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의 지배을 받는 다면 교회는 아니다

                         돈의 지배를 받는 다면 교회는 아니다

 

우리사회가 얼마나 물질만능주의인지는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물질주의가 팽배해지면서 한국사회는 과거의 전통과 윤리 도덕이 무너진지 오래다. 돈이면 사람을 죽이고 타인의 기업과 가정 개인을 파멸로 몰고 간다. 그렇다면 한국교회는 어떤가? 한국교회 역시 상업자본주의의 지배를 받고 있는지 오래다.이것이 한국교회가 해결해야 할 가장 큰 문제 중 하나이다.

아직은 대형교회와 돈 많은 성직자들의 일부 국한된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서서히 중소형교회들 까지 오염되고 있으며 교회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없이 투기나 투자들를 한다. 그러나 이것은 전통적인 교회의 존재방식이 아니다. 교회나  목회를 상업적 마인드를 갖고 경영하거나 이해하게 되면 이는 그것은 교회가 아니라 기업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시대의 목회자들이 이런 세속주의와 사업주의 가운데서도 성경이 가르치는 참 복음의 가치를 드높힐 수 있을 까? 이제 교회나 성직자의 적은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있으며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점을 받아드려야 한다. 신학교는 이제 더 이론이 아니라 정신개조와 청빈에 대하여 가르치지 않으면 안되는 이유다. 

방송설교의 명암

그 대표적인 예중 하나는 거액의 돈을 지불하고, 방송시간을 사서 자기의 설교를 내보내는 일이다. 이것은 악어와 악어새의 역할로 방송사도 문제다. 이런 전통은 처음 미국에서 들어왔다. 한마디로 자본주의의 논리에 따라 교인들을 조직하고, 그대로 실천하고 있다. 로버트 슐러나, 빌리 그레함, 제시 잭슨 같은 세계적인 목회자가 정보매체를 잘이용해서 성공했다. 한국교회의 성직자도 라디오 또는 TV를 통해 설교하는 일이 빈번해지고 있다. 유튜브를 통해 설교를 내보낸다.

정보 매체를 통해서 세속화된 현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일은 어찌 보면, 불가피하게 보일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자본주의라는 물신숭배 체제에 예속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언론기관들의 대형화와 자본화가 맞물리면서 더욱 물신화된 것이다. 그런 매체에서의 설교는 중립적이고, 예언자적인 설교는 없다. 본전을 생각하여 물질주의에서 자유롭지 않다.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익을 창출하고, 타자를 극복해야 할 경쟁자로 보는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데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것은 결국 방송설교를 통하여 자신의 명성과 교회를 알리는 수단이다. 그 타임을 살 수 있는 부자교단과 부자교회와 목회자들의 카르탤이 된다. 목사는 돈내고 설교하고 다시 방송국으로부터 돈을 받는 다. 꾕먹고 알먹고다. 교권주의자들이 이 기관의 이사와 기관장이되고 메스컴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지금도 방송국들은 경쟁적으로 사옥을 짓고 지역에서 이름내기를 좋아하는 목회자들과 교회들을 홍보해주고 설교를 하게 하고 돈을 지원받는 다.

그래서 그런지 작년에 세습을 한 인천 순복음교회의 최성규 목사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세습후 달라진 면을 말하면서 자기 때는 방송설교로 많은 돈이 들어 갔는 데 아들 때에 와서 방송설교를 안하니 돈도 절약되고 좋다고 말하는 것을 보았다.  방송에 설교를 내는 것은 본인이 잘난체를 하고 싶다는 욕망도 있지만 방송국들이 경영을 위하여 로비를 하기 때문이다.   

 

자본의 지배는 정신적 지배

 

상대적으로 진보교회 연합체라고 할 수 있는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도 부자교단과 부자교회를 받아들이면서, 연합과 일치정신이 쇠퇴되었다는 비판을 한다. 교회마져도 친구와 동료들을 밟고 올라서는 것이 묵인 된지 오래다. 개 교회에서도 새로운 신자의 전도가 아니라 다른 교회 교인들의 수평이전을 통한 성장으로 세속의 이치인 약육강식이 통하는 것이 한국교회 현주소이다.

교인들의 신앙과 심령의 각성에 목적을 두었던 부흥회도, 교인들의 양적성장의 도구로 변질되었다. 교인들의 친교와 교제에 목적을 두었던 구역 조직은, 미끼를 놓은 다단계 조직을 방불케하고 있으며, 새 신자 교육은 신입사원 훈련으로 변질되었다. 구역을 관리하고 책임지는 책임자에게는 적절한 교회의 지위와 함께 신앙적, 물질적 이윤이 배분된다.

