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서울지부의 곤당골 진출과 제중원
서선영 (장로회신학대학교, 새노래명성교회
Ⅰ. 서론
본고는 미국 북장로회 한국선교회 이하 ( “ ”) 선교회 가 매입하여 나중에 교회가 된 곤당골의“ (“ ” 초등학교건물 이하 학교건물 과) 그곳에서 활동했거나 살았던 사람들을 연결하여 곤당골교회의 기원을 재확인하는 연구이다.1) (Horace Newton Allen, , 1859-1948) 알렌 안련 을 포함하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 1859-1916), (John W. Heron, , 원두우 헤론 혜론 1856-1890), (Samuel Austin Moffett, , 1890-1939), (Cadwallader C. 마펫 마포삼열 빈튼 Vinton, , 1856-1936) 빈돈 등 이른 시기에 내한했던 선교사들의 편지와 보고에는 “ ” 학교건물에 관한 내용이 지속적으로 등장한다 이. 건물은 주로 ‘ (New school)’ ‘ 새 학교와 초등학교건물로 (Lower School Building)’ 지칭되었는데, 언더우드가 앞장서고 알렌과 헤론이 동의하여 1887년 가을에 매입하였다 언더우드는 . 이 부지와 건물을 기반으로 하여 최종적으로 한국에 기독교 대학을 세우고자 했다 그러나 . 1890년대 초반까지 선교회의 내적 갈등과 외부의 어려움들로 인하여 언더우드의 꿈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학교건물 로 . “ ” 매입하고 수리를 마쳤지만 긴 시간 동안의 논의 끝에 ‘ ’ 무어의 주택 이 되고 마침내 곤당골교회가 탄생하는 공간이 되었다.
“ ” “” 학교건물 은 언더우드의 고아원 과 혼동을 일으켜 미국의 선교본부에서도 오해할 정도였다 최재건은 . 『언더우드의 대학설립 그– 이상과 실현 에서 -』 언더우드가 품었던 대학 설립의 꿈을 다루었는데 학교건물 의 , “ ” 정체에 대하여는 분명히 밝히지 않았다 옥성득은 . 『언더우드 자료집 에서 Ⅰ』 대학 설립의 꿈을 간단히 언급하였다 새문안교회 . 『 100년사 는』 새문안교회의 지교회로서 곤당골교회의 역사를 간략하게 다뤘고 유영식의 , 『 』 착한 목자 게일의 삶과 선교 에는 게일의 곤당골 생활이 김은정의 , “선교사 해리엇 깁슨에 대한 연구 헤론 : , 부인 그리고 게일 부인에는 ” 게일 부인의 곤당골 사역이 . 담겨 있다 필자는 본 연구를 통해 흩어져 있던 곤당골 “ ” 학교건물 의 역사를 연결하고 곤당골교회의 기원을 재확인하고자 한다.
Ⅱ. 대학의 꿈을 담은 “ ” 학교건물
1. “ ” 학교건물 의 매입과 수리
초기 내한선교사들의 편지와 보고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 ” . ‘ ’ 학교건물 이 있었다 새 학교 또는 ‘’ , 초등학교건물 로도 불렀는데 이 “ ” ? 학교건물 은 어떤 건물이었는가 2) 이 건물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먼저 빈튼의 설명을 확인해본다.
1) 선교사들이 미국의 선교부와 소통할 때 이 건물을 Lower School Building이라고 불렀는데 본고에 ,
서는 “” . 학교건물 로 부르고자 한다
2)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Ⅰ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83, 85: Underwood to
Ellinwood, 1886. 1. 31.; 박형우 편역 존 , W. 『 Ⅱ 헤론 자료집 』(도서출판 선인, 2017), 120, 126:
Heron to Ellinwood, 1887. 11. 18.
셋째 저는 , 초등학교 건물(lower school property)의 개보수와 관련하여 박사님께 편지를 드리도록 지시 받았습니다 이곳 . 선교회의 요청은 만장일치의 합의에서 비롯된 것이며 이 , ……건물을 수리해서 게일 씨의 숙소로 쓰기로 결의했습니다. …… 이 건물이 위치한 작은 언덕의 정상은 병원 부지로는 매우 훌륭한 장소가 될 수 있겠지만 그, 땅은 북경에서 가끔 이곳을 방문하는 중국 사신들의 거처로 정부가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그것을 취득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습니다.3)
빈튼이 말하는 ‘ ’ 북경에서 온 중국 사신들의 거처로 정부가 사용하는 곳 이란 남별궁(현재 서울 중구 소공동 이었다 ) . 태종의 둘째딸 경정공주가 살았던 소공주댁 남별궁은 임진왜란 이후 청에서 온 사신들이 머무르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남별궁 자리는 제중원과도 관련이 있는 데, 알렌이 경운궁 건너편에 있는 남별궁을 눈여겨 보고 제중원을 이곳으로 옮기고 싶어했으나 고종이 이를 거절하고 구리개에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4) 1897 이후 년에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자주국가의 염원을 담아 이 자리에 환구단을 세운바 있다.
즉, “ ” 학교건물 의 위치는 남별궁 언덕 북쪽에 있는 ‘ ( , )’ , 1887 곤당골 미장동 미동 이며 년에 언더우드의 주도와 알렌 헤론의 , 동의 하에 선교회가 매입하였다. 언더우드는 이곳을 매입한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 밝혔다 저는 서울에 버려진 수많은 고아들과 사생아들이 있다는 사실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들을 데려다가 입히고 먹이며 올바른 방법으로 양육시키고 구세주를 사랑하도록 가르칠 수 있습니다. 저는 얼마 동안 이것을 놓고 생각해 왔으며 어떻게 사업을 시작할까 궁리해 왔습니다 만일 이것이 시작된다면 신청하는 모든 자들을 위한 매일 초등학교도 함께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김인수 역 빈튼의사의 , 『 』 선교편지(1891-1899) ( , 2015), 40-41, 269-270: Vinton to 쿰란출판사
Ellinwood, 1891. 12. 23.(번역문은 필자)
4) 박형우 편역, N. 『호러스 알렌 자료집 Ⅲ. 1886 ( 』 도서출판 선인, 2022), 488-90: Allen to Sang U.
