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더 존스의 생애와 사상

 
  마더 존스, Mary Harris Mother Jones(1837 ~ 1930)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 메어리 해리스 탄생하다

진흙탕에 무릎까지 빠지고, 걷기조차 힘든 고약한 날씨였다네. 하지만 노동 현장의 어린 것들을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겠다고, 그래서 그들의 쇠고랑을 풀어주고야 말겠다고 생각하며 버텨냈지.”

1902년 6월, 미국 웨스트버지니아 주에서 탄광 파업이 일어났다. 사주와 한통속이었던 그 지역 당국은 불과 3주 만에 노조 지도자들을 줄줄이 검거했는데, 그 중에는 어쩐 일인지 키가 작고 백발이 성성한 할머니 한 분도 끼어 있었다. 얼핏 보기에는 평범한 외모의 노인이었지만, 그녀의 정체는 산전수전 다 겪은 노동운동가 ‘마더 존스’였다.

“법원의 금지 명령서로 말하자면, 내가 죽었을 때 수의를 해 입어도 될 만큼 수두룩하게 받았다네.”

일단 보석으로 풀려난 마더 존스는 광부들의 비참한 상황을 알리려 각지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역설했다.

“지금으로부터 39년 전, 흑인 노예들이 해방되었습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부패한 사법제도에 억압받는 백인 노예가 되었습니다.”

7월 24일, 그녀는 법정에 섰다. 검사는 논고에서 마더 존스를 가리키며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고 단언했다. 왜냐하면 그녀의 말 한 마디면 수천 명의 노동자가 줄줄이 파업에 돌입할 정도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비록 독립선언과 수정헌법 제1조에서 보장하는 언론의 자유가 있긴 하지만 선동적 발언은 법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고 훈계한 판사는 다른 파업 주모자에게는 징역 60일씩을, 마더 존스에게는 훈방 조치를 선고했다. 그러면서 앞으로는 나이 지긋한 분께 어울리는 자선활동이나 하시라고 충고했다. 그러자 노부인은 판사를 향해 훈계는 고맙지만 이건 자신의 의무라고 응수했다. 아울러 자기는 언젠가 다시 체포될 것 같으니, 그때가 되면 자기에게도 남들과 똑같은 처벌을 내려 달라고 부탁했다. 순간 법정의 방청객들로부터 박수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메어리 해리스’에서 ‘마더 존스’로 거듭나다

마더 존스는 1837년에 아일랜드의 콜크에서 메어리 해리스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본인은 1830년 5월 1일(노동절)에 태어났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며 1837년 8월 1일에 유아세례를 받았다는 것만 확인되었다. 따라서 일각에서는 이 날짜를 그녀의 실제 생일로 간주하며, 이 글에서도 그렇게 했다. 19세기 후반 아일랜드 주민의 대다수는 가난과 수탈에 찌든 농민들이었다. 1845년 여름부터 농민들의 주식인 감자를 썩게 만드는 전염병이 창궐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기아와 질병으로 죽어나갔고, 수년 사이에 수백만에 이르는 사람들이 살 길을 찾아 신대륙으로 건너갔다.

메어리는 캐나다의 토론토에서 성장해 사범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다. 23세 때인 1860년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잠시 교사로 재직했고 나중에는 양장점을 운영했다. 이듬해에 조지 존스라는 기술자와 결혼함으로써 ‘메어리 해리스’는 ‘메어리 존스’가 되었고, 그 이름이 굳어져서 훗날 ‘마더 존스’가 되었다. 남북 전쟁과 노예 해방 등 굵직한 사건들의 연속에도 불구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서의 삶을 영위한 메어리였지만 1867년에 멤피스를 휩쓴 황열병에 남편과 자녀를 모두 잃고 말았다. 30세에 미망인이 된 그녀는 시카고로 가서 양재 일을 했지만, 1871년의 대화재로 재산을 모조리 잃고 말았다.

1877년에 시카고에서 벌어진 대규모 파업이 수백 명의 사상자를 내며 분쇄된 직후, 당시 40세였던 메어리 존스는 적극적으로 노동 운동에 동참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때 노동자는 다른 사람들의 죄로 인한 고난의 십자를 대신 짊어져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마더 존스’라는 이름이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인 60세 때의 일이었다. 1900년부터 그녀는 이름에서 ‘메어리’를 떼어버리고 편지마다 ‘마더(어머니)’라고 서명했다. 머지않아 동지들은 물론이고 적들까지도 그녀를 ‘마더 존스’라고 부르게 되었다.

“말은 똑바로 하게. 난 박애주의자가 아니라 소란꾼이라네”

마더 존스는 전미광산노조(UMV)의 일원으로 광산, 철도, 철강 등 주요 산업 분야의 파업에 관여했다. 아직 노조가 결성되지 않은 사업장에 잠입해 노조를 조직하는 것이 그녀의 임무였다. 나이를 고려하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때로는 오히려 그런 점이 이득이 되었다. 평범한 할머니가 노동운동가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지 못한 까닭이다. 그녀는 인자한 외모로 자식뻘인 노동자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때로는 육두문자까지 섞어 가면서 허물없는 대화를 나눠 그들의 신뢰를 얻었다. 말과 몸짓, 욕설까지 뒤섞은 그녀의 열변은 영어를 잘 모르는 외국 이민자 출신 광부들조차도 매료시킬 정도였다.

