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주의 역사속의 오늘
쾰른 대주교, 루터교인으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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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대주교로 영화를 누리던 헤르만(1477-1552)이 8월 15일에 고향에서 루터교인으로 숨을 거두었다. 쾰른 대주교 재위기간은 1515년부터 1547년까지, 30년이 넘는 세월이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났을 때, 그는 천주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열렬히 노력하였다. 1536년부터 그는 교구개혁을 시도하였다. 16세기 천주교의 뛰어난 신학자였던 요한 그로퍼와 성당참사회가 이를 주도하였다. 1541년 레겐스부르크에서 양측의 신학자들의 협의회가 열리자, 그로퍼는 마틴 부처와 많은 생각을 공유하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1542년 12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 부처를 초청하여 본 대성당에서 설교하도록 하였다. 1543년이 초에 성찬개혁을 시도하여, 평신도에게 잔을 허용하였다. 그해 중반에는 멜랑히톤과 부처를 불러 개혁적인 교회규율을 입법하도록 하였다. 이제 그로퍼와 성당참사회는 주교를 더 이상 지지하지 않았고, 황제가 개입하였다. 1547년 초에 후임자를 지명하면서, 헤르만은 2월 25일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 낙향한 대주교는 루터교회의 평신도가 되었다. Herrmann von Wied, 그 이름의 비트는 성씨가 아니고, 출신 마을의 이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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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3에 쾰른의 대주교 게브하르트(1577-1583)는 독신 서약을 깨고, 아그네스와 결혼하였다. 주교는 곧 교체되었지만, 지지하는 신도들도 꽤 있었는지, 4년간 전쟁이 벌어질 정도였다. 결국 쾰른 교구의 모든 개혁은 다시 원위치되었다. 쾰른은 일찍이 로마시대에 아그리피나 황후를 배출한 도시로서, 식민지 혹은 속주라는 뜻이 곧 도시명이 되었다. 쾰른 대주교는 궁정을 본에 두었는데, 프로이센이 서진정책을 펴던 시대에, 이 궁은 본대학교의 본관으로 전환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