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풍모방과 영등포산선과의 이별
1980년대 유일한 민주노조였던 원풍모방에 대한 신군부와 정보부등 공안당국은 이 노조의 영향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어떻게 하든 와해하려는 공작을 하게 된다. 원풍모방은 조합원들 다수가 여성들이었지만 당시 섬유 노련 산하 위원장은 남성 지동진이엇다가 방용석으로 바뀌면서 민주노조가 된다. 그후 다시 이무술이 그리고 말엽에는 정선순이 원풍의 마지막 노조위원장이었다. 1980년 정화조치로 방용석위원장과 박순희 부지부장이 강제 해고 되여 현장서 나오게 된다.
왕성하게 활동하던 노조 집행부가 와해 되자 당시 교선부 차장이던 JOC출신 이무술이 위원장으로 선임된다. 그 당시 노조는 이미 이전 부터 투쟁자금격으로 몇천만원을 비축해두웠다. 따라서 방지부장은 자신이 밖에 있더라도 자신의 영향력아래 집행부을 세워 놓고 외부서 지침을 주고 있었고 재정사용을 원하자 이무술위원장 노조 집행부는 이에 대한 불법성과 두려움으로 응하지 않차 급기야 노조원들을 통하여 이무술 집행부를 교체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이런 내용은 2024년경 이무술로 부터 직접 취재한 내용이다)
이무술집행부는 1년을 넘기지 못하고 노노갈등으로 와해가 된 것이다. 당시 노조가 모아 논 기금은 원주 지학순주교에게 맡겼고 훗날 이 자금이 원풍노조가 와해되고 노동자복지회를 조직할 때 현 대림동 연립을 매입하는 종자돈이 된다. 이무술은 경북군위출신으로 당시 김수환 추기셩이 군위 출신이라 JOC 활동도 그렇고 퇴직후 천주교측 사회운동이나 노동운동에 참여한다.
원풍모방의 전신은 1972년 한국모방 어용노조 민주화 결과로 1974년 말 원풍그룹으로 넘어가면서 원풍모방노동조합이 된다. 당시 노조의 힘은 소구룹에서 나왔는 데 대의원, 상집간부으로 부터 종교, 취미에 이르기까지 7,8명으로 한 때 100개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를 통하여 집행부의 지침이나 소식들이 점조직을 통하여 노동자들에게 전달되고 소통되는 방식이다.
소모임에서는 조합원교육, 대의원교육, 상집간부교육, 남녀 조합원교육, 종교별 교육이 끊임없이 이루어졌다. 못 배운 것이 한이었던 조합원들은 노조 교육에 기꺼이 참여했다. 그리고 외부 집회 장소를 찾아가는 체험교육을 중시하고 작업장의 조장, 반장도 사무실서 임명 하던 것을 조합이 입사 순서대로 바꾼다. 이를 통하여 노동강도는 그대로지만 환경이 바뀌면서 현장의 분위기는 변화한다.
민주노조 활동의 성과 가운데 하나가 12시간 맞교대를 8시간 3교대로 바꾼 것이다. 그 결과 조합원 2천 100명에서 700명은 조합 교육활동에 참여할 수 있었고, 여유가 생긴 4시간을 소모임, 교육, 연대활동에 쓸 수 있었다고 한다. 조합원의 단결된 힘으로 원풍모방노동조합은 “조합원의 해고는 노사합의하에 가능하다”는 단체 협약을 만들어 냈다. 즉 노동조합이 합의하지 않으면 조합원을 해고시킬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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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원한 노동운동가 방용석
이런 지도력을 발휘한 방용석위원장(1945년생)은 현장에서 해고된 후 다수의 조합원들이 회원으로 있는 영등포산선에 상주하면서 노조원들에게 어느 정도 영향력이 갖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교육의 덕분이다. 그러나 밖에 있으면서 현장운동을 지도한다는 것은 쉽지 않았는 데 산선의 도움이 컸다. 영산의 조지송, 인명진목사의 지원으로 이뤄진 것인데 자격은 노동자 실무자 성격으로 일정한 생활비도 지출된 것으로 안다.
이무술은 JOC출신(천주교 노동청년회) 으로 사실상 회사에 의해서가 아닌 노노갈등으로 교체된 집행부다. 이는 아마도 방용석 지부장이 원풍 노조를 컨트롤하기에 쉬운 구조로의 변화라고 하는 편이 맞을 것이다. 방지부장 시절의 부지부장은 박순희(안네스)였는 데 박부가 바로 JOC출신이다. 따라서 이무술은 박부의 지도력에 의존하였을 것이다.
