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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현장 선교 ‘공장의 등불’ 밝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02-3709-7646) 도시산업선교회(이하 산선)는 1979년 YH여성노동자들이 신민당사를 점거하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크게 주목받기 시작했다. YH점거농성사건의 전말을 발표하면서 정부는 ‘산업체들에 대한 외부세력 침투실태 특별조사반’을 구성, 종교를 빙자한 불순 세력이 침투하여 노동자들을 선동, 회사를 문닫게 하고 있다고 산선을 규정한다. 이후 산선은 권력과 언론이 일체가 되어 만들어낸 좌익 용공세력이란 누명을 쓰고 80년대를 지난다. 산업선교는 57년 예수교 장로회(통합) 총회 전도부 안에 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하면서 공식적으로 시작됐다. 이후 감리교, 성공회, 기장, 구세군 등이 교단 결정에 따라 산업전도를 시작하게 된다. 초기 산선의 활동은 각 교파들이 교세확장이란 관점에서 교단별로 시행됐다. 당시 산업전도를 시작한 대부분의 성직자는 신학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교역자로서 “노동자들을 어떻게 교회에 인도할 것인가” 하는 단순한 열정에서 출발했다. 따라서 이들의 활동은 공장예배, 봉사활동, 상담, 평신도 그룹활동 등이 주류를 이뤘다. 경영주들도 당시 이 산업전도를 환영했다. 그들이 산업전도를 환영한 이유는 “많은 노동자들이 순종적인 기독교인으로 변하는 것은 기업을 위해서도 바람직한 일”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60년대 후반에 들어가면서 10여년간에 걸쳐 산업전도를 한 실무자들은 예배 및 전도지 배부와 같은 단순한 전도활동은 오히려 기독교에 대한 반감을 불러일으키며, 진정으로 그들의 삶의 문제를 포용키 어렵다는 자각이 고조되면서 ‘개인구원’차원을 넘어서는 ‘사회구원’이라는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었다. “교회는 건물중심에서 벗어나 일하는 세계와 근로자를 교회로 삼아야 할 것이다. 하늘을 나는 말씀이 아니라, 과도노동, 임금인상, 노사분쟁, 부당노동행위, 산재보험, 해고문제 등을 기독교적인 면에서 이해하고 해석해 피부에 닿는 설교를 통해 메시지가 전달돼야겠다.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적으로 섬겨야 할 그리스도가 근로대중임을 명심하고 십자가의 경험을 근로대중을 위한 행위를 통해서 경험하는, 마음의 자세가 성숙되어질 수 있는 데까지 교회는 나아가야겠다”(조승혁 목사, 1969년 9월 기독교사상) 당시 기독교문화에 비춰 이런 선언은 혁명적이었다. 그 저변에는 당시에 활발히 논의되어 오던 ‘세속화 신학’과 ‘하나님의 선교신학’ 등 새로운 신학적 조류가 있었다. 이들 새로운 신학의 도입과 토론이 단순히 강단에 머무르지 않고 현실적 의미와 힘을 가지고 70년대에 이르러 ‘민중신학’의 형성으로까지 발전된 것은 이러한 선교 현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산업전도를 향한 적극적 노력은 1968년 ‘도시산업선교’라는 말을 쓰게 되면서 구체화된다. 우선 각 교단의 산업전도기관도 산업선교로 명칭을 바꾸게 되고, 기구들도 현장과 지역 중심의 위원회가 조직됐으며, 실무자의 자격도 현장경험의 엄격한 훈련을 거쳐서만 인정받게 됐다. 이런 외형적 변화 외에도 내용적으로는 노동자들의 외로운 권리투쟁에 참여하여 노동자들의 호소를 대변하는 행동이 바로 산선의 활동이라는 생각이 전반적으로 퍼져가기 시작한다. 이는 교회적 입장에서 산업사회를 바라보는 게 아니라, 산업사회와 그 조직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 안에서 선교적 과제와 사명을 찾는 방식으로의 변화를 의미한다. 산업사회를 중심으로 노동자와 그들의 조직, 그리고 도시사회의 빈민들 문제에 역점을 두고 인간의 존엄성과 공동체의식, 권익옹호를 구체적인 목표로 삼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산선의 활동은 노동법, 노동조합, 노동운동 지도자 교육, 노동자 조직 활동, 노동조합 지도자 육성 문제 등에 역점을 두면서 종교활동으로써 노동자를 위한 예배와 성서연구, 그리고 노동자복지활동을 조직적으로 진행하게 되었다. \주로 공장지역을 중심으로 한 산업전도가 이와 같은 변화 과정을 겪는 것과 거의 같은 시기에 도시빈민을 대상으로 한 도시선교운동도 탄생하게 된다. 도시선교운동은 1969년부터 1973년까지 알린스키의 지역주민조직 운동이론을 토대로 하여 낙산아파트, 연희아파트, 금화아파트, 창신동 등 슬럼지역에서 실무자를 훈련시켰다. 