Soh, 1886. 8. 14. 러시아 공사관 전망탑에서 남동쪽을 향하여 찍은 사진으로 남별궁 노란색 (사각형) 왼쪽 건물이 학교건물( ) ( : Princeton Theological 빨간색 원 출처 Seminary Moffett Korea Collection)
…… 만일 자금만 있다면 올해가 지나가기 전에 남녀 학교를 개설할 수 있습니다.5)
정동에서 1명의 아이를 데리고 고아원을 시작한 첫 단계부터 언더우드는 고아원과 학교를
함께 구상했다 그는 . 감리교에 뒤지지 않는 번듯하고 큰 학교를 “서울 도성 중앙에 세우고 ”
싶었고 초등학교 에서 , ‘ ’ 더 나아가 ‘기독교 대학 이라는 ’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다.6)
고아원과 병원이 있다는 것은 알려져 있지만 대부분 , 그 정도에서 선교 활동이 끝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 이곳 장로교 선교부의 돌봄 아래에는 정부 병원(남녀 병동 포함 정부 ), 의학
교 고아원이 , 있으며 이, 제는 이 땅에 기독교 대학(Christian College)의 시작이 될 새로운 학
교가 필요해진 상황입니다 우리는 . 그 목적을 위해 부지를 이미 구입했고 현재 , 그 용도에 맞게
정비 중입니다.7)
위의 편지에 따르면 1887 11 년 월말에는 이미 부지를 구입한 상태였다 헤론은 . 10월초에
“아주 적절한 위치에 있고 저, 희와도 가까운 큰 부지를 비교적 합리적인 가격에 구입할 수 있
는 기회를 갖고 있습니다 이 . …… 부지는 이 지역에서 매물로 나온 것들 중 가장 좋은 곳이
며, 바로 인접해 있는 빈 터 하나도 함께 확보되어야 할 것 이라고 ” 편지했으므로, 이 부지와
건물은 1887 10 11 년 월부터 월 사이에 구입이 진행된 것으로 보인다.8) 6 매입 가격은 00달러
였다.
이 부지 위에는 건물 두 동이 있었는데 하나에는 , 큰 방이 많아 학교로 사용하기에 적합했
고 다른 , 하나에는 기숙사를 만들기로 정하였다.9) “시내 중심 근처의 번화가에 있는 학교로
사용하기에 훌륭한 부지 매입에 ” 성공한 선교회는 그해 겨울에 담을 쌓고 1888년 여름부터
수리를 시작했다.10) 8 전체적인 수리 비용은 그해 선교회 총지출 ,557.48달러 중 1,719.64달러
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했고 고아원에 , 지출된 금액이 1,226.21달러로 두 번째로 큰 지출 항
목이었다.11) 예상했던 것보다 비용이 많이 들어 모두가 염려하기는 했지만 임시로 사용할 건
물이 아닌 선교회가 영구적으로 사용하고 소유할 건물이므로 선교회가 자랑스러워할 만한 건
물로 완성되리라는 기대가 컸다.12)
특히 이 일을 주도한 언더우드는 감리교 학교와 비교하며 감리교는 건물 한 동을 짓는데
1 , 만 달러가 들었지만 선교회는 학교 건물 기숙사들 한국인 , 1 사감 사택을 모두 합해 천 백6
달러에 짓고 있다고 보고했다.13) 호튼(Lillias Stirling Underwood, 1851-1921) 역시 새 학
5)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Ⅰ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62, 415: Underwood to
Ellinwood, 1887. 4. 8.
6) 위의 책, 62, 415: Underwood to Ellinwood, 1887. 4. 8.
7) H. G. Underwood, “A Powerful Appeal from Korea,” in Missionary Review of the World:
(March, 1888), 209-10.
8) 박형우 편역 존 , W. 『 Ⅱ 헤론 자료집 1887~1890 ( 』 도서출판 선인, 2017), 84, 88: Heron to
Ellinwood, 1887. 10. 1.
9) 위의 책, 163, 167: Heron to Ellinwood, 1888. 1. 15.
10) 위의 책, 120, 126: Heron to Ellinwood, 1887. 11. 18.
11)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Ⅰ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139, 504: Underwood to
Ellinwood, 1889. 2. 18.
12) 박형우 편역 존 , W. 『 Ⅱ 헤론 자료집 1887~1890 ( 』 도서출판 선인, 2017), 297, 301: Heron to
Ellinwood, 1888. 10. 5.
13)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Ⅰ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116, 477: Underwood 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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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에 돈이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이 들었다고 말하면서도, 잘 지은 건물이라는 평가 비, 슷한 건
물과 비교해서 현저히 적은 지출 그리고 , 지출을 줄이기 위한 언더우드의 노력을 강조했다.14)
2. “ ” 학교건물 을 준비하는 동안 발생한 문제들
그러나 건물을 준비하는 동안 몇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였다 먼저는 . 1888년에 형성된 반
기독교적인 분위기였다. 5월에는 기독교 전도 금지령이 내려졌고, 얼마 지나지 않은 7월에는
영아 소동이 벌어졌다. 전자는 가톨릭이 종현 현재 ( ) 명동 언덕 위에 고딕 양식의 성당을 건축
하면서 왕궁을 내려다보게 되자 조선 정부가 이를 왕실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보고 금령을
내린 것이었고, 후자는 외국인들이 아이들을 매매하여 잡아먹는다는 유언비어가 서울 안에서
돌면서 반외국인 감정이 폭발한 반기독교적 사건이었다 영아 . 소동은 가라앉았지만 기독교 전
도 금지령은 풀리지 않았다.
두 번째 문제는 선교사 수급이었다 본부에 . 계속해서 인력 충원을 요청하였지만 선교회가
원하는 만큼 선교사들이 빨리 오지 않았다 이미 . 의학교와 고아원에서 각각 2 , 1 시간 시간씩
가르치고 있던 육영공원 교사 헐버트(Homer B. Hulbert, , 1863-1949) 흘법 와 길모어
(George W. Gilmore, , 1857-1933) 길모 에게 더 많은 도움을 원했지만 이루지 못했다.15) 기
다리던 신임 선교사 기퍼드(Daniel L. Gifford, , 1861-1900) 기보 는 소년들을 가르치는 일은
안수 받은 남자가 아닌 여자 선교사와 YMCA 남자들에게 맡겨야 한다는 확고한 견해를 가지
고 있었다.16) ( 언더우드는 가드너 William Gardner) , 에게 기대를 걸었으나 여동생(Sarah
Gardner)과 함께 내한한 가드너는 기후가 맞지 않다는 이유로 내한한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국을 떠나고 말았다.17) “ 이에 대하여 호튼은 추가 도움이 없으면 새 학교는 개교할 수 없습니
다 가드 . 너 오누이의 귀환 결정은 선교회에 큰 타격이요 큰 손실이었습니다 헤론 . 의사와 파
워 의사(Charles Power, 1855-1904)는 가르칠 수 없고 나도 할 수 없습니다 라고 ” 말하며
선교사를 더 보내달라고 호소하였다.18)
세 번째 문제는 고종의 윤허를 받는 것이었는데 이것이 결정적인 어려움이었다.
