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관 노상추의 67년 일기

                조선시대 무관 일기 나와

한 사람이 18세부터 84세까지 67년 동안 매일 쓴 조선시대 최장(最長) 일기가 우리말로 완역됐다. 국사편찬위원회는 최근 12권 분량의 ‘국역 노상추일기’를 완간했다. 9권까지는 현재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r )에서 원문과 번역문을 열람할 수 있다. ​

구미성리학역사관이 노상추 일기’ 도록을 발간했다. 노상추는 선산 독동 출신으로 정조 때 주로 활동한 무관인데, 80세에 무관으로서 최고위인 종2품 직책을 받은 인물이다. 양반가문이라고 해도 관직에 나가는 과거를 보고 초시 복시를 거쳐 최고인 장원에 이르지 못하면 인정받지 못했다, 특히 문반에 이르지 못하는 이들이 지원하는 것이 무반인데 문반출신만이 3정승 6판서 자리로 가서 역사사서가 될 수 있기에 서열로 보아 2등 양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당재 선비 채제공과도 서신을 주고 받은 바 있는 데 정조가 그의 조부를 기억하고 파격적을 삭주목사로 발령을 내린 바 있는 데 이 때 필요한 자문을 구한 내용이다.

   
 

노상추가 일기를 쓰게 된 계기
노상추가 일기를 쓰기 시작한 나이는 17세였다. 이때부터 시작한 일기는 세상을 뜨는 84세까지 지속되었다. 노상추는 눈을 감기 이틀 전까지 일기를 썼으니 일기에 바친 열정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 양만 51책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이며, 국사편찬위원회에서 탈초脫草해 총4책(약 2,600쪽)으로 발간하였다. 아버지 노철도 19세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해 47세까지 썼다. 안강 노씨 집안의 일기 쓰기 전통은 저 멀리 6대조 노경필의 아우인 노경임盧京任까지 올라간다. 노경임은 1596년(선조 29)인 27세부터 일기를 썼다.

이 시점에서 노상추 집안에서 일기쓰기의 의미란 오늘날 우리가 생각하는 일기 곧 개인의 사생활을 비밀스럽게 담아내는 기록이라는 상식이 깨져버린다. 노상추의 아버지가 일기쓰기를 멈추면서 집안 일에 멀어졌듯이 일기쓰기란 한 집을 대표해 집안의 대소사를 기록으로 남기고 기억하는 행위였다. 그러므로 노상추가 아버지의 명을 받아 일기를 시작했다는 점은 아버지에게서 집안의 대들보 역할을 물려받았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노상추가 일기 쓰기에 보여준 열정은 남달랐다.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일과나 사건·사고를 기록하였다. 일이 없을 때에는 날짜와 날씨만이라도 기록하였다. 그렇다고 하여 노상추가 일기를 날마다 당일에 쓴 것 같지는 않다. 노상추는 곧잘 “이상 3일 동안의 일은 2일과 4일 사이의 일이니 마땅히 3일 아래에 있어야 한다.”(1771.9.4), “오늘 일은 18일 아래에 있어야 한다.”(1773.10.17)는 식으로 일기를 정리한 기록들을 남겨 놓았다. 이 점은 노상추가 일기를 며칠에 한 번 또는 일주일이나 10일에 한 번씩 어느 시점에서 한꺼번에 정리했음을 뜻한다.

실제로 노상추는 “손님 접대에 바빠 일기를 날마다 다 기록할 수 없어 추후에 기록하였다. 이 때문에 이 날의 일은 상세히 기록할 수 없다.”고 적기도 하였다.(1812.8.24) 매일 일기를 기록하지 않다보니 날짜에 해당하는 간지干支가 잘못되는 날도 있었다. 그러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 일기의 간지를 바로 잡았다. 이것이 노상추가 68년간 일기쓰기를 지속할 수 있던 비결이기도 하다. 만약 날마다 당일에 일기를 쓰지 못하는 본인을 자책하고 마음에 담아두었다면 그 부담감 때문에 중도에 일기를 포기했을 수도 있다.

