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도웅 목사 회고록(초고)
백도웅 목사(1943-
평북 의주에서 월남한 이래 부모님을 따라서 영락교회와 신일교회에서 성장하셨다. 아버님도 일찍이 중앙신학을 하시고 목회자의 꿈이 있었으니 결국은 장남 백도웅 목사를 목회자로 만드셨다. 도웅은 일찍 부터 목회자가 되기 원하는 부친의 의도대로 미션스쿨인 대광고등학와 연세대학교 철학과을 졸업했다. 그러나 군제대후 장신대에 가지 않고 잠시 사업을 손을 대기도 하기도 하였지만 결국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 목사가 되셨다. 목회사역도 비교적 순탄한 생활을 하였다. 서울의 동신교회 부목사를 거쳐서 남보다 일찍 담임목사로 청량리중앙 교회, 을지로 교회, 산성교회의 담임목사를 거쳤다. 산성교회 시절에는 목회자 신문사 대표를 지내고 사임 후 NCCK의 총무를 지내셨다. 그후 KSCF와 환경운동, 기사련 CBS의 이사를 지냈다. 또한 KCRP(한국 종교인 평화회) 의장을 지냈으며 이후 참여정부 하에서는 평안북도 도지사를 지내셨으며 2013년 ‘예장뉴스’ 을 발행할 때 후배들의 권유로 발행인으로 있다가 2016년 사임했다. 장남 인섭은 카나다 죤낙스 산학교를 졸업하고 거기서 결혼도 하고 안수를 받은 후 현지에서 목회하다가 홍콩동신 교회 부목사를 지내고 지난 3월 초 종로 5가의 익투수 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했다가 2016년 미국 루터교신학대학원으로 유학을 갔다.
글을 시작하면서
나는 2012년 봄 용천노회에서 정년퇴직을 하였는데 장로회 신학대학에 입학한후 시작한 지난 40여년의 목회자로써의 공식적인 삶의 여정을 마감했다. 서울 삼각교회에서 시작한 나의 첫 교육전도사로의 목회 사역은 평범하지 만은 않았고 참으로 극적인 삶을 살았다. 친구들은 한 교회에서 20-30년 장기목회로 마무리를 하는 데 비해서 나는 여러 교회와 기관에서 사역을 하였다. 그래서 한 곳에서 지루하게 사역하는 친구들은 나를 부러워 하지만 잦은 이임으로 인하여 나는 뚜렷하게 하나를 붙잡고 이루웠다고는 말못한다. 그러나 나름대로 주어진 장에서 맡겨진 일을 열심히 그리고 성실하게 감당해왔다고 자부한다.
사람들은 나에게 럭키하다고도 한다. 50이 다 된 나이에 뒤늦게 떠밀려 억지 십자가를 메는 심정으로 종로 5가에 나와 에큐메니칼운동의 막차를 타고도 NCCK 총무를 역임하고 고 강원용 목사가 조직한 한국의 6대 종단 대표들로 구성된 한국종교인평화회의 의장이 되기도 했다. 그래서 세계의 종교인들과 인류의 평화문제에 대하여 교류하고 배우고 섬김 수 있는 축복도 누렸다. 그리고 이제 후배들과 달라진 시대의 언론운동으로 pck를 바탕으로 후배들과 예장뉴스라는 인터넷신문 발행인으로도 이름을 올렸으니 말이다.
나의 극적인 삶은 앞으로 다시 오기 어려운 참여정부하에서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평안북도 도지사를 지낸 것이다. 당시 비서실장이 연대 총장을 지냈고 연세대 출신들이 정치권에 힘을 쓸 데다. 부모님 처럼 고향 땅을 그리는 모든 실행민들의 마음을 헤아리며 섬겼다. 도지사 사역을 통하여서 나의 행적은 실로 다면화 되었고 이런 경험은 보통 목회자들이 하기 어려운 일로 내게 큰 행운이고 축복이였다. 이런 과정들을 통하여 나는 평생 이해하지도 알지도 못했을 세계와 지식을 경험하고 배우며 더 성장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나를 돕고 성장시켜준 사건과 사람들에게 대하여 감사하고 싶다.