설교에서 목사들은 말로는 영적인 것 정신적인을 말하지만 늘 결론은 그래서 보화를 세상에 쌓치 말고 하늘에 쌓으라는 것인데 거기가 교회의 곡간이라고 가르친다. 물론 교회가 정당하고 바르게 지출을 하고 사용한다면 몰라도 주머니 돈이 쌈지 돈이라고 자기가 주고 싶은 데 주는 식의 재정운영을 하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이번에 명성교회의 재정보고가 처음으로 보도되었다. 규모도 그렇치만 여전히 차고 넘친다. 나는 이렇게 보고를 하게 된 것만도 큰 소득이라고 본다. 그러다가 보면 바르게 사용하고 관리될 것이라고 본다. 여전히 이월금이 크고 사용처도 불분명한 곳이 나왔는 데 앞으로는 정직하게 보고를 하면 되는 것이다.  

 

대형교회 대기업 흉내

 

오늘 대형교회의 면면을 살펴보면 그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당회장은 대기업의 회장 같고, 부목사는 사장의 기능을 하며, 전도와 구역장은 지점장이나 지사장의 역할을 한다. 은행이나, 대기업이 지점을 내듯 대교회들도 지교회 또는 지성전을 만들어 세력을 확장해 가고 있다. 이들 지교회의 목회자들은 자율권이 철저하게 통제되며, 당회장의 전권 하에서 움직인다. 이것은 분명 하나님 앞에서 좋은 모습은 아니라는데, 목회자나 교인 모두가 동의하면서도, 맘몬에 길들여진 나머지 쉽게 내려놓지를 못하고 있다.

이러한 대교회의 조직을 움직이는 것은 돈이다. 돈이 없으면 대교회를 움직일 수 없다. 일부 한국교회는 급한 나머지 대기업 형태로 대출을 내고 교회를 짓고 운영하다가 빚더미에 앉은 경우도 있으며, 많은 작은 교회가 대형교회에 흡수돼 문을 닫는 경우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이것은 분명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이 이웃 작은 교회를 존중하지 않은 결과가 빚어낸 것이며, 맘몬을 노래한 결과이다. 작은 교회를 살린다고 말하는 목회자들조차도, 이웃교회의 교인을 빼앗아 교회를 살찌우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어둠의 터널을 가고 있는 가장 큰 원인 중 하나이다.

현재 언론들의 표적은 대형교회이다. jtbc는 명성교회를 mbc는 소망교회를 kbs는 여의도순복음교회를 표적으로 하여 세습과 부동산 보유의혹,  방만한 재정운영과 퇴도한 퇴직금 지급등으로 흠집을 내고 있다. 그런 소리를 들어 싸기는 하지만 교회일을 일반언론에 맡겨놔야 하는 가? 하는 생각이다. 누구는 자정을 못하니 사회적인 압박과 망신을 통해서라도 정신을 차리게 해야 한다는 데 그것도 반만 맞는 말이다.  이런 근본적인 기저는 모두 돈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돈의 위력을 입증하는데 급급한 목회자

 

일부 대형교회의 목회자들은 세련된 신학적 논리로 돈의 위력에 대한 정당성을 입증한다. 한 목사가 방송에 출연해, ‘하나님의 속성 중 거룩성’ 즉 신의 능력을 가지고 설교한다. 이 목사는 아는 것이 힘이 아니고 군대가 강한 것도 아니고, 대통령이 강한 것도 아니고, 오직 돈만 강하다는 것이다. 강력한 힘을 소유했던 로마의 장군 시저도, 프랑스의 영웅인 나폴레웅도 사라졌다. 하지만 돈의 능력은 사라진 적이 없었다는 것을 열변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으로 명예와 권력도 살 수 있으며, 죽은 사람도 살릴 수 있는 것이 돈이다.

한마디로 돈만큼 강한 것이 없다. 돈이 있어야 나라도, 기업도, 교회도 운영되는 것은 분명하다. 그리고 돈이 있어야 가난한 이웃과 교회를 도울 수 있다. 전도와 해외선교도 할 수 있다. 어린이와 청년도 양육할 수 있다. 교회도 건축할 수 있다. 한마디로 하나님이 전능하시듯이, 돈도 전능하다. 때문에 돈, 즉 맘몬이 하나님인 것이다. 오늘 한국교회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 대신 돈으로 대치하고 있다.