​사학사(史學史)의 평가

18세기 후반은 무신에 대한 새로운 기록들이 출현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으로 병자호란의 명장이자 북벌의 상징인 임경업의 일대기를 정리한 『임충민공실기』(1791), 최초의 무신 전기집인 『해동명장전』(1794), 충무공 이순신에 관한 기록과 자료를 망라한 『이충무공전서』(1795)를 꼽을 수 있다.

이보다 더 주목할 사항은 그다지 잘 알려지지 않은 무신들의 기록도 등장한다는 점이다. 정조대에 활약한 무신 송규빈이 지은 군사평론집 『풍천유향風泉遺響』, 이정집(1741?~1782?)과 아들 이적(?~1809)이 2대에 걸쳐 완성한 『무신수지武臣須知』는 무신의 의식 성장과 정체성을 보여준다는 측면에서 주목할 만한 책이다.

노상추의 〈일기〉역시 개인 일기라는 인식을 넘어 조선후기 무신의 자의식 고양 및 인식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바라볼 때 주목해야 할 자료라고 판단된다. 더욱이 이 일기는 노상추 개인의 일상뿐만 아니라 선산을 비롯한 영남지방 사람들의 생활상, 한양 및 삭주, 홍주의 풍물과 한양인·지역민들의 생활상이 다채롭고도 세밀하게 펼쳐지고 있어 사회사 자료의 보고(寶庫)다. 정치적으로는 한 개인이 영남 남인의 정체성을 어떻게 일상에서 발현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그동안 자료의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던 수많은 사람들이 처한 현실을 구체적으로 형상화할 수 있고, 문치주의(文治主義) 사회에서 ‘양반’의 아웃사이더이던 ‘무관’의 시각으로 조선후기 사회를 새롭게 접근할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하고 있다. 그러므로 노상추의 〈일기〉는 조선후기 사회사 사료의 외연을 넓힘과 동시에 조선후기 사회상을 풍부하게 조명하기 위해 반드시 읽어야할 흥미로우면서도 새로운 자료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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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관료 인사에서) 영남 사람은 한 명 말고는 (수령 이상 자리에) 거론된 사람이 없다. 내가 변방 장수에 임명된 것은 바로 쫓겨나는 것이다. 세력 없는 사람이 예사롭게 겪는 일이고 이 또한 관직이니, 어찌 죽음보다는 낫지 않겠는가.”(1787년 6월 22일)

서울의 명문가인 경화세족이 사실상 관직을 독점하던 18세기 말, 조선 관가에서 영남 출신은 찬밥 신세였다. 더구나 권력에서 밀려난 남인인 데다 문관이 아닌 무관이라면 주류 양반에게 차별당하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었다. 조선 후기 무관 노상추(1746~1829)의 일기에선 이 같은 비주류의 설움이 절절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렇게 노상추는 비주류의 한계를 일찍 깨닫고 집안의 경제를 이끌기 위해 23세 때 무과로 진로를 변경했으나, ‘취준생’ 생활 12년을 겪고 난 35세 때에야 간신히 급제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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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에도 4년 동안 관직을 얻지 못했고 말단 무관직을 전전한 뒤 47세가 돼서야 활쏘기 솜씨가 정조 임금의 눈에 들어 정3품 선전관에 오를 수 있었다. 일기에는 관직을 얻기까지의 신산한 고생이 적혀 있다. 상속 재산 500냥을 몽땅 과거시험 비용으로 쓴 뒤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1782년 5월 7일)고 한탄하기도 한다. 그리고 양반 흡연자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담배를 피웠다. “궐내 금연령이 있는데도 군졸에게만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고 각 청에 입직하는 관원들은 담배 피우기를 예사로 하고 있다”(1799년 6월 2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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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양반 사회에서 경조사 참여가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려주는 기록도 있다. 노상추는 부친상 때 조문하지 않은 최충국이란 사람의 집을 일부러 들르지 않았는데, 앙심을 품은 최충국은 하인을 시켜 노상추의 홍패(과거합격증)를 탈취했다가 항의를 받고 돌려주는 일도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전통에 의거하여 지금도 개인일기는 법정에서도 중요한 증거로 채택이 된다. 예을 들어 월급봉투도 그렇고 업무일지와 같이 누가 결제를 하거나 확인하지 않은 글이라도 일정하게 쓴 글은 개인사를 넘어 법적으로도 중요한 문서가 될 수도 있다. 