더욱이 작년에는 우리 부부의 오랜 기도가 이루워진 해이다. 장남 인섭 목사가 카나다에서 공부하고 안수를 받고 귀국한다. 그러나 아직은 PCK의 목사로 이적을 하지 못하고 있은 데 마침 홍콩동신교회(김성준 목사) 부목사로 가게 되었다. 그런 후 다시 갑자기 다시 한국으로 오게 되는 데 PCK에 우려면 우선 동역관계에 있는 카나다장로교회 목사신분으로 PCK의 목사가 되기 위하여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런데 마침 종로 5가의 익투스교회로 청빙을 받아서 부임을 하게 된 것이다. 이제 장신대에서 과정을 거쳐서 PCK목사가 되는 것을 본다면 우리 가족은 부자 목사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 가정에게는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이 교회는 연대 부총장을 지낸 김중기박사가 세운 새바람교회서 분립한 것이다. 그러나 인섭은 여기서도 정착을 하지 못하고 다시 미국 루터교단의 회원으로 가입하고 유학차 미국으로 가서 루터교단 목회자가 된다.
나의 출생과정
나는 1943년 평안북도 의주군 피현면 영평리에서 부친 백문화씨와 이정옥 씨의 2남 3녀중 장남으로 태여났다. 그리고 3세가 되던 해에 신의주로 이주해서 살다가 월남하였다고 들었다. 내가 태여난 동리의 영평교회에는 우리 총회에서 오래 일한 적이 있는 정봉덕 장로(전 총회 사회부 총무)의 부부와 숭실대 조의숙 교수 가정,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 가족, 한경호 목사 가족들과 한 고향이다.
영평교회의 교우들은 월남하여 베다니교회(영락)나 신일교회등 인근의 교회에 흩허졌지만 한때는 통일의 염원을 그리며 고향의 영평교회를 재건 한다는 믿음과 실천으로 기금을 모의기도 했다. 그만큼 우리 고향 사람들은 그 곳을 그리워 하고 사랑하며 통일과 교회재건의 굳은 의지들을 가지고 남한에서 모두 자리들을 잡고 훌륭한 목사와 장로 권사들로 믿음생활들을 했다.
우리 가족은 1946년 월남을 했는 데 오다가 검문에 걸리자 아버지가 대답을 하기를 “말은 태여 나면 제주도로 보내고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있다” 라고 하면 자식교육을 시키기 위하여 서울로 간다고 했다는데 무사히 서울로 온 것을 보면 검문에서 그 말이 통한 것이 기적이 아닐 수 없다.
서울에는 이미 고향사람들 뿐 아니라 많은 이북의 사람들이 와 있었다. 그리고 당시에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제한적이였다. 건설이 있는 것도 아니고 공장이 있지도 않았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북 사람들은 회현동이나 남대문쪽에 전방을 열고 물건을 팔거나 배달하는 일을 하였다.
그때 우리 집은 구제품(미군부대서 나오는 제품) 장사를 했고 잘되였으며 모두 돈을 벌었다. 당시 남대문 시장은 실향민들의 삶의 터전으로 충무로까지 장이 섰다. 나는 남산초등학교를 나였는데 집안 덕에 잘 먹고 편하게 중학교를 다녔다. 당시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의 아들 김성관 목사는 나와 대광중고등학교 동창인데 사실 목사의 꿈은 그 친구한테서 받았다. 그래서 부모님은 신일교회에 다녔지만 나는 충현교회 새벽기도회에 나가기도 했다.
