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의 벗 호죽 정진동 목사 5주기 추도식

 민중의 벗 호죽 정진동 목사 5주기 추도식

제 3회 호죽 노동인권상 시상식

전교조 충북지부 1층 대강당에서 열려

   
 

   

                                         추모사를 하는 김규복 목사(대전 빈들교회) 

목사였지만 목사와 평신도의 자리를 오가며 인생을 폭넓게 살아가신 고  정진동 목사의 5주기 행사가 12월 9일 오후 4시 30부터 7시 까지 청주에서 있었다. 식전생사는 고인의 생전영상과 음악으로 시작하였는데 추모식은 민중의례와 고인의 약력보고, 추모사(김규복 목사(대전 빈들교회) 와 연대단체 기금 전달식(조국통일 범민족연합 남측본부) 지역의 투쟁영상, 호죽 인권상시상과 가족인사와 헌화와 합창 그리고 기념촬영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호죽 정진동 목사 기념사업회의 장학금을 받은 학생

그리고 다음 날인 12월 10 일(월) 오전 11시에는 버스로 고인의 뜻을 받드는 이들이 광주 망월동으로 참배하러 갈예정이다.

고인은 충북 청원군 호죽리에서 출생하셔서 18세 까지는 성경고등학교를 마지고 고향에서 부모를 도와 농사와 나무하기등 전형적인 농촌의 청년으로 성장하셨다. 회심후 1958년 22세에 대한신학교(현 대신신학교) 이어 1960년에는 단국대학교 문과를 졸업하신다. 그후 고향의 덕산장로교회의 전도사로 목회를 시작한다.

이후 정목사는 대신신학교를 졸업하시고 1972년 영등포 산업선교회 총무셨던 신학교 동기 조지송 목사를 청주에 모시고 강연을 한 것이 계기가 되여 크게 감명을 받고는 서서히 산업사회로 이행하여 노동자들이 출현하는 시대에 맞는 선교를 하기 위하여 방향을 틀어 본격적인 산업선교를 하기 위하여 산선훈련을 시작하기 위하여 노동자가 된다산업선교 실무자는 세계적으로 약 1년간 현장노동을 해야한다는 전통)

비록 농촌이였지만 일반목회로 기반을 다 잡았는데 다시 백지위에서 산업선교로 전환하여 일을 하신 흔치 않은 분이다. 장신대에서는 조지송목사님과 동문수학을 하셨지만 산업선교를 하기위하여 조지송 목사에게 직접 실무와 이론의 훈련을 받으셨다.

늦은 나이에 선업선교 시작

그러나 정목사는 나이가 많아 공장취직이 안되 취업에 많은 고생을 하셨다고 한다. 산선의 노동훈련은 전통은 일자리를 찿고 취직를 하는 것 자체가 시작이다. 그것은 노동자들이 취업하려고 하여도 쉽게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체험을 하는 것이며 일자리를 찾는 것 자체가 훈련의 한 과정이였다. 하루종일 아니 몇날 몇일 동안 일자리를 찾지 못하여 공장과 도시의 뒤안길을 헤메이는 가장 노동자의 심정을 헤아리는 것 부터가 바로 산업선교의 시작이다. 노동자 예수의 심정을 체화해 가는 것이다.

그리고 산업선교는 노동과정을 통하여 노동자들의 심정을 이해 하는 것만으로 끝나지 않는 다. 그 과정을 통하여 성직자 혹은 지식인이 가난한 노동자를 돕고 무엇을 한다는 얄팍한 우월감을 버리는 것이다. 그냥 노동자의 정신으로 삶으로 살아가고 노동자의 생활비로 살아보는 것이다. 그래야 그들의 여건과 바램, 그들의 소망과 꿈을 아는 것이다. 지금 대선 정국에 노동자 서민을 위하야 무엇을 하겠다는 약속은 사실 믿기 어려운 일이다.

현재 우리교단의 일하는 예수회(pck urm) 회원들이 바로 이러한 URM의 전통위에서 노동훈련을 받고 태동된 조직이다.  정진동 목사의 노동은 시내버스 앞자리에서 안내양 삥땅(돈 떼어먹는 것)못하게 계수기 하는 일을 하게 된다. 가기서 많은 부조리와 비인간적인 대우를 목도하게 된다.

