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목회 첫 모임 열려
오필승목사(마을목회 신학포럼-서울상임 대표)
마을목회신학포럼-서울은 예장마을만들기네트워크(예마넷), 예장사회적경제네트워크(예사경), 한국마을목회종합지원센터(마목센)가 참여한 가운데 지난 9월 26일(월)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1층 그레이스 홀에서 창립식을 갖고 “선교적 교회와 마을목회” 전광현 목사(만성교회)의 마을목회 박사논문을 요약발표 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어 기조발제1 마을목회 용어의 탄생에 대해, 오필승 목사(포럼 상임대표, 예장마을만들기네트워크 상임이사). 기조발제2 문명전환기 마을목회 나아갈 길, 이원돈 목사(포럼 공동대표, 예장사회적경제네트워크 이사). 기조발제3. 마을, 마을만들기, 공동체, 민건동 목사(한국마을목회종합지원센터 센터장)의 발제를 진행했습니다.
오늘부터 3주간 마을목회신학포럼-서울은 세 참가단체가 하루씩 준비해, 주 단위로 3회에 걸쳐 <마을목회신학 아카데미>를 진행합니다. 오늘 예마넷은 간단하지만 50년대 말부터 오늘까지 한국의 신학과 목회를 조명해 보는 시간으로 준비했습니다. 1.목민목회(목민신학)와 마을목회, 고성휘 교수(목민연구소 이사장). 2.민중신학과 마을목회, 권진관 교수(성공회대, 민중신학). 3.종교사회학에서 본 마을목회. 정재영 교수(실천신대 종교사회학). 세 분을 모시고 첫 날 강좌를 갖게 되었습니다. 시간적으로 제약이 있어 많이 어렵다고 생각됩니다. 부족한 부분은 또 다른 시간에 이야기 할 부분으로 남겨 놓았다고 생각하고 이해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앞으로 10월 24일(월)은 예장사회적경제네트워크가, 11월 1일(화)은 한국마을목회종합지원센터가 준비한 <마을목회신학 아카데미>를 통해 마을목회와 신학에 대한 이해와 나눔의 시간이 되기를 바라며, 12월 초 열리는 마을목회신학포럼을 통해 한국교회가 마을목회신학에 대한 이해와 목회적 실천을 통해 사회적 신뢰를 더욱 얻고, 본 포럼을 통해 국내교회와 세계교회가 마을목회와 신학을 나누는 마당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그 첫 일정이 지난 10월 18일(화) 서울 연동교회 2층에서 열렸다. 시작은 상임 대표 오필승목사의 개회사로 ‘목민목회와 마을목회’ 고성휘교수(목민연구소, 성공회대 신학연구원) 가 이어 ‘민중신학과 마을목회’권진관박사(성공회대 은퇴), ‘사회학에서 본 마을목회 신학’ 정재영교수(실천신학대학원대 종교사회학) 강좌를 연속해서 했다. 이날 강의는 동영상으로 촬영되여 유튜브로도 공개되었는 데 이번에 권진관 박사의 원고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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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신학과 마을목회
권진관박사(성공회대 은퇴교수, 민중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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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중신학계는 한편으로는 초상이 났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사가 났다. 1세대 주요 민중신학자들이 모두 돌아가셨기 때문에 초상이 났고, 3세대, 4세대 민중신학자들이 생기고 있어 경사라 하겠다. 가는 세대와 오는 세대 사이에 끼인 이제 70대에 들어선 나는 한편으로 슬퍼하고 있고, 다른 한편 희망 속에 있다. 올 초에 두 분의 민중신학자들이 돌아가셨다. 서광선 박사, 김용복 박사이시다. 어제 김용복 박사 사모님 마리온 (Marion) 여사를 독일 마인츠 대학의 폴커 퀴스터 교수와 함께 점심을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나온 얘기 중에 김용복 박사가 꿈을 꾸는 예언자(visionary)라는 것과 그런 이상주의가 없다면 세상이 안 바뀔 거라는 대화가 기억에 남는다.