당시 중학생이던 나는 왜 그렇는지는 모르지만 장안의 유명한 고승 청담스님의 강좌을 듣는 등 다름대로 인생철학을 향한 지적 방황을 한 기억도 있다. 그러나 나의 전 삶을 지배한 것은 교회였다.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의 소개로 당시 서울대학교에 재학중인 홍성현 형이 과외교사로 나를 지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 3 이 되었을 때 우리 집이 큰 어려움을 당하게 되어 과외를 더 하지는 못하였지만 연세대학에 무난히 들어간 것을 보면 홍 목사님이 잘 가르쳐 주신 것 같다. 연대 철학과 동기들로는 합동측의 정규남 박사와 탈랜트 이영후가 있다.
집안의 가세가 허물어지다.
당시 어머니는 매우 활동적이시고 사업수완이 계셨지만 너무 사업을 벌이신 것이 아닌 가 한다. 그때 어머니의 사업체는 충무로에 백상회라고 했는 데 당시 서울 장안에서 제일 큰 미제를 취급하는 사업체였다. 이 사업이 번창하고 잘되자 어머니는 소매뿐 아니라 도매도 하고 정식거래가 아닌 미군부대 물건을 빼내는 등 뒷거래도 하고 부적절한 일도 하신 것 같다. 그런데 1960년 5.16 군사혁명이 나면서 사회정화의 바람이 불었는데 모든 군사 쿠테타가 표방하는 애족심과 국산품 애용이라는 슬로건에 저해되는 희생물이 필요했다. 그래서 당시 서울 장안에서 산다 하는 집들은 거의 미제를 먹고 사용했는데 그 진원지가 우리 가게로 타켓이 된 것이다. 그래서 어머니는 군사 혁명정부의 사회정화에 반하는 반혁명분자로 구속되여 군사재판에서 자그마치 10년 형을 받고 복역을 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집은 재산의 모든 것을 정리하여 구속된 어머니의 석방을 위해서 백방으로 노력하여 석방을 하게 되지만 집안의 모든 것은 몰수 되거나 파산되고 바닥이 나서 매우 어려운 지경에 있게 되었다. 그래서 다시 한남동으로 가서 살게 되었다. 그러나 이 일은 한마디로 시범케스에 걸려서 생긴 문제로 혁명정부의 명분을 세워주기 위한 희생양이 필요했고 그 역할을 감당하신 것이다.
아내 황계숙과의 만남
나의 처 황계숙의 집안은 서울 행당동에 살았는데 부친은 무역업을 하시는 분이였다. 아내는 동네 성결교회를 다녔는데 숙명여고 시절 조직된 홍파회라는 연합서클에 내가 지도교사로 가면서 인연이 되었다. 서울의 여고생들이 모여 연합봉사 활동을 할 때에 나와 친구이며 대학생이였던 김성광 목사가 지도교사로 갔다. 이 모임은 당시 경기여고, 이화여고 등 자기들 나름대로는 일류학교 출신들만 뽑아서 만든 조직이라고 프라이드가 대단했지만 나는 황계숙에 대해서는 별 기억이나 관심은 없었다.
그후 시간이 흘러서 계숙은 홍익대 미대를 입학하였다. 그리고 1963년인가 한일협정 반대 시위가 전국적으로 있었는데 많은 학생들이 참여를 하였다. 나는 시위를 하다가 광화문에서 비기 와서 누추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그때 계숙은 집으로 가기 위하여 광화문에서 버스를 갈아타려고 하다가 나를 만났다. 서로 오랜만이라 반갑기도 하고 또 내가 처량해 보였는지 측은하게 여기고 인근 다방엘 간 것 같다. 그리고 거기서부터 인연이 되어 젊은 우리들의 가슴에 불이 붙어 연애를 시작하게 된다. 이후 아내는 졸업을 하고 유명한 브러더 미싱이라는 회사에 취업을 하였다.