이외에도 혜경궁 홍씨의 일기가 있는 데 국사기록이 아닌 개인기록이지만 역사자료에 아주 중요한 위상을 갖는 문서다. 이를 토대로 정사(왕조 실록)가 유일한 자료의 실체에 접근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자료이다. 또 비망록이나 사대부간에 주고받은 서신들은 아주 중요한 것으로 당시 사회상과 나라의 근본이나 선비들의 정신세계를 볼 수 있는 중요한 인문학적 자료다.   

   
 

다음은 ‘국역 노상추일기’에서 발췌한 내용.

【1770년 윤5월 10일 일기 번역문】
오시(오전 11시~오후 1시)에 기동(耆洞) 하인이 와서 부고를 바쳤는데, 외종조 고모인 여홍호(呂弘㦿) 정랑(正郞)의 부인께서 어제 오시에 돌림병으로 돌아가셨다. 초상이 돌림병이 돌고 있는 시기에 났기 때문에 형수씨께서 초종(初終)에 맞추어 갈 수 없었다. 나도 우연히 목에 부스럼 병을 앓고 있어서 목을 돌리기 어렵기 때문에 의관을 갖추고 외가에 가서 조문할 수 없으니 슬프고 참담하다.
【1776년 3월 24일 일기 번역문】
늙은 여종 분진(分眞)이 올해 나이 78세인데 돌림병으로 결국 오늘 새벽에 죽었다. 슬프고 가련한 것은 그가 증조부 때부터 일을 하여서 3대에 걸쳐 대대로 섬겼는데 죽은 형에게 젖을 먹여가며 돌보아주어 마침내 성장하게 해서 또다시 정엽(珽燁) 세대에 이르게 했다. 상전집의 성쇠를 한 몸으로 다섯 세대에 걸쳐서 지켜보았으니 공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장수의 복이 이 여종의 처지로 보면 도리어 불행이 되는 것이 많았다. 죽은 형이 살아있었을 때 죽었다면 여종이지만 보답 받는 것이 반드시 컸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임진년의 큰 변고를 겪지 않고 죽었어도 영예로웠을 것이다. 그런데 작년 겨울에 이르러 그 막내 딸 이례(已禮)의 세모자가 일시에 홍역으로 죽었고, 올 2월에 그 아들 삼재(三才)도 돌림병을 앓다가 죽었고, 이번에 그녀가 이병으로 죽었기에 그 불행을 말로 거론할 필요도 없으니 불쌍하다.
【1780년 8월 2일 일기 번역문】
상좌원(上佐院)에서 일찍 출발하여 큰길에 나서니 어떤 사람이 목화밭에 엎드려 있다가 갑자기 뛰어나와 함부로 홍패(紅牌)를 빼앗아 달아났다. 그래서 이유를 물으니 기동(耆洞)의 부장(部將) 최충국(崔忠國)이 그의 아들 셋을 시켜 남자 종 하나를 데리고 요로(要路)에서 빼앗게 한 것이었다. 그는 내가 선생을 만나지 않고 가자 쫓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저 남자종이 먼저 달아나므로 할 수 없이 나는 화판(花板)과 창졸(唱卒)을 실은 말을 내버려두고 혼자 말을 타고 바로 최충국에게 달려갔다. 최충국은 일찍이 서로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부친상 중에 있을 때에 그가 편지로 위문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방문할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허물을 스스로 헤아리지 않고 내가 새 급제자로서 마을을 지나가면서 자신을 무시해 방문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어 이렇게 망측한 행동을 한 것이다. 내가 이에 면전에서 꾸짖어 말하기를, “다른 사람의 부친상에 조문도 하지 않고서는 자신의 지위를 무시했다고 원망하니 크게 체모를 잃은 것 입니다. 주인이 처신하는 태도는 나이가 들었는데도 밝아지지를 않습니다.”고 하니, 최충국은 사과하고 아무 말이 없었다. 내가 또 말하기를, “홍패는 임금께서 내려주신 것이니 빼앗거나 주는 것을 그대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입니까?”하니, 그가 이에 자기 죄를 한없이 인정하고 홍패를 되돌려 주었다.
