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철의 새민족 강단

                                               새로운 오순절(New Pentecost)

김영철의 새민족 강단

  겔 37:1-14; 행 2:1-21; 요 15:26-27, 16:4-15
오늘은 성령강림주일입니다.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초대교회의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120문도에게 임하신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성령강림절의 이미지가 무엇일까요? 통성기도, 방언, 치유 등 여러 가지가 생각납니다. 오순절의 기본적인 이미지는 ‘열정’이라고 봅니다.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움직여 미친 듯이 열정적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하여 투신하는 것 그것이 바로 성령강림절의 이미지입니다. 그래서 예전 색깔도 빨간색입니다. 오늘 드레스코드를 빨간색 의상이나 빨간색 넥타이 빨간색 스카프 등을 하고 왔습니다. 부활절처럼 교회 안에 새로운 장식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 자신들이 장식들이 되어 보는 시간입니다.

사실 오순절은 지상교회를 탄생하게 한 날이기도 합니다. 이 날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 성령님에 의해 하나로 모이고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만들기 위해 택하신 성도들의 교제 가운데 오신 날입니다. 즉,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통해 이 땅에 교회를 세우도록 했습니다. 그렇다면 새민족공동체가 세워진 것도 바로 오순절의 역사라 할 수 있습니다. 오순절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해 초대교회 마가의 다락방으로 가보아야 할 것입니다.

사도행전 2장 1절은 오순절 성령강림을 대망하는 마가 다락방 공동체의 공동체적 열망과 초점 잡힌 기대감을 보도합니다. 오순절은 유월절에서 시작하여 50일째 되는 날로서 초실절 또는 칠칠절이라고도 불립니다. 오순절은 곡식의 첫 열매를 추수하여 하나님에 제단에 바치는 절기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역사 속에서 일구어 오신 포도원 농사의 열매를 수확하는 절기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는 성령의 첫 열매가 될 소수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120문도들에게 성령은 강한 바람처럼, 불의 혀처럼 임했습니다. 그런데 성령은 집 안의 모든 사람에게 각각 동시에 임했습니다. 2-4절에는 “다”(all)와 “각각”(every)이라는 관형어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각각”은 개별자를 가리키는 지시어이며, “다”는 집단을 가리키는 지시어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각각” 개별적으로 성령을 받아야 하며, 모두 “다” 공동체적인 차원에서 성령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성령충만의 환경적 조건은 “집안”임을 강조합니다. 가족같이 조밀하게 결속된 공동체가 성령충만을 받는 내적조건입니다.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던 120문도가 느꼈던 공동체적인 친밀감과 결속감이 강력한 기도를 이끌어냈고, 이 강력하고 집중되고 초점 잡힌 기도가 위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게 하는 매개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족같이 친밀함이 넘치는 공동체일지라도 성령의 강림을 맛보지 못한다면 그 공동체는 기껏해야 폐쇄적이고 자기충족적인 집단으로 고립되고 말 것입니다. 