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아지고 고난 받는 권위
(시 25:1-9; 출 17:1-7; 빌2:1-13; 마21:23-32)
김종원 장로 (새민족교회)
http://youtu.be/_fcT_8SC6N8
![]() |
||
오늘 성서일과 본문들은 권위에 대해 조명합니다. 모세의 권위, 예수의 권위, 민중의 권한 그리고 그 차이점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들을 보통 교회들에서는 어떻게 말 할까요? 하나님과 교회지도자들에게 대들지 말고 순종하라(출애굽기 본문). 묻지도 따지지도 말라(마태복음 본문). 그것이 마땅히 가야할 길(시편 본문)이며 그리스도가 보여준 겸손으로 이것을 실천하는 것이 곧 구원에 이르는 길(빌립보서 본문)이다. 아마 이렇게 결론 지을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도전과 해방
오늘 출애굽기 본문에는 물을 달라고 불평하는 출애굽 탈출 민중의 원망과 행동에 대해 모세의 대응과 이어지는 야훼 하나님의 조치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사건은 그 앞의 15장22절부터 이 본문까지를 연결해서 이해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물 사건(15장) – 만나 메추라기 사건(16장) – 다시 물 사건(17장)으로 장면이 연결됩니다. 오경 저자(편집자)들의 의도를 찾아 볼 수도 있을 텐데, 아마도 출애굽 히브리 민중들의 불평에 대해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문제의 완전한 해결을 이루는 야훼 하나님의 역사하심(인도)을 극대화시키고자 한 듯합니다.
이 기사는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17:8부터 나오는 아말렉전투 이야기와 18장 모세의 장인 이드로 이야기와 함께 큰 맥락을 구성합니다. 즉 출애굽기 1부를 탈출(Exodus)에 관한 기사라고 한다면 2부는 계약과 법(19장부터)에 관한 기사라고 할 수 있는데 오늘 본문을 중심으로 15장부터 18장까지의 기사는 이 1부와 2부를 연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연결 통로인 이 세 본문은 모두 위기(생존을 위한 먹고 마실 것 불평, 전투, 격무)를 주제로 하고 있으며, 이 위기가 모세라는 지도자를 통해 해결됩니다. 물론 위기적 상황이 신(야훼)의 인도로 극적 해결되지만 신은 현실에서 늘 볼 수 있는 존재는 아니므로 현실 지도자인 모세에 대한 히브리들의 태도를 봅니다. 아마도 이 기사들은 ‘너희 백성들은 이렇게 약하며 부족하고 미숙해, 그러니 우리는 신을 잘 섬겨야해. 그러려면 어찌해야 할까? 우리 지도자와 사제들의 말을 잘 따라야지!’ 라는 이데올로기를 담고 있는 것을 아닐까 라고 생각합니다.
출애굽기에서 보듯이 모세, 아론, 이드로 그리고 그들에 의해 세워지는 천부장부터 십부장까지 하위 지도자들의 체계를 만들고 있는 장면을 보면 이스라엘공동체가 리더시스템을 만들어 가는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바빌론 포로 시기 5경을 편집, 구성한 사람들, 즉 당시 포로로 잡혀간 이스라엘의 엘리트와 사제 등 지도층 사람들의 목적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야훼 하나님의 역사와 인도로 일군 그들의 삶과 역사를 지탱해 온 율법임을 강조하고, 포로시기와 귀환 이후 이스라엘을 재건하기 위해서는 율법에 순종하고 자기들과 같은 지도자들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을 것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오늘 본문에서는 ‘권위를 창출하려는 시도’를 찾아 낼 수 있습니다. 구약성서는 파라오의 권위와 그리고 출애굽한 히브리들 자신들의 지도자들의 권위에 대한 불평과 반발, 저항으로 해방과 이스라엘공동체를 건설해 가는 과정을 보여 줍니다. 물론 모세로 대표되는 히브리해방전통과 다윗을 중심에 둔 왕조전통, 두 전통의 긴장과 대립이 이스라엘 전체 역사를 엎치락뒤치락 형성해 갑니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유대교 일반이 가진 이러한 권위시스템과 이데올로기를 예수는 거부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뒤집어 버립니다. 예수는 하나님이 히브리민중을 해방시키고 공동체를 이루게 한 그 장대한 역사의 본래 가르침과 오늘 본문에 담긴 속 살(이면)을 실천하려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권위의 역전을 말하다
다음으로 오늘 본문 마태복음 21장 말씀을 보겠습니다. 예수의 권한 논쟁입니다.