20세기 초 아동 노동자의 인권을 위해 앞장 선 마더 존스

연설은 마더 존스의 가장 큰 무기였다. 어느 집회에서 ‘박애주의자’로 소개되자 대뜸

“말은 똑바로 하게. 난 박애주의자가 아니라 소란꾼이라네”

하고 맞받아치기도 했던 특유의 언변은 노동자들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1890년대 후반부터 1920년대 초반까지 그녀는 주로 탄광 노동자들을 위해 싸웠다. 때로는 파업이 성공을 거두어 노동자들의 처우가 약간이나마 나아지기도 했지만, 대개는 정부의 묵인 하에 사주가 동원한 사설 경비업체 직원들이 총을 들고 진압에 나서서 사망자가 속출하고 파업이 분쇄되기 일쑤였다. 마더 존스는 가사 일에만 전념하던 당시의 일반적인 여성상과는 전혀 달랐다. 파업 때마다 그녀는 노동자의 아내들을 불러 모아 한손에 갓난아기를, 또 한손에 대걸레를 들고 회사 측 사람들과 맞서 싸우게 했다. 어떤 사람은 당시 그녀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다.

“그녀는 오래 전에 중년에 접어든 사람 같았고, 키는 중간 정도 되고, 튼튼해 보였지만 뚱뚱하진 않은 모습이었다. 검은 드레스를 입고 있었지만, 보기에는 전혀 이상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사내들과 술을 한 잔 하기도 하고, 그들의 속어를 말하고, 사주들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상당히 거친 말도 했다. 보통 여자들 같으면 약간 닳고 닳았다고 여겨질 수도 있었지만, 광산 노동자들은 그녀를 이해하고 또 존경했다.”

100명의 아이들과 100마일 행진으로 아동 노동 항의

마더 존스는 웨스트버지니아와 콜로라도 주의 광산 파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명성을 얻었으며, 구속과 재판 과정에서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여성”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양쪽 주의 파업은 사주와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금세 분쇄되었지만, 마더 존스의 명성은 이미 확고해져서 가는 곳마다 구경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물론 음해도 자연스레 뒤따랐다. 노동운동가로 투신하기 전까지의 이력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는 점에 착안, 그녀가 젊은 시절 미국 각지의 홍등가에서 매춘업소를 운영해 떼돈을 벌었다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도 그때부터였다.

1903년 7월 7일, 마더 존스는 아동 노동에 항의하기 위해 100여 명의 아동 노동자를 이끌고 필라델피아에서 뉴욕까지 100마일에 걸친 행진에 나섰다. 3주 뒤에 뉴욕에 도착한 일행은 비록 시오도어 루스벨트 대통령과의 면담에는 실패했지만, 이후 아동 노동 문제에 대한 인식이 바뀌게 되는 중요한 계기를 마련했다. 1905년에 그녀는 오랫동안 몸담아 온 UMW와의 관계를 정리했고, 이후 사회당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세계산업별노동조합(IWW)의 탄생에 일조한다. 1909년에는 신임 대통령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와 면담하지만 물론 가시적인 성과는 없었다. 1911년에는 지도부의 부정부패를 비난하며 사회당을 탈당, 다시 UMW 소속으로 노동운동의 현장에 복귀한다.

러들로 천막촌과 노동자들

마더 존스의 새로운 전장은 일찍이 한 번 패배를 맛보았던 웨스트버지니아였지만, 이번에는 적들도 만만치 않았다. 1912년 2월 13일, 계엄령 하의 찰스턴에서 체포된 그녀는 이후 3개월 간 불법으로 구금된다. 또 다른 전장 콜로라도에서 마더 존스는 최강의 적수를 만난다. 석유 재벌 록펠러 가문의 후계자 존 D. 록펠러 2세가 콜로라도 연료 철강 회사의 소유주였기 때문이다. 1913년 9월 23일, 파업에 돌입한 광부들과 그 식구들은 사택에서 쫓겨나 러들로에 임시 천막촌을 조성했다. 회사 측에서는 무장 경비원들을 대거 투입했고, 팽팽해지는 긴장 속에서 가끔 총격전이 벌어져 부상자가 나왔다.