우리의 주제로 곧바로 들어가자. 민중신학과 마을 목회는 좀 생소한 관계일지 모르겠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 둘은 매우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다. 마을 목회의 두 가지의 주요 요소가 있다면, 인간과 자연이라고 생각한다. 민중신학도 인간의 문제, 자연의 문제를 함께 고려하면서 오늘날의 위기의 원인을 찾고 해결하려고 하기 때문에 이 둘의 관심은 매우 상통한다고 생각한다. 마을 목회의 관심은 마을이라고 하는 단위 안에 있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 예를 들어 땅과 거기에서 나오는 산물들과 인간과 관련된 이야기일 터이기 때문이다. 농촌이나 도시에서 마을을 살리는 일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특히 마을 목회는 농촌을 살리는 목회 이야기이다. 살기 좋은 마을 만드는 일이 목회의 일이 된다.
이런 일들을 신학적으로 성찰해 보자. 오늘날 식량문제, 인구감소문제, 기후변화문제, 수자원의 공해문제 등으로 몸살을 알고 있는데 그 영향이 시골의 마을에 직접적으로 닿고 있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오늘날의 자본만능, 맘몬만능주의에 의해서 자연이 파괴되고 마을이 사라지고, 사람들 사이에 인간미가 사라지고, 각박한 삶에서 오는 외로움, 소외감, 좌절감 등은 노령화되고 인구가 감소되는 농촌에서 더욱 절박한 매일 매일의 현실이다. 이 속에서 마을목회를 한다는 것은 먼저 사람들이 자연친화적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살도록 하는 것으로 이것을 통해 행복지수를 높이고, 하느님이 주신 삶을 잘 살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마을목회와 관련하여 신학적으로 중요한 주제들을 몇 가지 선택해서 이야기를 풀어가자. 그 주제들은 주체, 몸, 이야기 (언어), 생명 등이다. 이제 이러한 개념적 주제들에 들어가 본다.
민중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적 개념은 주체라고 감히 말할 수 있다. 물론 가난이나 소외 등이 중요한 개념이고, 한과 단이 중요한 개념이지만 이것들과 내밀하게 연결된 개념으로서 주체를 언급해 보자.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다는 말은 지금도 강하게 붙드는 개념이다. 최근 돌아가신 김용복 선생은 21세기 지구적 자본주의와 제국 하에서는 민중을 넘어서서 모든 생명(온생명)이 진정한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고 말한다. 매우 의미있는 예언자적 발언이며 생명신학적 통찰이다. 그러나 이 필자는 현실적인 관점에서 주체는 몸을 가진 존재이며, 언어에 의해서 만들어진 의식, 무의식적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을 비롯한 모든 존재가 몸을 가진 존재이므로 주체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진정한 주체가 되기 위해서는 의식적 무의식적인 영혼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날 생태학자들은 만물이 다 그러한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동양적 사상을 수용한다. 그러한 면에서 생태적 사물들도 주체가 될 수는 있다고 나도 인정한다. 그럼에도 몸과 언어를 모두 가진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주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고 싶다.
1. 주체와 마을목회
마을목회의 주체는 누구인가? 당연히 남녀노소 막론한 마을 주민들일 것이다. 목회자는 이들이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이(facilitator)이며 주민의 한 사람으로서 주체자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나지는 않는다. 주체는 몸을 가지고 있지만, 동시에 언어와 이야기에 의해서 형성된 존재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체는 계속 변화하는 존재이다. 우리가 주체를 자아, 에고와 구별하는 것은 이러한 역사성과 사회성을 주체라는 개념이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에는 이야기와 담론이라는 것이 있는데, 이것을 뭉뚱그려 언어라고 하자. 우리가 살면서 우리는 수없이 많은 언어들을 들어왔다. 신문, TV, 책, 이웃과의 대화 등등을 통해서 우리는 언어를 듣고 수용하여 내 안으로 들여온다. 그것이 우리를 어떤 형태의 주체로 만들어 준다.