박순희는 서울출신으로 가토릭 노동청년회를 통하여 의식화되었고 상당한 지도력을 확보한 여성이다. 그가 지금까지 재야의 여성노동운동사로 활동할 수 있는 배경에는 이런 철학적 신앙적 배경이 있었기 때문이다. 독신으로 단신이지만 예리한 통찰력과 카리스마로 그는 방용석에 필척하는 지도자였다.
교체된 지도부는 위원장에 정선순 부지부장은 박순애와 양승화였다. 자그마하고 평범한 여성들로 회사나 노조원들로 써도 만만하게 볼 여지가 있는 분들이었다. 총무는 이옥순이었는 데 그중 가장 의식 있고 투쟁성도 있는 산선 열성 회원이었다. 그 외 상집간부등도 그렇고 일단은 방지부장의 오더에 따르는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원풍노조의 와해는 회사나 먼져 개입하거나 외부세력 개입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노노갈등을 촉발하면서 시작 된 것이다. 당시 열열 조합원이었던 자들을 회사는 부추켜 정선순 집행부을 흔들었던 것이다. 뒤에는 회사라는 배경이 있었고 당시 반조직에 앞장섰던 문00은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당시 우리가 노조 집행부를 반대했던 이유는 이옥순이를 지부장으로만 했어도 이렇게 되지는 않았다고 하였는 데 위원장이나 상집간부들에 대한 불만을 회사는 이용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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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노조 지도노선은 외부에
정선순집행부를 비판하고 공격한 간부들중에는 이들이 자신들보다는 활동이 적은 이들이 간부가 된 것에 대한 섭섭함이 있었다 했다. 노조 위원장이 되면 상근을 하고 조합원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위치로 조합원들에게는 벼슬로 보여지기도 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자기 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원장이 된 것에 대한 반감이 없지 않았다.
그렇게 노노갈등을 부추켜 노조를 와해시키려는 회사와 당시 집행부를 날려면 자신들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하여 당시 집행부는 큰 어려움에 봉착해있었다. 그러나 내부적으로 힘겨운 싸움을 하는 이들에 대하여 외부 방지부장은 더 강력한 정신적 무장을 요구하게 되고 산선도 노노싸움에서 밀려서는 안된다는 판단으로 지원을 한다.
그리고 1982년 가을 추석을 몇일 앞둔 9월 27일 공장 내 시설에서 농성에 들어가게 된다. 사실 그 당시에 과연 언제가 D-day가 될 것인가를 기다리면 영산이나 밖의 지원세력들은 노심초사하던중이었다. 농성이 시작된 추석전날 신림동 회사 대각선의 작은 연립에 박순희 전 부지부장과 나는 훗날 처가 되는 장석숙씨와 함께 있었다.
그리고 저녁 무렵 회사에서 단식농성중으로 지친 노동자들에게 뜨거운 스팀을 넣고 있다는 기별을 듣고 우리는 몇 명이서 회사 정문앞으로 갔다. 그리고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던 노동자들 100여명이 회사 정문을 나왔다. 대로에 차량들이 멈추고 대기중이던 기동대와 경찰들이 막아섰고 이에 대열은 흩어지고 핵심간부 11명이 구속되는 것으로 끝이 난다. .
그리고 잡혀가지 않은 조합원들은 모두 영산으로 갔고 거기서 숙식 농성이 시작된다. 그리고 남은 조합원과 영산의 다른 회사 동료들로 오랜만에 북적였다. 조합원들은 아마 지하에서 묵고 대책을 논의하였으며 전체를 방용석 전 지부장 집행부였던 임재수 총무등과 긴밀하게 협의하는 중이었다. 우리는 그런 소식지를 외부에 전달하고 알리는 일을 했다.
당시 노조는 거의가 어용이였으며 한국노총으로 대변되는 노동자조직 자체가 친여적이었다. 그러나 수도권의 몇 개 사업장중 산선이 관여한 곳이 유일하게 민주노조였다, 이미 깨진 인천의 동일방직이나 YH도 그렇고 산별로 보면 섬유였다. 그후 컨트롤데이타(다국적기업) 등도 깨져나갔고 원풍만 남았던 것이다.
