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운 목사 한일장신대서 명예신학박사 수여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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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예수병원 정상화 대책위 대변인으로 활동중인 백남운 목사(중앙 마이크) | ||
전주에서 효자동 교회서 목회하시는 백남운 목사가 올 9월에 한일장신대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신다는 소식이다. 명예박사 학위는 어느 학교에서나 심사숙고하여 수여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학교에 대한 공헌은 물론 지역사회와 동문들 사이에서도 덕망을 끼친 분이어야 할 것이다. 이번에 백남운 목사가 명예박사 학위를 받게 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지역의 목회자들과 동지들 그리고 백 목사를 아는 모든 분들이 환영하는 분위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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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주 이일학교 첫 졸업식의 서서평 선교사와 교사 학생들 | ||
한일장신대의 전신은 1922년에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 서서평(Elizabeth Johanna Shepping)선교사가 전도부인(Bible Woman)양성학교로 시작한 것을 1923. 09. 04 테이트(Mattie Ingold Tate) 선교사가 전주에 ‘여성성경학교’를 설립하므로 개교하게 된다. 이후 한예정신학원으로 운영되다가 1948. 09 광주 이일학교 복교되었다가 1961. 04. 01 전주 한예정신학원과 광주 이일성경학교가 합병하고 전주 한일여자신학교로 명칭을 변경한다.서서평에 관하여는 임희모 교수가 쓴 하단의 책과 논문을 참조(http://cafe.daum.net/ElisabethJ.shepping/YSSv/19?q=%BC%AD%BC%AD%C6%F2&re=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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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일장신대 임희모 교수가 집필한 설립자 서서평의 전기 | ||
그리고 1984. 03. 02 전주 한일신학교로 명칭을 변경하고 남녀 공학이 되여 종합대학이 되여 현재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1986. 12. 02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 인정의 인정을 받고 1998. 09 대한예수교장로회 제83회 총회로부터 총회직영신학대학으로 허락받아 학교명을 한일장신대학교로 개명하고 1대 총장 김용복 박사가, 2대 총장 이영호 교수, 제3대 정장복 교수, 4대 총장 오덕호 교수, 5대 총장 서리 구춘서 교수가 101회 총회의 인준을 기다리고 있다.
백 목사의 소회로는 얼마전 오덕호 한일장신대 총장이 교회로 방문하여 이번에 학교에서 백 목사님을 명예학박사 수여하기로 교수회의에서 결의하였다. 그러나 허락해주시라는 말을 듣고 나는 돈도 없고 큰 일을 하지 못했는 데 명예박사 학위를 주는 가? 라고 의아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보면 한일장신대가 이전하여 지금까지 발전하는 데 나도 나름대로 협력한 것은 사실이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여 동문이 되기도 하였다. 이번에 이런 저런 자료들을 정리하여 당회에서 나눈 내용이다.
1. 1984년 한일신학교(전시 한일여자신학교) 가 문교부에 4년제 대학 학력인가에 필요한 교수요원으로 내 이름(Th.M)가 필요하다고 하여 참여를 하였다.
2. 1993년 4년제 정규대학으로 승인 받기 위하여 다가산에 위치한 신교를 신일건축에 매각하여 상관면 신리에 100억에 달하는 학교건축을 완공 할 때까지 다가산에 있는 학교부지에 아파트 건축허가가 나오지를 않았다. 그 이유는 다가공원에 아파트를 지을 수 없다고 하는 시민단체들의 거센 반대를 앞장서서 설득하여 해결을 하는 데 앞장섰다.
당시 상황을 재현하면 어느 알 김용복총장이 조심스럽게 ‘백목사님은 이 문제를 해결 할수 있을 것 같으니 … 이제 몇일 지나면 종합대학 인가를 받을 수 없으니 …. 이 문제 해결을 내게 부탁하여 나는 백방으로 뛰어 시민단체들을 설득하여 허가관청인 시장에게 내가 책임지는 것으로 하여 아파트 허가와 동시에 교육부에 서류를 제출하게 되었다. 곧바로 학위인정 종합대학으로 승인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내가 한일장신대를 위하여 동참하게 된 가장 큰일로 생각한다)
3. 2004년 정장복 박사 총장취임과 동시에 전주노회에서 10년간에 1억의 후원금을 드리고 결정하는데 산파역을 하여 학교와 총장에게 협력한 일
4. 2006년도 대학 종합평가에서 학생모집이 미달되어 한학과가 폐지위기에 놓였을 때 인근 지역의 지방신학교(호신)졸업목사님들을 사회복지학과로 입학하게 하여 폐지위기를 넘긴 일이 있다.