【1782년 5월 7일 일기 번역문】
당초에 가산을 받아 각자 살 때에 상속분으로 얻은 것이 논 1섬 9두락, 밭 90여 두락으로 가격으로 치면 500여 냥에 불과하였다. 10년 동안 과거시험을 보러 가기 위해 모두 팔아버리고, 화림(華林)으로 옮긴 뒤에 산 것 역시 과거시험으로 진 빚 때문에 팔았으니 나의 500 여 냥은 모두 과거 보는 데 사용하였다. 그러니 앞으로 굶어 죽을 운수가 아니겠는가. 공명(功名)이란 것이 정말 우습다.
【1787년 6월 22일 일기 번역문】
이날 도목정사(都目政事)를 하였는데, 친히 납시지 않으셨다. 정달신(鄭達新) 척형 보(甫)는 이성(利城) 수령이 되었고, 그 밖의 영남 사람은 거론된 사람이 없다. 나는 갑산진관(甲山鎭管)의 진동 변장(鎭東 邊將)이 되었는데, 병비(兵批)에서도 달리 거론된 사람이 없다. 내가 변장에 임명된 것은 바로 쫓겨나는 것이다. 세력 없는 사람이 예사롭게 겪는 일이고 이 또한 관직이니, 어찌 죽음보다는 낫지 않겠는가. 진실로 분하고 통탄스럽지만, 병조에서 나를 쫓아낸 것은 형편상 그러한 것이다. 신하된 자가 충성을 다함에 어찌 관직의 우열이 있겠는가. 스스로 마음을 너그럽게 가질 뿐이다.
【1792년 11월 3일 일기 번역문】
미시(오후 1~3시)에 임금의 명이 특별히 내려왔다. 전교하시기를, “어제 관궁으로 시행한 중일시사(中日試射)의 시기(試記)에서 오위장 노상추의 이름을 보고서 예전에 병조 판서를 역임한 이에게 물으니 병마절도사 아무개의 손자라고 하였다. 그 조부의 사적(事蹟)은 비록 알고 있었지만 그 손자가 누구인지는 몰랐다. 그러므로 매번 찾아서 쓰려고 해도 하지 못했는데, 그의 이름이 오늘 시기에 들어 있었으니 그에게 운이 있다고 할 만하다. 어제 저녁에 그를 불러 물었더니, 그의 조부는 과연 수문장 시절에 품계를 뛰어넘어 관직에 발탁되어 부천(副薦)으로서 병마절도사가 된 사람이었다. 더구나 그 조부가 수문장에 제수된 때가 지난 임자년(1732) 동짓달이었는데, 그의 이름을 알게 된 때가 올해 임자년(1792) 동짓달이니 이 또한 기이한 일이다. 하지만 그의 인품이나 범절이 어떠한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니 병조 판서로 하여금 그를 불러서 보게 한 후에 과연 당상 선전관을 감당할 수 있다면 선전관 가설(加設)로 의망하여 들이라.”고 분부하셨다. 저물녘에 다시 하교하시니, 밤에 구전으로 차출되었다. 3경(오후 11시~오전 1시)에 당상 선전관으로 의망하여 들이자 낙점해 주시니 감읍하였다. 이야말로 천지처럼 망극한 임금의 은혜를 입은 것이다. 이날 밤의 순찰은 초경(오후 7~9시)에 했으며, 군호는 ‘백설白雪’ 두 자로 내리셨다.
【1799년 2월 4일 일기 번역문】
갑산(甲山) 사람 김철몽(金哲夢)이 와서 알현하면서 함경도의 소식을 들었다. 그는 1월 초에 함흥(咸興)을 지났는데 돌림병이 이미 그곳에 도달해서 홍원(洪原) 땅의 사망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고 한다. 지금 8도 사람이 모두 고통을 받고 있다. 황해도, 평안도, 경기에서는 병이 잦아들고 있지만, 경상도, 전라도, 강원도, 함경도에서는 지금 한창 극성을 부리고 있다고 한다. 고향의 소식을 듣지 못하니 너무 답답하다.
【1808년 5월 18일 일기 번역문】
들으니 양서(兩西)에 개 돌림병이 크게 일어나서 마을에서 개 짓는 소리가 드물다고 한다. 지금 들으니 도성 내에도 그렇다고 하는데, 개가 죽으면 도랑에 버려서 썩은 시체가 무수히 쌓였다. 시장에서도 개고기를 팔지 않는데 사서 먹는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화성(華城)을 지나 온 사람에게 들으니 마을 놈 7, 8명이 개를 도살하여 삶아 먹었는데 하룻밤 사이에 모두 죽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괴이한 일이다.

