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신건교수의 동성애 알아가기

반동성애, 차금법 반대는 과거엔 듣도 보지 못한 한국 보수 기독교의 사회참여성 주제로 이전엔 반공주의 이슬람 포비아에서 바뀐 구호이다. 공통점은 모두 보수측 인사들이 주도한다는 점이고 교회안보다는 외곽에서 활동중이다. 그러나 교단 이단사위비에서 이슬람 반대 그리고 다시 반동생애 차금법 반대를 추동한다. 신학적인 것임에도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침묵 중인데 이 주제가 그만큼 예민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앞장서는 분들 중에는 신학자들은 거의 없고 보수적 목회자나 그 외 의사 변호사등 평신도들이 많다. 우리교단에서는 신학교 교직원이나 신대원 입학생 교회 항존직자에게 수 반동성애자 임을 확인하자는 법도 만들었다. 심지여 총회장 출마자는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서약서까지 쓰도록 규칙을 만들 정도다. 그러나 대부분의 노회나 총회는 이 주제에 대하여 능동적 반대보다는 수동적인 입장인데 이에 대한 지식이나 정보가 일천하기 때문이다.
다음 글은 한국에서 나름 균형잡힌 교단이라고 하는 기독교 장로회에서 오는 8월 말에 반동성애 포럼을 개최한다는 소식에 대한 소견으로 이 일을 주관하시는 분에게 드린 글을 시작으로 공론화한 이신건교수 글이다. 보수 교단 신학자로 모두가 피하는 이 주제에 처음 목소리를 낸 것이다. 그간 이 분야는 비판만 할 수 있지 학문의 장에서 연구나 토론 자체를 위험시 한다. 그런 가운데 독자들에게도 그렇고 우리교단 7개 신학대학의 교수님들도 이런 흐름과 정보는 알고는 계시라는 의미로 소개한다.
이신건 교수(1953년 출생, 서울신학대학 졸업, 연대 연합신학대학원, 독일 튜빙겐 대학 조직신학 박사, 서울신학대학 교수, 몰트만의 제자로 바르트연구자) * (319) 이신건 tv – YouTube

목사님의 선교적 열정과 헌신의 노력에 대해서는 감히 일면식도 없는 제가 진심어린 감사를 올립니다. 그러나 신학자인 저의 소견을 말씀드린다면, 동성애(동성 결혼) 반대는 마치 지동설과 진화론 반대와 같이 매우 허망한 노력이었음을 언젠가는 반드시 알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제가 저의 빗나간 탐욕과 타락한 본성에 따라서 이성애자가 된 것이 결코 아니듯이, 동성애자도 그러합니다.
동성애 현상은 인류의 역사 속에서 항상 일정한 비율로 존재해 왔고, 지금도 그러합니다. 아마 지금은 동성애를 공개적으로 밝히려는 추세 속에서 동성애자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는 생물학적으로 항상 일정한 비율로 존재해 왔던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를 자연질서라고 말하든, 창조질서라고 말하든, 결과는 다르지 않습니다.
저와 같이 보수적인 전통 속에서 자라고 활동한 신학자가 이처럼 매우 거북하고 어색하고 심지어 비난과 손해까지 감수해야 할 난제를 왜 감히 입에 올리겠습니까? 동성애 반대와 비난, 혐오와 차별 때문에, 심지어는 성전환이나 강요된 성전환 노력 때문에 얼마나 많은 동성애자들이 지금도 서럽게 울고 있고, 마음 아프고 괴로우며, 심지어 자살까지 자주 시도하는지 헤아려 보셨습니까?