정부나 노동부로써는 더 이상 민주노조가 뿌리를 내리거나 영향이 퍼지지 않토록 집중적으로 원풍을 와해시키려고 했을 것이다. 2천여명에 달하는 사업장 여성노동자들의 지도력만으로는 그렇게 결기있고 끊질지게 투쟁할 수 없었다. 따라서 원풍은 방용석이라는 노조지도자의 정치적 안목과 불굴의 투쟁의지로 이뤄낸 단일 사업장으로써는 유래없는 역사를 많이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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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단위의 법외노조 투쟁
그렇게 몇 개월을 지나고 1983년 5.18 2주기를 맞아 광주에서 추모제라도 해야 한다는 기독청년들의 제안으로 아마 EYC가 주도를 했는 지 광주 YWCA에서 고영근목사를 강사로 추모예배가 예정되었다. 그리고 천주교도 저녁에 남동성당에서 미사가 열릴 예정이었다. 이 때 원풍에서는 원풍사건을 알리는 유인물을 만들었고 이 배달 책임을 내가 맡았다.
인쇄소에서 바로 강남 고속터미날로 배달을 받아 아마 6개 뭉치를 화물칸에 실었다. 검문이 있었지만 인쇄물로 알고 검색하지 않았다 문제는 광주에서의 이동이었다. 이미 집회가 알려져 외지인들의 참석에 대하여 경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장청 선배 000에게 봉고차를 빌려 집회장소로 가져가 뿌렸고 나머지는 성당으로 보냈다.
그때 성당엔 더 많은 이들이 참석을 했는 데 당시 성공회대 류시경신부와 여자 청년이 이 원풍유인물을 배포하다가 잡혀가 실형을 살게 된다. 이런 얘기를 지난 2024년 4월에 오사카 가와구치성공회에 사역중인 류신부에게 처음으로 말했다. 사실 그 얘기도 그렇고 당시 원풍의 맏사위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런 얘기를 하는 것도 처음이다.
회사에서 밀려나온 원풍노조가 부당해고로 인한 복직투쟁은 하였지만 회사로 복귀하기는 쉽지않았다. 그리고 여성 노동자들도 더 이상 언제 될지도 모르는 복직투쟁을 계속할 수도 없었고 그리고 가족들에게 연락을 하고 데리러오기도 하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은 재취업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중 영산도 더 이상 이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실무자회의에서 영산에서의 수칙으로 몇시에 일어난다는 등 농성하는 원풍노조원들이 들으면 섭섭할 수 있는 룰을 내놓게 된다. 또 당시 인명진목사가 호주를 다녀오시고 다시 나가기 위하여 후임자로 이근복 손은하목사를 영산 총무와 성문밖교회를 맡겼다. 그러나 현재 상태를 두고는 갈 수 없었는 지 원풍지도부에게 정부측과 타협안을 제기한다.
그것은 자진출두하고 지도부만 구속되고 나머지는 면책된다는 내용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노조는 이를 거부하면서 인명진목사에게 우리가 이 지경이 되었다고 우리를 산선에서 쫒아내려는 것 아니냐고 거출게 항의하게 되고 인목사도 여기는 원풍 노조가 아니다. 영산은 다른 노동자들도 있으니 더 이상 우리를 힘들게 하지 말라는 식으로 대척점에 이르게 된다.
훗날 원풍 30년사 책자에 보면 이 문제롱 원풍의 핵심 회원들이 평가와 토로을 하는 대목이 수록되어있는 데 방지부장은 조합원들에게 그동안 영산(교회)가 원풍을 쫒아냈다는 당시 기류와는 다르게 서로의 입장이 달랐다는 말로 정리를 한다 이 말은 사실로 이 부분에 대하여 그간 정설로 있던 내용에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그후 방지부장은 김대중 정부의 국회의원과 노동부장관, 공단 이사장을 지내면서 과거의 고생을 나름 보상받는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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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풍은 어떻게 해서 현재까지 흩허지지 않았는 가?
그것은 방용석이라는 남다른 지도력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영산으로써는 원풍조합원들이 무더기로 먹고 자는 장소를 더 이상 제공하기 어렵다고 보고 노동자들에게 자수를 주선하면서 그렇치 않으면 우리도 견디기 어렵다고 겁을 준 것은 사실이다. 이에 원풍조합원들은 더 이상 산선까지 피해를 줄 수 없다는 생각에 외부로 나가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사실 그 때 까지 남은 조합원들은 집행부와 20명 정도이고 나머지는 연락처가 닿는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이들은 둔촌아파트를 얻어 지도부가 거주한다. 그러나 어려운 외부 사정과 투쟁 방법이나 노선문제로 갈등하면서 최영숙은 이 후 이탈하여 현재 까지 연락두절이다. 이렇게는 더 이상 투쟁도 그렇고 견지기 어렵다고 보고 과거 투쟁기금으로 모아둔 돈으로 대림동에 연립을 구입한다.
