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목회의 원조 고 민정웅목사

                 고 민정웅목사(1941-2004)

농촌목회 헌신 민정웅 목사 소천 

평생 농촌목회에 헌신했던 민정웅(독바위교회 원로) 목사가 지난 2004년 4월 22일 향년 68세로 소천하셨다. 민 목사는 한국기독교 농어촌목회자협의회장과 한국농선회 부설 한국농어촌교회목회연구소 소장으로 활동해 왔으며 얼마 전 위암 진단후 위암으로 투병해 왔다.

민 목사는 1968년 경기도 양주에서 독바위교회를 개척, 34년간 헌신해 왔으며 은퇴후  4년간은 중국 옌변 두레마을을 중심으로 한 농촌선교 활동을 하셨다. 이런 노력으로 고인은 예장통합 모범농촌교회상과 농어촌봉사대상, 장신대 총동문회 선교교육상을 받은 바 있다. 예장에서는 거의 첫번째 마을목회를 시작한 분으로 이후 임실 심상봉목사 아산의 임인수목사등 헌신자들이 나왔다.   

                                                          * 아브라함 농장 동지들 

손인웅 목사, 장례식에서 추모..김준곤 목사 등 200여명 참석

고 민정웅 목사는 고려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장로회신학대학원 재학중 뜻한 바 있어 김용기 장로가 하는 가나안농군학교에 입교한다. 그리고 거기서 생과 사명의 전환점을 맞는 다. 독바위교회로 이끈 윤동로청년을 만났고 유학을 포기하고 양주골 독바위로 와서 개척해 은퇴까지 한 것이다. 윤장로가 청빙한 민목사를 은퇴시 까지 모신 윤장로의 신앙이나 의리도 대단한 것이다. 

장례는 서울강북노회(노회장: 양회선 장로) 장으로 예식에서  손인웅 목사(덕수교회, 한목협회장)는 설교를 통해 “고인은 열악한 농민을 위해 헌신한 선각자”라고 평가하고 “목사님의 생애가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독바위교회 성도들과 유족과 믿음의 후배들의 마음속에 길이 길이 사실 것”이라고 추모했다.


고인이 회장을 맡아 마지막까지 열정을 쏟았던 한국농어촌목회자협의회 사무총장 김기중 목사는 조사를 통해 “작년 11월 강원도 농어촌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오면서 내년에는 신안군 증도에 있는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님이 개척했던 교회들을 방문하자고 그러셨는데 가보지도 못하시고 가신 것이 너무 안타깝습니다”라며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김 목사는 일찌기 농어촌목회의 신학적 이론을 정립하신 분으로  독바위교회 목회를 하시면서  농촌목회의 모범을 보여준 분이라고 평가한다.  장례식 축도는 1963년, 고인이 고려대 재학시절 직접 전도해서 양육한 c.c.c. 김준곤 목사가 하셨다. 김 목사는 “민 목사님은 김용기 장로와 김범일 장로님과 함께 농촌목회의 모델을 만드신 분”이라고 추모했다.  또 독바위교회 후임자 최성은 목사는 “독바위교회는 민 목사님의 비전과 열정을 이어갈 것”이라고 추모했다. 


고 민정웅 목사는 1941년 서울 출생으로 한양교회 출석하면서 장신대 재학중 어렴풋이 농촌에 대한 이상을 갖었다. 그러나 가나안농군학교를 졸업하면서 이 꿈이 구체화된 것이다. 거기서 만난 윤동로청년과 함께 윤동로의 고향 독바위에 교회를 세워 34년간  시무후 서울강북노회 공로목사가 된다. 그리고 연변사역 이후 소천하기 전까지는 아들이 목회하는 가는 붓교회 협동목사와 한국농어촌목회자협의회장을 맡아왔다.

유족으로는 부인 임수영 사모와 장남 경찬(가는붓교회 담임목사, 며느리 강덕임), 장녀 들래(사위 강호), 차남 경훈(며느리 우은진), 차녀 해야 등이 있다. 또 고인의 동생으로는 민산웅 극동방송 상임고문과 민대기 목사 등이 있다. 이날 장례식에는 김준곤 목사, 서울강북노회 목회자와 독바위교회 성도, 가는붓교회 등 200여명이 추모했다.