전광훈 목사와 같은 극우파의 이야기들을 많이 듣고 그것을 내 안에 수용하면 나는 극우적 주체가 되어, 진보진영을 주사파라고 부르고, 북한공산주의를 저주하며 호전적이 되기도 한다. 그렇지 않고, 전태일 평전을 읽거나 마음목회에 관한 글들을 읽고 듣다가 보면 나도 모르게 그러한 사람이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민중신학은 이야기, 민담을 자주 말해왔다. 마을에 얽혀 있는 민담이나 이야기, 혹은 민속춤 등은 그 마을 사람들을 일정하게 만들어 주는 힘을 가지고 있다. 민중신학은 토착적, 향토적, 민중적인 신학이 되고자 한다. 마을목회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
몸과 이야기(언어)를 함께 가지고 있는 주체는 몸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과 그리고 생태환경 속에 있는 만물들과 하나로 연결된다. 몸을 가진 주체가 삶을 살려면, 주위의 생태환경이 잘 살아야 한다. 몸을 가진 우리는 만물들과 함께 삶의 잔치를 하는 것이다. 몸은 건강한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마을에서 주민들의 건강을 지키기 위한 여러 프로그램이나 방안을 마련하는 것은 필수적인 활동이다. 건강은 만물과의 적합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본다. 건강과 행복의 근원은 자연에서부터 온다. 몸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이다.
동시에 우리는 언어를 듣고 말하면서 의식과 무의식을 형성한다. 마을에 얽힌 이야기를 말함으로써 공동체가 형성된다. 그런데 오늘날 매스미디어와 인터넷 등이 발전해서 수많은 이야기와 정보가 우리 안으로 들어오고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제 전국, 그리고 전 세계와 연결되어 있다. 언어를 가진 마을 주민들은 이제 전 세계의 기본적인 사고구조를 우리 안에 받아들이고 있다. 즉 우리 안에 마을이 아니라 전 세계와 전국적인 사고구조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신자유주의적인 이념성 사고구조나 현실안주적인 보수적 사고구조가 들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바깥의 구조를 안으로 수용한다. 그러므로 바깥의 사고구조가 자본주의적, 신자유주의적 개인주의, 이기주의, 물질물량주의를 내포하고 있다고 할 때 우리는 나도 모르게 여기에 순치되어져 있다. 그러므로 마을 주민들은 이기적인 주민일 수 있다. 주체인 마을주민들이 이기적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그런데 이러한 주체는 항상 분열될 수 있는 소지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분열되어야 좋은 방향으로, 즉 좋은 주체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몸을 가진 마을 주민들은 결국 무엇이 궁극적으로 복된 것인가를 직감한다. 그것은 자연과 함께 하고, 비록 조금은 가난하더라도 자연을 즐기면서, 그 속에서 협동하고 자립하며 살아가는 것이 결국은 가능하고 그것이 좋은 삶의 지름길임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마을의 주민들은 두 가지의 생각을 다 가질 수 있다. 바울 선생이 말한 것처럼, 영의 길과 육의 길이다. 세상의 구조는 육의 길이요 율법의 길이라고 한다면, 그것을 거슬려서 평화와 생명이 넘치는 영의 길이 있음을 마을 사람들도 감지하고 있는 것이다. 마을목회는 이것을 중시해야 한다. 영의 길을 여는 담론과 이야기, 즉 언어를 개발하고, 찾고, 그것을 나누는 것이 중요하다.
이렇게 “분열된 주체”라는 것을 목회에서 잊어서는 안 된다. 인간의 내면은 영과 육의 전쟁터이다. 쉽사리 통일되고 하나가 된 주체가 되기 쉽지 않다는 것을 늘 생각해야 한다. 70년대 80년대 민중신학은 산업선교 노동자들의 헌신적인 투쟁을 보면서 이들이야말로 메시야이고, 통일된 주체, 진정한 영웅이요 선생이라고 생각했다. 이들로부터 배워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후의 민중교회에서는 노동자들이 분열된 주체라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노동자들, 민중들을 교회 안으로 모아놓으면 곧 세상을 바꿔놓을 혁명적 전선이 민중교회들에 의해서 형성되어질 수 있으리라고 쉽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중교회 목회자들이 발견한 것은 분열된 주체였다. 즉, 세상의 구조가 이미 깊숙이 들어와 있는 민중이었다. 민중도 우리처럼 거짓과 위선, 이기심, 분열, 배반, 이전투구 등등이 발견되었던 것이다. 예전처럼 단일화된, 혁명적, 영웅적인 민중을 찾기 힘들었다. 민중교회의 구조로는 이들의 진정한 주체성을 형성시키기는 어려웠다. 새로운 민중조직이 필요했다. 이것이 민노총이었다. 지금은 많이 바뀌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혁명적인 조직이었다.