왼손잡이를 이상하게 바라보는 태도가 이미 변하였듯이, 동성애를 일종의 변태와 범죄 현상으로 바라보는 태도도 점점 변하거나 사라지고 있으며, 비단 선진국만이 아니라 유엔에 속한 수많은 나라에서도 동성애 현상은 점점 인정되어가는 추세입니다. “세상의 풍조를 따라야 한다”는 뜻에서 드리는 말씀이 아닙니다. 예수님도 동성애를 비판한 적이 없으며, 바울이 비난한 동성애는 오늘 우리가 목격하는 동성애가 아니라 동성 간의 성폭력, 특히 남성의 성폭력과 소년 성애와 같은 현상이며, 심지어는 이방 성소에서 일어나는 종교적 성행위였거나 성매매 현상이었다고 정직한 성서신학자들은 해석하고 있습니다.
만약 목사님이 그 시대의 동성애자였다면, 동성애를 감히 공공연히 드러낼 수 있었겠습니까? 예수님만이 아니라 바울도 오늘 우리가 바라보는 동성애자들을 알았을 리가 없습니다. 비록 동성애가 자연질서나 창조질서를 어기는 질병이나 범죄라고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을 위해 조용히 기도할 수는 있어도 공개적으로 비판할 자격과 자유가 과연 있겠습니까? 이성애 현상으로 인해 일어나는 범죄는 동성애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고 심각한데, 그렇다고 우리가 이성애와 이성 간의 결혼을 공공연히 반대할 수 있겠습니까?
정말 불가능하고 무망한 일에 소중한 시간과 재물을 바치기보다는 점점 침몰해 가는 교회와 급속히 병들어가는 지구의 기후 위기를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하고 활동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우연히 보게 된 글에 대해 제가 갑자기 낯선 글을 올려드려 참으로 죄송합니다. 저도 참 오지랖이 넓은 못난이, 바보인 듯이 보일 것입니다. 아무런 칭찬과 대가가 돌아오지 않는 무익한 짓을 제가 왜 하고 있는지도 헤아리시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 ㅠㅠ 오늘날 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보다는 세상의 암과 아편 노릇을 더 하고 있는 안타까운 현실에서 연약하고 부족한 신학자의 양심적인 고언임을 부디 해량하시기를 바랍니다. 만약 목사님이 저의 의견에 도저히 수긍할 수 없고, 저를 매우 어리석고 나쁜 신학자로 생각하신다면, 부족하고 연약한 저를 위해서도 기도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선한 의도에서 시작하시고 실천하시는 활동이 아무쪼록 선한 열매를 맺기를 기원합니다. 그리고 비록 우리의 생각이 완전히 달라도, 여전히 우리는 동료 피조물이요,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입니다.
성경만능 처방의 위험
동성애를 반대하는 자들이 가장 자주 끌어오는 성경 구절은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창 1:27)라는 구절이다. 나는 이 구절을 굳이 문자적으로 이해하고 싶지는 않지만, 백번 양보하여 이 구절은 반드시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치자. 그렇다면 하나님이 완벽한 남자와 완벽한 여자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제3의 성이나 퀴어한 존재가 나올 수는 없다. 그러므로 동성애자들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어기는 범죄자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창세기의 인간 창조 기사에 따르면 하나님은 흙으로 아담을 만드셨고, 이브는 아담의 갈비뼈로 만드셨다. 그렇다면, 남자는 ‘옹기 그릇’인 셈이고, 여자는 ‘본 차이나’인 셈이지만, 둘의 기원은 동일하다. 모두가 흙에서 나왔으니, 흙으로 돌아간다. 그렇다면 남자와 여자가 본질적으로 완전히 다를 수 없다. 그러므로 남자와 여자를 구분하는 경계선도 분명할 리가 없다.
생물학적으로 분석한다면, 남자의 성염색체는 XY이고, 여자의 성염색체는 XX다. 그렇다면 하나님은 남자의 염색체 중에서 X 하나를 떼내어서, 이를 둘로 증식한 셈이 된다. 그러나 남자와 여자는 X를 공유하기 때문에 완전히 구분(분리)되지 못한다. 여전히 둘은 본질적으로 하나다.