그리고 원풍만이 아닌 노동자복지화라는 조직을 띄워 김문수등과 같이 한 단위 사업장의 복직문제를 넘어 노동운동전반과 정치문제 까지 논의를 하면서 이론적으로 무장하고 언젠가는 반드시 이런 희생과 투쟁의 보상이나 결실이 올 것이라는 믿음으로 견디어 낸다. 이에 지도부의 의식은 강고해졌지만 숫자는 점점 줄어만 갔고 할 수 있는 일이란 소식지를 내는 일이었다. 이런 일들을 통하여 방지부장은 노동운동의 주류지도자로 각인된 것이다.
당시 원풍지도부나 조합원들의 의식에는 복직이나 회사나 동료들에 대한 분노보다는 산선에 대한 섭섭함이 더 컸다. 지금이야 운동의 동력으로 희망과 미래비전을 갖고 단결력과 투쟁성을 높이지만 당시만 해도 분노와 적개심으로 투쟁성을 높이고 자본가와 대적세력을 분명히 하므로 전선을 만들 던 때이다.
그렇게 해서 산선(교회)는 노동자를 버렸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다수의 지도급들은 그 감정을 응어리를 갖고 있다. 이런 배경에는 당시 조지송목사는 원풍과 산선이 함께 문을 닫더라도 함께했어야 했다고 하는 반면 인명진목사는 산선은 모든 노동자들을 위한 열린 공간이지 원풍만을 위해서 있는 곳이 아니라는 입장이었다. 나도 후자의 입장이었다. 자력으로 존재할 수 없다면 더 이상 운동은 끝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해서 원풍은 조지송목사의 장례식이나 행사에는 오지만 인명진목사나 영산의 행사에는 두문불출이다. 그러나 원풍노조의 과도한 산선원망론은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측면이 더 크다. 더 이상 흩허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무언가 가상의 적이 필요하다. 영산에서 나올 때 전열을 흩허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누군가는 교회가 우리는 버렸으나 우리는 살아남을 것이라는 강력한 투쟁의지를 갖게 하려는 의도였다고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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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와 결론
원풍 노조 집행부가 어느 시기에 어떤 방식으로 법적으로 해소가 되었는 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이후에도 대림동 연립에서 집행부 중심으로 계속모임을 하는 한편 달라진 시대에 방지부장의 도움으로 정선순은 시의원도 하고 환경단체를 조직하여 지역활동도 한다. 그리고 조합원 자녀들까지 모으는 등 이미 없어진 노조의 정신으로 전례없는 일도 하게 된다.
그리고 2000년 들어서는 당시 해고자와 구속자들 모두가 민주화운동유공자로 보상도 받게 되고 이를 신청하고 받는 과정에서 이전 조합원들도 합류하게 되는 데 이런 정보와 도움을 주는 일을 지도부가 한 것이다. 그러나 정선순 위원장이 불미스러운 일로 감사를 받고 원풍을 위하여 고생하고 수고를 하였음에도 제명 되는 일도 발생한다.
이후 지도부는 이어져오고 있으며 “불어라 원풍아” 라는 다음 카페를 통하여 조합원들의 소식이나 애경사 법적 지원과 정보공유를 하고 있다. 아주 최근에는 건강이 안좋은 방지부장과 시간을 보내기 위하여 동지들이 시간을 짜서 봉사하며 서로 위로와 격려의 시간을 보낸 것도 과거 어느 노동조합에서도 볼 수 없었던 일이다.
방지부장은 진천 광혜원 사람으로 모친이 보수적인 신앙으로 아들을 신학공부 시키기 위해서 기도한 분이라고 한다. 서울로 와 잠시 직장생활을 한다는 것이 원풍에 들어갔고 여기서 노조 사무간사였던 분과 결혼을 하고 산선을 통하여 지도자로 성장한 것이다. 어려운 시절을 굳은 의지로 이겨내고 성찰한 결과엿다.
노동운동가로 출발해 민중당과 재야운동을 거쳐 1996년 김대중 국민의 정부 시절 새정치국민회의 15대 전국구 국회의원을 지냈다. 승승장구하여 노동부 장관, 한국 가스공사 사장, 근로복지공단 이사장까지 하여 고졸출신 노동자출신으로는 획기적인 일이다. 그러나 장관시절엔 이전에 했던 말이나 약속을 모조리 뒤짚어 언론으로 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노동자 출신이지만 노동부 장관시절 한국노동운동가들에게는 좋은 추억으로 남아있지 않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고 자본가 편은 아니었지만 과거 현장이나 재야에서 투쟁할 때와는 다른 입장이었을 것이다. 성실하고 노동자들을 사랑하고 배우고 진보하는 사고로 당시 폴란드 그다니스크 조선소의 총파업 지도자에서 대통령까지 지낸 노동자 출신 바웬사와 비교하기도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