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발전에 이바지하는 교회
이삼열 박사 칼럼
1.한국교회의 전통과 사회발전의 문제
한국교회의 위기를 진단하며 대안교회운동을 모색해 보려는 대화문화 아카데미의 평신도 모임에서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교회” 라는 화두를 가지고 몇 가지 생각을 정리해 본다. 한국교회의 문제나 상황을 신학적인 면, 교회 조직적인 면, 사회참여적인 면 등 여러 가지 면에서 평가해 볼 수 있겠지만, 한국교회가 위치한 자기민족의 역사와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공헌했는가, 다시 말해서 사회발전에 이바지 했는가의 가늠자로서 위기와 기회를 진단 해 볼수 있으며, 개선해 나아갈 방안과 대안을 찾아볼 수 있겠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오늘의 한국교회는 과연 사회발전에 이바지 하고 있는가?
한국의 역사 속에서 교회는 어떤 공헌을 했으며, 오늘의 현실 속에서는 어떤 긍정적 역할을 하고 있으며, 혹은 부정적 역할이나 역 기능을 하고 있는가를 따져 볼 필요가 있다. 우선 한국기독교의 급속한 성장과 발전, 민족사에 미친 지대한 공헌과 영향력의 면에서 본다면 대체로 긍정적 평가를 할수 있고, 세계선교의 맥락에서 본다면, 대단한 성공케이스였다고 인정된다. 아시아의 기독교 선교사에서 인구의 30% 가량을 개종시켜 기독교인을 만든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다.
일본은 1%가 채 안되며, 300 년간 기독교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3%정도이다. 400 여년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필립핀이 높은 비율의 카도릭 신도수를 보이고 있으나, 스페인의 동화정책에 의해 강요된 식민지 어용교회로서 역기능적인 면이 더 많았다.아마도 한국의 기독교가 아시아 다른 나라에 비해 급성장하며 발전할 수 있게 된데는 서구기독교 국가의 식민지가 아니라, 반기독교적 일본의 식민지였다는 것이 큰 요인이 아니었을 가 생각된다. 한국이 만일 인도나 필립핀, 인도네시아 처럼 기독교를 국교로 하는 영국, 스페인, 네델란드의 식민지였다면 제국주의 어용교회가 되기 쉬었으며, 해방운동을 주도하지 못 했을 것이다. 따라서 대부분 한국의 지식인들은 제국주의 국가의 국교인 기독교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한국 기독교는 미국, 영국, 카나다, 호주의 선교사들에 의해 전파되었지만, 그들의 식민지가 아니라, 일본제국주의의 식민지였기 때문에 , 민족사에 반동적인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오히려 민족의 독립운동에 공헌했고, 인권과 사회정의, 교육문화의 발전과 여성의 참여등 사회발전에 크게 공헌함으로서, 긍정적 역할을 하게 되었다. 일제로 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공산독재 북한에서는 기독교가 거의 소멸되다 시피 되었지만, 6.25 전쟁전후로 수백만 북한 동포들이 월남하고, 미군의 참전으로 남한의 자유민주주의가 방어되자, 반공을 내 세운 기독교는 1950 년대부터 시골구석에 까지 급속도로 전파되었고, 급성장 하게 된다. 이때 기독교는 민족주위 전통에 반공자유민주주의로 무장한데다, 선교사의 도움으로 곳곳에 학교를 세우고 고아원, 양로원등 사회사업을 전개하므로, 많은 지식인, 지도층을 흡수해 교회가 남한의 엘리트 종교로 부상하게 된다.
60 년대의 군부독재와 70년대 유신독재 시대에도 한국기독교 교회들은 대체로 반공 이데오로기에 지배되어, 반민주 독재정권을 옹호하였으며, 교회지도층은 대통령을 모신 조찬 기도회등을 열며 어용화 되어갔다.
물론 70년대 군사정권이 인권탄압과 정보정치를 강화하고, 자유민주 헌법마져 짓밟으며, 유신헌법을 통해 영구독재체제를 꾸려가자, 일부의 기독교 목사, 지식인, 학생들이 저항운동을 전개했고, 민주질서 회복에 크게 공헌한바 있지만, 대부분의 교단과 지도자들은 나치독재 치하에서 “독일적 그리스도인”을 표방했던 독일교회처럼 고백교회가 아닌, 권력과 체제에 순응하는 교회로 전락 했으며, 교회는 영혼구원과 비정치적 영성운동, 양적 성장에만 매달리게 되었다.
