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가 남자현은 대체 누구인가?
최근 암살이란 영화가 나오면서부터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의사가 크게 조명받고 있음을 본다. 참으로 바람직한 일이라 생각한다. 그그의 별명은 여러개가 있는데 "여자 안중근", "조선의 총구", "변장술의 천재", "독립군의 어머니" 등의 별명이 있다. 그러나 이 그가 지린성에 이 신학교(지금은 그 신학교의 흔적이 없음)를 졸업한 사람으로써 교회를 12곳이나 개척한 전도사란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대구에 있는 "생명밥상 평화순례" 팀 8명의 목사들이 지난 7월 16일 나와 함께 안동에서 약 20분가량 떨어진 영양에 있는 남자현 전도사의 생가를 방문하고 함께 기도하며 찬송을 부르기도 하였다. 대선배 목회자의 숨결이 있는 그곳에서… 본인이 찾아내어 정리한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의 삶과 신앙"을 그곳에서 함께 공부하기도 하였다. 관심이 분들이 있으면 함께 읽어가면서 공부해보자. 혹시나 남자현의 생가에 가볼 의향이 있는 사람이라면 안동독립기념박물관에 가서 그의 삶을 온 몸으로 배워본 후에 영양에 있는 남자현 전도사의 생가를 방문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선생의 삶과 신앙
고정희 시인의 “남자현의 무명지”
구한말의 여자가 다 이리 잠들었을진대 동포여, 무엇이 그리 바쁘뇨
황망한 발길을 잠시 멈추시고 만주벌에 떠도는 남자현의 혼백 앞에
자유 세상 밝히는 분향을 올리시라 그때 그대는 보게 되리라
‘대한여자독립원’ 이라 쓴 아낙의 혈서와 무명지를 보게 되리라
경북 안동 출신 남자현
열아홉에 유생 김영주와 혼인하여 밥짓고 빨래하고 유복자나 키우다가
딱 깨친 바 있어 안동땅에 자자한 효부 열녀 쇠사슬에 찬물을 끼얹고
여필종부 오랏줄을 싹둑 끊으니 서로군정독립단 일원이 되니라
북만주벌 열두 곳에 해방의 터를 닦아 여성 개화 신천지 씨앗을 뿌리며
국경선 안과 밖을 십여성상 누비다가 난공불락, 왜세의 도마 위에
섬섬옥수 열 손가락 얹어놓고 하는 말 천지신명 듣거든 사람세상 발원이요
탄압의 말뚝에 국적 따로 있으리까 조선여자 무명지 단칼에 내리치니
피로 받아 쓴 대한여자독립원 아직도 떠도는 아낙의 무명지
만주벌판에서 항일 의열활동중, 조선 총독을 암살하기 위하여 동지들과 국내로 잠입 활동하다 실패하고, 만년에는 남편의 원수이자 2천만 민족의 원수인 일인 고관을 자신의 손으로 처단하기 위하여 괴뢰 만주국의 일본 전권대사를 암살하고자 중국 걸인 노파행색으로 변장, 장춘에 가는 도중 체포되자 단식으로 저항하다가 운명한 대한의 여걸이 있다. 그녀가 바로 남자현(南慈賢, 1872-1933)이다. 그의 별명은 여러 개가 있는데 “여자 안중근”, “조선의 총구”, 남자들도 무서워 떠는 “최고의 여자 독립운동가”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빠트려서는 안 될 그의 또 다른 모습은 “여전도사 남자현”이요 “민족 신앙인 남자현”이란 사실이다.
사대부 여인 남자현
남자현(1873-1933) 선생은 일제 강점기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흔치않은 여성 독립운동가이다. 양반집 규수였던 선생은 의병이었던 남편의 전사를 계기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국내에서 활동하다 47세에 만주로 망명해 서로군정서에 가입하는 등 14년간 항일무장투쟁에 헌신하다가 61세의 나이로 순국했다.
사대부 여인에서 만주의 여걸로 활동한 남자현이 일찍부터 독립운동에 투신한 것은 아니었다. 1956년 출간된 ‘독립혈사’의 ‘남자현 여사 약전’에 의하면 남편이 순국한 후에 남자현은 삼대독자인 유복자를 두고 시부모 봉양에 정성을 다해 진보 지역에서 효부로 표창됐다고 전하는 것을 보면 여염집 사대부 여인들 이상으로 봉건 규범에 순응해 살았음을 보여준다.