파업 7개월째인 4월 19일, 한밤중에 무장 경비원들이 러들로 천막촌에 난입해 불을 지르고 총격을 가했다. 화재 현장에서 여자 2명과 어린이 11명의 시신이 뒤늦게 발견되자 미국 전역은 충격에 휩싸인다. 본격적인 무력 충돌로 순식간에 사망자가 50여 명으로 늘어나자 각지에서 항의와 시위가 잇달았고, 심지어 국회에서도 청문회가 열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궁극적으로 록펠러 측의 승리로 돌아갔다. 민심을 무마하기 위해 일련의 선심성 정책을 내놓는가 하면, 홍보 전문가를 대거 동원해 악화된 여론을 자신들 쪽에 최대한 유리하게 돌려놓았던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노조 투쟁은 기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미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노동계는 현실과 타협하는 길을 택했고, 1920년대에는 이른바 ‘적색 공포’로 불리는 반공주의가 기세를 떨치며 진보 세력이 위축되었으며, 회사 측의 온정주의가 마치 대안처럼 받아들여졌다. 설상가상으로 진보 진영은 권력지향적인 지도부 간의 파벌 싸움으로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노동계의 대모로 존경받는 마더 존스도 마지막 10년 동안은 노쇠로 인해 실책을 여럿 범했다. 1930년 11월 30일, 마더 존스는 마침내 숨을 거두었다. 그보다 6개월 전의 노동절에 사람들은 그녀의 100회 생일을 대대적으로 축하한 바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실제 나이는 아마도 92세쯤 되었으리라.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산 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라”

1925년에 출간된 <자서전>은 마더 존스의 유일한 저서다.

“죽은 자를 위해 기도하고, 산 자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라.”

이것이야말로 행동주의자 마더 존스의 좌우명이었다.

나는 칠십 평생을 자본가들에게 지배를 받으며 살아왔고, 그 기간의 절반이 지나서야 내가 지배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나는 노동계급과 자본계급 사이의 결코 끝날 수 없는 갈등은 두 계급이 모두 사라지고 노동자들이 생산자로 남고, 생산된 자본의 소유주가 될 때에야 사라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마더 존스는 무신론자였고 사회주의 지지자였지만, 이념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하거나 일신의 안락을 추구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당대의 저명한 진보 인사들과 교류하는 와중에도 노동 운동의 대의에 어긋나는 행위에는 비판을 늦추지 않았고, 따라서 종종 정치적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거나 무마하려는 진보 및 노조 측 지도자들과 갈등을 빚었다.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던 노동운동가 유진 뎁스, 스코프스 재판을 비롯해 미국 현대사의 주요 사건들에서 명성을 떨친 변호사 클리어런스 대로, 심지어 멕시코 혁명의 영웅 판초 비야까지도 마더 존스의 지조를 존경해 마지않았다. 마더 존스는 사회주의 정당을 통해 노동자들이 산업 전체를 장악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의지를 천명했다. 하지만 이런 원칙과 이상은 현실 정치와 적잖은 괴리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아울러 미국의 노동자들을 최우선으로 놓다 보니 외국인 대체 노동자들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심지어 인종차별적인 비난을 퍼붓기도 했다. 한 가지 의외의 사실은 파업 등의 직접 행동에서는 여성의 참여를 적극 권장한 마더 존스가 정작 여성 참정권 운동에는 도리어 반대했다는 점이다. 왜냐하면 여성 참정권을 둘러싼 논란은 그보다 더 시급한 노동 문제에서 주의를 벗어나게 하는 계략에 불과하다고 생각한 까닭이었다.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에서 잊혀진 인물로

20세기 초에만 해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이었던 마더 존스도 사후에는 대중의 뇌리에서 깡그리 잊혀졌다. 그 이름이 저항의 대명사로 다시 부각된 것은 1960~70년대의 일이었다. 여성사에 대한 관심이 커지며 재조명이 이루어졌고, 반세기 만에 자서전이 다시 나왔으며, <마더 존스>라는 진보 성향의 잡지도 간행되었다. 1992년에 미국 노동부는 마더 존스를 ‘노동자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다. 그러나 일찌감치 헌액된 몇몇 노동계 지도자들이야말로 생전에 속물 기회주의자로 비판을 받았던 인물이었음을 고려하면, 마더 존스를 그들과 나란히 둔다는 것은 명예가 아니라 오히려 모욕이 아니었을까.

1930년 5월 1일. 100회 생일을 기념하며. 하지만 이때 마더 존스의 실제 나이는 92세로 추정된다.

언젠가 국회 청문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현재 주소가 어디냐는 질문을 받자, 마더 존스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미국에서 살지만 주소가 정확히 어딘지는 모릅니다. 왜냐하면 항상 폭압에 맞서 싸우고 투쟁이 벌어지면 어디든 뛰어가야 하니까요. (…) 내 주소는 내 신발 주소나 마찬가지입니다. 내 신발은 어딜 가든 나를 따라다니니까요.”

엘리엇 곤은 말한다. “마더 존스가 뉴스에 처음 등장한 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미국 아동들의 5분의 1이 빈곤 속에 있다. 그들은 마더 존스의 자식들이다. 어엿한 생활을 영위하기 위해 투쟁하는 노동계급 또한 그녀의 자손들이다. 사회적 불의에 저항하며, 현 시대에 안주하기를 거부하는 모든 사람들이야말로 마더 존스의 자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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