나는 연대를 졸업하고 바로 장신대에 입학을 하였다. 그리고 4년제 일반대학을 나왔다는 프라이드로 장신대에 가보니 당시 교수들은 학문적으로 그렇게 깊지 않은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앞서 말한 서울대 출신의 홍성현 목사 동기들(15기)들도 당시 학장을 찾아가서 실력 없는 교수들을 그만 두게 하라는 항의를 했다는 기록이 있는 데 우리들도 입학하자마자 이미 일반대학에서 배운 것 만도 못한 것을 가르치는 교수 목사들을 보고 불만이 많았다.
장신대 시절
그때 학장은 계일승 목사였는데 그 분의 아들 계지화(훗날 지영으로 개명) 군은 나와 동기로 친구 몇이 학장 아버지를 찾아가서 이런 식으로 하려면 학장을 그만두라고 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저지르기도 했다. 그때 계일승 학장은 너희가 왜 그러냐고 하길 래 “아버지가 무능해서 그렇다” 고 하니 “이 놈들아 내가 무능하니까 교단은 분열되지 않는 것이다” 라는 명언을 남기셨다. 그렇다 무능하고 못난 사람들이 분열하지 않는 다. 잘났고 실력있고 똑똑 하다는 사람들이 언제나 어디서나 패거리 짓고 말썽이다.
입학은 61기로 하여서 동기들로는 총회장을 지낸 유의웅 목사 또래 지만 졸업은 69기로 장신대 총장을 지낸 장영일 목사나 나겸일, 주성훈 목사와 동기이다. 나는 신학교 생활이 학교에서 더 문제가 될까 봐 한학기를 끝내고 군에 입대를 하게 되는 데 사연인 즉 계일승 학장은 골치가 아프니 우리들을 권하여 군에 입대하도록 하셨다. 학교에서 더 큰 사고가 없게 하려고 한 것 같다. 또 군에 가서 세상 물정을 살피다 보면 철도 날 것이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래서 계일승 학장의 사위인 고신열 대령(당시 방첩대장) 에게 부탁하여 나는 508 방첩대로 계지화는 육본 정훈과로 입대를 하게 된다.
방첩대 생활
이 방첩대는 당시 군사정권하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기관으로 군과 민간인을 가리지 않고 조사하는 권한이 있었는데 이미 자유당 정권에서 특무대라고 불리는 정부 친위대로 오늘의 보안사와 같은 기능을 한 곳이다. 나는 당시 신앙촌의 박대선 원장의 아들인 박동명과 같이 배치를 받아서 젊은 혈기에 장안을 누비며 잠깐 행세를 하기도 하였다. 그후 나는 3공구 수원을 거쳐서 여주와 안중에서 군생활을 하다가 제대를 하였다.
제대후 나는 영락교회 계인집 장로의 아들 계길훈과 같이 사업을 시작하는데 신진자동차에 도장원료를 납품하는 일이 였다. 그러나 남의 말만 들었지 경험이 전혀 없는 나로써는 성공할 리가 없었다. 결혼도 했지만 막막하였다. 결국은 망해 먹고 신혼집은 금호동으로 이사를 하였는 데 어머니도 남대문에서 당시로는 미제 물건을 다루는 큰 손으로 활약을 했지만 어려움을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지인들을 모아 계주가 되셔는데 부도가 난 것이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또 한번 큰 어려움에 빠지게 된다. 어머니는 당시 통이 크고 모든 일을 대범하게 하는 성격이지만 대책이 없는 것이 흠이 였다. 결국은 어머니의 통 큰 손과 행보로 인하여 우리 집은 천당과 지옥을 오고 갔다.