남자현은 1873년 12월7일 경북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서 통정대부를 지낸 남정한의 1남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는 이런 아버지로부터 일찍 한글과 한문을 깨치고 12살에는 소학·대학까지 마치는 등 어려서부터 두뇌가 명석했다. 남자현의 부친 남정한은 문하에 70여명을 거느린 유학자였다. 그의 문하 제자들은 일제 침략에 항거하여 나라를 지키기 위한 의병으로 활동하였고 선생인 남정한은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나라 사랑 정신을 남자현도 그대로 받아 배워 마침내 훗날 항일 운동가로서의 생애를 살게 된다.
나라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 시절에 소녀기를 보낸 그는 나라에 대한 근심을 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남자현은 숙성한 여인으로 자라 결혼할 나이 19세가 되었다. 그녀의 부친은 사랑하는 제자 중 한 사람이었던 11살 연상의 청년, 영양군 석보면 지경동에 사는 의성 김씨 가문의 영주와 결혼하게 하였다. 김영주는 경북 안동군 일직면 귀미동 출신이라 하기도 하며 혹자는 경북 영양군 석보면 답동이라고도 한다.(여러 자료를 종합해보면 원래 남정한 선생은 안동시 일직면 귀미동의 의성 김씨 집성촌에 살다가 영양으로 옮겨왔고 김영주의 가문도 영양으로 옮겨와서 살았다고 본다. 영양지역 역시 안동의 영향아래 있는 도시였음은 두말할 여지가 없다.) 김영주 역시 전통적 유학자 집안의 아들이었으나 당시 의병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청년이었고 남자현의 부친 남정한 선생으로부터 큰 영향을 받은 청년이었다. 다. 남자현은 시집생활 5년 만인 1896년 7월 11일 진보면 홍구동 전투에서 의병으로 활동한 남편을 잃었고 얼마 후에 유복자인 김성삼을 낳았다. 영양 의병전투가 있고 난 다음 일제의 압박을 더욱 악렬하여져서 받은그러나 당시의 시대는 47세의 남자현의 삶을 180도 바꿔 놓는다. 1919년 3월1일 만세운동 계획을 전해들은 남자현은 독립선언문을 각처에 배포하면서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것이다. 남편의 순국이 사실상 그의 애국심을 키운 자양분이었던 셈이다.
여성 항일 독립운동가 남자현
남자현은 3·1만세시위 후 곧장 만주의 김동삼을 찾아가 그가 참모장으로 있는 서로군정서에 입단했다. 그의 나이 47세. 독립기념관 김희곤 소장은 “한 사대부 집안의 며느리, 의병의 미망인이 적지 않은 나이에 무장항일투쟁을 위해 만주행을 자처했다는 것은 당시로서는 가히 혁명적”이라고 평가한다. 실로 그녀는 20~30년대 만주 항일무장운동 진영의 유일한 여성대원으로 꼽힌다. 당시 해외 항일투쟁의 성지였던 만주에서는 90여개의 한인 독립운동단체가 활동했다.
이들은 출신지와 사상의 차이로 날을 세워 무력충돌이 잦았으며 심지어 원수처럼 지내는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전사한 의병의 아내였던 남자현은 이러한 미움과 분열로 점철된 남성 독립운동가들을 바라보면서 금식과 단지와 혈서로서 단합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사분오열된 만주지역 무장단체의 통합, 군자금 조달, 여성들의 계몽을 위한 여성단체 조직 등 그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러한 남자현의 손길로 인해 1922년 8월 마침내 남만주 17개 단체가 통합을 이루게 된다. 특히 국제연맹에서 중·일관계 특별조사단을 만주에 파견했을 때 남자현은 왼손 무명지를 잘라 흰 천에 혈서로 ‘조선독립원’이라고 쓴 뒤 손가락을 동봉해 조사단에 보낸 일화는 너무나도 알려져 있는 이야기이다.