   
 

 참고 자료: 조선 시대(朝鮮時代)의  과거 제도(科擧制度)

조선시대에는 관리를 뽑기 위해 과거 제도를 시행했다. 조선은  성리학을 이념으로 하여, 고려말의 소수의 혁명파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건국되었다. 이들은 자신의 이상대로 모든 관리를 과거를 거쳐 선발하고자 하였다. 왕조 전 기간에 걸쳐 정기적으로 과거가 실시되었다. 과거도 고려의 제도를 따라, 문과·무과·잡과로 크게 구분하였지만,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은 여전하여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지적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컸다. 따라서 천인(賤人)은 물론, 같은 양반이라도  서얼  출신은 응시할 수 없도록 하였으며, 신분상으로는 일반 서민인 양인(良人)과 양반만이 응시할 수 있었으나, 양인이 급제한 사례는 적어 대개 순수한 양반들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이와 반면에 무과는 신분상의 제약을 훨씬 완화하여 무관의 자손을 비롯하여 향리(鄕吏)나 일반 서민으로서 무예(武藝)에 재능이 있는 자에게는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잡과는 직업적인 기술관의 등용시험이었으므로 서울과 지방 관청에서 양성되는 생도(生徒)들이 응시하였다. 양반들은 잡과에 응하지 않았고 일반 서민이나 천인은 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잡과는 일정한 신분계급에 의한 세습·독점됨으로써 이들에 의해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층이 형성되었다. 초기에는 모든 합격자에게 백패라는 증명서를 지급했으나, 후에 소과와 대과 합격자를 구별키 위해 대과 합격자에게는  홍패를 소과 합격자에게는 백패를 지급하였다.

과거에는 처음으로 벼슬을 하려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미 관직에 있는 사람에게 승진의 기회를 주던 제도도 있었으나, 식년시·증광시 등의 소과에는 통덕랑(通德郞:정5품) 이하로서 과거를 거치지 않은 관원은 응시할 수 있었고, 문과나 무과에는 통훈대부(通訓大夫:정3품 堂下) 이하의 관원이 응시할 수 있었으며, 이에 합격되면 각각 그 등급에 따라 원래의 관계(官階)보다 몇 관계씩 올려 주었다. 예를 들면  경국대전에는 관직에 있는 사람으로서 대과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갑과(甲科) 제1인은 4계(階), 갑과 제2·3인은 3계, 을과(乙科)는 2계, 병과(丙科)는 1계씩 각각 더하여 준다는 규정이 있었다. 그리고 10년에 한 번씩 문·무 당하관(堂下官)을 위하여 설치된 중시(重試)라는 과거도 있었다

과거에 합격하면 합격자를 위한 방방(放榜) 의식이 근정전 뜰에서 베풀어지며 왕이 홍패와 어사화(御賜花)를 제일급제자 장원(狀元)을 위시하여 순위대로 하사했다. 그리고 급제자의 부모를 위한 잔치를 관에서 베풀고, 급제자들은 3일 동안 거리를 누비며 축제를 벌였다. 장원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을 용두회(龍頭會)라 하여 관직을 맡고 떠날 때 보내는 전송연을 했다.

과거를 위한 교육
조선시대에도 관료로서 출세할 수 있는 정상적인 방법은 우선 과거에 합격하는 데 있었으므로 자연히 교육도 과거의 준비에 중점을 두게 되었다. 또한 과거의 고시과목이자 건국 초기부터 정교(政敎)의 근본이념으로 채택된 ‘유학’은 입신양명(立身揚名)의 유일한 도구로 양반계급에 의해 감독되었다. 따라서 교육도 대부분 과거의 응시자격을 구비하고 있는 양반의 자제에 한정되어 있었다. 이들은 대개 어릴 때 서당에서 유학의 초보적인 지식을 배우고 15·16세 이전에 서울은 사학(四學), 지방은 향교(鄕校)에 들어가서 공부하여 몇 년 뒤에 과거의 소과(小科)에 응시하여 합격하면 성균관에 입학하는 자격을 얻었다.