우리는 미국 공사를 통해 왕에게 우리의 계획을 아뢰고 개교 , 허가뿐만 아니라 왕의 윤허장
(Royal Charter)을 하사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만일 . 우리가 이것을 얻게 되면 그 기관으로서
는 경사입니다 우리는 . 적당한 시기에 학교에 적절한 과정을 개설하여 전문가를 양성하겠다고
왕에게 약속했습니다 우리 . 공사는 이 안에 찬성하며 우리 요청이 이루어지도록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미국 . 공사는 외국인 교사에게 아무런 권위를 부여하지 않는 현재 체제와 같은 정부학
교는 별로 중요하지 않으며 우리 , 학교와 같은 학교들이 앞으로 한국에 큰 유익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19)
Ellinwood, 1888. 8. 25.
14) 위의 책, 126, 487: Horton to Ellinwood, 1888. 11. 17.; 129, 491: Horton to Ellinwood, 1888.
12. 22.
15) 위의 책, 109, 469: Underwood to Ellinwood, 1888. 6. 11.
16) 위의 책, 134, 496: Underwood to Ellinwood, 1889. 1. 7.
17) 위의 책, 149, 513: Underwood to Ellinwood, 1889. 3. 11.
18) 위의 책, 160, 527: Horton to Ellinwood, 1889. 5. 5.
19) 위의 책, 116, 477: Underwood to Ellinwood, 1888.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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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정도 감리교를 의식하면서 선교회는 , 1888 9 년 월에 미국 공사관을 통하여 학교 설립
허가를 신청했다.
미국 시민인 헤론 박사와 언더우드 씨는 미국 장로교 해외 선교부를 대표하여 활동하고 있으
며 현재 , 이들이 소유한 토지 위에 건물을 건축하고자 합니다 이. 토지에 대해서는 이미 소유권
문서를 수령하였으며 이는 , 학교 용도에 한정된 것임을 명확히 하여 폐하의 당국에 정식 인증을
요청한 바 있습니다 이. 두 신사는 조선의 청년들을 가르치고 교육하기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그, 대학은 미국의 대학과 유사한 형태로 운영될 예정입니다 만일 . 이들의
사업이 성공을 거둔다면 조, 선의 젊은이들이 영어를 비롯한 서양 언어와 모든 과학 분야에 대해
교육을 받게 됨으로써 폐하의 백성들에게 큰 혜택이 될 것입니다.20)
그러나 첫 번째로 올린 신청에 한국 정부는 답을 주지 않았다 선교회는 . 1889 1 년 월에 이
를 상기시키며 다시 신청했고 서리독판교 , 섭통상사무 조병직은 고종에게 올려 교지가 내려오
는 대로 공문을 주겠다는 답을 보냈다.21) “” 언더우드는 윤허 가 시간의 문제라고 생각했으나
전망이 그리 밝지는 않았다.22) 기퍼드는 이 문제에 대하여 이미 입주 가능한 훌륭한 학교 건
물에 언더우드 하 , , (Robert Harkness, 1858-1938), 크니스 그리고 기퍼드 자신이 교사로 준비
되어 기다리고 있으나 길이 막혀 있는 것 같다며 답답함을 토로했다.23) 한국 정부는 계속 답
을 주지 않았으므로 미국 공사 딘스모어(Hugh A. Dinsmore, , 1850-1930) 1889 단시모 는 년
7 22 29 월 일과 일 두 차례에 걸쳐 답변을 촉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이 학교는 조선의 청년들에게 영어와 여러 학문 분야를 교육하는 목적을 가지며 기독교 , 교리
는 가르치지 않을 것입니다 만. 약 이 학교가 설립된다면, 이는 폐하의 백성들에게 큰 유익을 줄
것이며 그들에게 , 어떠한 비용도 부담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해당 . 학교를 위한 적절한 건물은
이미 선교부의 비용으로 준비되어 있으며 이, 제 학교 개교에 필요한 것은 오직 정부의 허가뿐입
니다 교사로 . 활동하고자 하는 분들은 모두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물들이며 이, 중 두 명은 이
미 왕립학교에서 교사로 봉직하며 최, 근 학생들의 시험 때 폐하 앞에 출석한 영예도 누린 바 있
습니다. 각하께서는 이 학교를 설립하려는 분들이 이미 조선에서 학교와 병원 사업을 통해 많은
선한 일을 해왔으며 그것이 , 폐하의 승인 아래 이루어진 점에 주목해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 각
하께 상기시켜드리고 싶은 것은 저는 , 선교사들의 활동이 정부가 수용할 수 있는 영역 내에 국
한되도록 하여, 폐하의 정부의 뜻을 늘 적절히 존중하려 노력해왔다는 점입니다.24)
이렇듯 적극적으로 학교 설립의 뜻을 전달하고 미국 공사관 역시 많은 한국 정부를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을 알렸지만 한국 , 정부는 최종적으로 학교 설립을 불허하였다.
20) 『 』 구한국외교문서 제 권10 1 “570. 미안 혜론 및 원두우 학당 설립의 신청준허요청” 1888. 9. 8.
21) 『 』 구한국외교문서 제 권10 1 “610. 미안 원두우 영어학교 개설 허가신청에 대한 회답” 1889. 1. 25.
(헤론 자료집에는 이 회답 부분이 “마땅히 해당 교사의 품서가 우리 대군주께 올려졌고 하교가 , 나왔
다 이것을 . 다시 공문으로써 회답한다 로” 해석되어 있으나 이후 8월이 되어서야 답이 나왔음을 감안
할 때 “하교를 기다리고 있으며 다시 공문으로 회답하겠다 로” 해석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박형우 . 편
역 존 , W. 『 Ⅱ 헤론 자료집 1887~1890 ( 』 도서출판 선인, 2017), 364.)
22)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Ⅰ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150, 515: Underwood to
Ellinwood, 1889. 3. 11.
23) “Gifford to Dr. Ellinwood, Seoul, July 10th, 1889”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4.