남자현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중 두차례 국내에 잠입했다. 1922년 9월 참의부 중대장으로 남편의 옛 동지인 채찬과 함께 군자금 조달을 위해 국경을 넘었고 1926년 4월 사이토 조선총독 암살을 목적으로 박청산, 이청수 등과 함께 서울을 찾았다. 결국 1933년 만주 전권대사 부토의 암살을 모의한 것이 발각돼 하얼빈에서 체포된 그는 8월6일부터 14일간의 단식 끝에 조선인 여관에서 61세의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항상 죽은 남편의 피묻은 옷을 갖고 다녔는데 중국인 노파로 변장해 장춘으로 가다가 일본 영사관 헌병에 체포됐을 때도 지니고 있었고 하얼빈에서 체포되어 숨을 거둘 때가지도 그 옷을 간직하였다고 한다. 그녀가 하얼빈 감옥에 투옥되었을 때 원수의 밥은 사절이라며 끝까지 항거하다 기력이 쇠진하여 숨을 거둔 것이라고 한다. 이런 남자현을 당시의 독립운동가들은 조선의 포구라 불렀으나 일제는 그녀를 조선의 무서운 암호랑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십자가를 등에 지고 태극기를 손에 든 남자현
남자현의 증손자인 옌볜과학기술대 한국어과 김종식 교수는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에서 살다가 모든 것을 접어두고서 증조할머니의 피와 땀이 배어 있는 중국 연변으로 건너왔다고 한다. 그는 남자현 증조할머니의 삶이 독립투사뿐 아니라 신앙인의 측면에서도 조명되길 간절히 바라면서 그녀의 신앙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증조할머니는 24세 때 남편을 잃은 이후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변절하지 않고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에 기반을 두고 독립운동을 하셨습니다. 서로군정서(1910년을 전후하여 이시영(李始榮)·이상룡(李相龍)·김창환(金昌煥) 등이 교포들의 자치 기관으로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애국 청년들을 양성하기 위한 신흥학교(新興學校)를 설립하였다. 경학사는 1912년부민단(扶民團)으로, 1919년한족회(韓族會)로 발전하고 5월 산하에 군정부를 설치하였다. 즉, 유하(柳河)·통화(通化)·흥경(興京)·환인(桓仁)·집안(集安) 등 남만주 각 현에서 활동하던 민족 지도자들이 삼원보(三源堡)에 모여 항일 운동 단체의 통일 기구 결성을 결의, 남만주 일대 독립 운동 총본영으로서의 군정부를 조직하였다. 그 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안정근(安定根)·왕삼덕(王三德, 본명 金炳憲)의 제의로 서로군정서로 개칭하였다.)에서 활동하면서도 만주에 교회 12곳을 세우고 여성계몽을 위한 여자교육회도 설립하셨습니다. 중년 여성의 몸으로 일제 요인 암살에 나서고 손가락을 잘라 독립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셨지요.”
그러면 남자현이 살았던 영양은 어떤 곳이며 그는 어떻게 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렸을까? 영양군에 처음으로 교회가 들어선 것은 1906년이다. 청기면 찰당골에 사는 전원구라는 여인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드린 후 시아버지와 시동생에게 전도를 하면서 부터이다. 당시 80여 호가 되는 마을에 30-50명의 신자가 모일 정도로 부흥되었다. 곧 이어 일월면 오리교회, 수비면 수비교회, 계동교회가 생겼다. 계동이면 바로 남자현의 동네이므로 남자현은 신식문명인 예배당을 접할 기회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이 된다.
남자현은 1919년 2월 26일 서울 남대문 동에 사는 김씨 부인의 편지를 받고서 그녀는 상경을 결심하게 된다. 그 편지는 “다음달 3월 1일 조선민족의 만세운동이 있을 것입니다. 연희전문 학교 부근의 교회당에서 그날 아침 만납시다.”라 적혀 있었다. 김씨 부인이 누구인지 알 수는 없으나 수비교회나 계동교회의 부흥회 때 만난 사람과 연결된 교인이거나 기독교계 지도자였을 가능성이 크며 동시에 의병 지원을 통해 만났던 사람일 수도 있다. 남자현은 1919년 2월 말에 간단한 봇짐을 들고 47년간 살았던 고향을 떠나 서울로 상경한다. 그는 상경하기 전 외아들 김성삼에게 자신의 결단이 담겨 있는 글을 남겼다. “나는 내 한 몸 편하고자 피신을 가는 것이 아니다. 절뚝거린 역사를 청산하고 그릇된 것을 바로잡으며 살 만하 세상을 만들기 위해 망명하는 것이다. 나는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라 이기러 간다, 벌판 같은 세상이 내 가슴에 있는데 어느 벌판이 무섭겠는가. 지금까지의 남자현을 잊어라.”