이렇게 가정이 해체되는 과정에서 계숙은 딸 인혜를 을 데리고 친정으로 가버렸다. 그리고 한 1년은 된 것 같다. 나도 제대를 했지만 복학하지 않았고 사업도 한답시고 돈을 털어먹고 이제는 앞길이 막막하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대구 피난시절에 대구영락교회의 창립멤버로 앞장을 서시기도 하였지만 그곳 중앙신학교에 가서 공부을 하시면서 어렴풋이 목회자에 대한 꿈을 갖고 계셨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머니의 반대로 지속적으로 하지를 못하였다. 내가 볼 때도 아버지는 목회자다운 품성이 계셨다. 그러나 어머니는 아버지가 목회자가 되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그리고 내가 신학에 지원 한 것도 어머니는 좋아하지 않으셨다. 그러나 아버지는 내게 많은 격려와 도움을 주셨다.
결혼과 신학복학
1969년 나는 결혼식장으로는 당시 최고인 광화문의 시민회관에서 결혼식을 올리게 된다. 주례는 당시 신일교회 현성호 목사가 하였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금호동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지만 또 다시 어머니의 통 큰 사업의 굴절로 인하여 우리 기족은 뿔뿔히 흩허지게 되였다. 그래서 아내 계숙도 첫아이 인혜를 데리고 친정으로 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계숙이 꿈을 꾸었는데 성배를 마시는 꿈이였다. 또 어깨를 다친 천사가 오는 것을 보기도 했다. 이 꿈에 대하여 처가에서 계숙은 도웅과 다시 합치고 신학을 계속하라는 의미로 해석하여 꿈보다 해몽이 좋다는 말을 실감하게 되고 나는 아내의 도움으로 장신대 등록금과 기숙사 비용을 받아 복학을 하게 된다.
그리고 계숙은 말하기를 먼져 한 학기 해 놓은 것 미련 갖지 말고 처음 부터 다시 시작하라고 했다. 그러나 도웅이 학교에 알아보니 학생의 학점은 8년이 지나면 소멸되지만 아직은 7년째로 자신의 학점이 살아있는 것을 알고는 입학금과 기숙사비를 내지 않고 학교에 다닌 다고 속이고 한학기를 놀며 소일 하는 배짱을 보이기도 했다. 헬라어나 히브리어등 원만한 교양과목을 입학시 전부 이수한 것이 아까워 그렇게 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제 결혼도 했고 학교도 다녀야 하니 경제적인 문제가 문제였다. 그래서 생활대책도 그렇고 신학교에 입학을 하게 인턴으로 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목회를 배우는 하는 것이 관례였다. 나는 임장제 형의 소개로 삼각교회에 첫 교육전도사로 부임을 하게 되었다. 당시 이태용목사가 시무하고 있었다. 그리고 삼각교회에서 나의 애 제자로는 정인수 목사와 오명철 기자(동아일보)가 있다. 그러나 살 집도 없고 경제적으로 부족하여 아내 계숙이 한남동에 방을 얻어서 유엔빌리지의 아이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알바를 하느라고 심신이 피곤하여 늑막염이 걸려서 고생을 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그런 고민을 친구들에게 얘기하자 염천교회에 계시던 신현균 목사께서 생활비를 올려줄 것이니 염천교회로 오라고 하셨다. 그러나 삼각교회에서도 그 소문이 알려져 더 줄 것이니 이곳에 있으라는 권유를 받았다. 그래도 한번 말이 나온 것이라 나는 염천교회로 이임을 할 것을 마음 먹었다. 그리고 신현균 목사에게 실은 사택이 있으면 오겠다는 말을 했더니 당회를 열러서 교육전도사로써는 드물게 사택을 받고 시무를 하게 되었다. 이 모두가 나를 좋게 보시고 도와주셨던 선배들과 어른들의 사랑이였다.