24) 『 』 구한국외교문서 제 권10 1 “652. 미안 원두우 혜론 학당 설립 허가원에 대한 회답 최촉” 1889. 7.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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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조선 교섭통상사무 총판 민( ) 閔 이 보내는 회신
…… 작년에 원두우 와 ( ) ( ) 元杜尤 蕙論 혜론 두 사람이 한양 안에 학교를 설립하여 아동을 교육
하고자 하며, 예수를 전도하려는 의도는 없다고 밝혔고 종교가 , …… 서로 다른 나라에서 사적
으로 종교를 가르치는 일은 본래 금지된 바입니다 하물며 . 해당 두 사람이 한양 안에 학교를 세
워 아동을 교육하되, 예수를 가르치지 않겠다고 명확히 선언한 사실은 이미 문서로 회신되어 기
록에 남아 있으므로 더 따질 필요는 없습니다 또한 . 두 사람이 학교를 세움에 있어 비용을 요구
하지 않았으며 반드시 , 백성에게 이로울 것이라는 말도 있었고 이들은 , 깊이 고민하고 직접 준
비하였으며 아, 끼지 않고 자금을 들여 학교를 설립하였습니다 이는 . 우리 정부에 대한 깊고도
성실한 우의에서 비롯된 것이니 이에 , 감탄하고 감읍하는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본 정부에는 이미 공립학교가 있어, 총명하고 슬기로운 자제들을 선발하여 언어와 문자
를 가르치고 장, 차 필요한 분야에 기용하고자 합니다 그러 . 므로 굳이 사적으로 교육을 시행하여
심력과 비용을 들일 필요는 없습니다.25)
언더우드 부인은 미국 공사가 일을 지연시키고 비효율적으로 일이 진행된 탓에 새 학교를
열지 못했다고 평가했다.26) , 그러나 자세히 알아본 바 한국 정부가 개교를 허락하지 않은 것
은 결국 학교에서 기독교를 전파할 것이라는 두려움 때문인 것으로 드러났다.27) 이렇게 해서
“ ” 학교건물 은 사용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게 되었는데 이, 후 선교회는 건물의 용도를 확정하지
못한채 1 . 년이 넘는 시간을 보내야 했다
Ⅲ. “ ” 학교건물 의 사용
1. 1890년대 초반 서울선교지부의 상황
당시 미국 북장로회 선교회 그 자체였던 서울선교지부는 계속 내부 갈등에 시달리며 좀처
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년까지 . 1890 첫 내한선교사들의 상황을 먼저 보자면, 언더우드는
사전과 문법서 출판을 위해 요코하마에 가면서 기퍼드와 마펫이 정동교회와 고아원 등을 맡아
일했고 주미 , 조선공사관 설치를 위해 미국에 갔다가 돌아온 알렌으로 인해 선교회가 다시 시
끄러워졌고 헤론이 , 사망했다 이로 . 인해 병원을 운영할 의사가 사라진 긴급함 속에서 한국선
교의 못자리가 되었던 제중원은 병원의 기능을 상실할 위기에 처했으며 교, 육의 큰 꿈을 안고
매입한 건물은 방치되었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선 사람은 마펫이었다 그는 . “우리는 무엇보다도 잘못
된 부분을 안고 시작했는데 중국과 , 일본과 달리 몇 년간 예비 전도 사역을 하지 않고 학교와
기관을 설립한 것이다 우리는 . 학교를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영어교 . 육에 대한 수요가 없
으며 한국인 , 학교에 배치할 인력도 없다 라고 ” 비판하였다.28)
이런 절박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1891 2 년 월에 열린 연례회의에서 향후 서울선교지부의 사
25) 『 』 구한국외교문서 제 권10 1 “679. 미안 원두우 혜론의 학교설립 불허의 건” 1889. 9. 19.
26)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Ⅰ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190, 560: Horton to
Ellinwood, 1889. 10. 6.
27) “Gifford to Dr. Ellinwood, Seoul, Nov. 8th, 1889,”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5.
28)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177, 179: Moffett to Ellinwood, 1890. 10.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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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방향을 정하는 중요한 결정들이 내려졌다. , “ 첫째 선교회 규칙과 부칙(Rules and
By-Laws)”이 채택되었다 그동안 . 계속되었던 선교사들 간의 갈등을 중재하기 위한 방법이었
다. , ‘ (Orphanage)’ ‘ (Boys’ School)’ 둘째 고아원 이 남학교 로 전환되었다.29) 선교사들이 선교
본부에 편지를 보낼 때 고아원생들을 학생들이라고 표현하였고 실제로 고아원에서도 이들을
교육하고 있었기 때문에 선교본부는 선교회가 고아원과 남학교 둘을 운영하는 것으로 오해했
던 것 같다.30) 선교회는 이를 바로잡으면서 개교할 학교를 위해 편성했던 예산을 고아원 쪽으
로 전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31) 추가적인 예산 투입이 없을 경우 고아원의 문을 닫아야 하
는 긴박한 상황이었다.32) , 셋째 부산과 평양에 선교지부 개설을 위한 대지를 구입하도록 결정
하여 비로소 선교회가 본격적인 지방 진출을 시작하였다 더불어 이때까지 . , 외국인들이 개항
장 밖에서는 부동산을 매입할 수 없었는데 프랑스 신부 로베르(Achille Paul Robert, , 김보록
1853-1922)의 연금 사건을 계기로 외국인을 환대하라는 고종의 교지가 내려오면서 선교본부
와 선교회는 기독교 포교와 개항장 밖 부동산 매입이 허락된 것으로 나름 해석하였다.33) 넷
째 학교건물 을 , “ ” 토론토 한국 연합선교회(Toronto Korean Union Mission)와 녹스 대학
YMCA(Knox College YMCA) 사람들이 사용하도록 허락해주었다. 방 한 개는 주일학교(S.
S.) 교실 및 복음 집회용 장소로 이미 개방되어 있었다.34) “ ” 당시 학교건물 의 자산가치는 약
4 , 천 달러였는데 고아원이 남학교로 전환되면서 이 건물의 목적이 사라졌고 선교회가 아직 이
건물의 용도를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35)
마펫은 “ , 주님께서 한국 선교회를 가혹하게 치셨지만 이제 더 밝은 면을 드러내고 계심이
분명합니다 저는 . 우리의 한국 사역을 위해 풍성한 축복이 예비되어 있다고 믿습니다 라고 ”
소회를 표현하였다.36)
2. “ ” 학교건물 의 사용자들과 곤당골교회의 시작
1890년에 이미 정동교회의 주일학교가 “ ” 학교건물 에서 실시되었다 매주일 . 오후에 주일학
교를 열고 끝난 후에는 구도자들의 질문을 받거나 설교를 듣곤 했다 명이 . 40 넘는 인원이 참
석했고 ‘ ’ 그리스도의 생애 시리즈를 포함하는 교재도 사용하였다.37) 또한 토론토 한국 연합선
29) “Gifford to Dr. Ellinwood, Seoul, Feb. 10th, 1891,”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5.