1880 년대 구한말, 몰락해가는 봉건왕조 시대에 들어온 기독교는 일제침 략기, 독립과 분단, 6.25 전쟁과 빈곤시기 등, 대략 1세기동안은 민족사의 시련과 함께 독립과 민주주의, 인권과 사회 발전의 계몽, 지도계층을 양성하는 등 매우 긍정적 역할을 담당했다고 평가된다. 이러한 고난의 시대가 지나고, 1980 년대 이후 경제성장과 세계화 시대가 오면서 한국교회는 오히려 시대적 사명을 잊고, 대형교회, 물량주의, 축복과 성공, 부자 되기 등에 매달린 자본주의적 가치관의 교회로 변질되게 된다.
교회에 나오는 이유가 예수님의 청빈사상이나, 정의와 사랑의 하나님 나라 실현에 있다기 보다는, 축복을 받아 부자가 되고, 성공하며 출세할 수 있다는 물질적 욕구가 동기부여를 해서 교회당이 늘고, 차고 넘치게 된다. 80년대 이후 나타난 대형교회들은 예배출석과 새벽기도회, 십일조 헌금이 하나님의 축복을 유도해 돈도 벌고, 병도 고치고, 출세도 하는 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는 기업 경영적 교회의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필자는 80 년대 말, 교회성장에 매달린 어떤 유명한 교회를 방문해 예배 보면서 꽤 존경을 받는 유명한 목사님의 설교에 몹시 놀랐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 보다 어렵다고 하셨지만, 부자가 교회에 열심히 나오고, 헌금을 많이 한다면, 하나님게서 기적을 이르켜서 낙타가 바늘구멍도 통과할 수 있게 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고 삶의 괴로움과 고통에서 벗어나게 용기를 주는 교회의 선교는 잘못된 것이 아니다. 교회성장과 물량주의, 대형화를 위해 예수님의 말씀과 교훈마저 왜곡하며, 십일조 헌금으로 축적된 교회의부를 그리스도의 사랑과 정의를 실현하는데 쓰느 것이 아니라, 재산축적과 건물확대, 교회재단의 기업화에 쓰면서 온갖 부정과 비리에 감염되고 있는 개독교적(?) 현실이 문제이다.
이러한 풍조와 이데오로기가(허위의식) 몇몇 대형교회에 그치지 않고 대형교회를 모델로 지향하는 많은 적은 교회들에까지 파고들어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 한국교회 정체성의 위기라고 하겠다. 백여 년의 민족수난기에 나름대로 의식계몽과 사회발전에 이바지 해온 한국교회가 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사회구원과 인간해방이라는 본질적 사명을 잊고, 대형교회와 물량주의의 유혹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는 위기에 처한 오늘의 모습을 보면서, 그 원인을 한국교회 전통 속에 움추린 구조적 문제와 외세의존의 한계에서 찾아본다.
첫째로 한국교회는 강대국의 선교정책에 의해 세워졌기 때문에, 신학적으로나 교회 구조적으로, 외생적인 (exogene)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주로 미국장로교의 전통과 근본주의 신앙의 영향하에 자라났기 때문에, 내세와 영혼구원에만 매달리며, 사회복음에 무관심한 신학사상과 선교정책에 물들어 있고, 목사와 장로가 중심이 되어, 교회의 권력을 독점하는 폐습이 민주화 시대인 오늘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장로교의 원산지인 스콧트랜드나 미국, 호주에서도 목사 장로의 임기제가 실시 되고 있는데 한국교회는 종신제를 택하고 있어, 교회의 운영형태가 비민주적이며, 권력을 독점 해 비리와 부정부패가 범람하고 있다. 당회의 권한을 축소하고 장로의 임기제와 로테이션 원칙의 도입이, 민주적 교회, 평신도 중심의 교회를 만드는데 필수적 요인이 된다.