                생전의 기고문 “일과 노동” 

민정웅-독바위교회 담임목사

나는 인간 최초의 삶의 환경이었던 에덴동산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행복한 삶을 위한 모델환경으로서 주신 것으로 이해하였다. 그리고 범죄 이전,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기 이전의 최초의 인간 아담은 에덴 동산에서 마음껏 뛰놀며, 마음껏 먹고, 마음껏 마시면서 일하지 않아도 되었던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행복한 사람이란 일하지 않고도 살 수 있는 사람, 불행한 사람이란 일을 많이 하는 사람, 이런 식의 이해였다. 그러나 창 2:15에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살게 하신 아담에게 일거리를 맡기셔서 일을 하도록 하신 것을 보고 인간에 대한 행복관이 바뀌게 되었다. 즉 행복한 사람이란 일을 많이 할 수 있는 사람이고, 불행한 사람이란 일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군대에서는 일거리가 많은 자리를 나쁜 자리라고 하고 일거리가 적은 자리일수록 좋은 자리라고 한다. 이것은 불신앙과 일종의 퇴폐풍조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생각된다.

나는 장신대 신대원에서 농촌목회학과 목회실습과목에 나온 전도사님들에게 “목회과제가 없는 교회는 떠나고 목회과제가 많이 주어지는 교회를 찾아가서 일하라”고 가르친다. 일거리가 있는 것이 행복의 조건이요 일거리가 없는 것이 불행의 조건이라고 가르친다. 나는 에덴동산에서 일거리가 없어서 빈둥빈둥 놀기만 하다가 낮잠이나 자는 아담을 생각해 보았다.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고 생각되었다. 하나님 말씀중심으로 살며 에덴동산을 지키고 돌보며 필요한 일을 열심히 하다가 얼굴에 홍조를 띄고 웃는 얼굴로 평화의 단잠을 자고 있는 아담의 모습은 행복 그 자체라고 느꼈다.

독바위교회를 개척해서 오늘에 이른지 어언 28년! 한국대학생선교회 전주지역 대표간사의 자리, 정신여고 교목의 자리, 미국유학의 길, 이런 자리들로 가지 아니하고 일거리가 많지만 살기가 어려워 많은 사람들이 떠나는 농촌지대의 자리로 가 독바위교회를 개척하였다. 내가 처음 한 일은 독바위교회의 자립 기틀을 마련하는 것이었다. 농촌교회 교역자들이 떠나는 이유는 생계문제가 해결이 안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농촌교회를 떠나지 아니하고 목회에 성공하려면 생계문제를 해결해 놓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아브라함 농장을 차리고 이 농장에 첫째, 경제적 자립책, 둘째, 신앙의 생활화, 셋째, 회천면 복음화, 민족의 복음화라는 3대 목표를 세우고 벗어 젖히고 열심히 일하였다. 이 농장은 많은 빚을 진 채 9년 후에 문을 닫게 되었지만, 이 농장 덕분에 독바위교회는 6년만에 자립하게 되었고, 교회가 자립 정신의 기반 위에 설 수가 있었다. 농사에 농(農)자도 모르던 내가 아브라함 농장을 세우고, 지금도 그렇지만 農者天下之大本을 외치며 거름 져 나르고 논 매고 밭 갈며 씨 뿌리고 풋고추 따먹고 상추쌈 싸 먹으며 고구마 캐 먹고 무 깎아 먹으며 옥수수 쪄 먹고, 교회 따로 마을 따로가 아니라 교회가 곧 마을이고 마을이 곧 교회이며, 내 안에 주민이 있고 주민 안에 내가 있다고 생각하며 보낸 독바위교회 개척생활은 농촌목회자인 나의 보람이요 힘이었다.