서울에 있는 성균관과 사학은 중앙정부에 직속되고 향교는 각 주현(州縣)에서 관할하던 관학(官學)으로서, 상호간에 상하의 연락 계통이 서 있는 것은 아니었고, 각각 독립된 교육기관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즉 성균관의 입학 자격은  생원·진사(進士)였지만 생원·진사는 사학이나 향교를 거치지 않아도 될 수 있었으며, 또 성균관 유생에게는 문과 대과에 응시하는 자격과 기타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으나 그렇다고 성균관을 거쳐야만 문과의 응시 자격이 부여되었던 것은 아니고 그밖의 사람들도 얼마든지 시험은 치를 수 있었다. 이들 관학 가운데서 성균관만은 말기까지 줄곧 최고학부로서의 시설과 권위를 유지하였으나 사학과 향교는 후세에 점점 쇠퇴하여서 유명무실하게 되고 그 대신  사숙(私塾)으로서  서당  이외에  서원이 기세를 떨치게 되었다.

실시주기에 따른 구분
정기 시험 /식년시(式年試) – 3년마다 한 번씩 정기적으로 시행
부정기 시험/
• 증광시(增廣試)
• 별시(別試)
• 정시(庭試)
• 알성시(謁聖試)
• 춘당대시(春塘臺 試)
• 종친과(宗親科) – 특수한 사람에 국한해서 치러진 시험
• 충량과(忠良科)
• 기로과(耆老科)
• 외방별과(外方別科) – 지방별로 보던 시험
• 도과(道科)
• 발영시(拔英試)
• 등준시(登俊試)
• 전문시(箋文試)
• 진현시(進賢試)
• 현량과(賢良科)
• 탁영시(擢英試)
증광시(增廣試)는 조선시대 나라에 경사가 있을 경우에 보이던 임시 과거제도이다. 태종 1년(1401)에 실시되었다. 본래는 왕의 등극을 축하하는 의미로 즉위년이나 그 이듬해에 실시하였으나, 선조 때부터는 그 범위가 확대되어 원자 탄생·왕비 책례 때도 실시되었다. 그 절차는 식년시와 같아 생진초시·생진복시·문과초시·문과복시·문과전시의 5단계로 나뉘며 시험과목도 같았다.

직렬에 따른 구분
조선 시대의 과거는 크게 문과, 무과, 잡과로 나뉘었다. 문과와 무과는 정기적인 식년시(式年試) 이외에도 여러 가지의 과거를 시행하여 많은 인재를 등용하였으나, 잡과는 수요(需要)인원이 많지 않은 까닭에 과거로는 식년시 이외에 증광시(增廣試)가 있었을 뿐이었다. 이 밖에 초기에는 승려(僧侶)의 자격을 주기 위하여 국가의 공인 아래 선(禪)·교(敎) 양종에서 독자적으로 실시하던 승과(僧科)라는 시험제도가 있기도 하였다.

문과/조선시대의 문과시험은 요직으로 가는 관문이었다. 문(文)을 숭상하는 경향이 있어 보통 과거라 하면 문과를 지적할 정도로 그 비중이 컸다. 그러므로 자연히 문과에 응시할 수 있는 유자격자를 신분상으로 제한하여 일반서민과 천인(賤人)은 물론, 같은 양반이라도 서얼(庶孼) 출신은 응시할 수 없도록 함으로써 이른바 순수한 양반들만이 합격의 영광을 누리게 되었다.

문과는 크게 소과와 대과로 나뉘었다. 소과는 다시 초시(初試)·복시(覆試)의 2단계, 대과는 다시 초시·복시·전시(殿試)의 3단계로 나뉘어 있어서, 모두 5단계를 차례로 거쳐야만 문과급제가 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러나 이 5단계를 거치지 않고도 대과의 전시와 동등한 자격을 받던 과거에는 알성문과(謁聖文科) 및 성균관 유생(儒生)이 보던 반제(泮製)·절일제(節日製)·황감제(黃柑製)·관학유생응제(館學儒生應製) 등이 있었다. 시험의 실시는 예조에서 담당하였다.