둘째로, 한국교회는 외국 선교사들의 신학을 본받아 성장하면서, 스스로의 신학적 반성과 주체적 신앙형성이 부족했다. 그것이 영혼구원의 복음주의든, 칼빈주의적 근본주의든 외래 신학사상을 모방하여 교회를 확장 시키는데 바빴지, 한국인의 전통과 문화를 반성하면서 신학과 신앙의 체계를 만들어 가는 노력은 거의하지 못해서, 우리 스스로의 주체적 신학을 수립하지 못했다. 주체적 신학발전과 사회 복음적 신앙형성이 결핍된 한국 교회는 온갖 외래신학과 선교사들의 침투에 감염되기 쉬웠으며, 따라서 장로교나 감리교, 침례교등 미국선교사들에 의한 교파들이 들어 왔을 뿐 아니라, 성공회, 루터교, 안식교, 구세군 등 온갖 개신교 자유교회들이 선교비를 안고 들어와 정착 했다.
뿐만 아니라 한국교회의 주류를 형성하는 장로교회가 파벌과 계보에 따라, 고신파와 장신파, 예장과 기장, 통합과 합동,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등 교파분열과 분쟁으로 인해, 70 여개의 장로교단으로 분열되는 교단난립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교회는 성장했지만, 교단과 교회의 분열로 동네마다 대한예수교 장로교회라는 간판이 붙은 교회가 4, 5개씩 되는 웃지못할 분열상이 노출되고 있다. 이렇게 분열된 교회는 자기교회의 유지와 성장, 경쟁에만 급급할 뿐, 대 사회적 복음의 선포나 사회발전에 대한 책임에는 무관심하게 된다.
셋째로는, 교파의 분열과 분쟁으로 인해 총회나 노회등 교단의 기구들은 계속 싸움과 분쟁으로 일관하고 있으며, 총회장 선거에 수억원 내지 수십억원씩 쓰는 돈 선거가 교단마다 판치고 있다. 자연히 교인들은 이러한 교단 정치에 신물을 느끼며 불신하게 되고, 총회나 노회의 통제에서 벗어 나려고 애쓰게 되고, 교회연합 운동이나 에큐메니칼 운동은 기를 펼 수가 없다. 따라서 여기서 파생되는 문제가 개교회 중심주의이다. 특히 교인수가 많은 대형교회들은 독자적으로 사회사업기관도 만들고, 학교나 병원도 세우고, 선교사도 파송하여, 교단과 교회연합이 필요치 않는 개교회주의로 나가고 있다. 총회나 노회등은 신뢰도 권위도 기능도 잃어 무력화 되고, 에큐메니칼 운동이 자리를 잡을 수 없게 된다.
내세와 영혼구원에 매달린 근본주의적 신앙관, 외생적 교리와 선교정책에의존한 종파와 교단의 난립, 목사, 장로가 독점하는 교회의 운영권과 재정권이 가져오는 개교회 중심주의가 한국교회를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하나님의 나라운동으로부터 멀어진 물량주의와 성장주의에 빠지게 했고, 사회발전과 현실개혁에는 무관심한 교회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오늘의 한국교회가 당면한 위기와 정체성의 혼란으로부터 벗어나, 사회발전에 이바지하는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인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실천하는 운동에로 방향을 전환해야한다.
이차대전후 전 세계적으로 확산된 에큐메니칼 운동, 세계교회협의회의 연합과 일치운동은 여러가지 대안적 교회와 선교활동을 제안하고 있다. 한국교회는 교회와 사회, 영혼과 육체, 내세와 현세를 이분법적으로 분리하는 근본주위적 신학사상과, 교파주의, 개교회주의, 목회자 중심의 교회를 에큐메니칼 운동과 사회선교, 평신도중심의 교회로 전환하는 운동을 시도해야 할 것이다.