이렇게 나의 농어촌 목회자들을 위한 명특강(名特講) 두 가지 ‘농촌목회자의 네 가지 명심사항’ 중에서 첫째, “인간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다”(마 4:4)와 ‘농촌목회 성공비결 일곱 가지’ 중에서 첫째, “땅을 1,000평 확보하라”가 모두 다 나의 독바위교회 개척시대에서 얻은 체험담이다. 아브라함 농장 이야기를 할 때 빼 놓을 수 없는 것은 산란계 500수를 키우면서 재미 본 이야기이다. 서울 출신이 농촌에 와서 사니까 일가친척과 친구들이 자주 다녀가게 되었다. 특히 서울에 있는 교회들의 중고등부(예를 들면 영락교회, 연동교회, 경신중고등학교 등)가 여름수련회를 아브라함 농장에서 했는데, 나는 프로그램 전체를 맡았고, 내 아내는 취사부를 맡았다. 그 때 아내가 만들어 준 닭볶음요리는 정말 일품이어서(둘이 먹다가 한 사람이 죽어도 모를 정도로) 지금도 나를 만나는 사람들 중에는 그 때 그 맛을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이다. 

그리고 그 수련회가 유명했던 것은, 그 때 얼마나 성령이 충만했으면 “그 수련회 때 받은 감동이 저를 목사가 되게 했습니다”라는 고백을 참석했던 여러 사람들에게서 들은 적이 있을 정도다. 오전에는 일조점호로 시작해 아브라함 농장을 세우게 된 이유와 사명을 비롯해서 성경강의와 분반공부를 하였다. 오후에는 농장실습과 도로보수, 마을일손돕기 등 서울학생들이 땀을 뻘뻘 흘려 가며 일할 수밖에 없도록 노동을 시켰고, 모두가 다 아브라함 농장의 무공해 농산물로 노동의 대가인 맛있는 식탁을 대하게 하였다. 일석점호로 일과를 마치게 하였는데 점호시 그 날에 암송해야 할 성경구절을 못 외우면 잠을 재우지 아니하였으니 그들은 잠을 자기 위해서라도 성경구절을 외웠다.

4박 5일의 짧은 수련회였지만 청소년들에게 꿈과 낮과 밤의 낭만과 공동체적 사귐과 노동이 주어져 그들의 신앙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 같다.  내가 교회론(敎會論)을 강의할 때면 언제나 사용하는 예화도 아브라함 농장 손님들에게 대접하기 위하여 닭을 잡으면서 발견한 진리이다.

                                                  독바위 교회 당회원 

* 양주 회천면 독바위 일대는 윤씨 집성촌인데 청년 윤동로 청년이 가나안농군학교에서 당시 한양교회에 다니며 장신대 재학중인 민정웅을 만난다. 1967년 농군학교 44기로 졸업하면서  윤장로는 고향에 교회를 세우기로 결심 하고 민목사와 상의한다. 이것이 독바위교회의 시작이다. 당시 이곳은 윤씨 집성촌으로 당회원들도 그렇고 윤씨 성을 가진 분들이 많다.

시무중 민목사는 건강문제로 2001년 조기 은퇴를 하고 당시 부목이었던 강철목사(현 의정부동부교회)가 강단을 보다가 독바위교회는 2003년 신성북교회 부목사였던 황철목사를 2대 목사로 청빙한다. 그러나 2005년 돌연 사임후 양주로 개척해 나간다. 이에 2006년 3대 목사로 이전에 민목사를 모시고 교육파트와 전임전도사를 지낸 청주 상당교회 출신 최성은목사를 청빙하여 위임한다.

그리고 최목사 부임후 지역은 변모하고 발전하여 비약적인 부흥을 이룬다. 지역 교회로써의 봉사와 해외선교,  윤동로 장로와 최목사가 노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기여하며 독바위교회의 위상을 크게 알린다. 양주시 장로교단 모교회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편 독바위교회 초창기에 도움을 준 곳으로는 민목사 모교회인 서울노회 한양교회기 부지와 건축을 도왔고 덕정감리교회 김덕화목사도 많은 도움을 준다.  

