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용석 전 의원 소천(1945-2025)

                           원풍모방 노조의 산 증인 

전 원풍모방 노조지부장, 국회의원, 노동부 장관역임, 근로복지공단 이사장 역임

   
 
   
 

1970년대 민주노조 운동 지도자중의 한 분으로 최초 노동자출신으로 노동부 장관까지 한 방용석 전 의원이 지난 8월 24일 소천했다. 1964년 19세에 진천 광혜원고를 졸업후 서울로 상경해 원풍모방 전신인 한국모방에 입사해 일하며 10년 후 1975년 당시 전 집행부의 어용과 부정을 정상화를 시키는 과정에서 후임 지부장(노조위원장)이 된다. 그러나 유신말기와 1980년 신군부의 등장으로 인하여 강제해고와 투옥된다

이후 영등포산선에 원풍노조원 만이 아니라 노동자들의 의식화와  활동을 지원하는 일을 한다. 당시만 해도 국가와 기업 산별이 합세한 일방적인 억압에 조직을 보존하는 것만으로도 힘겨운 시대였다. 동일방직과 YH무역 노조를 끝으로 일체의 노동운동이 사라진 뒤에도 원풍은 밖의 방용석의 지도하에 이무술에 이어 정선순이 위원장을 마지막으로 1983년 초까지 결사항전으로 버틴다. 이런 기록은 원풍 30년사 책자에서 밝힌 바 있다.

방지부장은 옥에서 출소 후 당시 노동운동지도자들과 함께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노복)를 만들어 외곽에열악한 노동운동 지원을 한다. 그리고 원풍노조가 잘될 때 모아 원주 지학순주교에게 맡겼던 기금으로 대림동에 연립주택을 구입해 사무소로 활용한다. 원풍 노조원들은 현장에서는 밀려났지만 일부가 흩어지지 않고 부서별로 모임을 이어간다. 그후 방지부장은 김대중 총재 노동 담당 특별보좌관 등을 계기로 1996년 15대 총선에서 새정치국민회의 전국구 국회의원이 된다.

   
 

이후 2001∼2002년 한국가스안전공사 사장에 이어 김대중 정부 말기인 2002∼2003년 노동부 장관을 지내 현장 노동자 출신의 첫 노동부 장관으로 기록된다. 이는 당시 폴란드 그다니스크 항만 노동운동가 출신으로 훗 날 대통령이 된 레흐 바웬사와 비유하기도 한다. 방지부장은 영등포산선 총무 인명진목사와 동년배로 산선서 활동한다. 어머니의 지극한 신앙으로 서울로 상경할 때는 목회자를 꿈꾸기도 한 바 있으며 마지막도 집사로 소천하여 출석 교회 예식으로 고별했다. 

장례식에는 고인의 보좌관을 지내고 광주에서 20대 국회의원을 지낸 최경환 전의원과 우원식 현 국회의장 천정배, 박우섭, 이목희 전원등도 문상했다. 장례식장은 가족과 함께 방지부장과 함께 부지부장을 지낸 박순희(안네스)와 당시 원풍노조 전 부지부장 박순애, 양승화와 황선금, 김금자 대표등 조합원들이 고인의 가는 길은 지켰다. 몇달전 부터는 조합원들이 조를 짜서 방지부장을 돌아보는 등 마지막 까지 원풍의 의리를 지킨 것으로 전해진다.

원풍노조가 1982년 밖으로 나온 후 영등포산선과도 결별하는 과정에서 교회가 우리를 버렸다는 마음으로 조합원들은 아직도 감정들이 남아 있지만 방지부장은 원풍 30년사 책자에서 산선과 원풍은 서로의 자리와 입장이 달랐다는 것으로 정리하고 있다. 방지부장은 이후 정신적으로는 원풍 노조원들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동지지만 그의 삶의 자리나 몸으로는 더 이상 운동가적 삶이 아닌 사회 지도층이 된 것은 사실이다.

같은 시기 방지부장과 함께 부지부장을 지내고 함께 해고된 박순희(안네스) 같은 경우는 오늘 날 까지 재야 노동사회운동의 현장에서 활동한 것과는 비교가 된다. 천주교인으로 같은 시기 동일방직 이총각 YH 최순영 컨트롤 케이타 한명희 노조위원장들과 함께 70년 민주노조운동을 하던 동지들과 70 민노를 조직하기도 한 바 있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사회적 평가도 문제로 지적된다.  

한편 유족으로는 부인 명인숙(선옥)씨와 2남과 며느리, 손을 두고 있으며 구로병원서 26일 발인해 화장후 안성 유토피아 추모관에 안치되였다. 원풍 조합원 출신으로 1980년 가장 먼져 해고되 민주화운동유공자가 된 내 처도 이르기를 방지부장도 그렇고 부인으로 부터 남다른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필자 개인적으로도 신학생 시절 부터 알고 지냈지만 서로 다른 삶을 살다보니 고 조지송목사님 소천시 뵌 것이 마지막이다.