2. 교회의 본질적 사명과 하나님의 나라
교회가 교회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의 발전을 위해서 존재한다고 할 때에, 사회의 어떤 문제와 과제를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하는가?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일은 수도 없이 많다. 학교도 세워야 하고, 병원도 지어야 하고, 우물도 파야 하고, 도로나 교량도 만들어야 한다. 정치도 경제도 교육이나 문화 복지도 모두 사회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사회를 위해서 해야 할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 빛과 소금의 직책에 있음을 강조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니라” “어둠을 밝히는 등불이니라” “세상 속에서 소금이 되어야 한다” 또한 교회와 사회의 관계를 누룩과 밀가루반죽과 같은 것으로 설명하시기도 했다. 교회가 누룩이 되어 밀가루 반죽 속에 들어가 확산작용을 하면 사회가 반죽이 부풀어나듯이 팽창되고 늘어나서 먹음직스런 빵의 재료가 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세상을 변화시키며 좀 달라지게 만들라는 것이다. 빛이 되어 사회를 밝게 하든가, 소금이 되어 세상을 좀 맛있게 만들든가, 누룩이 되어 부풀게 하든가, 어쨌든 세상이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교회가 사회를 위해 해야 할 사명이요 역할이라는 것이다.
세상 속에 편안하게 안주하면서 아무런 변화를 주지 못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다. 세상이 썩고 부패하니, 그 안에서 함께 썩고 부패하는 교회, 소금이 되어 썩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하지 못하고 정치, 경제, 교육, 문화의 비리와 부정부패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하고, 사회정의를 외치지도 못하고 예언자적 음성도 들려주지 못하는 교회는 있으나 마나한 교회며 때로는 사회를 더 부패하고 썩게 만드는 교회다. “소금이 짜지 못하면 무엇에 쓰는가? 밖에 갔다 버리게 된다”는 말씀은 곧 교회가 제구실을 못하면 역사 속에서 심판을 받고 짓밟히게 된다는 말씀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부패한 루이왕조와 함께 타락하고 호화 사치 권력에 탐했던 가톨릭 교회가 민중들의 돌을 맞으며 무참히 짓밟히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처녀들의 초야권까지 빼앗던 러시아정교의 사제들과 교회당이 1917년 러시아혁명 때 무참하게 살해되고 파괴되는 모습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교회가 사회의 변화를 위해 일하고 노력해야 한다면,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변화시켜야 하는가? 이 대답은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주기도문 속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신의 나라가 임 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도록 이 사회를 변화시키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상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은 “하나님의 나라”였다.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는 예수님의 비전(vision)이었고, 유토피아며 오늘날의 말로 한다면 실천적 이데올로기였다. 예수님의 많은 가르침과 비유 속에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한 언급이 반드시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 만들어 낸 말은 아니다. 독일 튀빙겐의 유명한 성서신학자 캐제만(Ernst Käsemann)이 밝혀낸 바에 의하면, 예수는 유대민족, 민중들이 익히 알고 귀에 익은 개념이 된 “하나님의 나라”를 가지고 그의 선교와 가르침의 핵심을 삼았다고 한다. 마태복음 11장 13절에 “모든 예언자와 율법이 요한의 때까지 그 나라에 대한 예언을 했다”고 쓰여 있다. “너희가 그 예언을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오게 되어 있는 엘리야가 바로 그 요한이다”라고도 했다. 매우 구체적으로 역사적 상황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실현을 이야기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러 나라의 침략을 받으며 종살이를 하고 압제에 시달리면서도 고대하고 기다리던 “하나님의 나라” 사상에다 연결해서 예수님은 이 “나라”의 뜻을 보다 더 구체화하고 분명하게 밝히셨다. 당시에도 하나님의 나라를 내세적이며 종말론적인 것으로만 여겼던 신도들이 많이 있었던 것 같다. 죽어서야 가서 볼 수 있는 천당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나라를 매우 구체적인 현실에다 연결시키며 역사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과정으로 설명하시고 있다.