                                                      *장신대 졸업식에 윤동로 장로와 

         민정웅목사 강연 “나의 회심과 농촌목회”

본문:창세기2:7-15, 이사야11:6-9, 마태28:7-10  

1968년도, 필자가 28살 신학교 졸압반 때 전기도 들어오지 않고 버스도 않다니는 경기도 양주군 회천면 옥정리 독바위 마을에 필자가 농촌 출신도 아니고 서울에서 태어나서 서울서 자란 서울태생이 독바위교회를 개척해서 34년간 목회하는 동안 개척시대 ,자립시대, 환란시대,성장시대 ,선교시대를 경험하고 독바위교회를 퇴임하고 중국선교사로 나갈때도 중국 길림성 연길시 의란진 연화 동촌, 연길시내에서도 100리 떨어져있는 산촌 두매산골에 선교거점을 정하고 나아간 것을 알게된 분들이 저에게 알고 싶어하는 것중에

첫번째 질문이 “민목사님 왜 첫목회지를 농촌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까?” 하는것이 였고 두번째 질문은 “몇 년 견디다가 다른곳으로 목회지를 옮기지도 아니하고 10년도 아니고 34년동안이나 청춘과 모든 것을 다 바쳐서 평생목회를 하게되었느냐?” 는 것이 였습니다.

첫번째 질문에 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청춘의 방황기에 시달리다가 CCC의 김준곤 목사님에게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다음에 신학교도 가게 되었고 신학교 2학년때 1967년도에 CCC 하용조 목사의 권고를 따라 가나안 농군학교에 입교하여 제44기생 회장이 되었습니다. 당시에 농군학교 교장은 김용기장로님이셨고 지금은 4박5일과정이지만 당시는 보름과정이였고 새벽기도시간은 매일 2시간씩이나 되었습니다.

이 새벽기도시간은 저에게 정말 가물에 단비가 내리는 것 같았습니다. 심령이 기쁘고 성령께서 역사해서 그런지 생명샘이 제 배에서 흐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러면서 보름간을 지났는데 정말 참 은혜를 많이 받았습니다.

당시 저는 구원받은 생명을 어떻게 써야 되겠는가? 하는 질문을 가지고 삶의 문제를 놓고 고민하고 있을 때 였습니다. 그런데 김용기장로님을 통해서 “농춘이 잘되야 나라가 잘된다”는 절절한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농촌이 잘살게 되야 우리나라의 미래가 있다는 것이였습니다. 구원받은 생명을 어떻게 써야 되겠는가라는 질문을 가지고 고민하고 있던 저에게 그렇다면 당연히 나의 구원받은 생명을 한국농촌을 위해서 써야 되지 않겠는가하는 생각을 이때 하게되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독바위마을에서 온 가나안농촌학교 44기 동기생이였던 윤동노형제가 “민전도사님 신학교졸업 맞으시면은 다른데 가지마시고 우리마을에다가 교회를 세워주세요.”하고 간청하는 것이 였습니다. 그때 그간청을 받아 드렸고 신학교 졸업반때 졸업을 얼마남겨 놓치않고 있을 때 였는데 윤동노형제가 저의 기숙사에 찾아와 저의 약속을 확인하면서 졸업하시면 꼭 내려 오시라는 것이 였습니다. 졸업은 1969년 2월이였는데 졸업도 하기전에 1968년11월24일 서울한양교회 남녀전도회의 지원을 받아 독바위교회 창립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저의 신학교 친구의 소개로 1970년 10월31일 농촌교회목사님의 딸인 임수영씨와 결혼하였는데 제가 살던 서울 약수동 집에서 약혼식을 할때는 저의 결혼생활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분의 증인을 모셨습니다. 저의 신앙의 상징으로 CCC의 김준곤목사님을 저의 삶의 상징으로 김용기장로님을 모셨고 신앙과 삶의 만남이 곧 저의 결혼이 였습니다.