나는 열심히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런 소문은 당시 서울에 많치 않던 교회에 소문이 났다. 그래서 당시 월남한 어른들이 해방촌에 세워 최중해 목사님을 모시고 있던 영주교회로 청빙을 받아 부임을 하였다. 거기서 김은교(숙명여대)가 제자이고 많은 것을 배우고 성장했지만 둘째 인섭이 갑상선저하증이라는 희귀병으로 인하여 사경을 헤메고 있어서 온 교회가 기도하며 정성을 다하여 치유의 축복을 경험하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목사 안수를 받을 때가 되자 한기원 목사님이 계시는 동신교회의 부목사로 청빙받아 안수를 받고 시무하게 된다. 그 곳에서 부목사도 여럿이였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기억되는 제자들로는 이승열 박사(총회 사회봉사부 총무) 와 김경인 목사(전 총회 기획국장,CWM 부총무) 와 박수길 목사(전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동경 히지리가오까교회) 가 있다.
그후 을지로 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을 하게 된다. 을지로 교회는 당시 총회 교육부에서 근무를 하고 계신 김 암 장로가 계셨다. 이곳에서의 기록은 을지로교회 50년사에 잘 기록이 되어있지만 젊은이들과 교류하고 제 3세계 신학연구소(홍성현 목사)도 돕고 노회적으로는 임원도 하고 총대가 되어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시 서울 동노회 청량리 중앙교회로 부임을 한다. 이 교회는 전 총회장 임택진 목사님이 시무하시다가 정년은퇴를 하신 곳으로 사실 나로써는 쉽지 않은 곳이 였다. 그때 같이 얘기가 되던 분들을 보면 내가 얼마나 부족했는지를 알 것인데 삼양동교회의 홍재구 목사와 삼각교회의 조유택 목사도 물망에 오르고 있는 지경이었다.
그리고 그 교회에는 김재호 장로라는 PCK의 걸출한 장로가 있었다. 장로회보의 창설자로 당시 연지골이라는 칼럼으로 필명을 날리던 어른이였다. 그리고 교단의 장로회와 이북세력들을 좌우지 하던 분이다. 그런데 여러분이 거론이 되였지만 가장 나이가 어렸던 내가 선임이 되었다.
그곳에서 부 목사로 김성준 목사와 동역했다. 그러나 목회는 쉽지 않았다. 가장 어렵고 힘들었던 곳으로 기억된다. 우선은 교회가 지역사회와 분리되고 그것을 당연시 하는 일이다. 지역이 청량리 주변이고 주거지가 아니니 사업이나 유흥업에 종사하는 분들이 살고 있었다. 교인들은 모두 멀리서 오니 지역사회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그러나 나는 지역의 가난한 어린이들에게 교회가 친구가 되고 놀이터가 되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교회 유치원의 놀이터에 들어와서 놀도록 하려고 해도 관리자가 아이들이 못하도록 팬스를 쳐 놓차 아이들은 들어오고 싶어서 거기 메달려 있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다. 이런 저런 일로 인하여 나는 마음이 떠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교회의 주차장을 지역에 개방하지 못하도록 하고는 저녁에 주차료를 받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강사들에 대한 접대와 예우등으로 나와 불화하게 되자 나는 부산의 신동혁 목사님이 부흥회를 오셨다가 교회가 하는 예우을 보고는 마음이 아프셨던지 백 목사 교회를 옮기시오 하는 권면을 듣기도 하였다.
그리고 후임이 된 내가 평소에 존경하던 임택진 목사님이 65세에 자원하여 조기은퇴를 하신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교회의 그런 처사에 대하여 달리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으시니 내색을 하지 않으신 체 그냥 조용히 은퇴로 목회를 마감하신 것이다. 그 어른의 높고 깊은 마음을 알고는 배나 존경하게 되었지만 그러한 시련이 내 것이 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존직자이면서도 교회를 상대로 월급을 받고 기생하며 살아가는 숙주들이였다.
마지막 목회지 산성교회
그후 강남터미날 옆의 산성교회의 담임 목사였던 김리관 목사가 미국으로 이민목회를 떠나자 임장제 형이 알고는 나를 소개하였다. 나는 두말없이 부임을 하였다. 이로써 나의 마지막 목회지가 되는 산성교회에서는 9년간 목회을 하였다. 나는 산성교회가 소속한 용천노회에서 노회장도 하고 이북노회 연합회의 중심지도자로 부총회장 운동도 하고 총회적인 활동을 하게 되었다.