그리고 청주의 사창동에 바로 그 유명한 청주산업선교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보수적인 우리교단의 지역교회의 정서상 정목사의 산업선교 사역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일렀다. 스스로 노동자가 되여 먹걸리를 마시고 담배를 배우는 일도 일단은 큰 충격이였다. 그러나 정목사는 그런 겉치례는 사실 복음의 본질이 아님을 아셨다.

결국은 스스로 예장 통합측을 탈퇴하고 좀 자유로운 분위기의 기독교장로회로 소속되여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산업선교를 하였지만 이도 길지 않았다. 청주의 모든 사회적 문제들을 붙틀고 씨름을 하는 동안 정목사는 사회의 기득권층들로 부터 비판을 받고 그들의 친구인 교회의 지도자들은 그의 사역을 불온시 하게 된다. 그래서 결국은 기독교장로회도 탈퇴를 하시고 독자적으로 산업선교를 하신 유일한 분이다.

   
 

교회의 보호없이 독자적으로 하신 투쟁

사실 7-80년 대에 교회 혹은 교단의 지원과 보호없이 산업선교를 한다는 것은 더우기 지방에서 참으로 어려운 일이였다. 그러나 정목사는 굴하지 않고 온 집안이 나서서 청주의 가난하고 힘든 민중들의 벗으로 평생을 사셨다. 그리고 당시 산업선교가 정치적으로 집중적인 탄압을 받게 된데에는 바로 다수 노동자들이 깨여나고 그들의 권리를 위하여 나서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 집권층의 두려움 때문이였다. 산업선교는 싫턴 좋턴 당시도 지금도 가장 첨예한 정치권력에 즉 군사독재에 대한 끊질긴 비판과 도전이였기에 그렇게 되였다. 

또 하나 정목사의 청주 노동교회와 산업선교는 우리가 아는 교단의 틀속에서의 안주하는 제한적인 선교가 아니였다. 그 분의 자세한 일생이 아직은 정리가 되지 않아서 논란의 여기자 있지만 예을 들어서 산업선교에서 지역운동 그리고 노동운동과 민족통일운동의 자리까지 나가게 되였는 데  한때 지역의 열화같은 성화에 못이겨 초기 민중당 후보로 청주시장에 출마를 한일등은 많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목사로 선교의 자리와 영역에 대하여 많은 시행착오와 실험을 하신 분이라고 보여진다.

   
                   생전에 길거리 노동자 집회에서 연설하시는 정진동 목사

그러나 분명한 것은 정목사는 교회를 나왔지만 한번도 예수를 버린적이 없고 목사를 포기한 적이 없는 신앙인으로 죽는 날 까지 예배를 드리고 설교를 하고 성경의 메시지를 제대로 전달하고 살았는데 지금의 청주 노동교회가 그것을 증명한다.

사람들은 정목사가 기성교회(교권)으로 부터 버림을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은 정목사가 기성교회을 버린 것이다. 교권의 비위를 맞추고 얻어먹는 것을 차버린 것이다. 교권주의자들이란 옛날이나 지금이나 오직 관심은 하나님이고 교인인것 같지만 교인들의 주머니를 울거내여 교회를 키우고 자기의 자리를 공고히 하고 그 돈으로 나가서 자기의 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정목사는 교회와 교인을 버린 것이 아니라 교권의 놀음과 권력놀음을 버린 것이다.  노회의 자리와 총대 부서장 파벌에 줄서고 그 영향력으로 행세하고 돌아다니며 거들먹 거리고 얻어 먹는 일을 버린 것이다.

   
 

그러나 정목사가 세상을 떠난지 5년을 지난 지금도 뒤를 돌아보면 그는 진정으로 민중의 친구였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그의 추도식에는 설교와 기도 찬송가가 불러지지 않았지만 청주의 민중운동의 거목으로의 자리매김고가 우리 사회의 진보와 민주주의를 소망하는 많은 이들이 그를 존경하고 기념하고 추모하는 것을 보면 알수 있다.