두번째 질문에대한 저의 답변은 이렇습니다. 농어촌교회 목회자들의 경향이 빠르면 6개월 길어야 3년정도하고 교회를 옮기는 것이였습니다. 농어촌교회가 자립하지 못하고 영세교회로 계속 머물게 되는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삼국지에 한나라와 초나라의 싸움에 승리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울 때 유방과 관우와 장비가 도원결의(挑園決意)로부터 시작되었든 것 처럼 1969년 봄 제1회 부흥회에 강사로 모신 독바위교회가 소속되어있는 회천면의 덕정감리교회 김덕화목사님(現在日本神戶東部敎會元老牧師)과 독바위교회의 윤동노형제와 제가 식사를 나누는 자리에서 저는 이곳에 뼈를 묻기로 다짐하고 목회를 시작한 것이 독바위 교회를 자립시키고 선교시대를 열어놓고 62세에 퇴임하기까지 34년이라는 세월이 훌쩍 지나가고 만 것이 였습니다. 자세한 이야기는 강의 시간에 하겠고 이 원고에는 강의 골자만 밝히겠습니다.  

1. 개척시대(1968-1973)
가) 아버님 유산으로 아브라함 농장을 세웠습니다. 아브라함 농장에 4가지 임무를 부여 했습니다.
①신앙의 생활화
②농촌교회의 경제적인 자립책
③농촌교회의 평신도 지도자 육성책
④회천면 복음화 민족의 복음화 – 여름성경학교를 준비하기 위한 교단 강습회를 초교파적으로 2박3일간 아브라함농장에서 합숙하면서 했습니다. 나) 신용협동조합을 세웠습니다. – 라이화이젠(1818-1888), 메리가별수녀

2. 자립시대(1973-1978)
평신도 지도자를 육성하기위하여 사랑방 성서학교를 세웠습니다. 사랑방성서학교 지도자 논(指道者論) 10가를 세웠습니다.
①먼저 중생해야
②소명이 있어야 한다(농촌교회 지도자로서)
③성장해야 한다(영적으로,육적으로)
④나는 지속적이고 생동적인 전도자이고 육성하는 교사이며 기독화 전쟁의 최전방 소대장이다.
⑤나는 누구도 지배하고 누구도 섬기는 자유인이고 그런 의미에서 한국이 기대하는 새로운 종합적 지도자다.
⑥나는 영혼따로 육체따로 마음따로 교회따로 분리시킬 수 없음을 자각하고 교회가 곧 그리스도의 몸이고 마을이 곧 그리스도의 몸임을 자각한다
⑦나는 우리나라 안에 있는 59524개 자연부락 가운데서 한 개의 자연부락에 복음을 주어서 파송된 하나님 나라의 일꾼이다.
⑧나는 내가 사랑으로 구원받았듯이 임무수행 방법은 사랑임을 지각한다.
⑨나는 지금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으로 내 안에서 살아계시고 나를 통해서 일하고 계시고 하나님과 나는 영원의 삶임을 믿는다.
⑩나는 보조지도자를 임무수행 일로부터 찾고 확보하고 동행하고 육성할 책임을 진다.

3. 환란시대(1978 – 1980)
창립10주년 기념으로 민정웅 작사 ,임현영 작곡의 독바위교회가를 만들어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양계파동,양돈파동등 축산파동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 농장이 무너졌습니다. 저는 일본 아시아 농촌지도자 양성전문학교(A.R.I)로 유학을 떠납니다.

4. 성장시대(1981 – 1988)
저는 A.R.I를 졸업후 다른교회나 도시로 도망가지 아니하고 독바위교회로 돌아와 재 도전합니다.
교회는 부흥하게 되고 278평의 평신도 훈련시설을 갖춘 새성전을 짓습니다.

5.선교시대(1988 – 2002)
가)창립20주년이 되는 1988년을 독바위교회 선교원년으로 선포하고 선교위원회를 발족시켜 국내 농어촌에 1개 교회를 개척하면 해외에도 1개 교회를 개척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선교위원회 내규를 정합니다.
나)1995년에 방글라데시에 평신도 지도자 윤연섭집사 한가정을 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다)자비량 농어촌 목회자협의회조직(총무:유기종목사 – 충남 부여군 적성면 신현리 신현장로교회)을 추진중에 있었음.