30)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194-97: Moffett to Ellinwood, 1891. 2.
11.
31) 위의 책, 188-91: Moffett to Ellinwood, 1890. 11. 17.
32) 위의 책, 202-03: Moffett to Ellinwood, 1891. 2. 23.
33) “Dr. Ellinwood to Korean Mission, May. 14th, 1891,”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30.
34) “Report of Building Committee, by Mr. Underwood, Korean Mission Annual Meeting, Feb.
1891,”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21.
35)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206-07: Moffett to Ellinwood, 1891. 2.
24.
36) 위의 책, 194-97: Moffett to Ellinwood, 1891. 2. 11.
37) “Report of Church Session, by Mr. Moffett, Korea Mission Annual Meeting, Feb. 1891,”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21.
– 71 –
교회(Toronto Korean Union Mission)와 녹스 대학 YMCA(Knox College YMCA) 사람들도
“ ” , , (Malcolm C. Fenwick, , 1863-1935), 학교건물 을 사용했는데 아마도 하크니스 펜윅 편위
하디(Robert A. Hardie, , 1865-1949), (James Scarth Gale, , 1863-1937) 하리영 게일 기일
등이었을 것이다 이들 . 1891 9 중 년 월에 정식으로 선교사로 임명을 받은 게일은 계속해서 건
물을 이용했던 것으로 보인다.38) 한편 알렌은 미국 외교관으로 완전히 이적하기 전 이 건물에
입주하고 싶어했으나 그 의도를 의심받고 입주를 거절 당한바 있다.39)
그러던 중 게일이 헤론 부인(Harriet Elizabeth Gibson Heron, 1860-1908)과 결혼을 결
정하면서 선교회는 이 건물을 게일이 거주할 수 있는 주택으로 개조하기로 결의하고 비용 6백
달러를 선교본부에 요청했다 마펫은 . 선교회가 이렇게 결정한 몇 가지의 근거를 제시했다. 첫
째 학교건물 은 , “ ” 매입 후 이미 4년 동안 용도대로 사용하지 못한 채 비어있으나 여전히 학교
로 사용하기에는 어렵고, , 둘째 새로 내한할 선교사들에게 줄 집이 필요하고 셋째 이와 , , 관련
하여 과거 , 언더우드 헤론 , 부부의 힘들었던 관계 언더우드와 , 게일의 사역 노선의 차이 등을
고려할 때 이들을 분리시키는 것이 좋고, , 넷째 외국인 거주지인 정동에 오는 한국인들은 지
인들의 의심을 받기 때문에 눈에 덜 띄는 곤당골이 유리하고 다, , 섯째 서울에서 사역할 다른
거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이었다.40) . 게일 역시 곤당골 정착에 대하여 매우 긍정적이었다
훨씬 좋은 주변 환경을 가진 정동을 주저 없이 떠날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씀드릴 수 있습
니다 이곳이 . … 야말로 장로회가 이 대도시로 들어오는 최적의 관문이 되리라고 생각하기 때문
입니다 외국인이 . 많이 사는 곳에서는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불편함이 있는데 저는 , 이곳이
야말로 그런 불편함이 없이 한국 사람들을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는 멋진 곳이라고 생각합니
다.41)
1892 4 7 년 월 일에 결혼한 게일은 하루 7시간 정도를 건물 내 사랑방에 머물면서 한국인들
을 만났다 그곳에서 . 사람들은 복음서를 읽고 배우고 복음에 관심을 표현하기도 했다 게일은 .
얼굴만 빼고는 완전히 한국 사람이었다 그는 . “곤당골에서 우리는 주일에 예배를 드렸고 처음
으로 조선의 민속음악을 사용했습니다 라고 ” 보고했다 그는 . 한국의 민속음악을 사용한 칠음
절 찬송가를 만들고 이 찬송을 한글로 크게 써서 벽에 붙여 모인 이들에게 전파했다 게일 . 뿐
만 아니라 게일 부인도 정동 시절부터 해오던 여성 모임을 곤당골에서도 지속하여 한국인 여
성사역자들을 길러내 한국교회에 파송하였다.42) 늘 어디로든 떠날 준비가 되어있던 게일은 예
정대로 몇 달 지나지 않아 새로운 선교지부를 열기 위하여 원산으로 자리를 옮겼다.43)
38)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260-63: Moffett to Ellinwood, 1891. 12.
28.
39)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Ⅰ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5), 229, 607: Underwood to
Ellinwood, 1890. 8. 10.
40)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226-31: Moffett to Ellinwood, 1891. 9.
17.
41) 김인수 역, S. 『 』 제임스 게일 목사의 선교편지(1891-1900) ( , 2009), 14. 쿰란출판사
42) “Report 1892 by Gale,”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21. (게일 부부의 곤당골 선교에 대하여 김은정의
“선교사 해리엇 깁슨에 대한 연구 헤론 : , 부인 그리고 게일 부인 과” 탁지일의 ““ ” 착한목자 제임스 게
일의 초기 선교 를” ) 참고하라
43)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320-21: Moffett to Ellinwood, 1892. 11.
9.
– 72 –
“ ” 학교건물 의 다음 사용자는 스왈른(William L. Swallen, , 1859-1954) 소안론 가족과 무
어(Samuel Forest Moore, , 1860-1906) 모삼열 가족이었다. 1892 11 년 월에 내한한 스왈른
가족은 기퍼드의 집에 머무르다가 자립적인 살림을 꾸리기 위하여 용감하게 곤당골로 이사했
다.44) 9 건물 두 동 중 방이 개가 있는 큰 벽돌집이 그들의 사택이었다.45) 게일이 시작했던 예
배가 스왈른과 무어에 의해 이어졌다.
오늘 오후 2 30 , 시 분 우리 사택 안에 있는 약 8×12 크기의 한국식 방에서 처음으로 한국인을
위한 예배가 열렸어 그. 방은 윌이 공부방으로 꾸며놓은 곳이지. 윌과 무어 씨가 찬양을 인도했
고 서, 조사가 설교를 했어. 참석자는 모두 남성이었고, 20 약 명이 바닥에 앉아 있었어 나는 .