소과(小科)/ 또는 사마시(司馬試)라고도 한다. 고려시대 국자감시(國子監試)와 승보시(陞補試)를 계승한 것으로, 진사시는 전자를, 생원시는 후자를 계승하여 성립된 제도로서 초시(初試), 복시(覆試)의 2단계로 나뉘었다. 합격자는 성균관에 입학할 수 있었으며, 하급 관리가 되기도 하였다. 생원과(生員科)는 고려시대에도 있었다. 시험은 중국의 경적(經籍)으로 치렀으며, 여기에 합격한 자를 ‘생원’이라 했다. 생원과는 대체로 과거의 예비고사와 같은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생원은 선비로서의 사회적 지위를 공인받았으며, 진사와 더불어 하급관료에 취임할 수도 있다. 하지만,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을 부여하는 것을 본래의 목적으로 실시한 과거이다.

진사과/ 고려 때 명경시(明經試)와 함께 가장 중요시 되었으며 등용되는 범위 역시 가장 넓었다. 조선시대에는 소과초시(小科初試)의 한 분과로서 서울과 지방에서 실시하였다. 시험과목은 시(詩)·부(賦)·표(表)·전(箋)·책문(策問) 등이다. 여기에 합격한 자는 ‘진사’라 하여 초급 문관에 임명될 수 있었으며, 동시에 계속하여 중급 관리 등용에 응시할 수 있는 자격과 성균관에 입학할 자격이 주어졌다.

대과 (문과)/초시(初試)는 조선시대 복시에 응시할 사람을 선발하는 과거의 제1차 시험이다. 일명 ‘향시’(鄕試). 초시는 이들 각 과의 최초의 시험으로서, 복시·전시를 치기 전해의 가을에 각 지방에서 실시하였는데, 식년시 외에 증광시·알성시 등에도 초시가 있었다. 

복시(複試)/ 초시 합격자 중에서 33명을 선발하였으며, 이들은 전시에 응시할 수 있었다. 전시(殿試)는 임금이 친림(親臨)하여 보던 시험으로 과거의 최종 시험이었다. 고려 공민왕  때 처음으로 원나라의 향시(鄕試)·회시(會試)·전시(殿試)의 3단계 고시제도를 채용하여 시행하였던 것인데, 그 내용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이것이 조선시대에 계승되어 완전히 제도화되었다. 법전(法典)에 규정된 전시의 종류를 보면, 식년문과전시(式年文科殿試)·증광문과전시(增廣文科殿試)·별시문과전시(別試文科殿試)·정시문과전시(庭試文科殿試) 등과 이 밖에 무과(武科)에도 전시가 있었다.

식년문과전시/ 대과의 복시 합격자 33명을 그대로 급제케 하되, 대책(對策)·표(表)·전(箋)·잠(箴)·송(頌)·제(制)·조(詔)·논(論)·부(賦)·명(銘) 중 1편(篇)의 제술(製述)로써 갑과(甲科) 3명, 을과(乙科) 7명, 병과(丙科) 23명의 등급을 정하였다. 원래는 갑과 1위가 장원(壯元, 수석, 전체 1위), 갑과 2위가 아원(亞元, 차석, 전체 2위), 갑과 3위가 탐화랑(探花郞, 전체 3위)이 되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 원칙이 반드시 지켜진 것은 아니었다. 갑과를 한 명도 뽑지 않는 경우도 있었고, 갑과를 1명 또는 2명만 뽑는 경우도 많았다. 그런 때에는 을과 1위가 장원 또는 아원 또는 탐화랑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을과 2위가 아원 또는 탐화랑이 되기도 하였고, 병과 1위가 탐화랑이 되기도 하였다. 시험관으로는 의정(議政) 1명, 종2품관 이상 2명이 독권관(讀券官), 정3품관 이하 4명이 대독관(對讀官)이 되었다. 증광문과 전시의 액수(額數)는 식년문과전시와 같이 33명이었고, 대증광(大增廣)에는 7명을 더 뽑았다. 별시문과전시·정시문과전시의 액수는 일정하지 않고 그때그때 정하였다. 그러나 시험과목과 시험관은 모두 식년문과전시와 같았다.