그러나 마을목회는 좀 다르다. 주민들은 거의 붙박이로 마을에 살고 있고 다른 곳으로 떠나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요즘은 귀농 귀촌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어서 마을목회는 해 볼만 한 사업이다. 이들을 위해서 마을목회는 새로운 마음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언어(이야기와 담론)를 개발하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진리는 이야기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이러한 언어, 진리의 언어, 몸의 언어도 있을 수 있으니 그것을 찾아나서야 한다. 사실 진리는 우리와 가까운 곳에 이야기적-시적-픽션적인 구조와 사건적인 구조로 오고 깨달음과 거듭남을 가져온다.
2. 몸을 가진 주민들
인간의 몸은 자연적인 물질로 되어 있다. 거기에 생명이 불어넣어졌는데 이렇게 자연의 생명력(기, 루아흐, 조에)으로서 인간의 몸이 물질만이 아니라 유기체가 되며, 나아가서 언어를 습득하면서 완전한 인간 주체로 진입해 들어간다. 인간의 몸은 독특한 몸이다. 동물과 같은 몸이지만, 약간의 차이로 인해서 인간의 몸은 언어를 입는다(습득한다).
인간의 몸은 생명이 있는 곳이다. 생명이 잘 살기 위해서는 몸이 건강해야 한다. 몸이 궁극적인 대답이다. 루가복음 12:17-20에 부자가 많은 수확을 하여 더 큰 창고에 저장하면서, 이제 편하게 먹고 마시며 즐겁게 살자고 하니, 하나님이 오늘 너의 영혼을 데리고 가면 이 많은 곡식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는 말씀이 있듯이 결국 재물이나 명예나 지식이나 권력은 부차적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마을목회가 가져야 할 기본자세를 볼 수 있다. 마을목회는 주민들의 몸을 위한 목회가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는 몸의 언어, 몸에 양식이 되는 이야기와 담론을 계속적으로 발견하고 나누어야 하지 않을까?
육을 위한 삶은 무엇인가? 그것은 자본주의적인 약탈적-착취적 경제를 말한다. 이기적이고 맘몬주의적이다. 농촌에서 이것을 넘어서야 한다. 성서에 인간의 길이 영과 육의 길이 있다고 했다. 신약성서에는 인간의 삶을 구성하는 두 가지의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몸(소마)이고 다른 하나는 육(사르크스)이다. 로마서에서는 한 가지 중요한 요소가 있다고 했는데, 그것은 바로 영이다. 이 영은 진실 된 인간주체를 만들어 주는 생명의 힘, 진리의 영이요, 지혜의 영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몸을 놓고 두 가지의 힘이 싸운다는 것이 로마서의 취지이다. 인간의 몸은 그냥 몸이며, 중성의 물질이요 덩어리이다. 그러나 인간의 몸은 특별한 몸이기 때문에 영과 육의 언어와 기운에 민감하다. 그리고 영과 육의 기운 이전에 이미 몸은 인간으로서의 갈망, 소망, 삶에 대한 지향성을 가지고 태어난다. 육은 이 세상의 지배질서를 대변한다. 자본과 권력에 의해서 지배되는 지배질서를 말한다. 육의 결말은 죽음이다. 지금 우리가 목도하듯이 자연의 파괴와 약자들의 고난이 지속된다. 영은 이것을 극복하기 위한 신적인 힘이다. 인간은 신적인 힘에 응답할 수 있는 감수성을 타고 태어났다. 그러나 죽음의 힘인 육에 복종할 수 있는 성향이 더 강한 것은 분명한 것 같다.
3. 몸과 자연 (식물, 산, 땅)
농촌 마을은 자연으로 둘러 쌓여 있고, 자연 속에 위치한다. 방문을 열면 자연이 펼쳐진다. 나무와 밭작물, 논 작물, 과실수, 상추 등이 있는 논과 밭과 산이 펼쳐지고 집 앞 개울이 반겨준다. 농촌은 살기가 좋은 곳이다. 잘만 하면 도시보다도 훨씬 좋다. 몸과 자연은 서로 조화를 이루며 한 부류에 속한다. 몸도 자연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한국도 선진국 대열에 들어가는데 선진국의 특징 중 하나는 자연이 풍부하고 아름답다는 것이다. 자연이 지켜지면 몸도 지켜진다. 그러니 이제 자연 속에서 자연에 잘 어울려 사는 것이 앞선 나라의 모습이다. 태양광 등으로 에너지를 해결하고, 진흙 등으로 추위와 더위를 이기는 건축을 하여, 굳이 자본주의적인 삶의 양식이 아니더라도 풍부하고 잘 살 수 있다. 이렇게 사는 것이 훨씬 몸에 좋다는 것을 마을목회가 보여주기 바란다.