그 방 밖의 현관에도 20명 정도가 앉아 있는 것을 봤어 그들도 . 방 안의 사람들만큼 잘 들을
수 있었어.46)
그런데 건물을 무어가 ‘ ’ 영구적으로 사용하기로 결정하면서 두 가정이 함께 사용할 수 있
도록 대대적으로 수리를 하게 되었다.47) (Susan A. Doty, 1861-1931) 도티 의 집에 잠시 머무
르던 스왈른 가족은 수리가 끝난 후 5 16 월 일에 돌아왔고 무어 가족도 입주했다 이때 . 쯤 무어
는 이미 약 80명의 남성들이 참석하는 집회를 이끌고 있었다 빈튼은 . 이곳에 진료소와 작은
병원을 운영하기로 결정되었다.48) , 이렇게 건물의 용도가 정해지자 안정을 찾아갔고 건물 안
에 있는 채플에서 매일 오후 예배가 드려졌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한 번도 들어본 적 없
는 사람들이 이곳을 찾았고 소책자들을 사기도 했다.49) 드디어 곤당골교회가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이로부터 약 1 1894 4 년이 지난 년 월에 스왈른 가족은 애초에 정해졌던 평양이 아닌 원산
으로 거주지를 옮겨 게일과 함께 원산지부를 개척하였다 무어는 . “ ” 학교건물 에 정착하여 1901
년 11월 부인의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날 때까지 이곳을 사택으로 사용하였다.
44) Letters of Mrs. W. L. Swallen, Missionary to Korea from 1892 to 1941: 1892. 11. 21. Mrs.
Swallen to Jennie.
45) Letters of Mrs. W. L. Swallen, Missionary to Korea from 1892 to 1941: 1893. 1. 8. Mrs.
Swallen to Will & Jennie.
46) Letters of Mrs. W. L. Swallen, Missionary to Korea from 1892 to 1941: 1893. 2. 5. Mrs.
Swallen to Jennie.
47) 김인수 역 빈튼의사의 , 『 』 선교편지(1891-1899) ( , 2015), 122-23, 361-62: Vinton to 쿰란출판사
Ellinwood, 1893. 2. 23.; Letters of Mrs. W. L. Swallen, Missionary to Korea from 1892 to
1941: 1893. 2. 20. Mrs. Swallen to Jennie.
48) Letters of Mrs. W. L. Swallen, Missionary to Korea from 1892 to 1941: 1893. 5. 15. Mrs.
Swallen to Jennie.
49) Letters of Mrs. W. L. Swallen, Missionary to Korea from 1892 to 1941: 1893. 7. 13. Mrs.
Swallen to Jennie.
– 73 –
“ ” 학교건물 의 마지막 사용자는 이탈리아 영사 프란체세티 디 말그라(Ugo Francesetti di
Malgra, 1877-1902) . 였다 무어가 떠난 뒤 건물이 첫 번째 이탈리아 영사관으로 사용되었던
것이다.50) 1905 38,000 년에는 엔이라는 거액으로 매각되어 이중 일부가 나중에 승동교회 건물
을 건축하는데 사용되었다.51) 서울선교지부는 애초에 곤당골 부지를 시내 중심지에 있는 다른
부지와 교환할 계획을 세웠다.52) 그러나 계획을 변경하여 정부 소유인 구리개 부지를 보유하
고 대신에 곤당골 부지를 내놓으며 차액을 지급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꿨다 선교지부의 . 계
획은 실현되지 못했고 구리개의 제중원 부지는 예정대로 정부로 넘어갔고 곤당골 부지는 매각
되었다.53)
Ⅳ. 곤당골교회의 역사적 의미
1. 선교 거점이 된 곤당골
“ ” 학교건물 은 선교회가 영구적으로 소유하고 자랑스러워할 만큼 공들여 완성되었고 자산의
가치도 높았다 시간이 . 흐르는 동안 여러 자산들이 매입되고 매각되었지만 이 건물은 거의 20
년 가까이 선교회의 자산으로 남아 있었다 비록 . 대학 설립이라는 언더우드의 원대한 꿈은 이
곳에서 성취되지 못했지만 곤당골은 선교사들이 외국인 거주지 정동에서 벗어나 새롭게 선교
거점으로 삼고자 하는 중요한 자리가 되었다.
50) “New Calendar,” in Korea Review (December, 1901).
51)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자료집 Ⅲ』(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86, 405: Underwood to
Brown, 1905. 1. 10; 88-89, 408-09: Underwood & Avison to Brown, 1905. 4. 28; 곤당골교회
에서 승동교회로 이어지는 역사에 대하여는 김일환의 “승동교회의 초기 역사에 관한 연구:
1902-1908년 시기를 중심으로,” “홍문동교회의 설립과 분열에 관한 연구 년 : 1902 징계사건을 중심으
로 를” . 참고하라
52) Minutes and Reports of the Nineteenth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19 (1903).
53) Minutes and Reports of the Twentieth Annual Meeting of the Korea Mission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the U.S.A. 37 (1904).
이탈리아 영사관으로 사용되던
당시 “ ” ( : Corea 학교건물 출처
e Coreani: Impressioni e
Ricerche sull’ Impero del
Gran Han)
– 74 –
스왈른 부인(Sallie Willison Swallen, 1863-1945) “ ” 은 학교건물 에 대하여 이렇게 표현했
다 집은 . “ 방이 아홉 개나 되는 아주 큰 집이지만, 난로 두 개로 겨우 세 개의 방만 난방하고
있어 우리는 . 다른 외국인들로부터 적어도 반 마일은 떨어져 있는 것 같아 사. 방이 한국인들
로 둘러싸여 있어.”54) “ ” 즉 학교건물 은 궁 바로 옆의 제한된 자리가 아닌 시내 중심 근처의
번화가로 한국인들이 , 많이 살고 있는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정동은 외국인들이 모여 살기에는 좋은 곳이지만 기독교에 관심을 가진 한국인들이 출입하
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한두 . 번 방문하게 되면 사람들의 주목을 끌게 되고 박해의 대상이
되므로 사람들은 정동을 꺼려했다.55) 따라서 한국인들을 자유롭게 자주 만나기 위하여 정동이
아닌 시내에 있는 곤당골에 선교의 거점을 만들자는 의견이 계속 제시되었다.56) “저는 한국인
들이 오기를 싫어 하고, 길 건너편에 있는 감리회 선교회와 인접한 채 사역하는 이곳 외국인
거주지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로 우리의 사역을 이전하는 정책을 옹호합니다.”57)
그런데 어떤 형태의 거점을 만들 것인가에 대하여 관점이 달랐다 마펫은 . 건물을 개조하여
새로 부임할 의사의 주택으로 사용하고 부속 , 건물은 진료소나 병원으로 개조하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58) . 빈튼은 마펫의 의견을 강하게 반대했다 학교건물 의 “ ” 위치가 진료소나
병원으로 적합한 곳인 것은 맞지만 이를 의료 용도로 개조하는데 비용이 너무 많이 들기 때문
에 그 비용이면 차라리 더 좋은 위치에 부지를 매입하여 더 좋은 건물을 짓는 것이 낫다는 의
견을 내놓았다. 전에 알렌이 제중원 이전 부지로 원했던 남별궁 구역까지 함께 넣어 병원, 진
54) Letters of Mrs. W. L. Swallen, Missionary to Korea from 1892 to 1941: 1893. 1. 8. Mrs.