성령은 가족같이 친밀함으로 결속된 공동체가 세계만민의 보편적 유익을 위해 창조적으로 분화되고 해체되는 공동체로 승화되도록 격려하고 압박하십니다. 성령충만한 공동체의 특징은 가족적이면서도 보편적인 개방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오순절은 성령님의 선물로 인해 사람들 가운데서 막힌 의사소통을 회복하는 날입니다. 우리는 이 날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하나 된 공동체로 참여합니다. 6-7절에 보면 120문도가 성령충만하여 각 나라의 방언으로 복음을 증거하는 것을 보고 기이하고 놀랍니다. “갈릴리 사람들”로 불리는 120문도가 자신들의 태어난 곳 방언으로 말하는 사실 앞에 경악한 것입니다. 방언소통사건은 세상을 향한 그리스도인의 성육신적 선교의 방향을 예고합니다.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간의 언어로 인간과 소통하기 위해 육신을 입으셨듯이, 제자들은 지방족속들의 지방언어를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제자들이 부활의 증인이 되어 지역적 언어적 문화적 경계를 넘어 선교지의 지방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져야 한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방언소통사건은 하나의 세계언어를 엄청나게 많은 열방과 족속들의 지방언어로 분화시켰던 ‘바벨탑의 저주’(창11장)을 푸신 사건입니다. ‘바벨탑의 저주’란 바로 인간 사이의 의사소통의 단절을 말합니다. 전쟁과 모든 갈등은 이러한 단절로부터 옵니다. 우리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바로 ‘불통의 사회’ ‘불통의 정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들이 ‘불통의 교인’ ‘불통의 교회’가 된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성령의 역사는 사람들을 취하게 합니다. 여러곳에서 왔던 오순절 순례자들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며 방언하는 120문도들을 “포도주에 취했다”고 했습니다. 성령의 강력한 권능에 완전히 사로잡혀 복음을 전하는 열정적인 120문도들이 새로 발효한 술에 취한 것처럼 보였습니다. 과연 그들은 1,500년 묵은 포도주에 취한 것입니다. 아브라함 이후로 숙성되어 온 영적 포도주에 취한 것입니다. 이 포도주는 이기심과 탐욕, 자기주장 의지와 교만, 절망과 자포자기와 자기경멸에 빠진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을 잊고 예수를 믿도록 도와주는 선물입니다. 성령의 새 포도주를 마시면 제정신을 잃고 예수의 얼로 가득차게 됩니다. 그런점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은 술에 취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절대로 제정신으로 돌아가면 안됩니다. ‘제정신’의 본질은 이기심, 탐욕, 교만, 음란, 자기경멸, 열등감, 과도한 경쟁심입니다. 제정신은 자신은 물론 다른 사람들까지도 절망에 빠뜨리게 합니다. 제 정신을 차리면 남을 위해 살아가던 사람들은 “내가 왜 이런일을 하지?”라고 하면서 뒤로 물러나게 되고, 교회와 사역을 위해 돈과 시간을 바치며 열정적으로 일하는 열심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도행전 17-21절에서 베드로는 구약의 요엘서 말씀을 인용하면서 성령강림의 의미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첫째, 성령의 강림은 “마지막 날” 곧 이스라엘 중심의 구원사의 끝에 일어나는 사건이라는 점입니다. 성령의 도래와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사는 이제 선민의 경계를 넘어 만민을 상대로 전개됩니다. ‘모든 사람’이라는 말은 모든 계층과 연령을 포괄하는 모든 육체를 가리킵니다.