몸의 건강을 우선하는 삶이 소비와 사치를 하는 삶보다 훨씬 좋은 것이다. 삼성의 이건희도 일찍 죽었다. 마을에서 즐겁게 노래하며, 웃으며 자연 속에서, 그리고 이웃과 함께 즐겁게 먹고 일하며 사는 삶은 남부러울 것이 없을 것이다. 서울의 강남은 벼락부자를 상징하지만, 이 벼락부자의 이면에는 빈곤과 가식이 존재하며, 특히 피폐한 몸과 정신이 존재한다. 모두 부러워하지만 그 속에 어려움이 많다. 특히 몸이 피곤하며, 자연과도 거리가 멀어 자연의 치유의 힘을 받지 못한다. 그래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은 주말이나 휴일에 자연 속으로 여행을 떠나지만 대부분의 도시 사람들은 그럴 형편이 아니다. 도시 안에서 뱅뱅 돈다.
마을에서 몸과 마음의 풍부한 삶이 영위될 수 있도록 시설 등을 갖출 필요가 있다. 마을의 정자아래 쉼터, 북 카페, 다양한 문화행사, 책읽기와 이야기 발표하기, 노래하기, 마을놀이 등을 개발하여 몸과 마음이 풍요해 지면 더욱 좋을 것이다. 마을의 약점은 문화시설이 도시보다 상대적으로 빈곤하다는 것이다. 자연은 좋은데 문화면에서 부족한 것을 마을목회가 채워줘야 한다.
4. 녹색 경제, 공유경제 가능할 수 있는 농촌: 신문명의 출발지
협동조합, 태양광, 신재생에너지를 개발하거나 시작해야 한다. 생활을 담당할 물질적인 생산과 소비부분에 대한 통찰이 있어야 한다. 새로운 문명은 농촌에서. 자본주의적이지 않으면서 물질을 공유하는 공유적인 삶에서 시작된다. 공유경제가 가능한 곳이 마을이다. 이제 농촌의 모든 지붕위에 태양광발전 패널을 설치하고, 밭이나 공유지에서 에너지를 생산해서 삶에 필요한 자원을 자연파괴 없이 얻는 경제를 구축해야 한다.
민중신학이 추구하는 경제는 무엇일까? 오이쿠스(세상)에서 이코노미(경제)가 나왔다. 상생의 경제는 마을공동체의 주요 기반이다. 가족공동체도 상생경제에 기반 한다. 함께 먹고 사는 공동체이다. 마을공동체는 가족공동체의 확장이며, 이것은 공유경제이다. 함께 생산하여 공유하는 경제는 시골에서 가능하다. 한살림운동도 비슷하다. 생산협동조합도 같은 목표를 지향한다. 특히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으려고 하는 노력이 농촌에서 일어나야 한다. 신재생 에너지 특히 태양광에너지가 그것이다. 마을목회는 과학이나 기술을 배제하지 않고, 오히려 적극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것을 자본주의적으로 사용하지 않고 생명과 삶을 위해 적용한다.
민중신학은 확실히 자본주의적인 약탈경제를 비판하고 반대한다. 자본주의적인 삶은 두 가지를 약탈하기 때문이다. 첫째는 노동을 약탈하고, 다음은 자연을 약탈한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공유적인 경제가 필요하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공동체적 공산적인 삶을 생각해 봐야 한다. 이것은 영을 추구하는 삶이다. 육을 추구하면 자본주의적인 약탈적 경제로 간다. 마을목회는 영을 추구하는 목회요, 이것은 생명을 살리는 목회가 된다.