1980년대 엄혹한 시절이었고 누구하나 도와주지 않는 가운데 오직 여성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하여 원풍노조를 이끌어 간 것은 기적같은 일이다. 이들은 어렵더라도 어떻게 하든지 우리가 버텨야 한다는 신념이 오늘 날 방지부장을 만든 것이고 원풍노조의 역사를 한국노동운동사에 기록하게 한 것이다. 그런 연유에는 방지부장의 남다른 혜안과 열정이 기초한 것이며 이에 감동한 조합원들의 의리가 합일 된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원풍 조합원 출신으로 성공회대를 나와 제주도에서 작가로 활동중인 장남수의 추모사를 소개한다. 

오늘 원풍동지회(원풍노조해고자모임)는 반세기를 넘어 함께해온 소중한 선배이며 동지인, 방용석 지부장님을 떠나 보냅니다. 투병 중 수차 고비를 넘긴 했으나 불시에 닥친 마지막 이별은 야속하고 황망하기만 합니다. 국회의원, 장관, 공기업의 대표 등 사회적 호칭이 많지만, 우리 ‘원풍동지회’는 자녀들조차도 ‘방 지부장님’라고 인사하는 그 호칭 그대로 영원히 ‘방 지부장님’으로 남을 것입니다.

1945년 충북 진천의 가난한 농촌 가정에서 태어난 방용석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어머니가 손에 쥐어준 5000원을 들고 돈 벌러 서울로 향했고, 원풍모방의 전신인 한국모방의 노동자가 되었지요. 돈을 아끼려고 매일 국수를 삶아 먹고 출근한 성실하고 명민한 그는 퇴직하는 동료들에게 퇴직금을 지급하지 않 는 회사의 부당함을 모른 척할 수 없었습니다.

1972년 그렇게 운명처럼 노동조합이 다가왔고 어느새 영원한 ‘방지부장’이 되었습니다. 합리적이고 탁월한 전략가이자 핵심을 관통하는 논거로 문제를 해결하는 지도력에 힘입어 원풍노조는 민주노조의 상징이 되었지요.

’70년대 한국의 바웬사’라고도 불리던 시절의 전국섬유노조 원풍모방지부의 방용석 지부장은 원풍노조만의 ‘방 지부장’이 아니었습니다. 민주노조들과 연대해 징역과 수배, 협박, 회유를 넘어 맹활약한 그때가 어쩌면 방용석의 80년 인생에서 가장 빛나던 시절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원풍노조가 파괴당한 1982년까지의 ‘민주노조 10년’을 “내 인생의 전성기”라고 회고하셨으니까요.

   
 

그 이후 통일시대민주주의국민회의 등 민주화운동의 일선에서 활동하셨고, 1984년에는 70년대의 민주노조 운동가들과 함께 결성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의 위원장을 맡아 <민주노동>을 제작해 전국의 노동조합에 배포하며 전국 노동현장을 찾아 교육과 조직지원 활동을 하시던 모습을 선명히 기억합니다.

그런 와중에 운동의 이념적 갈래로 분열과 갈등을 겪기도 하셨지요. 노동자들 교육과 조직결성 지원 활동에 큰 가치를 두었던 방 지부장님의 방식이 ‘조합주의, 경제주의에 매몰된 조직보존론자’로 매도되던 참으로 씁쓸하던 그 시기에도 초지일관하던 모습 또한 선명히 떠오릅니다.

그렇습니다. 초지일관! 적당한 타협 같은 건, 그래야 하는 이유를 스스로 납득하지 못하는, 그래서 ‘오만하다’, ‘독선적이다’ 비판의 화살을 받기도 하셨지요. 좀 느슨하면 당신도 덜 고단하실 텐데 타고난 성정 때문에 그건 안되는 분이었습니다. 좋게 말하면 정치력, 속되게는 정치적 술수를 부리지 못하는 체질이시니까요.

그런 분이셨기에 김대중 대통령의 신뢰를 받아 정치의 주요 장을 맡아 일할 때도 한 점의 사용이나 비리의 유혹에 단호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세간의 관심만큼 무게도 컸으련만 ‘방 지부장님’에 대한 우리의 신뢰는 어긋나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건 ‘노동자’였고, 가장 소중하게 여긴 사람은 1970년대부터 함께한 동료들이었음을 병상에 누워서도 온 힘을 다해 증명하셨지요. 그래서 오늘까지도 당신은 우리의 동지였습니다.

올해 가을 원풍동지회 총회는 ‘방 지부장’의 빈자리 앞에서 많이 허전할 것 같습니다. 그날은 흰 나비로라도 한번 다녀가시면 좋겠습니다. 지부장님, 결코 평범하지 않았던 80년, 이제 명예의 세월도, 고통의 시간도 다 내려놓으시고 평안하십시오. 원풍 동지회의 후배들이 마지막 길을 배웅하겠습니다.

   
 

다음은 황인오 선생(사북항쟁 동지회 회장) 이 페이스 북에 남긴 개인 기록을 소개한다.