이러한 훈련과 실천 과정에서 실무자들은 민중의 주체적 운동역량을 발견하게 되고, 이와 더불어 민중들을 소외시켜왔던 기존 교회의 갱신을 부르짖게 되는 과정을 밟아나가게 된다. 이처럼 한국기독교는 산업화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60년대 후반을 경계로 하여 민중의 삶의 현장에 깊게 뿌리박는 ‘도시산업선교’라는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게 됐다. 산선의 또 다른 특징중 하나는 연합조직적 성격이다. 이것은 산업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의 결과 노동, 빈민 문제가 고립된 문제가 아니라 사회전체의 구조와 관련된 것이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보다 광범위한 조직이 필요하게 됨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이후 산선은 많은 대기업에서 노조를 새롭게 조직하고 어용노조를 민주화하는 활동을 활발히 진행한다. 동일방직, 태양공업, 진로주조, 대일화학, 원풍모방, 남영 나이론, 경성방직, 방림방직 등에서 노동자들의 단결된 힘을 모으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면서 유신정권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산선의 성장과정은 곧 고난의 여정이 된다. 1972년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사무실이 서울시경의 수색을 받은 데서 시작했다. 산선 실무자들이 농성을 사주한 혐의로 연행되었던 것이다. 이는 산선이 앞으로 걸어갈 골고다 가시밭길의 첫걸음이었다. 1974년 산선 실무자들이 긴급조치 1호 위반으로 구속되자 이에 때맞추어 한국노동조합총연맹(이때의 노총은 정부산하 기구같은 성격이었다)은 산하 최고 간부회의를 열어 “한국도시산업선교위원회를 비롯한 일부 종교인의 불순한 조직침해를 배격하고…”라는 결의문을 채택한다. 여기서 비롯된 시비는 1974년과 1975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한국노총과 산선 단체간에 성명전으로 계속됐다. 당국은 또 기독교 내부에 권력과 야합한 일부 보수 세력을 내세워 산선을 공산주의자로 몰기 시작했다. 당시 서울시경 제2부국장으로 있던 김재국, 홍지영 등은 산선이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전략과 흡사한’ 신학논리를 가지고 있다면서 ‘정치신학의 논리와 행태’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등의 책자와 관제 반공 강연회에서 공개적으로 산선을 ‘자생적 공산주의’로서 국제공산당 전략에 이용되고 있다는 터무니없는 공격을 가했다. 이런 모략과 공격은 1979년 YH사건이 터지면서 정부 여당이 그대로 받아들여 경제정책 실패를 은폐하고 산선에 모든 책임을 전가시키는 데 이용됐다. 정부 여당은 YH사건의 배후에 산선이 있으며, 이들은 “외세의 지원하에 첫단계로 유신체제 전복, 다음 단계로 자본주의 체제를 부정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시도하고 있으므로 종교단체의 노동문제 개입을 정책적으로 저지해야 한다”고 선전했다. 완벽한 호흡을 맞춘 관제언론은 산선이 사회주의 체제를 건설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을 교육, 훈련시키며 대중조직운동을 통해 폭력적 수단을 선동하고 있다는 악의에 찬 왜곡 날조기사를 집중적으로 게재했다. 명색이 노동자 조직인 한국노총은 ‘노조의 자주성 옹호’라는 명분으로 노동운동에 제3자 개입을 막는 입법을 요청함으로써 ‘제3자 개입금지’라는 세계 입법사상 유례없는 노동관계법 개악이 시행됐다. 신군부의 80년대로 접어들면서도 언론은 산선에 대한 매도에 앞장선다. 82년 콘트롤데이타사의 폐업과 원풍모방 사건을 계기로 산선은 권언일체의 외부적 압력과 인적·재정적인 내부적 문제로 위축돼 갔다. 몇가지 부정적 평가에도 불구하고 산선이 노동자와 도시빈민들의 요구와 희망을 외면하지 않고 민중 편에 서서, 그들의 아픔을 교회적 아픔으로 삼고자 했던 노력은 무엇으로도 부정할 수 없다. 또 가난하고 소외받는 민중의 현장에서 기독교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는 21세기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주제이다. 70년대 산업화의 뒤안길에 내몰려 있던 민중들에게 신은 너무 멀리 있고, 황제는 너무 높이 있었다. 거룩하게 하늘에만 계신 그리스도가 아니라 척박한 땅에 함께 계신 그리스도가 필요한 시대였다. 