이 기사를 통해 마태공동체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무엇일까요? 이 논쟁의 장소는 예루살렘입니다. 권력과 권위의 최고 중심인 곳에서 예수님은 그의 날카로운 의도를 드러냅니다. 대사제들과 원로지도자들은 예수의 가르침에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예수와 그 무리들로 인해 위태로워지는 그들의 권위와 권력입니다. 그게 걱정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꿰뚫습니다. ‘그렇게도 권위를 세우고 으스대며 목에 힘주고 다니는 너희들의 근거, 그 대단한 권위의 근거는 무엇이냐?’. 그러면서 이어지는 두 아들의 비유에서 세리와 창녀 등 민중을 장자로, 원로지도자들과 사제를 둘째 아들로 비유합니다. 즉 아버지의 말을 결국 실행한 민중, 세례 요한이 가르친 옳은 길을 믿고 따르는 세리와 창녀들과 같은 민중이 구원받을(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이들이고 이들이 애초 하나님이 계획하신 첫째다 라고 규정합니다. 이것은 엄청난 해석학적 전복(뒤집음)입니다. 결국 이러한 논쟁을 통해 예수는 권위의 전복, 패러다임의 전복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는 유대 지배계층의 눈엣 가시, 처단시켜야 할 위험인물로 점점 되고 있습니다. 오늘 이 본문이야말로 마태공동체가 유대 지도자들과 사제들의 권위를 비웃고, 그들에 눌린 대중, 그리고 이와 같은 처지와 배경을 지니고 있을 공동체 구성원들과 함께 나누었던 신학적 민담인 것입니다.
박근혜의 권위,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의 권위
지난 주 24일 손석희 앵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월호 얘기, 혹시 지겨우십니까? 지겹다는 분들도 계시더군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직도 왜? 라는 질문은 넘친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는 이 배가 왜 침몰했는지도 모르고 있습니다. 오늘(24일)이 벌써 162일 째인데도 말이지요. 지겨워도 직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믿습니다.”
세월호 구조의 골든타임을 놓치게 된 결정적인 시간 동안 대통령의 행적을 밝히라는 요구, 나아가 세월호 사건의 모든 진상규명 요구에 대한 대통령의 대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통령의 권위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며 모독이라고 본 것입니다. 세월호 특별법 논의가 진전되지 않는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사실 대통령 모독에 관한 한 박근혜 정권의 뿌리 한나라당이 노무현정부 때 했던 일을 돌아보면 대통령 모독의 진수를 보게 됩니다. ‘노 대통령과 개구리의 닮은 점 다섯 가지’, ‘노무현 뇌에 문제가 있다’, ‘노무현 대통령 외교는 등신외교’, ‘그 놈의 노무현 대통령 때문에 참 쪽 팔리다’, ‘노 대통령의 정신상태가 올바른지 의문”… 이 정도는 돼야 대통령 모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욕 먹고 모독 받는 일이 일상이었던 노 대통령은 “대통령을 욕하는 것은 민주사회에서 주권을 가진 시민의 당연한 권리입니다. 대통령을 욕하는 것으로 주권자가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다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들을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또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자신의 해외 순방 중 박연차씨로부터 받는 백만 달러를 미국 유학 중인 아들 건호씨에게 건내 주었다며 그로부터 이 년이 지난 시점에서 중앙일보가 ’대통령의 16시간의 공백 의혹‘에 대해 보도했습니다. 이에 대해 당시 천호선 홍보수석은 ’시애틀의 23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대통령의 당시 일정을 시간대 별로 자세하게 설명한 보도 자료를 냈습니다.
대통령이 받는 욕과 모독, 그리고 의혹의 시간을 밝히는 것에 대해 한 쪽은 시민의 정신건강과 알 권리로 규정하는 반면, 한 편은 이것을 대통령에 대한 모독, 대통령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입니다. 노무현은 ‘권리’로, 박근혜는 ‘모독’으로 말입니다. 박대통령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고 고통과 슬픔 가운데 있는 가장 작은 사람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통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 대한 모독입니다.
최고의 권위 – 그리스도 찬가 / 가난하고 고통받는 자들의 권위
빌립보서 본문은 매우 유명한 그리스도 찬가입니다. 바울이 빌립보에서 추방된 뒤, 그가 이루지 못했던 그리스도 공동체가 현지의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바울은 이러한 빌립보 공동체의 성장 소식을 듣고 예전 자신이 약한 자들을 위한다며 자만에 가득 차서 사역하던 그 때를 성찰합니다. 그 성찰의 핵심은 하나님의 겸손입니다. 그리고 낮아짐, 고난, 그리고 이를 통해 획득한 권위 즉 하나님께서 지극히 높여 주심(2:9-11)입니다. 그리스도 찬가는 자신의 성찰을 통해 낮아짐, 겸손의 의미를 깨닫게 합니다.