이 분(방지부장)을 처음 만난 것은 1980년 4월 사북항쟁 후 불법체포를 피해 서울로 올라가서였다. 여의도 한국노총 위원장실을 점거하며 투쟁 중인 동일방직 노동자들을 지원하는 원풍모방 노조 지부장이었다. 동일방직을 비롯하여 수다한 민주노조 동지들과 함께 농성 중이었다. 때는 전두환 신군부 반란집단이 호시탐탐 탄압국면으로 전환할 태세로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이른바 서울의 봄이 실은 짙은 안개에 덮여 한치 앞을 예측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10만이 넘는 대학생들이 집결하여 신군부 반란집단과 건곤일척의 결판을 낼 것 같았던 5.15 남대문 대회전이 서울역 회군으로 용두사미로 끝나고 이어지는 5.17, 5.18 등의 사태전개로 민주노조들은 가혹한 탄압국면으로 몰리며 위축되었다. 나는 5.18 유혈사태를 세계에 폭로하려고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미스유니버스 대회장을 점거하려다 실패하여 불법 계엄군사재판에서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서대문 · 대전 · 대구교도소를 전전하다가 82년 12월 성탄특사로 풀려나왔다.

그 사이 원풍노조는 이미 전두환 일당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 당하고 방용석 지부장과 박순희 부지부장 등 다수의 노조 간부들은 구속되고 많은 조합 활동가들은 해고 당하여 겨울 바람 차거운 거리를 헤매며 복직과 노조 복구 등을 외치며 싸우고 있었다. 방용석 · 박순희 등의 재판을 방청하며 군부의 졸개가 된 법원의 정찰제 재판에 저항하였지만 다 아는대로 당시로선 서슬푸른 군부 정권의 총칼 아래 무력감을 느낄 뿐이었다.

83년 하반기에 이른바 유화국면에서 민청련, 즉 민주화 운동청년연합이 발족하고 뒤이어 84년 2월 노협, 즉 한국노동복지협의회가 방용석 이총각 최순영 등 7~80년대 민주노조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결성되었다. 그해 4월 반도체업체인 대한마이크로에서 노조를 결성하려다 군사 정권과 회사측의 탄압으로 노동자들이 대거 해고되는 사태에 노협이 연대하여 해고 무효 투쟁에 함께 하는 등 반인권적인 노동현장을 개선하고 노동자를 조직화하는데 앞장섰다.

당시 함께 했던 김문수는 방용석 등 현장파의 노선이 개량적이라며 노동자의 정치적 진출 등 좀더 급진적 노선을 내걸며 서노련, 즉 서울노동운동연합으로 이탈하기도 했다. 당시에는 노동자들에게 사회주의 노선을 적극적으로 가르치면서 누구보다 급진적이었던 김문순대가 이제와서 당시 투쟁했던 사람들을 좌파라고 공격하는 꼬라지를 보면 그 입을 쳐다보고 싶어진다.

사북항쟁 이후 단기필마로 활동하는 나와 달리 비록 해산되었을 망정 노조를 함께 했던 동지들과 꾸준히 결속하며 각종 활동을 활발히 하는 원풍모방 등 민주노조 출신 노동자들이 몹시 부럽기도 했다. 그런 나를 때때로 불러서 격려해주던 방용석 형이 고맙기도 했다. 수많은 복직 투쟁, 노조 탄압 저지 현장과 구속 노동자들의 재판정과 문화행사 등에서 수없이 만나고 호흡하던 80년대의 동지적 교류는 한세대가 훌쩍 넘은 지금까지 따뜻한 기억을 되살린다.

이제 막 8순을 넘기고 서둘러 떠난 형의 장례식에서 박순희 · 이총각 · 이목희 · 이철순 · 하동삼 · 장남수 · 박재익 등의 선배들과 오랜만에 맥주잔을 나누며 아쉬움을 나누었다. 91년 여름 신림 4동에 살 때, 세 식구가 한강에 가서 삼겹살을 구워먹다가 옆자리에 있던 방용석 형과 원풍모방 일행과 만난 적이 있었다. 지금의 손녀와 같은 세살 무렵의 아들을 안아 주던게 형과 사사로이 만난 마지막이었다. 아내가 84년 노협 창립 후 첫 연대투쟁이었던 대한 마이크로 노조 결성에 참가했다가 해고된 해고노동자인 것을 기억하고 위로하기도 했다.

그뒤로는 형이 노동부장관 등 공적 신분이었던 관계로 공식행사장에서 만난게 전부였다. 뜻밖의 너무 이른 부고에 아쉬움이 크다. 부디 좋은 곳에서 편히 쉬실 것을 믿고 기원드린다.

   
 ‘사북항쟁 40년’ 특집 『푸른사상』 2020년 겨울호(통권 34호) 사북항쟁은 1980년 신군부가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상황에서 동원탄좌의 광부들이 어용노조와 열악한 노동 조건에 대항해 일어났다. 항쟁의 주역들과 나눈 대담은 그날의 역사를 구체적으로 증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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