6.독바위교회 창립 33주년 기념(2002년11월24일)으로 민정웅 목사를 중국선교사로 파송하게 됩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읍시다. 마태복음 28:7-10을 다 찾아서 보시기 바랍니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 하시니라. 그럼 여기서 갈릴리는 어떤곳 입니까? 그곳은 당시 이스라엘의 북쪽 변두리 지역으로 가장 소외된 지역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곳에서 자라나셨고 이 소외된 지역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위하여 사역 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 그곳에서 다시 제자들을 기다리시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중심도시였습니다. 부와 명예가 있었고 권력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몰려 드는곳입니다. 무두가 그곳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아니하시고 갈릴리로 가셨고 갈릴리로 간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수 있었고 그리스도의 지상명령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노늘날 우릴들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이 시대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여러분의 갈릴리는 어디입니까?

도시화 산업화 시대에 소외된지역 젊은이들이 떠나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떠나는 지역 사회적 관심이 줄어들고 소외된 영혼들이 있는 그곳이 어디 입니까? 농어촌 지역이 아닙니까? 한국교회는 다시 예수님의 마음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가 원하는 곳이 아니라 예수님이 찾아 가셨던 그곳,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라” 하신 그곳으로 찾아가야 합니다. 힘들어도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 같아도 가야합니다.

온 인류를 구원하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하나님의 비젼을 품고 그 길을 따라 가야 합니다. 그리고 그 마음을, 그비젼을 우리의 농촌과 농민들에게 심어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농어촌을 복음화하여 기독교한국건설을 완성하고 이 나라를 세계 선교의 기지를 만듭시다.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이세상에 충만하게하여 사자들과 어린양이 함께 뛰노는 온 국민 이 더블어 함께 잘사는 공동체를 이루는 이나라를 만듭시다.(이사야11:6-9)

예수님이 가라하신 갈릴리로 찾아가는 사람들이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떠나시면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님을 의지해서 사역하는 것 입니다. 우리가 농촌교회를 살리기위해 많은 방법적인 것을 나누웠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예수님이 주신 성령이 필요합니다. 성령없이도 교회건물도 지을수 있고 어느정도 사람도 모을 수 있고 농장도 만들 수 있고, 신협도 만들 수 있고 여러가지 일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성령님의 도움없이 참다운교회,하나님의 교회를 만들 수 없습니다.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름 부우심 없는 교회에는 그리스도의 생명이 없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 입니다. 그 몸에 그리스도의 영이 없다면 그것은 몸은 있으되 생명은 없는 시체와 다름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수많은 교회가 죽어가는 것은 그안에 성령이 없기 때문입니다. 갈릴리로 찾아가는 사람들은 성령의 인도하심과 기름부으심을 받아 사역할 수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예루살렘을 버리고 갈릴리로 찾아간 목사님들을 소개 하겠습니다.
①강동진 목사(온누리교회부목사였음):충북 보은군 산외면 대원리 예수마을 공동체 개척
②박종훈 목사(분당지역교회에서 부목사 였음):전북 고창군 심원면 궁산리 궁산교회 개척
③양승주 목사: 경남 함양군 마천면 창원리 창원교회 (토종꿀 생산판매,솔잎효소 생산판매)
④전석호 목사: 여수시 화양면 나진리 274-1 여수도농교회 여수 한살림생활협동조합 조합장
⑤유기종 목사: 충남 부여군 적성면 신현리 신현장로교회, 자비량 농어촌목회자 협의회 총무

  
           민정웅목사에 대한 회고 (2008년 3월 27일 경기북부신문 기고)

김실, 이영휘집사

그날 오후 김가다는 소요산의 외진 숲길에 뻐쭈하게 불거져나온 벤치에 앉아 상념에 잠기어 있었다. 그때 아내에게서 걸려온 전화 속에서 아내의 목소리는 물먹은 듯 울먹이고 있었다. “민 목사님이 그예 돌아가셨대요.” 순간 김가다는 원고지를 달려가던 펜을 잠시 멈추어 놓고 파도처럼 밀려오는 슬픔을 어쩌지 못하고 가슴으로 울었다. “너무 빨리 돌아가셨구나. 이번 주일엔 중창단을 데리고 가서 목사님이 평소 좋아 부르시던 곡을 불러 드리려 했는데…”