9-11절에 나온 자신들의 난 곳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들었던 청중들의 출신 지역을 나열합니다. 바대인, 메대인 엘람인들은 메소포타미아지역에서, 갑바도기아 본도 아시아 브루기아 밤빌리아는 소아시아지역에서, 애굽과 구레네에 가까운 리비아는 북아프리카지역에서, 그레데인은 그리이스지역에서 그리고 아라비아는 유대남쪽지역을 말하는 데 말하자면 유대지방을 중심으로 지중해 동서남북 곳곳을 말합니다. 우리가 지난번 성서의 땅을 찾아서라는 공부에서도 보았듯이 당시로서는 세계전체 그리고 세계만민을 말하는 포괄하는 지역입니다. 세계 만민이 하나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 오순절의 역사입니다.

세계는 이제 민족과 성별의 경계를 넘어서서 하나되는 세계화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제는 국경의 의미가 축소되고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해지며 어디에서든지 다양한 형태로 활동을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단적인 예로 두 여성의 예를 들수 있습니다. 한분은 한국 입양아 출신으로 프랑스의 장관이 된 플뢰르 펠르랭(39)과 다른 한 사람은 필리핀 태생으로 한국의 국회의원이 된 이자스민(35)입니다. 플뢰르 펠르랭은 프랑스대통령으로 당선된 올랭드에 의해 프랑스의 중소기업 혁신 디지털경제장관(이런 부서는 IT강국 한국에 있어야 할 부서인 것 같습니다)에 발탁되었습니다. 한국이름 김종숙인 그녀는 생후 3일만에 거리에 버려져 6개월 만에 프랑스 가정에 입양되었습니다. 원자물리학을 공부한 사업가를 양아버지로 둔 그녀는 부모로부터 ‘플뢰르’(꽃)라는 이름을 받고 자라난 입양아입니다. 자세한 과정이야 알 수 없지만 얼마나 큰 아픔을 가지고 자라나며 그것을 이겨내고 문화대국 프랑스에서 어엿이 장관이 된 것입니다.
한편 필리핀 태생의 여성 이자스민(영화 <완득이>에서 완득이 엄마로 나왔습니다)은 한국의 제19대 국회에 입성하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새누리당 추천입니다. 그녀는 한국의 남성과 결혼하여 귀화한 사람입니다. 이자스민은 우리 헌정 사상 최초로 귀화 외국인이 헌법기관이 된 것입니다. 한국에 거주하는 외국인(불법체류자포함)은 약 140만명인데 강원도 인구와 비슷합니다. 이렇게 플뢰르나 이자스민 같은 소수민족 여성들이 주류사회의 주역으로 등장한 것은 바로 민족적 다양성을 가진 사회로 우리 사회와 세계가 변화되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계가 하나되는 세계화의 역사에도 ‘바벨탑을 쌓은 세계화’와 ‘오순절의 세계화’가 다름을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불통의 세계화, 1%를 위한 세계화가 아닌 소통의 세계화, 99%를 위한 세계화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둘째, 성령강림의 결과로 미래를 통찰하고 조감하고 미래를 위해 창조적으로 역사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자녀들은 예언하고,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늙은이들은 꿈을 꾸게 된다고 합니다. 예언, 환상, 꿈은 이전에는 예언자와 제사장처럼 신정통치 체제의 지도자들에게 한정적 일시적 예외적으로 허락된 하나님의 뜻을 계시하는 수단이었습니다. 그런데 오순절 성령은 “영(靈)민주주의적 공동체”, “은사(恩賜)민주주의적 공동체”를 탄생시켜 모든 사람이 예언자가 되게 하고 제사장이 되게 한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남녀의 차별없이, 나이와 성별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영을 보편적으로 경험하는 일이 벌어진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은사민주주의는 종교개혁의 바탕이 되었습니다. 교회의 주역은 평신도라는 평신도사상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사실 이러한 은사민주주의를 교회에서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제가 목회자라고 하여도 우리 교인들중에 많은 분들이 저보다 더 깊은 은사를 체험할 때도 많을 것입니다. 더 깊은 기도와 교인들과 교제와 만남 상담을 해주는 분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은사민주주의야 말로 오늘 우리 사회의 참된 민주주의의 기초가 될 수 있습니다. 자립된 인간, 영적 분별력을 가진 사람,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행하려는 사람들이 가진 기본적인 특성은 영적 민주주의입니다. 이 기초 위에 제도적 민주주의가 꽃 피워질 것입니다.

셋째, 오순절 성령강림은 하늘과 땅에 일어 날 천지개벽적 대변환의 시대를 향도한다는 점입니다. 19절에 따르면 성령을 보내시는 사건과 같은 사건이, 하늘에서는 놀라운 일, 땅에서는 징조를 베푸시는 사건입니다. 그 징조는 ‘피와 불과 자욱한 연기’인데, 이는 전쟁과 파괴의 상징물입니다.
20절은 성령강림이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을 예고하는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성령강림은 엄청난 국가적 우주적 재난과 천체상의 대변동 직전에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는 사건은 창조질서의 해체를 의미하는데, 이는 이스라엘의 국가적 멸망을 암시하는 말처럼 들립니다. 이러한 때에 성령은 긴급구조 예인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구원받는 보편적인 만민구원의 시대, 긴급하고 즉각적인 구원 요청에 구원이 이루어지는 시대가 성령강림과 함께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또 다른 인류 멸망의 시나리오를 듣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핵재앙의 소식입니다. 미국의 쓰리마일(1979), 구 소련의 체르노빌(1988), 그리고 2011년 일본의 후쿠시마 원자력발전소 사고를 통해 우리는 핵에너지가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경험했습니다. 아마도 다음 번 사고는 핵발전소가 많은 순서대로 하면 프랑스나 우리나라가 될 것이라고 합니다. 특히 원전 수명을 다하고 연장운행하고 있는 기장의 고리원자력발전소의 경우는 위험도가 너무 높고 예상희생자수가 어마어마 하다고 합니다. 다음주 환경주일주제가 바로 “가라! 핵 너머 생명의 세상으로”입니다. 더 자세히 핵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겠지만 오늘 우리는 핵없는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는 새로운 오순절을 맞이하여야 합니다.

이 시대의 “새로운 오순절”을 위하여 성령의 역사에 힘입는 새민족공동체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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