서울에 도착한 남자현은 3월 1일 신촌에서 김씨 부인을 만났고 교회 신자들과 할 일을 의논한 후에 오후 1시 “조선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면서 만세를 외친 것이다. 추측컨대 그녀가 기독교로 입신하게 된 또 다른 배경을 들자면 철저한 유교적 가정에서 생장한 그가 그의 동지 김씨를 비롯하여 3.1운동의 주동 세력이 기독교인임을 알고 한국사회를 새롭게 할 종교로서 기독교로 보고 자신도 기독교로 개종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3.1운동 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강력해지기 시작하자 남자현은 그가 독립운동의 무대를 북간도지역으로 생각하고 일체의 주저함없이 미지의 땅 서간도를 향한다. 그것은 일제에 독립을 청원하는 소극적인 만세운동보다 더 직접적인 타격을 줄 수 있는 것은 “독립투쟁”이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이 없다. 그 후 고향 땅 영양을 떠나기 전부터 남자현은 서간도지역을 머리에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증언에 의하면 남자현은 지린성 룽징의 한 신학교에서 신학공부를 한 뒤 전도활동에 나서기도 하였고 그곳 조선인 마을을 찾아다니며 여성을 모은 뒤 전도와 계몽을 함께 하였다고 한다. 그는 퉁화현을 중심으로 12곳에 예배 모임,을 만들었다고 하는 것은 그가 교회를 12곳이나 설립하였고 여성들과 어린이들을 위한 목회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제라고 하는 폭압적인 죄성의 현실에서 독립운동가들의 뒷바라지도 중요한 하나의 목회 곧 민족목회라고 생각하여 그 일에 앞장을 선 것이다. 아쉽게도 지린성 룽징에 있던 그 신학교는 중국 문화혁명 당시(1966-1976) 불타버렸다고 한다.
또한 남자현은 1922년 만주 항일무장투쟁 단체들이 지역과 이념에 따라 갈라져 무력충돌을 빚었을 때, 선생은 한 주 동안 금식기도를 한 뒤 단합을 호소하면서 손가락 하나를 짜른 단지로 혈서를 써서 단지와 함께 그들에게 보내어 감동을 받아 서로 화해하면서 하나로 단합되었다고 한다. 추측컨대, 그의 손가락 한 마디를 짜르는 단지를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고통을 체험하였을 것이며, 일제의 폭압으로 고통당하는 민족의 아픔을 몸으로 삼키고자 한 것이다.
신앙의 여성이요, 교육가이며 교회의 여전도사로서의 남자현은 동시에 독립군 지원과 함께 그들의 뒷바라지에 주력하다가 직접 무장투쟁의 최전선에 나선 건 1927년 길림사건(吉林, 지린) 곧 지린사건 때문이었다.(지린 사건이란 1927년 지린에서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가 300여명이 중국 군경에게 체포된 사건을 말한다. 안창호는 상하이를 출발하여 베이징을 경유하여 만주 각지를 돌아다니다가 1927년 봄 지린 조양문 밖 대동공창(大同工廠)에서 나석주 의사의 추도회를 겸한 민족운동의 장래에 대한 강연회를 열었다. 이 강연회에 독립운동 단체들과 지방 유지들이 500여명이 참가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일제는 평안북도 경찰서에 명령하여 수십명의 일경을 지린으로 출동시키는 한편 길림독군 장작림(張作霖, 장쩌린)에게 공문을 보내며 정치범 체포하여 인도해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 것이다. 장쩌린이 이를 거절하자 일제 관헌은 봉천에 와서 중국 헌병사령관 양우정에게 교섭하여 조선공산주의자 수백명이 길림에서 불법집회를 하고 있으니 체포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이 말을 믿은 양우정은 길림독군서(吉霖督軍署)에 헌병을 파견하여 조선인들을 체포하라는 공문을 전달했다.
지린독군서는 조선인 가택을 수색하는 동시에 강연회를 하고 있는 대동공창을 습격하여 안창호를 비롯하여 300여명을 길림 경찰청에 감금하였다. 이에 일제 관헌은 다시 조선인들을 즉각적인 인도를 요구하엿으니, 장작림은 체포된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지린 주민이므로 취조가 일단락되기 전에는 ds도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경찰청에서는 이들을 취조하여 대부분을 석방하고 그 중 48명을 계속 감금하였다.