김가다가 1974년 여름 어느날, 처음으로 만나뵈었던 민 목사님은 독바위 교회에서 농어촌 목회를 열정적으로 일구어가고 있던 때였다. 당시 목사님은 아내가 다니던 학교의 교목이기도 하셨지만 복음의 불모지인 농촌에서 사랑방 교실을 시작해서 점차로 농촌 복음화의 초석을 닦아놓고 계셨다. 언젠가 민 목사님이 김가다의 집에 찾아오셔서 넌지시 물으셨다.

“김 선생님은(그때는 집사가 아니었다) 꿈이 있어? 있다면 무엇일까, 허구한날 술에 젖어 사는 삶이 너무 아깝지 않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제자의 남편인데 유달리 안쓰러워서…” 그때 김가다는 멋쩍게 웃으며 목사님의 물음에 대답했었다. “대학시절엔 시나리오 작가가 되는 게 꿈이었었는데…그마저 꿈이 사그라진지 오래 되었구요…글쎄요. 꼭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소설을 써보고 싶긴 합니다만…”

“소설을? 그것 참 멋진 꿈이군. 쓴다면 어떤 소설을 쓰고 싶은데?” 저녁노을이 빨갛게 내리깔리고 있는 먼 하늘을 바라보며 김가다는 목사님에게 쓰고 싶은 소설의 내용을 대충 들려 드렸었다. 그때 민 목사님이 무릎을 탁 치면서 자신감에 넘쳐 말했었다. “훌륭한 소재이고 멋진 영감이야. 써, 쓰라구. 아까운 시간 낭비하지 말고 쓰기 시작해.”

목사님은 그렇게 흥분하시기까지 하며 김가다에게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런 어느날 김가다는 아들이 한밤중에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다가 마주오는 택시와 충돌하는 끔찍한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다행히 아들은 무릎 아래의 뼈가 몇조각 부서질만큼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김가다는 그때부터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가는 듯 혹독한 고난의 우겨싸임 속에서 아들의 대소변을 받아내며 조그만 쪽침대에 쪼그리고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소설을 쓰기 시작한 6개월만에 ‘불곰’ 1.2.3권을 출판하는 기염을 토해 내었다. 소설을 밤새워 다 읽어본 목사님이 김가다에게 또 새롭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기 시작하셨다.

“김 선생, 이 책은 반드시 4.5.6권이 더 쓰여져야해. 4.5.6권을 또 쓰지 않을텐가?” 소설쓰기가 정말 얼마나 영혼을 갉아먹는 일인가. 그때도 김가다는 목사님의 격려에 힘입어 다시 기도원에 들어가 기어이 4.5.6권을 써내고 말았다. 일년만에 여섯권의 장편소설을 써 내었던 것이다. 그러고도 여러권의 소설을 더 썼고 그것이 발단이 되어 KBS아침마당에도, 극동방송, CBS 새롭게 하소서에도 출연했을뿐 아니라 신문사나 잡지에도 끊임없이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그런 어느날 민 목사님은 다시 김가다에게 어렵게 입을 여셨다.

“김 선생, 그 소설 말인데 아무래도 10권짜리로 거듭 태어나야 할 것 같은데…” 그런 민 목사님이 어느날 갑자기 교회에 불어닥친 분쟁의 폭풍 속에 휘말리기 시작했고 결국 민 목사님은 34년동안 자신의 혼과 정열을 몽땅 쏟아 부었던 교회를 등뒤로 하고 배신의 독배를 홀로 마시면서 쓸쓸히 교회를 떠나고 말았다.