하나님의 나라가 멀리 내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가 1:15)는 말씀을 여러 번 하셨다.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누가 17:20-21)고도 했다. 도마복음엔 “ 하나님의 나라가 저 하늘 공중에 있다면 새들이 먼저 들어갈 것이다”고 까지 했다. “내가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들을 쫓아낸다고 하면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너희에게 임한 것이다”(누가 11:20) 라고도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내세에만 있는 것이 아니요, 종말론적으로 끝에 가서 단 한번에 오는 것도 아니요, 바로 이 땅위에 너희들 가운데 현실적으로 오고 있는 과정이라는 말씀이다. 그런데 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의 삶 속에 임하려면 우리들 속에 있는 귀신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독재와 억압의 귀신, 폭력과 착취의 귀신, 부정부패의 귀신, 전쟁의 귀신, 사치와 허영의 귀신들, 인간과 자연의 생명을 죽이는 모든 구조악을 쫓아내야 하나님의 나라가 그 만큼 오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많은 비유들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설명은 매우 구체적이며 현실적인 것이었다. “천국은 마치 포도원 주인이 노동자들에게 일을 시키고 먼저 온 사람이나 늦게 온 사람이나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그런 포도원과 같다”(마태 20:12)고 설명하셨다. 또한 “잔치 상을 벌였는데 청한 사람은 오지 않고 길거리에 있던 맹인, 절뚝발이, 불구자들, 가난한 사람들이 와서 잔치 상에 앉아 즐기는 것과 같다”(누가 14:21)고도 하셨다. 이것은 우리가 이 땅에 실현하도록 노력해야 할 사회의 모델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비전과 목표를 제시하신 것 뿐 아니라, 실천행동으로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도록 노력했다. 가난한 자와 억눌린 자에게 기쁜 소식과 해방을 주시려는 노력, 병 고침과 위로와 구제의 행위들이 곧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오게 하려는 노력이요 실천이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구체적으로 실현해 볼 계획과 전략마저 세우셨던 것 같다. 마가복음 4장 11절엔 이런 구절이 있다 “무리들과 대중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에 관해 알기 쉽게 설명해 주시고 제자들과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까지 알게 해 주었다.”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데는 무슨 구체적인 계획과 전략이 있었던 것 같다. 이것은 아무에게 나가 아니라, 핵심그룹들만 알아야 할 비밀에 해당하는 전략이었던 것 같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해 구체적인 작전계획까지 구상했던 분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누가 6:20-21)는 말씀이나 “부자는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신 풍자를 볼 때, 예수님은 이 땅에 가난을 구제하고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세상을 만들어야 하나님의 나라에 가까운 사회가 된다는 교훈을 주신 것이라 볼 수 있다.
3. 하나님의 선교와 사회발전의 목표.
교회의 존재이유가 복음의 전파와 실천, 곧 하나님의 나라를 증거하고, 그 나라가 이 땅에 임할 수 있도록 인간과 사회를 개조하고 발전시켜야 한다면, 어떤 사회발전을 목표로 노력하고 지향해 가야하는가 ?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사회의 개조를 교회의 사명으로 볼 때,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하는 민주사회의 건설은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기 위한 우선적인 실천과제가 된다. 예수님은 사람다운 권리와 존중함을 누리지 못하는 사람들을 높이고, 그들의 생명을 살리는 노력을 통해서 인권을 보호하고 신장시키신 분이다. 최후의 심판 날에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에게 묻겠다고 했다. “너희가 세상에서 배고파 굶주린 자들을 돌보았느냐? 옥에 갇힌 자를 찾아 위로하였느냐? 병들고 아픈 자를 도와주었느냐? 이런 것들이 하늘나라에서 심판받을 내용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은 인권존중의 가치관을 가르치셨다.
포도원에서 한 시간 일한 노동자에게도 하루 먹고 살 임금 한 데나리온을 주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이라고 가르치신 예수님은 노동자 농민의 인권을 옹호하신 분이다.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막지 말라고 어린이의 인권을 옹호하신 예수님의 모습, 부엌에서 음식을 만들지 않고 예수님과 토론을 하고 앉아 있는 마리아를 변호하시며 여성들도 진리를 배우고 토론할 권리가 있다고 여성의 인권을 옹호하신 예수님의 태도, 이런 장면들을 볼 때 예수님의 선교야말로 인권선교였고, 특히 가난하고 소외되고 불쌍한 사람들의 인권, 사람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사람들의 인권을 옹호하며 회복시키려는 선교였다.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의 복음과 선교행위를 따르려면 인권선교를 게을리 해선 안 된다.