Swallen to Will & Jennie.
55) 김인수 역 빈튼의사의 , 『 』 선교편지(1891-1899) ( , 2015), 40-41, 268-70: Vinton to 쿰란출판사
Ellinwood, 1891. 12. 23.; ,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260-63: Moffett
to Ellinwood, 1891. 12. 28.
56)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270-73: Moffett to Ellinwood, 1892. 2.
17.
57) 위의 책, 334-37: Moffett to Ellinwood, 1892. 11. 23.
58) 위의 책, 194-97: Moffett to Ellinwood, 1891. 2. 11.
서쪽에서부터 정동의 외국인 거주지 곤당골의 , 교회 동현의 , 제중원이 이어져 있
다.
– 75 –
료소 사택을 , 만들 수 있다면 좋겠지만 남별궁을 매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59) 그
러면서 빈튼은 남대문에서 상당히 떨어진 곳에 병원을 세우고 싶어했다.60)
제중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또다른 병원 이야기가 나온 근본적인 원인은 제중원
내 전도 금지였다 물론 . 한국 정부의 상태가 점점 나빠지면서 정부의 지원과 협조 역시 처음
과 너무 달라진 것도 큰 문제였다.
병원은 단순한 진료소로 축소되었고 명의 , 16 째째한 관리들이 환자들을 착취하여 돈을 빼앗
은 매우 더럽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전락하였으며 서, 양 의학의 명성은 이전에 민영익의 수술 사
례를 제외하고 지금 거의 ‘ ’ 존재하지 않는 상 . 태입니다 병원을 선교부의 성공으로 만들기 위해
서는 우리는 그것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얻어야 합니다 박사님께서는 . 약품 설비 인건비 , , , 음
식 등을 위하여 매년 2~3,000달러를 지출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 런 다음 그곳에서 매일 정기적
인 기독교 사역 활동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만일 . 박사님이 이것을 하실 수 없다면, 지금이 이
사역을 중단하는 데 가장 좋은 기회입니다.61)
헤론이 사망한 후 당장 일할 수 있는 의사가 없는 상태에서 병원을 돕고 있던 설립자 알렌
마저도 제중원 사역을 그만두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러나 . 선교본부는 제중원을
끝까지 잡아야 한다고 했다.62) 사실 헤론도 제중원 내에서 전도가 불가능한 상황을 안타깝게
여기고 선교회가 주관하는 병원이 있기를 바랐고 자신의 집에서 진료를 한바 있었다.
1893 2 년 월 연례회의에서 최종 결정이 내려졌다 이때는 . 스왈른 가족이 “ ” 학교건물 에 살
고 있었다.
연례회의에서 선교회는 진료소와 병원 사역을 곤당골의 부속 건물에서 가능한 규모로 시작하
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지시를 수행하려고 의료위원회는 빈튼 의사와 그곳의 일부 방들을 사용
하는 문제를 조정했습니다 그러나 . 적은 비용으로 그 방들을 사역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드는 것
이 필요합니다 빈튼 . 의사는 거의 2년간의 수입으로 약 80달러를 수중에 가지고 있다고 보고하
는데 이는 , 한국인과 일본인 환자들로부터 수시로 받은 소액을 모은 것입니다 우리는 . … 우리
선교회가 시작한 기독교 병원의 사역을 보기를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63)
외부 건물 몇 개를 병실과 약국용으로 쓸 수 있게 만들기로 했다.64) 10 그런데 월 연례회
의에 무어가 제출한 재정보고서를 보면 “ $ 부엌 싱크 은 식당과 1.00, $ 거실 사이 문 10.00, 칸
막이와 천장계단 $16.00, 석고공사 추가 $13.50, $10.00, 벽 완성 부엌에 연결되는 홀 수리
$2.00, $65.00” 합계 로 표시되어 실제로 병실과 약국을 위한 수리가 진행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가 없다.65)
59) 김인수 역 빈튼의사의 , 『 』 선교편지(1891-1899) ( , 2015), 40-41, 268-70: Vinton to 쿰란출판사
Ellinwood, 1891. 12. 23.
60)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270-73: Moffett to Ellinwood, 1892. 2.
17.
61) 박형우 편역, N. 『호러스 알렌 자료집 Ⅴ. 1890~1896 ( , 2024), 112-113, 115-116: Allen to 』 선인
Ellinwood, 1890. 7. 26.
62) 위의 책, 241: Ellinwood to Korea Mission, 1890. 12. 17.
63) 옥성득 역 마포삼열 , 『 』 자료집 1 (새물결플러스, 2017), 370-73: Moffett to Ellinwood, 1893. 2.
24.
64) 김인수 역 빈튼의사의 , 『 』 선교편지(1891-1899) ( , 2015), 123: Vinton to Ellinwood, 쿰란출판사
1893.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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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충우돌하던 빈튼과 달리 그해 11월에 내한한 에비슨(Oliver R. Avison, , 어비신
1860-1956) 1894 은 년에 제중원의 성격을 완전히 바꿔 선교병원으로 만드는데 성공했고 빈튼 ,
은 제중원에서 물러난 후로 선교회 서기, 예수교서회 성서공회 , 등 출판 관련 사역을 하면서
전도여행을 다니고 본인이 만든 왈더 진료소 사역을 진행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 곤당골
건물은 의료보다는 전도의 거점이 되어 ‘’ . 무어의 주택 이라고 불렸다 66)
2. 선교 거점의 확장
하지만 곤당골교회와 제중원 사이의 거리가 350미터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자연 . 스럽게 선
교의 거점이 확장되었다 언더우드와 . 조사 서상륜도 곤당골교회 사역에 동참했지만 무엇보다 ,
도 제중원 원장인 에비슨이 적극적으로 동역을 하고 무어의 곤당골교회 역시 제중원으로 전도
사역을 나감으로서 곤당골교회는 시작부터 제중원과 뗄 수 없는 협력과 공생의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였다.
주일 아침 11시 예배가 열리기 전에 정규 참석자들로 정기 모임을 열었고 매일 , 기도회에도
늘 참석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오. 2 후 시 예배는 일년 내내 모였으나 그, 성격은 구경꾼을 위한
모임에서 정규 교회 출석자를 위한 성경 공부로 바뀌었는데 늘 새로 오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 예배를 2부로 분리한 후 참석률이 좋아졌고 사람들이 점점 늘어나서 대문 근처의 더 큰방
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에비슨 . 의사는 찬송을 인도하고 설교의 후반부 절반을 맡아 설교합니다.