5. 2006년 NGO대학원(이남섭교수)가 재정난으로 학과유지가 어렵게 되었다. 이에 전북도로부터 장학금 7천만원 유치케 하여 학생모집이 잘 이루어졌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대학평가원으로부터 좋은 인정을 받아 2012년부터 10년 동안 연구비 41억원을 지원받게 되었다.
6. 한일장신대학교에 상수도 시설 100억이상 공사가 되게 한일이 있는 데 학교신축당시 지하수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석회석이 너무 많고 고갈되어 상수도 시설이 절실하였지만 상관면에는 상수도가 없어 불가능하였지만, 하지만 그동안의 사회운동으로 끈끈하게 관계를 가졌던 정치권과 도지사의 도움으로 상관면 전역에 상수도 시설을 국책사업에 편입시켜 한일장신대에 상수도를 시설 할 수 있게 된일이 있다.
7. 장인이신 조준현장로(초대이사장)님 이 소천하시면서 그 자녀들로 학교에 장학금을 1억여원 조성하여 한일 장신대에 기증하여 한일장학문화재단을 만들게 된 것이다.
전주지역과 백남운 목사
사실 전주와 우리교단은 특별한 관계가 있는 지역이다. 가깝게는 7-80년대 민주화운동과 인권운동에서 특별한 의미를 갖는 곳이다. 그리고 미국남장로교회가 세운 각종 학교와 병원들이 곳곳에 남아있다. 그리고 장청운동 인재들도 많이 나왔다. 1981년 전성교회(정복량 목사)에서 장청대회가 열린 이래 이후 완산교회(염용택 목사)와 기전여자 신학교에서등에서 모인바 있다. 그 외에도 원로구룹으로 염용택, 정복량, 송봉규, 김동건, 유성룡, 최00, 이점용, 김종채 목사등이 있다.
그러나 기전학교와 예수 간호학교, 예수병원등 선교사들이 세우고 운영하다가 지역과 교단에 이양한 많은 기관들이 세월이 흐르면서 몇사람에게 사유화된 것은 아주 불행한 일이다. 지금도 예수병원을 둘러싼 정관개정문제로 인하여 전부 지역과 총회에 큰 문제가 되고 있다. 미 장로교. 선교부가 이런 일을 예방하기 위하여 운영권은 주고 토지에 대한 재산권만은 몇년전까지만 해도 이양하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총회가 앞장서서 토지를 총회유재단으로 이양을 받고 다시 바로 예수병원에 증여을 한 후 부터 예수병원의 태도는 돌변한 것으로 보인다.
전주에는 우리역사와 관련된 역사적 유물도 많다. 최근에는 한옥 마을이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전주 비빔밥이나 콩나물해장국도 유명하다. 기독교관련 초기 유적지도 많다. 또 훌륭한 목회자들이 많이 나와 예장 목회자 운동과 장청 청년운동이 맥을 이어왔다(변정수 장로, 손석모 집사등) 이런 자료들은 앞으로 더 많이 발굴되고 정리되어야 하겠다. 다만 아직은 생존해 계신 분들도 있고 진행중인 사안들이 있지만 언젠가는 역사적으로 반드시 평가해야 할 것이다.
나는 이미 우리교단의 고인들을 중심으로 몇분에 대하여 초고를 공개한바 있는 데 그 기준으로 예장내 목사, 장로들로 7-80년 민주주의와 인권을 위하여 활동한 분들이다. 이 분들은 당시 한국사회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던 군사독재와 유신정권 그후 신군부의 통치와 민주정부, 참여정부를 지나면서도 한결같이 권력의 자리가 아닌 음지에서 지금 까지 옳 곧게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갈릴리의 민중과 같은 이들의 아픔을 대변하고 함께 하신 분들이다.
사실 생존해 계시는 분들에 대하여 평한 다는 것은 조심스럽다. 뭐라고 써도 용비어천가가 될 수 밖에 없다. 한 사람의 진실한 평가는 후대가 되야 가능할 것이다. 조선왕조의 실록도 왕이라도 생전에는 그것을 볼 없었다. 이 기록을 하는 이들은 정실에 메이지 않은 초시에 합격한 젊은 사관들이 감당했다. 만약에 자신에 대한 기록을 본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래도 본 사람들은 모두 역사의 퍠륜아로 기록되어 있다.