그러면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의 이러한 인권선교의 정신을 현대사회 속에서 어떻게 구현할 수 있는가? 가난하고 굶주리며 병들고 억압받는 자들이 하나 둘이 아니고 수백만, 수천만인 경우에 이들의 생존과 인간적 권리를 지켜주는 일은 개인들의 구제활동만으로는 부족하며, 사회제도의 개혁을 통해 사회 전체가 이들의 인권을 보호해 주도록 만들어야 한다. 인권을 최대한 보장하고 신장시키는 사회는 어떤 사회인가를 물었을 때 우리는 쉽게 대답하기 어렵지만,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제도 가운데서는 아직까지 민주주의 사회가 가장 인권을 지켜준 사회라는데 동의할 수 있다. 물론 민주주의도 완전한 제도는 아니며 많은 단점을 갖고 있지만 적어도 자유와 평등과 박애와 같은 인권의 핵심적 내용을 실현하는 것을 최대의 목표로 삼고 있는 사회제도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타고난 권리, 즉 신체의 자유, 신앙의 자유, 언론의 자유, 평등의 권리, 생존의 권리, 교육과 직업의 권리, 정치권력을 선출하고 수행하는데 참여할 권리를 최대한 보장하려는 제도가 민주사회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정치제도일 뿐만 아니라 사회 경제구조며 가치관이다. 왕이나 황제, 귀족, 봉건제후 같은 특정 권력자나 계급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가 아니라 국민 전체가 주인이 되고 모든 사람들의 권익과 행복을 추구하는 정치제도며 의식구조 이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정치권력만 민주적 방식으로 선출되고 행사된다고 해서 다 실현된 것이 아니고 국민 모두의 삶을 규정하는 경제, 교육, 문화, 사회 전반에 걸쳐 차별과 억압이 없고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질서가 확립될 때 민주화가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정치 질서의 민주화 뿐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의 민주화가 필요하다.
인간의 기본권이 보장되는 민주 사회가 기독교 사회발전의 우선적 목표가 되는 것은 사실이지만, 민주주의 제도가 확립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나라 운동이 지향하는 시회발전의 목표가 다 실현되는 것은 아니다. 민주 사회 속에서도 수많은 차별과 억압, 착취와 비리, 폭력과 지배가 있는 것을 보면서, 민주주의 제도가 수립 되었다고 인권이나 사회정의, 평화, 복지가 다 보장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한 때 기독교는 어떤 사회이념(이데올로기)을 긍정해야 하느냐로 논란이 많았지만, 결국 어떤 특정한 제도나 이념과 교회의 선교는 동일시 될 수 없다는 것이 결론이었다. 민주주의에도 사회주의에도 민족주의에도 기독교가 긍정해야 할 부분이 있지만, 결국엔 역사적 정치적 한계가 드러나고 결점이 보이면서 교회의 하나님나라운동과 일치될 수 없는 면이 드러 나고 만다.
이것이 아마도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나라는 세상의 나라와는 다른 것이다”고 말씀하신 뜻일 것 같다.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 나라운동이 일반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과 다른 점이 여기에 있을 것이다. 교회는 인권신장과 사회정의를 위해 때로는 정치적 행동과 사회 개혁운동을 해야 하지만 그것이 일반적인 정치운동이나 사회운동과 구별되는 것은 목표가 하나님의 나라가 올 수 있게 하려는데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나 공산주의가 가난한 자를 구제하는데, 계급차별과 지배를 타파하는데 크게 기여한 것이 사실이지만 일부의 교인과 성직자들이 초기 공산주의 운동을 초대교회의 공동체처럼 미화한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기독교의 복음정신과는 거리가 먼 이데올로기 때문에 기독교는 공산주의도 비판하게 되었다.
