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먼저 듣는 사람인가?

                                      김승범 선교사 단상 

김승민 목사(서울장신대, 장신대, NCCK간사, 남아공 선교사, University of Pretoria(흑인신학으로 Ph.D) 현재 필리핀 거주Pastor–Theologian | Teaching & serving with CWM at UTS, Philippines

B교회에서 함께 사역했던 친구 목사가 있다. 오랜만에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친구가 예전 일을 하나 꺼냈다. 함께 사역하던 시절, 내가 그를 따로 불러내 “나를 가르치려 하지 말라”고 말했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거렸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늦었지만,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솔직히 나는 그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내가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잊었어도, 그 친구에게는 불편함이나 상처로 남아 있었을 수 있다.

 
생각해 보면 그때의 나는 어렸다. 누군가의 조언을 배움으로 받아들이기보다 간섭으로 느꼈고, 동역자의 말을 함께 걷자는 말이 아니라 나를 평가하는 말처럼 받아들였던 것 같다. 자존심이 배움보다 앞섰고, 겸손보다 방어가 먼저였다. 목사라는 이름으로 사역하면서도, 정작 배우는 일에는 서툴렀다.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우리는 누구에게나 배울 수 있다. 나이가 많다고 늘 가르치는 사람이 되는 것도 아니고, 직분이 있다고 늘 옳은 자리에 서는 것도 아니다. 경험이 많다고 반드시 더 깊이 보는 것도 아니다. 때로는 나보다 어린 사람에게서, 덜 알려진 사람에게서, 전혀 다른 길을 걸어온 사람에게서 더 정직한 배움이 찾아온다.
 
중요한 것은 누가 더 높은 자리에 있느냐가 아니다. 내가 배울 마음을 가지고 있느냐이다. 배움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겸손한 사람은 어디서든 배우지만, 교만한 사람은 아무리 좋은 말을 들어도 자신을 방어하느라 배움을 놓친다.
그러다 문득 오래전 한 장면이 떠올랐다.
 
남아공을 떠나 아시아로 다시 파송받던 예배였다. 그 예배에서 친구인 코보 교수가 내 발을 씻겨 주었다. 그때도 그 장면은 고맙고 귀했다. 그러나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 의미가 더 깊게 다가온다. 그것은 단순한 축복의 의식이 아니었다. 먼저 듣고, 더 낮아지고, 더 깊이 섬기라는 조용한 파송의 언어였다. 나는 누군가의 발을 씻기도록 부름받기 전에, 먼저 발을 씻김 받은 사람이다. 누군가를 가르치기 전에, 먼저 누군가의 섬김을 받은 사람이다. 그러므로 내가 서야 할 자리는 누군가를 내려다보며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사람의 삶 앞에 무릎을 낮추고 듣는 자리여야 한다.
                   요즘 나는 이 질문 앞에 자주 선다. 나는 정말 듣는 사람인가?  아니면 여전히 가르치려 드는 사람인가?
 
지금 나는 선교사로, 목사로, 선생으로 살아가고 있다. 누군가를 격려하고, 가르치고, 방향을 제시해야 하는 자리에 설 때가 많다. 그러나 그런 자리들이 나도 모르게 나를 “듣는 사람”보다 “말하는 사람”으로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느낀다. 사역이라는 이름으로, 책임이라는 이름으로, 경험이라는 이름으로, 나는 얼마나 자주 누군가의 말을 끝까지 듣기 전에 먼저 판단하고 설명하려 했을까?
무엇보다 나는 아빠이고 남편이다.
 
이 사실 앞에서 질문은 더 무거워진다. 나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음성을 먼저 듣고 있는가? 아니면 사랑한다는 이유로 더 쉽게 가르치려 드는가? 어쩌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 가장 어려운 일인지도 모른다. 밖에서는 조심스럽게 말하고 인내하며 들으려 하면서도, 정작 집에서는 사랑하는 사람들의 말에 충분히 머물지 못할 때가 있다. 아내의 말 속에 담긴 피곤함을 듣기보다 해결책을 먼저 말하고, 아이들의 말 속에 담긴 마음을 듣기보다 훈계를 먼저 꺼낼 때가 있다.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 사랑이 경청보다 지시의 모습으로 나타날 때가 있다.
 
듣는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멈추는 일이 아니다. 상대의 마음이 내 안에 들어올 공간을 내어주는 일이다. 내가 옳다는 확신을 잠시 내려놓고, 상대가 왜 그렇게 느끼고 말하는지 기다려 주는 일이다. 가르치기 전에 이해하려 하고, 답하기 전에 공감하려 하며, 판단하기 전에 그 사람의 자리에 서 보려는 일이다.
 
늦었지만 친구에게 사과할 수 있어서 다행이다. 사과한다고 과거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일을 다시 기억하고 부끄러워할 수 있다는 것은 지금의 내가 조금은 달라지고 있다는 뜻일지도 모른다. 부끄러운 기억은 때로 나를 무너뜨리기보다, 나를 다시 세우는 거울이 된다.  그 친구에게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다. 오래전의 철없던 나를 다시 마주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남아공에서 세족식을 하고, 다시 아시아로 파송되던 그날을 떠올린다. 그 장면은 내게 여전히 묻고 있다. 너는 먼저 듣고 있는가? 너는 더 낮게 섬기고 있는가. 너는 가르치기 전에 배우고 있는가? 이제는 조금 더 낮은 자리에서 배우고 싶다. 누군가의 말을 쉽게 밀어내기보다 먼저 귀 기울이는 사람이 되고 싶다. 선교사로, 목사로, 선생으로, 그리고 무엇보다 한 사람의 남편과 아빠로서, 가르치는 말보다 듣는 귀를 먼저 배우고 싶다. 사역도, 신앙도, 사랑도 결국 잘 말하는 사람보다 깊이 듣는 사람에게서 더 깊어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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