그리고 4년동안 중국 옌지에서 선교활동을 마치고 돌아오신지 얼마 안된 어느날 목사님이 또 아내의 가게에 들르셨다. 식사를 하시면서 목사님은 또 새롭게 필리핀 선교의 꿈을 이루고 싶다고 말씀하셨을 때 아내는 조심스럽게 만류했었다. 민 목사님은 그즈음 이미 건강이 몹시 나빠져 있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목사님, 아무래도 필리핀 선교는 훗날로 미루시는게…” 하지만 민 목사님은 결국 필리핀에서 쓰러지고 마셨다. 진단 결과 목사님은 위암 말기로 온몸에 암이 전이되어 수술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급거 귀국해서 병원에 입원하고 계시던 어느날 김가다는 목사님이 누워계시는 병실을 찾아가서 목사님의 손을 꼭 쥐고 말씀 드렸다.

“목사님, 드디어 소설이 10권짜리로 거듭 태어 났습니다. 며칠전 탈고 했어요.” 김가다의 말을 다 듣고난 민 목사님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시며 매우 만족해 하시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몰랐다. “수고했어. 하나님이 많이 기뻐하실거야, 수고했어. 정말 수고했어. 이제 정금처럼 다듬고 다듬어서 세상에 내어 놓아. 제목도 고치고 말이지.”

그런 며칠후 주일날 저녁에 눈코 뜰새 없이 바쁜 시간을 쪼개어 또 병실을 찾았을 때 민 목사님의 상태는 거의 절망적이었다. 아내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목사님의 손을 붙들었을 때 민 목사님이 혼신의 힘을 다해 아내의 손을 잡고 놓지 않으셨다. 그때 민 목사님이 아내의 귀에다 대고 속삭이듯 물으셨다.

“오늘 최재식 목사님의 설교 말씀 내용이 무엇이었어…” 그리고 며칠 뒤 졸사간에 민 목사님은 홀연히 천국을 입맞추고 만 것이었다. “결국…돌아가시고 말았구나…”김가다는 밀려오는 슬픔을 참지 못하고 벤치에 앉은 채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민 목사님, 영감은 하나님이 주셨지만 미련할만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던 덕분에 10권의 대하 장편소설이 세상에 태어났지요. 저는 단지 손끝을 빌려드린 것 밖에 없습니다. 그 소설은 목사님이 세상의 많은 슬픈 영혼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해 두고 가신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제 민 목사님은 어디를 둘러보아도 이 세상에 없다. 목사님의 해맑은 웃음을 다시는 볼수없게 된 이 거리가 너무도 허전하여 김가다 부부는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만 같다. 비록 민 목사님을 이 세상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지만 목사님의 격려에 힘입어 탄생된 소설이 음지에서 소망없이 웅크리고 사는 음울한 영혼들에게 얼마나 많은 힘이 되고 위로가 될것인가. 문상을 다녀오는 길은 봄비로 촉촉이 젖어있었다. 문득 김가다는 책의 맨 처음장에 올라가야 할 한 줄의 문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이 책을 민정웅 목사님의 영전에 바칩니다. 김실, 이영휘.”

위대한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는 그 나무의 뿌리가 얼마나 튼튼하여 바람에 흔들리지 않고 그 숲의 우거짐이 어떠하고 열매가 어떠한가에 달려있다. 먼 훗날에 목사님을 그렇게 뼈가 마르도록 힘들게 했던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 가서 무슨 말을 할까. 김가다는 자신이 그러한 무리 속에 두남두고 끼어들어 목사님에게 돌을 던지며 참훼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너무도 감사하다고 가슴을 쓸어 내렸다.

“목사님, 생전에 우리 부부를 그토록 사랑해 주셔서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계속 좋은 글을 써야겠지요.” 봄비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김가다와 목사님이 살고 계셨던 아파트 광장을 소리없이 적시고 있었다. 운전대를 잡은 아내가 아직도 떨리는 목소리로 조그맣게 말했다.

“은혜 아빠. 목사님이 그토록 좋아하셨던 해물샤브샤브 집 앞을 이젠 마음놓고 지나칠 수 없을 것만 같아요. 그 해물샤브샤브를 너무도 맛있게 잡수시던 모습이 자꾸만 떠올려지면 가슴이 너무 아파서 어떡해 아빠…좀 더 자주 사드렸어야 했는데…좀 더 잘 해드려야 했었는데…지난 겨울에 내복이라도 한 벌 사 입혔어야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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