기획·집필/ 유시춘(국가인권위 상임위원) 이우재(자유기고가) 김남일(소설가) 황인성(인권운동가) 정재돈(농민운동가) 한상봉(자유기고가) 장종택(출판인) 최민희(민언련 사무총장) 박노승(경향신문 논설위원) 김정섭(" 미디어부 기자) -독자제보를 기다립니다. (1) 도시산업선교회 ① 산업전도를 통한 복음 전도 (1957~1967) 한국 교회는 1950년대 후반부터 공업화가 본격화되면서 공장으로 모이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특히 1957년에 동아시아 교회협의회 산업전도담당 헨리 존슨 목사가 내한하여 산업전도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예장 통합) 총회전도부 안에 산업 전도위원회가 조직되었다. 그 후 이듬해에는 예장 통합 경기노회가 영등포지역에서 산업전도를 시작하면서 본격적인 현장활동이 시작되었고, 1961년에는 기독교대한감리회도 인천산업전도위원회를 조직했다. 또한, 대한성공회는 1961년 강원도 황지 탄광지 광산노동자를 위한 활동으로 시작되었으며, 한국기독교장로회도 1963년에 인천 대성목재에서 그 활동을 시작했다. 산업전도의 시작은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실행되면서, 한국사회가 급속한 산업화 과정을 거치며 동시에 산업사회의 노동자 문제가 심각해지기 시작한 시기에 맞추어졌다. 이 시기에 산업전도는 기존의 전도 방법을 활용하여 주로 공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선교와 상담을 통해 복음을 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산업화화 진행되며 많은 노동자들이 공장으로 모여들었기 때문에, 이들을 대상으로 집단 예배와 상담을 제공함으로써 복음 전파의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는 판단이 내려졌다. 이에 기독교인 기업가들이 운영하는 공장을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고 상담 및 전도 활동을 진행했다.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노동자들의 권리회복을 돕는 데 거의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노동자들은 목사들을 사장의 친구로 간주하고 이에 대한 반발을 일으켰다. 이는 목회자들이 산업사회의 본질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 노동자들에게 선교를 시도했기 때문에 발생한 것이었다. 결국 목회자를 통한 산업전도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했고, 그 후에 일시적으로 평신도를 훈련시켜 산업전도를 시도하기도 했지만, 이 역시 별다른 효과를 보지 못했다. 이 시기를 평가한다면 교회가 산업전도의 필요성을 깨닫고 이를 위한 기반을 단단히 세우는 시기였다는 것이다. 참여한 목회자들은 산업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얻었고, 각 교파는 전국적으로 조직을 구축하고 보다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연합협의회를 구성하는 데 주력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한국산업 전도 문제 협의회’가 1964년에 결성되었다.
② 노동조합을 통한 산업선교 (1968~1972) 1965년 한일협정을 시작으로, 박정희 정권은 대규모의 외자 유치를 통해 수출주도형 경제개발을 본격화했다. 이러한 발전 정책은 저임금과 저곡가정책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필연적으로 이뤄졌다. 이러한 과도한 경제성장 정책 아래에서 산업사회의 비인간화 현상이 점차 더욱 악화되었고 다양한 사회문제가 발생했지만 이를 사회와 교회가 심각하게 대처하지 못했다. 1970년 11월 13일 평화시장 젊은 노동자 전태일의 분신은 사회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이 사건은 노동문제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발했다. 그러나 정부는 산업사회의 다양한 문제에 대해 치안유지와 정권안보 차원에서 억압적인 대응을 취했으며, 외국인 투자기업 내 노동자들의 활동을 제약하는 법을 제정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산업선교는 산업화와 도시화로 인해 발생하는 다양한 문제와 노동자들의 삶의 고충, 그리고 노동 사회 전반을 선교의 대상으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전 10년간의 활동과 경험을 반성하고, 이를 바탕으로 신학적 입장을 재정립하는 과정에서 ‘산업전도’를 ‘도시산업선교’로 변경하였다. 