만약 남자와 여자가 생물학적으로 완전히 독립적인 존재여야 한다면, 여자가 XX이듯이, 남자는 YY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녀도 반드시 그러해야 한다. 그렇다면 결혼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단성 생식을 해도 같은 유전자를 지닌 자녀를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남자와 여자가 성염색체를 하나씩 주고받아야 한다면, 결국 지금의 남자처럼 XY라는 이상한 존재가 나와야 한다.
그런데 왜 하나님은 XY로 남자를 만들었을까? 거꾸로 YY로 남자를 만들고, XY로 여자를 만들 수는 없었을까? 이러한 불균형과 불공평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이미 여기서 하나님은 상당히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분으로 드러난다.
좌우간 여자는 여성 염색체 두 개를 가졌기 때문에 안정된 존재로 보이지만, 남자는 남성 염색체 하나와 여성 염색체 하나를 동시에 가졌기 때문에 상당히 불안정한 존재가 된 것처럼 보인다. 남성의 가슴에 여성의 신체 기관(젖꼭지)이 붙어 있는 것도 이 때문일까? 여성보다 남성이 성적 정체성의 혼란을 더 자주, 더 심하게 겪고, 그래서 기이한 행동을 보이는 것도 이 때문일까? 레즈비언(여성 동성애자)보다 게이(남성 동성애자)의 수가 훨씬 더 많은 것도 바로 이 때문일까?
좌우간 하나님이 인간을 이렇게 불공평하게, 아니 괴상하고 요상하게, 아니 신묘막측하게 창조하신 깊은 뜻을 도저히 모르겠다. 그리고 하나님이 인간의 모든 자식들이 아버지와 어머니의 성염색채를 공유하도록 창조하셨다면,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고 말해서는 안 된다. 솔직히 말하자면, 하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이것은 창세기 저자의 설명이다.
그런데 창세기의 다른 기록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서, 왜 이 구절만은 문자적으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도저히 알 수 없다. 문자적으로 뱀이 말을 했다거나, 뱀이 흙을 먹고 산다고 받아들이는 자들이 과연 있는가? 가인이 아벨을 죽인 뒤에 누구를 두려워했는지를 설명할 수 있는 자들이 과연 있는가? 가인이 누구와 결혼했는지도 오리무중이다. 범죄하는 즉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담과 이브가 왜 그토록 오래 살았는지도 생게망게하다.
그렇다면 비록 잠정적이지만, 그래도 가장 합리적인 결론은 뭘까? “하나님이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셨다.”는 말씀을 문자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결론일 것이다. 성경은 물리학적 교과서가 아니듯이, 생물학적 교과서도 아니지 않은가? 무더위가 서서히 물러가는 중임에도 내가 더위를 먹었는지 저녁밥을 잘 먹은 후에 이런 허망하고 난삽한 글을 마구 쓰고 있다. 늙고 한가하다 보니, 내가 온갖 쓰잘 것없는 글을 마구 쓰는가 보다. 늙어가면서 나도 점점 더 망령이 드는가? 아이구, 내가 정말 불쌍하다. 오래 살 것도 아니다. 짧고 굵게 살고 싶지만, 내 마음대로 안 되는구나!
잠정적 결론을 대신하여
동성애 문제가 내가 오랫동안 연구해 오거나 전문적인 경험과 지식을 쌓아온 문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내가 최근에 이 문제를 자주 거론한 까닭은 무엇일지 궁금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내가 최근에 동성애에 관해 – 비록 여전히 잠정적이지만 – 상당히 합리적이고 성서적인 결론을 내렸기 때문에 교회를 섬기는 신학자로서 책임적인 자세로 이를 널리 알려야 한다는 사명감이 일어난 것은 사실이다. 왜냐하면 신학대학 교수들은 대부분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쟁할 용기가 부족하기 때문이겠지만, 무엇보다 대중의 여론에 더 신경을 쓰거나 교회 권력의 압력에 완전히 눌려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교회의 목회자들과 신학자들의 압도적인 입장처럼 동성애를 분명히 반대함으로써 인기와 명예도 얻을 수 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왜 그들은 계속 침묵하고 있을까? 미루어 짐작하기란 쉽지 않다. 가장 그럴듯한 추측으로는 아마 별다른 이득이 생기기 않기 때문일 것이다. 반동성애 유명 강사가 된다고 해서, 얼마나 많은 명예와 인기가 돈을 얻을 수 있겠는가? 차라리 전문 분야에 관한 책과 논문을 쓰는 것이 더 바람직할 것이다.