년령적으로나 경력으로 우리 또래가 총회적으로 한참 왕성하게 활동을 할 때 였다. 먼져 세상을 뜬 청운교회의 이종윤 목사와 같이 이북출신들이 어른들의 후광을 입고 성장하여 총회 내에서 황금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그 꽃으로 PCK 장로로는 최초로 총회장이 된 신흥교회 한영제 장로의 선거운동을 했고 성공했다. 지역적으로는 농어촌교회의 지원과 삼풍백화점 사고지원 봉사등으로 지역에서의 평판도 좋았다.
그러나 1988년 이북지원 사업으로 중국을 통하여 지원한 경비의 영수증을 발급받지 못한 것을 빌미로 내가 믿고 맡긴 유치원의 원장이 교회의 지도자들과 결탁하여 나를 곤경에 빠지게 하였다. 나는 결백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어 대광고 선배인 총회 전도부의 윤두호 목사에게 부탁하여 허위 증빙서류를 만들어서 낸 것이 올무가 되어 결국 치명적인 실수가 되어 더 이상 목회하지 못하게 된다.
물론 법에서는 무혐의가 되었지만 사람에 대한 실망으로 사임을 하게 된다. 아마 법원에서 그런 결정이 없었더라면 나는 계속 있던지 분열을 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나의 그런 사정을 안 교인들이 하나 둘 나가서 개척을 하자는 권유를 하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분열의 씨앗까지 남길 수 없다는 판단아래 97년 대책없지만 단호하게 사임을 하였던 것이다.
나는 짧지 않는 목회여정에서 목회자는 부임도 잘해야 하지만 사임이야 말로 정말 타임밍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싶다. 비겁한 사람은 여러번 죽지만 용감은 사람은 한번 죽는 다는 역사의 교훈을 나는 분명히 기억했기에 구차하게 구걸하며 목회하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번도 이력서를 내고 선을 보지 않고 그져 부르면 가고 때가 되면 그만 두웠는데 모르는 사람들은 이 말을 믿지 않는다.
1993년 부친이 별세하다.
아버지는 내가 산성교회에서 시무할 때 별세하셔서 문막의 공원묘역에 안치되여 계시다. 부친은 신일교회에서 장로로 피택을 받았지만 극구 사양하시여서 임직을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본인이 신학에 마음을 두고 공부를 하시기도 했지만 가족의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지만 나의 신학공부에 최선을 다하여 뒷바라지 하시며 철없는 아들이 좋은 목자로 성숙되기를 조용히 기다리며 기도하신 것으로 기억된다.
사임후 1년 정도 신도시 일산에서 기거하며 여러 가지 진로를 놓고 생각하였다. 그중에 교회 개척도 장소도 그렇고 지원도 그렇고 년령적으로나 전혀 불가능한 것이 아니였다. 그러나 당시 연세 신학과에 재학중인 아들 인섭이에게 물으니 “아버지 저 밖을 보세요” 보니 밤하늘에 붉은 십자가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면서 “공해를 더 이상 만들지 마세요” 라고 짧게 말하는 것을 듣고 개척할 마음은 접었다.