또한, 선교 방법에 있어서는 산업사회의 거대한 구조적 문제와 경제정책의 모순으로 인해 적절한 전략을 찾지 못하던 산업선교가 노동조합이라는 조직을 발견하게 되었고, 이 조직이 산업사회에서 하나님의 뜻을 실현할 수 있는 매우 효과적인 도구로 여겨졌다. 이에 따라 산업선교는 한국노총과 협력하여, 기존의 노동조합 간부들을 교육하고, 노동자들 가운데서 지도력을 갖춘 인재를 발굴하여 노동조합 지도자로 훈련시키는 일에 주력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많은 공장에서 노동조합이 생겨나고, 노동조건이 개선되었다. 결과적으로, 산업선교는 노동자 사회에서 높은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러나 기존의 노조 지도부는 노동자의 권익향상과 노동사회의 변화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에 노총과의 협력은 분명한 한계를 갖고 있었다.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국내 경제는 고도 성장을 목표로 하면서 무리한 수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덤핑 수출을 위한 노동자들의 저임금을 강요하였다. 이에 따라 1970년 전태일 분신사건이 발생하고, 노동자들의 투쟁이 급증하며, 지식인들도 노동 문제에 대한 관심을 높여 가게 된다. 박정희 정권은 1971년 12월에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하고, 1972년 1월에는 국가보위법을 제정하여 체제의 유지와 자본 축적을 원활히 이루기 위해 노동조합의 단체 행동권과 교섭권을 크게 제약했다. 이어서 1972년 10월 출범한 유신체제 아래 노동 운동은 자본가와 정치 권력으로부터 직접적인 탄압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한국노총과 산별노조는 이러한 당국의 대응에 순응하면서 유신체제에 안주했다. 한국노총의 어용화에 따라 산업선교는 기존 노조간부를 통한 활동을 지양하게 된다. 이 기간 산업선교는 노동자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하고 조직화하는 데 중점을 둠으로써 실무자 중심에서 노동자 중심으로 그 활동이 변화해 갔다. 또 한 가지 주목할 만한 점은 초기에는 각 교파 간 경쟁적으로 시작된 선교 활동이 이 시기에 에큐메니칼 차원에서 연대를 형성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1971년 산업사회와 도시 빈민 사이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선교단체와 실무자들의 연합 기구가 조직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크리스챤사회행동협의체’이다. ③ 소그룹활동을 통한 산업선교 (1973~1979) 노동법이 개정되고 노동운동이 탄압을 받는 상황에서, 심지어 한국노총과 같은 조직 상부가 어용화 됨에 따라 기층 노동자들은 자주적인 노동운동을 추구하게 된다. 이때 산업선교회와 J.O.C.는 기층 노동자들의 지원자가 되었고 그들의 투쟁을 돕는 동반자가 됐는데, 이러한 과정에서 민주노동운동이 시작되게 되었다. 이 시기 산업선교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다양한 소그룹을 조직하고 노동자들을 의식화시켰으며, 이렇게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대기업들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어용 노조를 민주화하는 작업을 지원함으로써 민주노조운동을 활발하게 하였다. 또한 노동자들의 근로조건을 개선하는 데에도 도움을 줘 큰 성과를 거두었다. 동일방직, 반도상사, 태양공업, 대한모방, 청주시 청소부 사건, 진로주조, 대일화학, 해태, 롯데, 원풍모방, 남영나이론, 경성방직, 방림방직 등에서 노동자들의 결속된 힘을 발휘하여 정권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도시산업선교회의 소그룹 활동은 대부분 여성 노동자들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이 소그룹에 참여한 초기 동기는 대개 여가생활과 교육에 대한 필요가 주를 이루었다. 당시 사회적으로 여성들이 교육을 받고 여가를 즐길 수 있는 환경이 사회적으로 보장되지 않았던 상황에서, 도시산업선교회의 소그룹 활동은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모임이었다. 