시험관은 2품 이상의 문과 1명과 무관 2명, 당하관(堂下官)의 문관 1명과 무관 2명을 파견하여 시취(試取)케 하고 의정(議政) 1명으로 명관(命官)[1]을 삼았는데, 전임의정(專任議政)이나 1품관으로서 대리(代理)케 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무과전시의 시험관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다소 변동이 있었으며 또 무과전시에는 임금이 친림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갑과 제1인자로 합격하는 자를 장원(壯元)이라고 했으며 참상관(종6품)에 기용하였다. 기성의 관리가 장원 급제를 한 경우 4등급을 진급시켰다고 한다.

무과/무인을 선발하는 시험으로 오늘날의 육, 해, 공군 사관생도나 학사장교등 군인을 선발하는 시험이다. 문과와 달리 무과는 신분상의 제약을 훨씬 완화하여 무관의 자손을 비롯하여 향리(鄕吏)나 일반 서민으로서 무예(武藝)에 재능이 있는 자에게는 응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무과는 소과와 대과의 구별이 없는 단일과(單一科)로서, 초시·복시·전시의 3단계가 있었으며 장원을 선출하지 않았다. 무과의 복시는 28명을 선출하였으며, 전시는 복시 합격자 28명을 그대로 급제케 하되, 기격구(騎擊毬)·보격구(步擊毬)로써 갑과 3명, 을과 5명, 병과 20명의 등급을 정하였다. 시험의 실시는 병조에서 담당하였다.

잡과(雜科)/ 직업적인 기술관의 등용시험이었으므로 서울과 지방 관청에서 양성되는 생도(生徒)들이 응시하였다. 양반들은 잡과에 응하지 않았고 일반 서민이나 천인은 이에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잡과는 일정한 신분계급에 의한 세습·독점됨으로써 이들에 의해 이른바 중인(中人)이라는 신분층이 형성되었다. 잡과에는 역(譯)·의(醫)·음양(陰陽)·율과(律科)의 4과가 있었다. 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관상감(觀象監)·형조(刑曹)등 각 관서의 기술관원을 채용하기 위해 실시되었고 여기에는 초시·복시의 두 단계가 있었다. 대체로 그 격이 문과나 무과에 비해서 낮았다. 시험의 실시는 해당 관청에서 담당하였다.

특별 채용 제도/조선 시대에는 문과, 무과, 잡과 이외에 관리를 선출할 수 있는 특별 채용 제도가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천거, 문음(음서), 취재, 이과 등이 있다. 천거는 기존의 관리를 요직에 추천하는 제도였다. 이과는 서리를 선발하는 시험이었다. 음서(蔭敍)/ 본인의 학덕(學德)이나 선조의 특수한 공훈으로 말미암아 관리에 서용(敍用)되는 제도이다. 고려 시대에는 5품 이상 관리의 자제가 그 대상이었으나 조선 시대에 와서는 2품 이상 관리의 자제로 그 제한을 엄격히 하였다. 또한 음서로 등용된 관리는 요직에 진출할 수 없었다.

취재(取才)/ 과거와 달리 하급 관리를 뽑는 특별 시험이었다. 양반의 자손 친척이나 경아전(京衙前)인 녹사(錄事)·서리(書吏) 등에게 관직을 주기 위해 실시되었는데, 과거와 다른 점은 일정한 관계(官階) 이상으로 승진할 수 없도록 제한한 데 있었다. 또 녹사·서리도 처음에는 취재에 의해 선발하였으며, 하급 수령(守令)이나 외직(外職)의 교수(敎授)·훈도(訓導)·역승(驛丞)·도승(渡丞) 등을 임용하기 위한 취재도 있었다. 무과 계통에도 취재의 제도가 있어 무과의 합격자로서 아직 관직이 없는 사람을 등용하거나 해직된 사람을 다시 임명할 필요 등이 있을 때에 실시하였으며, 이 밖에 선전관(宣傳官)·내금위(內禁衛)·친군위(親軍衛)·갑사(甲士)·대정(隊正)·파적위(破敵衛) 등에서도 필요에 따라 그 요원(要員)을 시취(試取)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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