이 목사의 설교는 가난에 찌든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는 것 같이 보이지만, 복음의 본질에서 크게 벗어났다. 목회자들 중에는 ‘가난이 죄’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따라서 가난한 사람들이 교회를 떠나고 있다. 오늘 한국교회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는 것이 바로 자본주의의 상업적 맘몬주의에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다.

 

세습, 그래서 나온다.

 

그렇다 보니 부자 목사 아버지를 만난 아들은 대형교회의 상속자로 이름을 올린다. 물론 좋은 여건에서 좋은 교육을 많이 받아서 능력이 된다고 하여도 이것에 대하여 문제를 제기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사회도 상승의 사다리가 제거되고 더 이상 모으고 아껴서 집을 사고 재산을 증식하기는 쉽지 않다.  오늘 한국교회 안에서 담임목사 세습을 둘러싼 비난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상대적 박탈감에 내몰린 목회자들이다. 또 세습과정에서 의 비민주성과 거짓에 염증을 느끼는 이들이  이탈하고 있다. 

요즘 세상은 아무리 공부를 잘하고, 영리해도 돈 없으면 상놈이고, 공부 못하고 불성실해도 돈만 있으면 양반이 된다. 한마디로 돈이 양반을 만들고, 신분을 높여주고, 사회를 엉망진창으로 만든다. 오늘 한국교회가 그 모습을 그대로 닮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보니 사회에서는 돈 많은 사람이 양반이고, 교회 안에서는 헌금의 액수가 신앙의 척도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교회가 세상을 향해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교인들은 묻고 있다.

사실 세습을 막는 길은 법갖고는 안된다. 세습을 구조적으로 꿈꾸지 못하게 해야 하는 데 그것은 임기제를 도입하여 평신도들에게 인사권을 돌려주는 것이다.  구조적으로는 장기목회를 하게 하는 위임목사(종신제) 가 폐지 되지 않는 한 교회에서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면 그 사람은 아무리 머습이 되고 싶어도 신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니 후임자를 정하는 데도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할 수 밖에 없고 이룩한 성과를 사사화하고 싶어하는 유혹에 노출된다. 개인이 나쁜게 아니라 구조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다. 거기다가 은퇴후 끝이 아니라 각종 혜택을 받는 원로목사까지 되니 정신적으로 사유재산으로 볼 수 밖에 없다. 

 

교회 중직도 매매

 

오늘 한국교회의 면면을 살펴보자. 장로가 되는 것이 더 이상은 신앙만이 아니다. 돈이 장로, 안수집사, 권사를 만든다. 신앙이 돈독하고 믿음이 좋아도 돈이 없으면, 장로, 안수집사, 권사가 될 수 없는 것이 오늘 한국교회이다. 내놓으라는 교회 대부분은 ‘헌금의 액수’로 신앙을 평가하고, 어떤 교회는 중직자가 되려면 무조건 수억의 돈을 내야 한다. 

교회가 경제적으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나 건축시기 이를 극복하기 위한 수단으로 임직식을 갖는 교회들이 늘어나는 것만 보아도 한국교회가 중세교회의 전철을 그대로 밟고 있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한마디로 교회를 지배하는 것은 돈을 그렇게 배척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정신이 아니다. 오직 돈이 있어야 한다.  이것도 역시 가난하게 자란 한풀이를 성전건축으로 왜곡되여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거기서 교회의 모임을 하고 내가 지었다라고 하는 교만을 부리게 하는 것이다.  

예수는 마태복음 6장 24절에서 아무도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선언했다. 이것은 재물과 하나님이 양립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한 것이다.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예수의 이러한 선언에 비웃었다. 그러나 여전히 한국교회는 이를 받아드리고 있다.

 

돈의 능력 앞에 무너지는 성직자와 기관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를 보면, 교회는 항상 하나님과 맘몬을 하께 섬기고자 했다. 오히려 하나님보다도, 맘몬을 더 섬기려 했다. 오죽하면 하나님께서 탐욕에 길들여진 인간을 향해 “나 이외는 다른 신(맘몬신)을 섬기지 말라”고 했겠는가(?) 이것은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십자가탑을 높이는데 경쟁을 벌이는 한국교회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싶다. 오죽하면 “돈!돈!돈! 돈의 돈!돈! 악마의 금전”이라는 노래 가사가 있겠는가. 이 노래는 80년대 교회 내에서 소외당하던 가난한 교인들의 입에서 자주 불려졌다.