예장뉴스에서는 작년에 장신대에서 명예박사를 받으신 인명진 목사에 대하여 소개한 적이 있다. 그리고 이번에 전주 한일장신대에서 명예박사를 받으시는 백남운 목사에 대하여 소개하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한 인물에 대하여 기록한다는 것은 쉽지않다. 진실하고 객관적인 평가는 아무래도 사후가 되야 할 것이지만 우선 지금까지의 사역의 여정을 소개한다.
백 목사에 대해서는 얼마전 기독공보에 4회에 걸쳐서 약간 소개가된바 있는 데 관련된 내용을 참고했다.
신학수업과 첫 목회
백 목사는 1948년생으로 이데 은퇴를 2년 남겨두고 있다 그는 전북대학교를 졸업하지만 재학중 기독학생(KSCF)운동으로 이미 의식화가 되어 있었다. 장신대에 졸업하고 목사로 안수 받은 후 오늘까지 한결같이 목회자로 살아왔다. 재학중 군복무를 끝내고 복교하여 자신의 진로를 고민하고 기도하던중 당시 모교 이동술 총장으로부터 “모교에 남아 있으라” 는 권유를 받지만 고등학교 시절 기도한 대로 교수보다는 목회자로의 소명을 기억하고 신학교를 입학하게 된다.
장신대 재학중 첫 사역지로 인천제일교회였다. 당시 장신대는 일반대학 4년제를 졸업하고 온 학생들과 교단직영 지방 신학교를 졸업하고 온 학생들로 양분되어 있었다. 그러나 학업은 모두 같이 하여 지금까지 우정과 사랑을 나누는 동기들로 은퇴한 김용상 목사등이 있다. 그런데 1978년 제 63회기 총회에서 1979년도부터 졸업하는 신학생 부터는 개척교회나 단독목회 1년 이상을 의무적으로 한 사람에게 목사안수를 준다는 결의가 있었다.
백 목사는 72기로 1979년 1월에 졸업하여 이 규정을 받는 첫 케이스였다. 동기들중 절반은 유학을 가고 절반정도가 지방의 단독 목회를 위하여 부임들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백 목사는 마침 운명처럼 역사적으로 유서깊은 새문안교회 전도사로 부임하게 된다. 새문안은 당시 기독학생운동의 중심이었다. 그래서 청년들과 구로동 공단지역에서 노동자들을 위한 야학을 함께 하면서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런데 개척 3개월 만에 오는 사람들이 차고넘쳐서 활발한 교회가 되기는 했지만 구성원들의 갈등과 관리부족으로 분열과 혼란이 가중되었다. 그러나 목사 안수 받을 수 있는 개척교회 1년의 경력은 되어 당회에 사임서를 냈으나 만류로 1년을 더 있게 된다. 새문안교회의 역사 한페이지에 이름이 오른 것 만으로도 큰 자부심과 감사를 지금도 느낀다.
대학원에서의 공부가 쉽지 않았고 첫 부름에 순종하겠다는 서원은 하였는 데 졸업을 앞두고 서정운 교수님께서 “야 백남운이 너 나와 함께 한남대학으로 가자” 하는 제안을 받았다. 그러나 “저는 목회 할려고 신학 했습니다. 3-40명이 모이는 곳이라도 소개해주세요” 라고 당돌하게 답했다.
그러던중 학업동기인 박동현 목사(전 장신대 교수)가 “백형 제주도 안가실래요” 하는 제안에 응하여 나는 3-40명이 되는 제주도에 첫 단독목회 부임을 하게 된다. 제주도에 간다고 하니 만류를 하는 분들도 있었지만 유일하게 당시 새문안교회 강신명목사님은 ‘가 있어’ 하셨다. 그래서 제주 화북교회에서 1981-83년까지 2년 동안 열심히 목회를 하였더니 새로운 청빙이 들어왔다.
그리고 새문안교회를 은퇴하시고 숭실대학교 총장으로 계신 강신명목사님께 오랜만에 인사차 들렸더니 반갑게 맞아 주시고, 여기저기 전화를 하시더니 “이번 주에는 조금 어렵겠고 다음 주에 이사 올 수 있지 하신다” 그리고는 “양에는 안찰지 모르지만 거기 한 5년 있다가 중앙으로 나와” 하신다. 그러나 나는 ‘목사님 제가 제주도에서 3년은 있겠다고 하나님께 기도하였는데요….“그래 그럼 1년 더 있어 하시고는 다음해에 강 목사님은 소천 하셨다.