NCCK와 인연
1995년인가 PCK는 NCCK총무 인선문제로 인하여 교단간의 순번을 어긴 기독교 장로회의 처사에 불만을 삼고 몇 년간 NCCK에 참가를 보류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제 까지 그렇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였다. 그리고 마침 박종순 목사가 총회장이 되시는 데 나도 일조를 한 덕으로 우리교단이 NCCK에 복귀를 해야겠는데 먼져 백목사가 가서 부총무로 일을 좀 하면 어떻겠는가? 하는 제안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실 NCCK와는 별인연이 없지만 시기와 국면의 산물로 부임을 하게 된다. 그러나 NCCK에서도 나를 별로 반기지는 않았고 전통적인 에큐메니칼동지들도 ‘제 뭐야’ 하는 눈치였다. 내가 바란 것은 아니지만 총무인 김동완 목사도 부총무 제도를 탐탁해 하지 않았는지 전혀 예우를 하지 않았다. 아무 것도 상의도 교육도 없었다는 말이다. 나는 눈치만 보면 얼마의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내게는 전부적으로 타고난 친화력으로 새로운 친구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며 나의 영역을 넓혀갔고 그리고 서서히 인정을 받기 시작했다. 사실 나는 NCCK에 가서 에큐메니칼운동을 할 것이라고는 나도 그렇고 나를 아는 어느 누구도 예측하거나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새로운 분야에서 일을 시작하는 내가 이것을 성히 감당하는 것을 보고는 많은 사람들이 도와주었다.
직원들과도 친화력있게 지냈고 대 정부와 교단과도 원만한 관계가 되었다. 그래서 김동완 목사의 임기가 끈날 무렵에는 후임 총무로도 거론이 될 지경이였다. 그러나 당시 나는 NCCK총무가 된다는 생각을 하거나 될 수 있다는 사실 생각을 해본 적은 없다. 한편으로는 막상 총무가 되면 어떻게 할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도 했지만 두려운 마음도 없던 것도 아니였다.
그러나 같은 교단의 후배인 박성원 박사가 당시 제네바의 WARC의 국장을 그만두고 NCCK 총무가 되기 위하여 국내에 잡입하여 교단정치를 한다는 말이 들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로 5가의 여론이나 후배들도 모두 박성원이 국제기구에서 경험도 있고 하니 후임총무가 되야 한다는 분위기였다. 나는 누구 하나 믿을 사람도 없고 도움을 구할 사람도 없어 조용히 하나님께 기도할 뿐이였다. 모두가 박성원 목사를 밀고 있었다그리고 5가 후배들 가운데는 허춘중 목사와 유재무 목사만이 NCCK 총무가 별 것이냐? 부총무 하던 사람이 하면 하는 전통을 만들고 하면 된다는 논리로 나를 위로하고 있었다. 또 나중에 들으니 인명진목사도 영어 좀 못하면 어때요 난 백목사님 총무 할 수 있다고 응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내가 NCCK의 총무가 되었으니 승자임에 틀림없어 모든 것을 이해하고 접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남기는 말이지만 크게 섭섭했던 것은 박성원 목사가 한번이라도 나를 찾아와서 자신의 의향을 솔찍하게 말하지 않고 정치력으로 나를 이기거나 누루려고 한 것에 대해서 매우 불쾌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런 마음이 가시지 않은 것은 그 후로도 한번도 속시원하게 내게 미안하다거나 속사정이 어떻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NCCK 총무로 근무
그러나 사필규정이라고 PCK 총회의 연합사업위원회는 나를 NCCK 총무로 추천을 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나는 1997년 11월 2일에 NCCK로 첫 출근을 하게 된다. 이 날을 기억하는 것은 그날 마침 장애우 체험행사가 마로니에 공원에서 열린 날로 직접 헬체어를 차고 인도를 다녔던 경험을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나는 NCCK 부총무와 훈련원장으로 4년을 보내고 총무로 4년을 더 일하게 된다. 비서실에는 문정은 목사(CCA 국장)가 나를 도와 많은 수고를 했고 황필규 목사와 부총무 임흥기 목사의 협력없었다면 그 임무를 다 감당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후 종교인 평화 봉사단과 평안북도 도지사 활동을 마칠 수가 있었다. 이후 이명박 대통령이 서울시장 시절부터 알고 지내다가 복지법인을 하나 냈는 데 자가로 운영할 수는 없어 위탁을 주웠다. 그리고 예장뉴스 발행인도 그만두고 후임으로 고 이명남목사가 맡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