내가 어이 없는 공격과 인격적 비난을 받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 문제를 자주 거론하는 까닭은 단지 이 문제에 관해 올바른 입장을 널리 알림으로써 교회가 더 소중하고 위급한 일에 노력해 주기를 바라기 때문만이 아니라, 교회의 반동성애 운동이 교회의 사회적 신뢰도를 매우 심각하게 깎아 먹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동성애가 한국교회의 인문학적, 신학적, 도덕적, 영적 수준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결정적인 지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를 자주 거론하게 된다. 동성애를 대하는 한국교회의 심각한 병폐와 어처구니 없는 모순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진화론이나 동성애 논쟁에서 드러나듯이, 보수적인 교인들의 과학적 상식이 매우 열악하다. 진화론이나 동성애의 문제는 일단 과학적인 입장에서 설명해야 하고, 무조건 성서적으로 풀어야 할 문제가 아님을 그들은 모르거나, 이런 사실을 애써 부인한다. 성서를 여전히 과학적인 문서라고 우기는 창조과학의 폐해가 작지 않다. 그들은 과학의 혜택을 최대한 누리려고 하면서도, 과학에 대한 존중은 전혀, 혹은 거의 없는 자세를 보여준다. 얼마나 역겹고 모순적인 태도인가!
과학만이 아니라 성서를 읽는 보수적인 교인들의 신학적 수준도 매우 허약하다. 성서를 문자적으로만 읽어서는 결코 안 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아직도 문자적 성서 읽기를 고집하고 있다. 성서가 100% 인간에 의해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인간의 오류와 편집 속에서도 하나님의 불변적인 뜻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서가 100%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이거나, 100% 인간의 오류 있는 문서라는 양자택일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마치 계란 꾸러미 속의 계란 몇 개가 썩었다고 해서, 모두를 버려야 한다는 어리석은 생각과 같아 보인다.
만약 성서를 오직 문자적으로, 하나님의 무오한 말씀으로 읽어야 한다면, 모든 기록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문자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완전히 무시하며, 문자적으로 읽음으로써 생겨나는 신학적, 윤리적 갈등도 완전히 무시한다. 그러면서 그들의 선택적 성서 읽기가 대단한 영적 수준을 입증한다는 듯이 으스대고, 성서를 그렇지 않게 읽지 않는 형제를 마구 조롱한다. 그들도 성서를 잘못 해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전혀 인정하지 않는다. 그들은 성서만이 아니라 자신을 절대화하고 우상화함에도 불구하고 신앙 수준이 가장 높은 자처럼 허풍을 뜬다.
동성애보다 더 자주, 더 심각하게 지적하고 비판하는 본문은 얼마나 많은가? 그들이 어기지 않는 동성애 범죄보다 그들이 공공연히, 은근히 어기는 성서적 범죄는 얼마나 더 많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남의 눈 속에 박혀 있는 티보다 자신 눈 속에 박혀 있는 들보는 전혀 인정하지 않으며, 회개할 마음조차 없는 듯이 보인다. 이처럼 위선적이고 야비하고 비열한 존재가 있을까? 그래서 나는 이런 신자들보다 정직한 무신론자를 더 좋아한다. 루터의 말대로 아마 하나님도 그러하실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