소그룹은 노동자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관심 분야를 결정해 조직했는데, 초기에는 주로 꽃꽂이, 요리, 노래와 같은 취미활동이나 교양 활동을 선택했다. 이처럼 소그룹 활동은 취미생활과 같은 개인적인 적인 동기에서 시작되었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집단적인 경험을 나누는 장으로 변모했다. 소그룹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삶과 주변에서 일어나는 구체적인 사건들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들은 사업주 및 남성 노동자들의 비도덕적 행동, 공장에서 이루어지는 비인간적인 대우. 성차별 뿐만 아니라 각종 사회적 차별과 멸시에 대해 본인들의 생각과 경험을 나누었다. 이러한 모임은 여성 노동자들에게 자신들이 최소한의 생존과 인간의 기본적 권리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구조의 불평등 때문임을 깨닫게 했으며, 결과적으로 여성 노동자들의 관심을 노동문제에 집중하게 했다. 여성노동자들은 노동문제에 대한 관심이 심화되고 의식화가 진행됨에 따라 취미활동을 위한 소그룹이 아닌 노동조합, 근로기준법, 노동운동사 등을 주제로 한 모임을 구성해 갔다. 그리고 소그룹 운영을 담당할 실무자를 노동자 중에 선정하여 관리하게 하였다. 여성 노동자들은 소그룹 내에서 함께 정한 오늘의 주제에 대해 평가를 공유하고, 노동문제나 사회적 문제에 대한 토론을 진행하기도 했다. 여성노동자들의 변화는 의식적인 수준에서만 머물지 않았다. 먼저 여성 노동자들 간의 상호 관계가 변화되어 갔다. 초기에는 조장이나 반장과 같은 중간 관리자 여성노동자들과 일반 여성노동자들 간에 일정한 상하 관계가 존재했으나, 소그룹 활동을 통해 여성 노동자들 간의 유대가 형성됨에 따라 작업장 안에서의 위계적 구조가 점차 해소되어 갔다. 또한, 소그룹 활동을 통한 의식화 교육으로 변화된 노동자들은 다양한 노동운동을 실천했다. 대표적으로는 동일방직, 반도상사, 콘트롤데이타, 원풍모방 노동자들의 민주노조운동을 들 수 있으며, 1973년 대한모방 강제예배 반대투쟁, 1976년 어용 노조의 민주노조로의 개편을 시도한 남영나일론 투쟁, 1977년 방림방적 체불임금 투쟁, 1979년 해태제과 8시간 투쟁 등 또한 소그룹활동으로 의식화된 노동자들이 일구어낸 성과라고 할 수 있다. 다음은 영등포산업선교회 총무였던 조지송 목사가 간추려 정리한 70년대 영등포산업선교회 소그룹 활동의 조직형태와 활동내용이다. 조직인원수 – 5명이상, 10명이내 조직구성원 – 반듯이 동일한 공장이어야 하고 같은 부서에서 일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 남성과 여성을 분리해서 조직한다. 임원 – 회장, 서기 (회계 겸임) 각 1명 모임내용 – 생활과 직접관계된 문제를 광범하게 치급한다. (예-꽃꽂이, 요리, 예절, 노래, 가정, 결혼, 육아, 한문, 경제, 노동법, 정치, 종교 등) 회비 – 각 조직에서 자유적으로 정하나 월300 ~ 500원을 초과하지 않는다. 회비 전액은 각 그룹이 독자적으로 사용한다. 가입, 탈퇴 – 가입과 탈퇴는 자유이지만 이직하거나 퇴직하면 자동 탈퇴된다. 통합, 분리 – 한 조직의 회원수가 10명 이상으로 증가하면 두 개로 분리하고, 5명 이하로 줄어들면 그룹을 해산하고 각자가 원하는 그룹에 편입한다. 그룹조직수 – 한 공장에 몇 개의 조직이 있던지 제한하지 않는다. 다만 전체 그룹수는 100~120 정도로 조정한다. 그룹 수가 적으면 조직력을 행사할 때 힘이 약하고, 너무 많으면 관리 능력의 한계로 인해 교육, 훈련을 효율적으로 할 수 업세 되기 때문이다. 그룹모임 – 매주 1회 정기모임(1시간 30~2시간)을 갖는다.
왜 이런 형태의 조직이 필요했을까? 모든 문제를 노동현장으로 집중하기 위해서다. 연구, 토론만 하는 모임이라면 아무나 같이 모여도 된다. 그러나 입장이 다른 사람들이 다양하게 모이면 이론적이거나 관렴적인 토론만 반복하는 우를 범하기 쉽다. 따라서 삶의 터전이 다른 사람들과 같이 조직활동을 하는 것은 매우 비생산적이라고 생각됐다. (중략)
매월 전체모임수가 300~400회, 총인원 3,000여명, 이 외에도 각종 집회에 참여하는 노동자는 2~3천명을 넘었다. 5~6천명의 노동자들이 매월 모이고 흩어지는 일을 365일, 년중 반복했다. 여기서 꼭 지적해야할 것이 있다. 노동자들의 모임은 그것이 규모가 크거나 적은 것을 막론하고 노동문제와 직결된다는 것이다. 비록 꽃꽂이나 요리실습 모임이지만 이 시간의 중심 화제는 현장이야기로 귀착된다는 것이다. 정부와 기업이 이런 평범한 노동자모임을 두렵게 본 것은 바로 이때문이었다. 노동자들의 말이 쌓이고 시간이 쌓임과 동시에 인권에 대한 의식도 쌓였다. “노동3권이란 무엇인가”, “근로기준법에는 어떤 내용들이 있는가”, “노동조합은 왜 필요한가”, “사회정의, 인권, 자유, 평화” 등등 광범위한 정치, 경제, 사회문제에 대하여 눈을 뜨게 됨과 동시에 노동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법, 인간학대, 임금착취 등 온갖 분노와 서러움이 가슴에 쌓인다. “무릅을 꿇고 사느니보다 서서죽기를 원한다”, “불의를 거부해야 한다”, 이렇게 울부짖지만 그러나 감정대로 싸울일이 아니다. 싸움에는 조직이 필요하고 전략과 전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듯이 대결해야할 문제를 접어둔채 묵묵히 조직력을 키우는데 열중했다.