결국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지향해 가야할 사회, 하나님 나라의 모습을 닮은 사회는 어떤 사회며, 교회가 지향하는 사회발전의 목표는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이 계속 나오게 된다. 2차 대전 후 교회의 일치와 하나님의 선교를 주장하며 에큐메니칼 운동을 전개했던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특히 현대사회 속에서 교회가 추구해야 할 사명과 사회발전의 복표를 어디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모색하며 많은 제안과 주장을 내놓았는데, 이 과정과 흐름에서 대안적 교회의 방향을 찾아 볼수 있겠다. 시대에 따라 과제와 목표가 좀 달라졌지만, 세계 개신교 교회와 동방정교회를 대표하는 WCC가 제시한 하나님의 선교와 사회발전의 목표는 세계 주요 나라 교회들의 의견과 태도를 반영한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1948년 암스테르담에서 창립된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창립선언엔 “무조건 전쟁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에 반대한다” 는 선언을 했고, 교회의 “책임사회”(responsible society)론을 주장했다. 전쟁과 독재와 인권과 자유의 탄압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도록 책임있게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1954년 미국의 에반스톤(Evanston)에서 열린 WCC 총회에선 민주사회(democratic society)가 강조되었다. 1968년 스웨덴의 웁살라(Uppsala) 총회에서는 “사회발전과 평화” (SODEPAX, WCC 와 로마가톨릭교회가 공동으로 만든 프로그램) 가 강조되어 60년대의 많은 신생독립국의 교회들이 요구한 경제발전과 사회평화를 반영했다. 그 후 70년대에 와서는 남미의 종속이론과 해방신학이 득세하며 제국주의 신식민주의 등 억압과 지배 수탈의 정치 경제구조에서 해방되지 못하면 인권과 사회정의가 실현될 수 없다는 입장을 내세우게 된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그리고 경제적 지배와 수탈에서 벗어나는 정의로운 사회구조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선교적 과제로 설정된다. 이것이 1975년 케냐의 나이로비(Nairobi)에서 열린 WCC 5차 총회에서 채택된 “정의롭고 참여적이며 지속가능한 사회”(Just, Participatory, Sustainable Society JPSS)라는 교회의 사회선교 목표였다. JPSS는 당시에 세계교회의 핵심적 과제였던 흑백 인종차별의 철폐와 참여적 민주주의, 경제예속과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된 정의로운 사회구조, 그리고 자연자원과 환경을 지속가능하도록 보존하고 절약해야 한다는 생태계 보존의 윤리가 담긴 선교적 목표였다고 할 수 있다.
그 뒤로 1980년대에 와서 전 세계적으로 반핵 평화운동이 일어나면서 교회는 평화의 사명에 다시 눈을 뜨고 예수님의 산상수훈의 정신으로 돌아가 전쟁과 폭력을 폐지하고 평화를 만드는 선교를 목표로 설정한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자연환경, 자원의 문제는 생명의신학 운동과 함께,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온전하게 보존하고 유지해야 한다는 “창조의 통전성”(Integrity of Creation)운동으로 전개된다. 1983년 캐나다의 밴쿠버에서 모인 6차 총회에서 세계교회의 에큐메니칼 사회선교의 목표와 과제는 다시금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Justice, Peace, Integrity of Creation)으로 재조정된다. 1990년 서울에서 모인 JPIC 특별 세계대회(WCC Convocation)도 정의, 평화, 창조의 보전을 통전적으로 결합시키면서 구체적인 실천 강령을 만들어 낸 대회였다. 1991년 호주의 캔버라에서 모인 7차 총회는 정의나 평화, 창조의 보존이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의 생명, 자연의 생명을 지키며 풍성하게 하려는 노력이라고 주장하면서 생명의 문화, 생명의 신학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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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 WCC 총무 Konrad Raiser박사의 한국방문(좌, 박종화 박사, 이삼열 박사, 장상 박사, Dr Raiser, 김영주 NCCK 총무, 안재웅 이사장, 박경서 박사) | ||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우도록 증거하고 실천해야 할 교회의 선교는 정의롭고 평화로우며 지속가능한 세계와 사회를 건설하는데 있다고 잠정적 결론을 내렸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가치와 이념을 실현하기 위해서 교회가 해야 할 과제는 엄청나다. 여러 가지 정치적 사회적 변화와 개혁을 이루지 않고는 실현될 수 없는 목표다. 그래서 때로는 교회가 독재타도와 민주화운동, 제국주의 타도와 민족해방운동, 계급 인종차별 철폐와 경제정의실천운동 같은 사회 정치 운동에도 참여할 수밖에 없다.
아울러서 교회는 이러한 사회선교를 실천할 수 있는 일꾼들을 교육하며 훈련시키는 일, 빛과 소금의 사명을 깨닫게 만드는 예배와,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돌보는 사회봉사, 피곤하고 지친 심령들을 위로하고 희망을 심어주는 상담 등, 목회적 과업들을 감당해 갈 수 있도록 조직과 인물, 구조를 갖추어야 한다. 교회는 곧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 운동에 깊은 신앙을 가지고 참여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는 전진기지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