2017년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제2의 종교개혁를 하자는 목소리가 나왔지만 어떤 방식으로 어떤 것을 구체적으로 개혁할 것인지 남은 것은 없다. 한국교회가 돈으로 성직을 매매하고, 천국의 열쇠를 헌금의 액수로 평가하고, 맘몬에 길들여진 목회자들의 입에서는 돈!돈! 을 외쳐지고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이 선언한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한 말씀을 살아 움직이게 하지 않는 한 개혁은 리모델링에 불과할 것이다.

사실 한국교회의 강단은 이미 맘몬을 노래하는 목소리로 오염되었고, 교인들의 주머니에서 돈을 잘 꺼내 헌금하게 하는 부흥사 및 영성운동가가 대접받는 풍토가 뿌리를 내렸다. 이런 상황에 처한 일부 목사들의 입에서 천박하고, 쓰레기 같은 말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거디다가 교회를 재패한 목회자들이 연합기관의 이사나 책임자들로 이름을 올리며 취미생활들을 하고 있다.

교회의 성장으로 이익을 보는 기관들 성경반포, 찬송가 공회, 기독교 방송국등 한마디로 일류기업을 구가한다. 한국교회 대다수는 여전히 가난한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상대로 허울좋은 방송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수금을 하고 있다. 그리고 자산을 늘려가고 족벌경영도 서슴치 않는 다. CTS도 그렇고 극동방송도 세습을 한 상태다.  

 

감사를 잃어버린 지도자들

 

예수님의 비유는 어찌 보면 맘몬에 길들여진 이 세상에서의 하나님 나라,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이 이 세상에 도래할 새로운 질서와 그 질서의 내용을 알았기 때문에 이와 같이 선언한 것이라는데 목회자와 교인 모두는 동의하고 있다. 그럼에도 목회자와 교인들이 이를 실천하지 못하고, 맘몬과 바벨을 노래하며,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고 있는 데는 복음의 본질을 상실하고, 세속화되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도 한국사회처럼 압축성장의 단면을 보여주는 것이다. 짧은 기간동안의 산업화와 정보화를 경험하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급속한 마을 공동체의 해체와 변모를 겪으면서 아노미현상이 온 것이다. 무엇이 가치가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인지를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오직 1등,성공, 출세, 돈을 버는 것이 목표가 되었기 때문이다. 청지기(Stewardship) 정신을 잃어버렸거나 애써 무시하기 때문이다.

새로운 질서, 새로운 시대, 하나님이 통치하는 시대는 오늘 한국교회를 비롯한 세계교회는 기독교적 세계관의 꿈이다. 한국교회와 지도자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통당하는 이스라엘 민족 속에서 역사하셨다는 사실과 예수 그리스도가 가난하고 소외되고 고난당하는 사람들 속에서 역사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어느 천주교의 노사제의 말이다. “사제는 물질적으로 가난할수록 영성적으로 풍요해지고 성장된다. 물질이 풍요하면 소외된 고통 받는 이웃에 무관심하게 되고, 기득권층만 바라보게 됩니다. 주머니가 비워질수록 축복으로 여기십시오.”

한국교회가 일본제국주의 아래서 가난하고 척박한 땅에서 해방과 6.25한국전쟁 이후 가난하고 고난당하는 이웃과 함께 할 때, 하나님나라 선교가 왕성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당시 신앙의 척도는 돈이 아니었다. 가난과 열심, 비젼이었다. 지금도 한국교회가 년말년시가 되면 송구영신예배나 신년예배에서 단골로 증장하는 것이 년중기도제목과 봉투이다. 한마디로 복채를 사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

구약성서에서도 예언자들이 경계한 것이 산당신앙으로 철저하게 혁파를 강조한다.  그것이 자신들의 책임임을 모른다.  무미건조하고 형식화한  성전제사보다 뭔가 귀신이라고 역사할 것 같은 장식과 치장에 현혹된다.  그래서 사제들을 피하여 산당의 단골무를 찾아가서 길흉화복을 비는 무속적인 신앙에 빠진다.  지금도 기도원이나 예언에 능한 능력자들에게 현혹되어 시간과 가산을 탕진하는 이들들이 속출한다. 그리고 이것이 이단교회에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멀쩡한 교회도 무속을 부채질 하고 있다.

한마디로 교인의 우민화, 순종화를 통한 충성경쟁으로 기분 안나쁘게 내도록 해서 부를 축척하는 것이다. 그러나 구역성경의 몇 구절에 나타난 물질의 축복를 확대해석하여 성도들로 하여금 성직자 수준에 버금가는 윤리성과 계율을 강조하고 못하면 물질이라도 내라는 겁박을 하는 것이다. 그렇치 않다면 왜 신앙과 믿음만이라고 하고는 물질에 대한 탐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가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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