④ 산업선교에 대한 탄압과 수호 (1978~1983) 유신정권은 산업선교가 국가 권력과 정책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산업선교회를 파괴하기 위한 시도를 다방면으로 전개했다. 당시 서울 시경 제2 부국장이자 영도교회의 장로였던 김재국은 1976년에 『한국기독교의 이해』라는 책을 출판했고, 홍지영이라는 인물이 회장을 맡고 있는 정체가 분명하지 않은 한국종교문제연구회라는 단체는 같은 해 『한국기독교와 공산주의』라는 책을 발간했는데, 이 두 저서는 산업선교를 공산주의와 관련시켜 비판했다. 그 후, 홍지영은 1977년에 『정치신학의 논리와 행태』, 『노동운동의 사상적 기초』, 『산업선교는 무엇을 노리나?』 등의 책을 출판했으며, 1978년에는 『이것이 산업선교다』를 발간하면서 지속적으로 산업선교회의 활동을 불순한 노동운동과 공산주의 활동으로 맹비난하였다. 정부는 산업선교회 총무 목사의 설교를 문제 삼아 구속하고, 그곳에서 활동하던 외국인 선교사를 추방하기도 했다. 1978년 8월 신민당사를 점거하며 노동 투쟁은 감행한 YH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경찰은 YH노조 간부들이 산업선교의 배후 조정을 받았다고 발표하며 산선 관련자들을 구속했다. 10.26사태 이후 광주 민중을 대규모로 탄압하고 나타난 신군부세력은 위기에 직면한 한국 경제를 전면적이고 근본적으로 재편하지 않고, 1970년대 유신체제하의 사회경제정책을 그대로 따르면서 오히려 더 많은 노동자와 대중의 이익을 저해하는 정책을 시행했다. 정부는 구조적인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저임금정책을 강화하고, 노동운동을 법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억압하며, 강력한 임금동결정책과 노동강도의 강화를 추진했다. 군부세력은 외국자본과 국내 기업들의 이익을 보장하여 권력을 유지하고자 노동운동을 탄압하였고, 노동법을 개정하여 민주노조를 모두 파괴함과 동시에 산업선교에 대한 탄압도 강화하였다. 전두환 정권은 산업선교와 관련된 노동조합 간부 및 노동운동 지도자들을 ‘정화조치’라는 명목으로 해고시켜 산업선교의 활동을 마비시켰으며, 블랙리스트를 작성하여 산업선교회 회원들을 해고시키도록 하고 재취업을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 또한, 삼자개입금지법을 통해 산업선교회가 노동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통로를 차단하였다. 이 같은 정부의 탄압과 함께 교권 내에서도 산업선교 활동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확대되며 산업선교 활동을 반대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 시기 산업선교는 70년대 활동을 부분적으로 이어갔지만, 정부의 민주노조 파괴와 강력한 탄압으로 인해 상황을 유지하는 데 주력해야만 했다. 많은 회원이 해고되었고, 실무자들은 구속되었으며, 미디어를 통한 왜곡된 보도와 공장 내 반대 세력의 압박 속에서 심각한 상황에 처하게 됐던 것이다. 하지만 산업선교는 이 같은 탄압 속에서도 예배와 성경공부, 새로운 노동자들과의 접촉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이어가며 운동을 지속해 나갔다.
⑤ 새로운 모색과 활동 (1984~ ) 노동운동은 1980년 5월 17일 이후 강력한 탄압으로 약화되었으나, 1983년 말 블랙리스트 폐지를 위한 투쟁을 통해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다음 해에는 대구 택시기사들의 임금 인하 시위를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운송노동자들의 싸움이 번졌으며, 새로운 노동조합들이 결성되었다. 1985년에는 대우자동차 노동자들의 파업이 6월 24일부터 29일까지 구로동맹 파업으로 이어져 한국 노동 운동사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광주민항쟁 이후 현장으로 쏟아진 학생 출신 노동자들의 열정적인 활동은 구로동맹 파업을 계기로 노동운동이 단순히 근로 조건의 개선을 넘어 사회변혁을 향한 이념적 목표를 명확히 하게 되었다. 