전주효자동교회에서의 목회
군 입대전 전북대 총장님이셨던 유영대장로님이 총장임기를 마치시고는 자신의 모교인 순천의 기독교명문 매산고등학교 교장으로 부임하시면서 내게 매산고등학교에 갈 것을 종용하신 적이 있다. 그후도 신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또 다시 같이 일하자고 종용하시더니 제주에서 3년이 다 될 즈음에 또 연락을 하시면서 백목사님 ‘백목사님은 목회하시기를 원하니 나와 함께 목회하자’ 내가 은퇴하고 교회를 하나 세우는데 순천으로 내려와 같이 목회를 하자고 권유하셨지만 연은 닿치 않았다.
그후 어느날 효자동교회에서의 청빙이 있었다. 나는 사실 고향이라 망서렸다. 그러나 지원서도 내지 않았는데 위임목사로 청빙했다는 기별을 받고 더 이상 거부할 수 없어 한주동안 기도하던 가운데 부임하여 지금 까지 30년 넘게 목회를 하고 있다. 당시 효자동교회는 전부의 외곽으로 버스정류장에서 약 700m를 걸어들어가는 변두리 절대농지 에 약 50평의 작은 교회였다.
나는 부임하자마자 장로님들에게 교회를 옮깁시다. 학교 앞에 있는 논이 좋은 입지라고 설득하였지만 문제는 재정이라 난색을 표하셨다. 그러나 합십으로 기도하며 천평달라고 새벽마다 기도한 후 부지를 밟으며 기도하였다. 3년이 되자 하나님은 이 기도를 이뤄주셨다. 겨자씨만한 믿음이 산을 옮긴다고 하는 말씀이 이루어 진 것이다. 이 대지위에 지금의 예배당 500평 교육관 800평을 세우게 된 것이다.
당시 효자동교회 년간 예산은 3000만원, 교인들은 120여명 이였다. 그럼에도 기도의 힘은 전에 있던 교회 땅보다 4배나 비싼 땅 1000여평을 주셨고 3억이 넘는 예배당을 건축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기도하고 믿는 겨자씨만한 믿음 이였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 였다. 그래서 나는 목회는 하나님께서 하신다고 하는 목회 철학이 생겨지게 된 것이다. 그후 나는 한일장신대 사회복지학과를 뒤 늦게 입학하여 공부하고 교회에 복지관을 세우고 전주에서 지역운동과 연합운동에 함께 하며 총회 총대로도 활동하게 된다.
특히나 전주지역에서 8m 도로에 인접한 건축은 건평150평 6m인접한 건축은 건평90평 이상을 지을 수 없게 된 건축법 때문에 큰 교회를 건축하려고 땅을 많이 사 놓은 교회들(연세교회, 산돌교회, 전주성결교회, 현암교회등)에게는 치명적인 규례가 아닐 수 없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나는 절대로 고칠 수 없다고 하는 실무자 국장과 시의원들을 설득하여 8m인접에는 5000입방, 6m인접에는 3000입방으로 건축 규례를 고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요 전주시내에 있는 건축을 앞둔 수 많은 교회들에게 오아시스와 같은 일이였다. 나는 이것을 교회를 위한 사회운동의 가장 큰 성과라고 보고 있다.
그 외에도 총회 총대로써 활동하며 2015년에는 한 노회로부터 WCC탈퇴를 위하여 조사위원회를 구성하자는 헌의에 대하여 백 목사는 발언권을 신청하여 “WCC의 신학과 에큐메니칼운동은 우리교단의 정신중 일부인데 지금 이런 결의를 하면 세계적으로는 선배들에게 큰 결례와 망신이다” 라고 반대한 일화도 있다. 또 지금도 전주 예수병원 사태에 대하여 비상한 관심을 갖고 지역에서 목회자들과 “예수병원 정상화 대책위원회”를 조직하여 대변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외에도 전북지역의 노숙자와 외국인 노동자등 가난하고 여려운 이들을 돌보는 기관을 세우고 지금까지 후원과 책임을 맡고 있다.
