‘할 수 있다’고 외쳤던 나였기에 이제 와서 ‘이제 더는 못하겠으니 도와줘’라고 말하는 것은 자존감에 더한 상처를 줍니다. 과거 규율사회에서는 욕망을 금지하고 노동을 강요하는 외부의 주권에 대해, 나의 주권을 회복하기 위해 또 다른 ‘나’들과 함께 ‘우리’라는 이름으로 연대하고 저항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를 노예로 만든 주권자가 바로 나 자신이라면 도대체 연대와 저항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새 힘을 얻어 우리를 죽음의 현실로 몰아가는 이 상황에서 참된 사회적 연대를 회복해야 합니다. 교회공동체의 역할과 과제는 앞으로 이러한 개인적 연대와 사회적 연대를 가능케하는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입니다.
4. “죽음의 골짜기에서도 함께 하시고, 두려움에 사로잡히지 않도록 보살펴 주신다”
부활 이후 예수가 죽음의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선포하신 말씀은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이라는 말입니다. Peace with you! 저는 이 말씀을 특별히 22명이나 죽어가며 실제적으로 죽음의 공포에 떨고있는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주시는 위로와 권면의 말씀으로 듣게 됩니다. 개인적 낙담과 희망없음에 그들은 생명줄을 놓고 말았습니다. 살아있는 자들도 온 몸과 마음이 상처투성이입니다. 주님은 그러한 사람들 이 땅의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보살펴 주십니다.
그러한 활동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이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을 상담하고 있는 정신과전문의 정혜신이다. 최근에는 ‘와락’이란 치유센터를 만들어 함께하고 있다. 쌍용자동차 해고자들은 대부분 외상스트레스증후군을 앓고 있다.
“쌍용자동차 공장 안에서 77일간 싸우는 동안 물도 끊기고, 전기도 끊기고, 너무나 날카롭고 극단적인 일이 벌어졌어요. 밤에 자지 못하게 계속 방패를 두들겨 공포를 일으키고, 정상적인 형태가 아니었죠. 노동자들이 싸우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거죠. 하지만 국가 공권력은 그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가공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죠. 이 힘이 와장창 깨놓고 싹 빠지면 사람의 심리가 어떻게 되냐면 가해자는 보이지 않는데 피해자만 남아 있는 상황인 거예요.”
공장에서 쫓겨나 거리로 내몰린 노동자는 자신에게 공권력이라는 가해자 대신에 자신과 가족과 동료들을 미워하게 된다. 차츰 주변과 관계가 끊어지고 끝내는 죽음을 선택하게 된다. 유독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의 희생자가 많은 이유는 여기에서 비롯한다. 바로 국가 공권력이 훑고 지나간 살인적인 진압. 이 경험은 적군과 아군을 구별하지 못한 채 싸워야 했던 ‘베트남 전쟁’과 같은 경험이라고 정혜신은 말한다.
말기 암 환자보다 에이즈 환자의 자살이 높단다. 에이즈 환자에게는 “관계의 소멸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관계의 소멸은 “사람에게 죽음과 같다”고 한다. “관계가 끊기면 사는 게 아니라 죽음인 거니까. 왕따 당하면 사람이 죽잖아요. 고문당해서 목숨을 끊는 사람보다 왕따를 시키면 그 사람이 목숨을 끊을 확률이 더 높아요. 나는 이렇게 처절히 고통스러운데 세상은 내 고통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완전히 끈이 끊어졌다.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 그렇게 되는 거죠.”
정혜신은 쌍용자동차 노동자들에게 오늘의 예수와 같은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현실에 놓여진 그들에게 참된 위로와 힘을 더해 주어야 합니다.
5. “잔치상에 초대해 주시고, 손님으로 맞아 주신다”
오늘날 가난하고 힘들어 하는 자들에게 함께 먹고 함께 나누는 ‘생명의 식탁’ 자리가 필요합니다. 음식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고민을 나누고, 대화하는 그러한 생명의 밥상이 필요합니다. 이 땅에 살아가며 소외된 우리 비정규직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외국인노동자들에게는 참된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중국인동포들이나 아시아계 노동자들의 범죄가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혐오증에 가까운 언사를 하며 다문화적 가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여과없이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제 감동적인 외신을 보았습니다.
“봄이라지만 추적추적 비까지 내려 쌀쌀한 북유럽 노르웨이의 수도 오슬로, 우산을 받쳐든 사람들이 법원 앞 광장에 모이기 시작했다. 유치원과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이 어른들 손을 잡고 나왔다. 26일 이 광장에서 4만여명이 함께 ‘무지개 아이들’을 불렀다. 마치 쇠로 된 심장이라도 단 듯한 법정 안 피고인을 향해 노래는 울려퍼졌다. “형제자매들 모두, 너와 나 우린 함께 살아가야 해. 무지개 아이들, 풍요로운 땅과 바닷가….”
지난해 7월 총기 난사와 폭탄 공격으로 77명의 목숨을 빼앗은 아네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3)가 전혀 죄책감을 보이지 않는 법정 진술을 이어가자, 이에 자극받은 시민들이 법정 밖에서 노래로 그들의 절망과 슬픔을 표현했다. <아에프페>(AFP) 통신은 법원 앞 광장이 인터넷으로 연락을 주고받은 시민들로 가득 찼다고 전했다. 테러에 꽃으로 답한다는 ‘장미 집회’를 벌여온 시민들은 법원 청사를 장미꽃으로 장식했다. 다른 도시들에서도 비슷한 집회가 잇따랐다.“
다문화적으로 같이 사는 것을 거부하는 브레이비크의 망령은 심지어 오늘 한국 사회에서도 횡횡하고 있고, 프랑스의 대선에서도 극우파 국민전선의 약진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든 사람을 잔칫상으로 초대하며 손님으로 맞아들이는 주님의 말씀을 귀하게 듣게 됩 됩니다.
6.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니, 나는 주님의 집으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살겠습니다”
영원에 대한 소망은 타계적인 것에 현재의 문제를 전가하는 것이 아닙니다.궁극적인 소망, 참된 영성에 관한 것입니다. 오늘의 노동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이러한 깊은 확신과 소망입니다. 우리에게 함께 거할 영원한 집이 있다는 사실은 우리 마음에 참된 평안을 줄 수 있습니다. 죽음의 현실에서도 이를 이길 수 있는 힘은 이러한 확신입니다.
오늘 시편 23편의 말씀이 피로사회를 살아가는, 오늘의 노동자인 여러분 모두에게 큰 위로와 권면의 말씀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