5. 이야기가 있는 마을
민중신학은 이야기 신학이다. 예를 들어, 민담 중에 김안국 이야기가 있다. 이야기로 문장의 원리를 깨닫게 되는 김안국 이야기인데 이야기는 이렇게 세상을 알게 해 주는 역할을 한다. 주체는 이야기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야기는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문화를 형성한다. 이야기가 나누어지는 세상이 마을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이 세상을 만들어 준다. 동시에 이야기는 이 세상을 넘어서는 상상력도 제공해 준다. 구전으로 내려오는 이야기는 마을을 만들어 주지만, 개중의 이야기는 마을이 어디로 나아가야 하는가? 진취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보여준다. 이야기는 구성적인 힘을 가진다. 이야기와 언어는 기존 자본주의적 지배질서를 강화시켜주기도, 그것을 넘어서게 하는 진리를 포함하는 이야기와 언어도 있다.
그런데 오늘날 마을목회를 위해서는 생명 중심의 새로운 이야기를 생각해야 한다. 이야기에 두 종류가 있다. 인간중심의 이야기와 생명 중심의 이야기이다. 지금까지의 민중신학은 인간중심의 이야기에 머물렀다. 민중의 사회전기는 인간중심의 이야기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생명 중심의 이야기로 넘어갈 필요가 있다. 마을의 생명망과 관련된 인간의 이야기를 생명 중심의 이야기라고 하겠다. 김용복 선생의 표현대로 조에그라피(zoegraphy)이다. 조에(zoe)는 만물의 생명을 가리킨다. 그러나 조에그라피라고 해서 인간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간과 만물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나아가서는 만물 자체를 중시한다.
6. 생명이 깃들어 있는 마을
결국 마을목회는 조에그라피(생명 이야기, zoegraphy)가 있는 생명이 넘치는 마을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생명이 깃들게 되는가? 생명은 어떻게 풍부하게 살아나는가? 마을에 생명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야 하는가를 생각해야 한다. 우선 조에그라피가 있기 위해서는 육의 이야기, 죽음의 이야기, 즉 자본주의적 맘몬주의적인 이야기들을 극복하고 우리 안에서부터 제거해 내야 한다. 자본주의적인 약탈과 착취 경제를 넘어서야 한다. 조에그라피는 몸과 모든 피조물들과의 연대 속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를 가리킨다. 인간들 사이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런 만물들과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면서 그 관계를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몸으로부터 출발하여, 만물로 나아가서 생명적인 농업과 생산, 분배, 그리고 축제로 나아간다. 이런 모든 과정에 관한 이야기가 조에그라피라 할 수 있다. 생명체들에 대한 이야기요, 생명살림의 이야기이다. 다른 생명과 함께 사는 경제를 형성하는 과정을 이야기하는 것을 말한다. 조에그라피를 통해서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 조에그라피가 인간의 실제 삶과 무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에그라피 속에는 문화적인 삶도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마을사람들은 마을카페, 마을놀이, 함께 공부하기 등으로 문화적인 삶을 누릴 수 있어야 한다. 조에그라피를 위해서는 마을의 공유재산을 넓혀야 한다. 공동의 땅, 산림, 숲, 밭, 우물, 하천을 함께 공유, 보호하고, 공동생산을 하여, 정당하게 나누는 공유공동체가 되는 것이 필요하다.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자동차, 토지, 트랙터, 농기구 등도 공유한다. 서로 양보하고 함께 발전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러한 공유경제(economy of the commons, sharing economy)가 가능하기 위해서 마을 사람들이 함께 공부하고, 집단적인 지혜를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생명은 모든 사람들이 모든 생명이 함께 참여하면서 자라난다. 신명이 참여 속에서 일어나듯이 생명도 그렇게 자라난다. 이러한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조에그라피라고 생각한다. 단순히 만물의 생명 이야기가 조에그라피가 아니다. 구체적인 삶을 세워나가는 이야기가 조에그라피가 아닌가?
7. 결론: 결국 주체의 문제
어떤 인간이 탄생하는가? 어떤 주체가 형성되는가? 이런 것이 마을목회의 성패를 결정할 것이다. 생명을 살리는 주체가 마을에서 형성되는가? 예를 들어, 쓰레기로 나오는 플라스틱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는가? 마을에 생명들이 살 수 있도록 함께 무슨 일을 벌일 수 있겠는가? 등이 주체들이 던져야 하는 질문인데, 이러한 생명을 살리는 주체를 만드는 것이 마을목회의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한다.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해결해 나가는 주체들이 생길 때 마을은 이제 도시들의 미래가 될 것이다. 새로운 문명의 중심지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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