이 사건이 상하이에 전해지자 흥사단은 물론 임시정부를 위시한 단체에서는 베이징 정부와 길림 당국에 석방을 요청하였다. 또한 이 사실이 중국신문에 보도되자, 중국의 각 단체와 학생들도 외국의 혁명가를 부당하게 검거하고 이들을 타국에 인도한다는 것은 중국의 수치라고 중국정부를 비난하였다. 결국 장작림은 이와 같은 여론에 밀려 전원 석방함으로써 사건 발생 6개월 만에 해결되었다. 이 사건이 전개된 배경에는 1925년 중국과 일본 간에 한국독립운동자 체포와 인도에 관하여 합의한 이른바 미쓰야협약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1926년 베이징에서 좌·우 항일세력을 결집한 도산 안창호 등 독립운동 지도자들이 이듬해 지린을 방문했다가 지린성 당국에 무더기로 체포됐다. 선생은 비상대책반을 구성해 지린성 당국을 설득하고 옥바라지에도 힘썼다. 그의 구명운동에 힘입어 독립운동가들은 일제에 넘겨지기 전 중국에서 석방된 사건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여성독립운동가로써 그리고 무장투쟁을 통한 독립쟁취 운동에 가담하게 된 것이다.
남자현 선생은 1926년 사이토 조선총독 암살을 시도하고 1932년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잘라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고 혈서를 쓴 뒤 만주를 찾은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전달하는 등 목숨을 아끼지 않고 독립투쟁을 펼쳐나갔는데 수차례 체포되어 일제의 혹독한 고문과 감옥생활에도 지조를 꺾지 않았다. 드디어 남자현은 1933년 일제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하려다 부하의 밀고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선생은 하얼빈 주재 일본영사관의 감옥에 갇혔다. 6개월간 고문에 시달리던 선생은 같은 해 8월 6일 “일제가 주는 건 더 이상 먹지 않겠다”며 금식을 선언한 뒤 같은 달 22일 61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만다.
임종 전 아들 김성삼과 손자 김시련을 만난 그는 중국돈 249원80전을 전달하며 ‘200원은 조선이 독립하는 날 정부에 독립축하금으로 바치고 나머지는 손자의 대학 진학에 써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어머니 남자현을 밀고한 사람을 향해 분노하던 아들에게는 ‘절대 원수를 갚지 말라. 원수는 하나님께 맡기고 너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군에 입대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조선 독립에 대한 그의 의지는 이처럼 영원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의지를 자손만대에까지 전하겠다는 깊은 뜻은 그것을 자신의 혈육에 한정하겠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깊이 새겨야 한다. 그녀의 묘지는 하얼빈 남강 외국인 묘지에 자리 잡았었으나, 종전 뒤 개발 때에 유실되어 그 유해를 유실하였다.
그녀의 자손들
그녀의 아들 김성삼은 조국독립을 위해 군에 입대하는 등 어머니의 유언을 모두 지키면서 신앙 또한 열심히 지켜 온 가정이 지금도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라고 한다. 그리고 남자현 선생을 밀고했던 사람은 한국에 돌아와 6·25전쟁 중 죽었지만 그의 아들은 전쟁 당시 중공군에 붙잡혀 1년 넘게 포로생활을 했음에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는데 남자현의 증손자 김종식 교수는 이것은 증조모의 기도 덕분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중국인들이 김종식 교수에게 왜 중국에서 일하느냐고 물으면 그는 언제나 다음과 같이 말한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자주 제가 왜 이곳에 왔는지 묻습니다. 그때마다 ‘가족을 대표해 감사를 전하러 왔다’고 해요. 증조모께서 안창호 선생 구명운동을 할 때 중국인들이 돕지 않았다면 독립운동은 큰 타격을 입었을 겁니다. 앞으로도 감사의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중국인 제자를 키울 겁니다.”
남자현 그녀의 증손자인 김종식 교수는 할머니의 뜻을 살려 연변대학교에서한국어를 가르치며 봉사하고 있다는 것을 보면 할머니가 중국에서 진 사랑의 빚들을 그곳에서 갚고 있다는 것이 가슴에 찡해온다. 그리고 할머니의 신앙을 이어가면서 신앙의 할머니, 십자가를 등에 지고 태극기를 손에 들었던 할머니의 모습을 새롭게 조명해나려고 이곳저곳엣 신앙의 흔적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는 그의 모습이 감동적이어서 왠지 우리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