또한, 서울노동운동연합 등 다양한 노동운동 조직이 형성되어 지역별로 활발히 활동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노동운동가들이 현장에서 해고되거나 구속되며 고통을 겪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의 노동자 대투쟁을 통해 한국의 노동 운동은 양적으로나 질적으로 크게 발전했다.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4.13 호헌조치로 인한 민심의 분노는 6월 항쟁으로 발현되었으며, 그 뒤 이어진 노동자들의 대규모 파업 투쟁은 한국 변혁 운동사상에서 이례적인 규모를 자랑했다. 이로써 노동운동은 급격한 진전을 이루었고, 노동조합은 노동운동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맡게 되었다. 산업선교는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새로운 인재를 확보하고 교육하는 데 주력했다. 또한, 대중 교육 프로그램을 강화하고, 노동운동에 관한 전문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료실을 운영하여 다양한 자료들을 생산, 배포하였다. 산업선교는 이 같은 활동을 통해 지역노동운동을 지원하였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 노동운동이 다양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노동교회(민중교회)가 본격적으로 설립되어 지역사회에 뿌리를 내렸고, 1985년 2월에는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기노련)이 조직되었으며 이를 기초로 전남, 인천, 서울 등 지역조직이 탄생하여 활발한 활동을 펼치게 되었다. 산업선교는 기노련이 창립되는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으며, 노동교회와 기노련과의 긴밀한 관계 속에서 80년대 노동자들의 다양한 문제들을 함께 대처해 나갔다. 한편,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의 성수교회는 기장산업선교회 역할을 담당하였는데, 1984년에 성수지역에 설립되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하면서 서울동부지역 노동운동 발전에 기여했다. 1987년 7월부터 9월까지의 노동자 대투쟁 이후, 노동조합의 수가 급증하는 시기에 산업선교는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한 노동자 대중 운동을 지원하고 강화하기 위한 교육, 훈련, 투쟁 지원 등을 실천했다. 이와 동시에 기독노동자 대중운동을 지원하는 단체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다. 이러한 노력은 일반 노동운동이 점차 강화되고 발전하는 현실 속에서 기노련 및 민중교회의 강화와 발전을 더욱 높이고자 하는 시도였다.
(2) 한국기독노동자연맹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 깃발 전두환 정권의 강력한 탄압으로 큰 피해를 받게 된 도시산업선교회는 그 이후,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규모지만 교육 활동이나 노동자 모임을 새롭게 조직하면서 기독노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 같은 과정에서 1983년 말 유화국면에서 노동운동이 다시 활성화되는 가운데 이에 대한 지원 활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에서 일부 노동자들은 기독노동자들의 역량을 하나로 결집시키고자 했다. 1985년 2월 3일, 산업선교회나 교회를 통해 활동하던 기독노동자들과 과거 산업선교회와 관련이 있던 선배 노동자들의 주도하에 한국기독노동자총연맹(기노련)이 설립됐다. 기노련은 창립선언문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정신에 따라 이땅에 노동운동의 발전을 통하여 노동자의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지위향상을 도모하고 진정한 민주노동사회를 구축하기 위한 노동자의 주체적 조직”으로 자신을 규정하며, “부조리한 현실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이고 구조적인 사회의 모순과 이를 지배하는 모든 세력을 세상의 악으로 규정하고, 이에 대항하여 전체 민중과 함께 끝까지 싸워나갈 것”이라는 목표를 밝혔다. 