구약성서를 편저한 어떤 그룹의 사람들이 가진 목적이 신을 통해 지배계층 자신들의 권위를 극대화하려 한 것이라면,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을 추구했던 예수공동체들은 구약에 근거하는 권위로 뭉친 유대교 전통이 가지고 있던, 야훼하나님을 왜곡하고 민중을 억압하는 대표시스템인 성전권위 해체를 주창했습니다. 바울의 빌립보교회에 보낸 편지에서도 권위 해체를 위한 실천의 마땅한 근거는 스스로 낮아지고 고난 받음,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보여준 바로 그 증거라는, 매우 파격적이고 전복적인 해석을 내놓았던 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예수 이후 소아시아 지역 인근의 유대교 공동체 혹은 유대교적 기반을 가진 공동체 구성원들이 오늘 구약성서 본문 편저자들의 의도에 따라 획득된 성전 권위의 핵심인 ‘율법 순명’을 강조하는 상황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러한 조건에 있는 빌립보 교회도 본문 뒤에 나오는 3장에서 보면 율법을 강조하는 이들에 대한 경계를 강하게 드러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 운동 공동체의 권위
오늘 성서일과 본문은 ‘권위를 세우려는 이와 권위에 저항하는 이들 사이의 접점’을 분명하게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정치와 사회 현실에서, 또한 교회공동체에서 권위의 역전과 전복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빌립보 본문에서처럼 낮아지고 그로 인해 고난 받은 예수의 모습에서 권위의 진정성을 찾는 일입니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이 가지는 권위, 세리와 창녀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갈 권한을 회복해야 합니다.
세월호 희생자 가족들이 치유되고 그들이 일상으로 온전하게 돌아오려면 피해자로서의 권위를 존중해야 합니다. 이것은 대통령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국회가 협상으로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아닙니다. 피해자 가족들에게는 진실(진상)을 알아야 할 마땅한 권한이 있고, 거기에 책임 있는 사람과 조직(구조)이 무엇인지 알고 어떤 조치를 해야 하는지 명명백백하게 규명 받을 권한이 있습니다. 이것을 가로 막고 왜곡하거나 비난할 권한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금 이 권한과 권위가 무시되고 모욕당하는 상황을 접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세월호 사건에 책임 있는 자들이 그들이 가진 막대한 권한을 바탕으로 자신들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온갖 방해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말씀드린 대로 ‘권위를 지키려는 이와 권위에 저항하는 이들 사이의 치열한 접점‘이 폭발하듯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며 사건의 깊은 속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의 신앙과 실천은 어떤 좌표를 가져야 합니까?
우리는 목사의 권위, 장로의 권한, 연장자의 권위, 스스로 공동체 주변인으로서 권리 등 이렇게 각자 자신들의 권위, 권한, 권리만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까? 우리 각자에겐 아무런 권위가 없다고 생각해 봅시다. 오로지 지금 슬퍼하는 사람들, 지금 우는 사람들, 지금 고통 받는 사람들에게 있는 하나님의 위로를 받을 권한, 그들과 우리가 함께 하나님 나라의 주인이 될 권한 만을 생각합시다. 그러므로 우리 새민족공동체는 ‘같은 생각을 품고,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이 되어’ 하나님나라 운동의 전진기지, 야전병원이 되어야 합니다. 야전병원은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현장에 있어야 합니다. 이 현장은 우리의 가정과 일터일 수도 있고, 그리고 밀양, 청도, 쌍용자동차, 사대강, 원자력발전소, 성소수자, 장애인, 이주노동자, 쌀 개방 투쟁 농민, 우리 지역의 어렵고 힘든 사람들과 지역문제 일수도 있으며 그리고 가난하고 지금 울고 슬퍼하는 사람들이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 가서 머무르기 위한 전진기지, 야전병원이 될 때 교회공동체의 권위가 세상에서 세워집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모두가 그리스도의 겸손을 실천하여 하나님의 자녀답게 사는 태도를 기초로 하여 교회의 모든 것을 점검, 정비하여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 합니다. 이렇게 될 때 우리 공동체의 권위는 물론 교우들 한 사람 한사람 각자의 권위도 아름답게 생겨나고 커져 갈 것입니다. 서로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가진 권위를 존중하고 같은 마음을 가집시다.
요즘 가을 하늘이 정말 눈부십니다. 제가 일하는 캠퍼스에서 보는 요즘 하늘을 보면 감탄이 저절로 나옵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서 봐도 더욱 그렇습니다. 하늘과 땅이 거꾸로 되어 파란 하늘 속을 거닐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모든 사람이 슬픔과 고통 없이 눈이 부시게 파란 하늘을 보며 하나님 창조세계에 감탄하고 감사할 수 있는 그 날, 그 하나님의 나라를 그리워합시다. 이 하나님 나라를 잊지 않고 우리의 일상과 생활에서 예수가 보여 준 권위의 전복을 맛보며 새로운 세상을 향해 실천하는 교우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