백남운 목사의 민주화 운동
백 목사는 전북대학교기독학생회장(KSCF) 출신으로 박정희 대통령의 3선개헌반대와 독재반대로 인하여 위수령파동과 함께 제적당하는 진보적인 학생으로서 박정희 정권의 부당함에 굴하지 않고 박정희 대통령을 상대로 행정소송을 (홍남순변호사) 진행하여 위수령파동으로 제적된 학생 172명에게 특별사면케하여 복학을 허용하는데 기초를 놓았다.
군제대후 복학하여 장신대에 입학 할 수 있었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졸업후 새문안교회에서 청년들과 2년동안 사역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여기에서 그는 진보와 보수를 아우릴 줄 아는 목회자로 성장하여 보수적인 목회자들을 설득하여 사회구원에 눈뜨게 하는 역할과 사회 참여로 목회자들의 위상을 향상시키는 목회자 인식으로 민주화운동, 인권운동, 사회복지운동 통일과 평화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당시 새문안의 강신명 목사라는 걸출한 인물도 그렇치만 우리 교단 장청운동과 전체 기독청년운동의 지도력이 나왔다. 서경석, 박철원, 권진관, 이근복, 류태선, 전응휘 유종성등 많은 목회자, 운동가, 학자, 시민운동가들도 나왔다. 또 부교역자로 홍성현 목사와 김용복 박사, 조성기 목사, 기현두 목사등이 사역했다.
이런 정신를 평생 목회하는 동안 한번도 포기하지 않고 전국의 동역자들과 동지적인 연대와 활동을 하신 분이다. 특히 예장교단내에 머물지 않고 NCCK와 정평목협 의장과 인권운동의 허리가 되신 분이다. 당시 서울에 고영근 목사 금영균, 윤두호, 목사와 같이 충남의 이명남 목사 청주의 노영우, 김정웅 목사 폭포의 임서현 목사 광주의 이경석 목사 부산 광복교회 박광선, 신창수 목사등과 같이 이름을 날렸다.
이번에 새롭게 알려진 내용으로는 1980년대 고영근 목사는 서울 서노회 전도목사로 사경 부흥회에서 당시 군사독재와 유신비판으로 구속되고 민주화운동에 앞장서자 노회에서는 난감해 하며 고 목사님에게 이명을 종용하고 압력을 주었다. 목회자는 노회로부터 적이 없다면 무임목사가 될 판이었다. 이런 사정을 안 백 목사가 앞장서서 고영근 목사의 목민사역을 높이 평가하여 전북노회로 이명을 주선한다. 그리고 정년(70세) 되시는 날까지 10여년동안 선교비로 매월 100여만원를 드린 것이다. 고영근 목사의 목민사역에 가장 큰 동역자였던 것이다. 이렇게 고 목사님은 어려운 시절에 전북노회 전도목사로 평생 마음편하게 민주화운동과 복음사역을 하는 데 큰 힘이 되었다. 또 지역의 현신이나 건목협 후배들의 사역지와 활동을 후견해주시기도 하셨다.
학 력
1967. 2 전주공업고등학교 졸업
1975. 8. 전북대학교 농과대학(B.S) 졸업
1979. 2 장로회 신학대학(M.Div) 졸업
1981. 2 장로회 신학대학 대학원(Th.M) 졸업
1992. 5 Sanfrancisco Thological Seminary (D.Min) 졸업
2006. 2 한일장신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사회봉사 경력
전북기독학생 연합회장, 전북대학교 기독학생 연합회장, 민주수호전북지역 청년대표, 한일장신대 총동문회장, 전북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의장, K.S.C.F 이사장, EYC창립위원, 현대목회·바른목회 창립부터 활동(부회장)목회자정의평화실천협의회 전국의장, 기독교사회운동연합 전국공동의장, 전북 기독교사회운동연합 상임의장
전북지역 봉사
효자유치원이사장, 성폭력예방치료센터 대표이사, 통합 전주노회장, 전주시기독교연합회장, 전북기독교연합회장, 전북기독교새만금완공추진협의회장, 전주시장로교연합회장, 한일장학문화재단 이사장, 전북기독교명소화 추진위원회이사장, 호남신앙동지회장
현 재
아모스청소년회 이사장, 전북전통시장활성화운동본부이사장, 아리울내부개발완공추진협의회이사장, 글로벌 예술선교단이사장, 전북사대종단 기독교대표, 전북사대종단순례자조직위원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