목사지만 교회의 담을 헐고 세상으로 들어가심

정목사의 장례식도 교회식이 아닌 지역의 인사들로 구성된 사회장으로 치뤄졌고 당시 들어온 조의금으로 행사를 진행하고 남은 경비를 적립하여 3년전 부터는 고 정진동 목사의 정신과 의미를 기리는 "호죽 노동인권상"을 제정하여 시상하기 시작하기 시작 하였다고 한다. 현재도 매월 약 100만원의 회비를 모아 년간 1천만원씩을 적립하여 시상기금으로 적립을 하고 있었다. 특히 이 상을 공모하고 심사하는 일을 충북대 허석렬 교수가 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사회운동 단체와 지역의 시민운동가와 그 자녀에게 장학금을 전달하는 감격적인 것을 보았다. 이 일에 정목사의 가족들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기념사업회의 회장은 지역의 본 교단 김태종 목사가 맡았고 사무국이 조직이 되여 있는데 앞으로 전국적으로 확장할 것이며 기념사업회에서 전기도 기록할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그야 말로 청주지역의 민족운동가셨던 정목사의 족적을 느낄수가 있었다.

호죽 노동인권상 시상식은 더 많은 정진동 목사를 길러내는 셈이였다.

정목사와 같이 초기 부터 뒷바라지를 하고 여전도사로 동역하시다가 현재 뒤를 이어서 청주 산업선교회와 노동교회를 사역하고 계신 조순형 전도사는 청주지역의 지역운동의 큰 누님이다. 그러나 이 날의 추모식 행사에는 편하게 않아서 모두가 대견하다는 듯이 지켜보고 계셨다. 모두가 청주지역의 노동조합 전교조 시민단체의 실무자들이 일사분란하게 진행하는 것을 보았다. 가족은 추모식 순서중 차남이 나와서 아버지를 기리는 인사를 하는 것이 다였다.

정목사의 이러한 추모사업은 오직 정목사의 몫이였다. 가족이 없어서는 안되겠지만 가족이 주역이 아니였다. 그 기념사업회가 보고한 자세한 재정재역도 돗보였다. 작년도의 수입과 결산내역과 전체 규모를 순서지에 내놓았는데 민주화 운동단체와 개인들이 어렵고 힘든 일을 한다는 핑계롤 받기는 잘받고 보고는 제대로 하지 않는 다는 말을 무색케 하였다. 앞으로도 매년 1천만원씩을 적립하여 추모사업의 기금을 모아간다는 계획은 실로 놀라웠다. 

목사로는 정목사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본 교단의 김규복 목사와 장창원 목사 부부가 참여 하였는데 본인도 존경하는 정목사의 장례식은 물론 추모에 한번도 참여하지 못한 불효를 벗고자 추운 날씨에도 무리를 해서 내려갔다. 그리고 청주에 간 김에 지난 번 80회 생신을 지내신 조지송 목사가 54세때 질병으로 84년에 영등포산업선교를 은퇴하시고 내려가셔서 오랜동안 거주하시던 미원면 옥화대의 "하나의 집" 에 들려서 그 체취를 잠시 느끼고 담아왔다.

   
좌로 부터 사업회 회장 김태종 목사 장창원 목사 본인 조순형 전도사, 김규복 목사 장석숙 동지

원래 이 집은 조지송 목사와 가까운 지인들이 마음을 모아 노후에 모여 살요량으로 십시일반으로 내여 구입을 하고 조지송 목사가 먼져 내려가서 생활을 하였지만 몇년전 부터 고령과 건강의 문제로 상경하신후  노후되여 방치된 감이 있었다. 이렇게 정목사는 조지송 목사와 동년배로 동기면서 서로 주고 받은 많은 이야기들과 자취들의 한조작이라도 예장뉴스 한칸에 남기는 것이 도리하고 생각하여 담는다.

   
                                                            옥화대 하나의 집 전경

   

                                        하나의 집 현판은 광주의 강희남 목사가 썼다.

                      8-90년대는 많은 노동자들과 시민단체들의 모임이 있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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