…… 전씨와 에비슨 의사가 제직회를 구성했습니다 우리는 . …… 선교회의 허락을 받아 정동교
회에서 독립하여 사역하기를 원합니다 세. 례를 받아야 할 자가 있을 경우 그들을 전혀 낯선 심
사위원회에 보내는 것은 최선이 아닌 듯합니다.67)
“이전에는 주일 아침예배에 참석하기 위하여 정동으로 갔지만 이제 에비슨 의사가 독립적
인 사역을 개시했다 는” 무어의 편지를 통하여 연못골교회와 더불어 곤당골교회가 마침내 정동
교회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 완전한 선교의 거점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68) 그런데 1906년에
쓴 언더우드의 편지를 보면 곤당골교회와 제중원이 하나의 거점으로 묶여 있다 원 . “ 래 서울에
는 세 개의 선교 거점이 있었습니다 다른 . …… 거점은 도시 중앙에 위치한 병원과 의사의 주
택 미혼 , 여선교사들을 위한 제이컵슨 기념관 그리고 , 약간 떨어진 거리에 곤당골 혹은 무어
의 주택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69)
잘 알려진 것처럼 곤당골교회에서는 신분 갈등이 발생하여 1895년에 홍문석골교회가 분리
하여 나간 뒤 1898년에 곤당골교회에서 발생한 화재로 재결합하여 홍문석골교회가 된 역사가
있다 이러한 . 갈등을 겪는 중에도 곤당골교회와 제중원은 에비슨 원장의 노력 하에 협력을 멈
추지 않았다.
65) 위의 책, 138: Vinton to Ellinwood, 1893. 10. 19.
66)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자료집 Ⅲ』(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120, 448: Underwood to
Brown, 1906. 6. 5.
67)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Ⅱ 자료집 』(연세대학교 출판부, 2006), 146, 499: “Evangelistic
Report for the Seoul Station” by Underwood, Dec. 1894.
68) “Moore to Ellinwood, Dec. 9th, 1894,” in Records of Board of Foreign Missions of the
Presbyterian Church of U.S.A. Korea, Letters and Reports 11.
69) 이만열 옥성득 , 편역 언더우드 , 『 자료집 Ⅲ』(연세대학교 출판부, 2007), 120, 448: Underwood to
Brown, 1906. 6. 5.
– 77 –
연차별로 보고서를 확인하자면, 1895-96 먼저 년에는 병원에 입원한 환자들 거의가 그리스
도인이 되었고 그중 2 . 명이 곤당골교회에 등록하였다 70) 1896-97년에는 곤당골교회가 헌금의
일부를 병원에 입원 중이 환자를 돕는데 사용하였고, 제중원은 시설을 전면적으로 정비하여
남녀 모두를 위한 집회가 가능하도록 병실이 배치되었다.71) 이 집회를 주관하는 의사들이 있
었고 아침 , 경건회와 주중 기도회 주일 , 정기예배가 병원 프로그램에 포함되었다.72) 1898-99
년 보고서에는 주일 오후에 홍문석골교회 교인들이 병원을 방문하여 입원 환자들과 함께 찬양
하고 기도하는 모임을 가졌고 수요여성기도회를 , 병원에서 가지면서 입원한 여성들과 외래 진
료를 받으러 온 여성들이 함께 참석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들 . 중에는 홍문석골교회의 교인이
된 사람도 있었다.73) 이런 협력 사역이 있었으므로 홍문석골교회가 해산되었을 때 제중원은
이들에게 기꺼이 예배 공간을 내어주었다.
Ⅳ. 결론
“ ” 학교건물 은 언더우드의 주도 하에 선교회가 기독교 대학의 큰 꿈을 품고 매입하여 세운
건물이었다 기독교 . 포교 금지령, 한국 정부의 설립 불허로 이어지는 어려움을 겪으면서 당시
언더우드는 이 꿈을 접어야만 했다 공들여 . 세운 자랑스러운 건물을 학교로 사용할 수 없게
되자 고민하던 선교회는 건물을 빌려주었고 주일학교를 포함한 예배가 진행되었다 마침내 .
1891년에 고아원을 남학교로 전환하고 학교건물 이 , “ ” 있는 곤당골을 선교의 거점으로 삼는다
는 결정이 내려짐에 따라 대대적인 수리를 하고 헤론 부인과 결혼한 게일이 곤당골에서 사역
을 이어갔다 게일이 . 원산으로 떠난 후 스왈른과 무어가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가 무어만 남아
곤당골교회를 만들어가게 되었다.
한편 당시 , 제중원은 두 번째 부지인 구리개에 자리잡고 있었다 곤당골은 . 구리개와 무척
가까운 곳에 있었으므로 무어는 곤당골교회 교인들과 함께 제중원에 가서 환자들에게 복음을
전하였고 에비슨 , 원장 또한 곤당골교회에서 적극적으로 사역하였다 년에는 . 1897 제중원이 전
면적으로 정비되면서 남녀 모두를 위한 집회가 가능하도록 병실이 배치되어 교회와 제중원은
더욱 깊은 협력의 관계를 유지한 끝에 해, 산된 홍문석골교회의 교인들까지 수용할 수 있었다.
곤당골교회의 기원은 기독교 대학을 세우려는 언더우드의 소망이었고 한국인들을 , 자유롭
게 만나 마음껏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싶은 선교회의 소망이었다 그. , 소망이 자랑스러워
할 만한 예배당 건물로 먼저 세워져 드러났다 또한 . “ ” 학교건물 을 채우고 활동했던 정동교회
주일학교 게일 , , 스왈른이 있었고 사무 , 엘 무어가 있었으며 함께 , 협력한 언더우드 에비슨 그 , ,
리고 서상륜으로 대표되는 한국인 지도자들이 있었다 지. 척에 있는 제중원과 적극적으로 협력
한 결과 곤당골교회는 작은 선교의 거점으로 남지 않고 중앙에 자리잡은 든든하고 커다란 선
교의 거점으로 성장하였다.
70) Annual Report of the Korea Mission(1896) 59th, 158.
71) General Reports of Seoul Station, Sept. 1897.
72) Mission Korea 1897 60th Annual Report.
73) “Medical Work Evangelistic” in – General Reports of Stations of Korea Presbyterian
Mission for the Year 1898-1899 (Sept. 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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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찬
임희국 박사 장로회신학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