기노련은 초기에 일반 교회 산업전도부 신자들과 산업선교회의 회원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설립 이후, 지역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자 지역 조직을 확장했다. 기노련은 기노련 시문을 발행했는데 이는 전국 각지의 투쟁 소식을 널리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기독교라는 합법적인 울타리를 이용해 기노련은 노동운동을 지원하는 대중 공개조직으로 활동했다. 기노련 조직구조는 최고 의사결정 기구로 중앙위원회와 사무국이 있었고, 사무국은 교육부, 조직부, 홍보부, 대책부의 네 개 활동부서를 포함했다. 초대 회장으로는 1970년대에 삼원섬유의 지부장을 역임한 유동우가 추대됐으며, 사무국장은 콘트롤데이타 노조간부 출신인 한명희가 맡았다. 연맹은 교육, 조직, 홍보, 선전, 조사 연구, 대책 상담 등의 다양한 사업을 진행하였다. 기노련신문 창간(1986년 8월 1일) 한국기독노동자 전남지역연맹(전남기노련)은 지역에서 최초로 지역기독교 노동자 조직을 구축한 조직으로, 1985년 6월 16일 창립됐다. 1970년대 전남지역에서 이어오던 들불야학과 가톨릭노동청년 회원 중심의 노동운동이 80년 광주항쟁으로 심각한 피해를 받자, 이를 대신해 노동현장의 조직화를 위한 외부 지원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전남기노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시작되었다. 이후 1985년 12월 2일에는 한국기독노동자 인천지역연맹(인천기노련)이 창립되었다. 인천과 부평지역에서 민중교회를 통해 활동하던 노동청년들이 모여 인천기노를 결성했다. 이들은 1985년 3월 10일 근로자의 날에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1986년 5월 3일 인천항쟁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1987년 7월 6일에는 ‘민주현법쟁취 전국노동자공동위원회’에 공동으로 참여했으며, 7월 26일에는 인천기독노동자연맹을 중심으로 5개 단체가 모여 부평 백마교회에서 인천지역구속노동자협의회의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그러나 1987년 여름, 인천지역 노동자 여름수련회에 참가했던 회원들 중 4명이 불의의 익사 사고로 목숨을 잃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활동이 정지되었다. 이후 뜻을 같이하는 회원들이 조직을 재건했지만 변화된 노동상황 속에서 그 위상을 재정립하지는 못했다. 1980년대 인천기노는 국가의 탄압 속에 비공개적으로 활동 할 수 밖에 없었던 다양한 노동운동가들과 단체들에게 공개적으로 모일 수 있는 공간과 합법적인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한국기독노동자 서울지역연맹(서울기노련)은 1986년 9월 14일 창립되었다.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성문밖교회에서 약 80여 명의 기독노동자가 모여 창립대회를 개최하여 출범했다. 서울기노 역시 지역운동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서울 지역 산업전부와 민중교회 노동청년 등의 역량을 모아 시작됐다. 서울기노는 다양한 대중집회와 공개활동을 통해 서울지역 노동운동의 활성화에 이바지했다. 서울기노련은 공개적이고 합법적인 노동자 대중 조직을 추구하며, 지역 내 노동운동을 강화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지역노동자동맹의 건설을 촉진하고 기독교 노동자들을 의식화하고 조직화하여 노동운동과 교회 변혁운동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았다. 주요 활동으로는 지역노동자 대중집회를 개최하였는데, 1986년에는 노동문화제, 박종철 추모제, 서울지역 임금인상투쟁진행대회, 5·17 추모제, 그리고 1987년에는 서울지역 노동자 여름수련대회 등을 포함하여 다양한 행사를 기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독교 노동자를 노동운동의 주체로 세우기 위해 문화교육, 성서연구교육, 노동자기초교육 등 다양한 교육 활동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민중교회 등 여러 노동청년회를 결합하여 공동으로 조직을 형성하는데 실패하였고, 조직의 지도력을 재생산 해내는데에도 어려움을 겪어 결국 1991년 해산하게 된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