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죽 강신명 목사와 PCK

                       소죽    강신명 목사 알아가기 첫 모임 

한해가 저무는 때에 한국교회와 우리교단의 위해  헌신한 선배 동역자들과 서로의 안부를 물으며 고 강신명목사에 대한 회고의 시간을 갖었다. 그간 목회의 사표가 되는 선진들중 우선 새문안교회를 담임하면서 한국교회의 지도자로 우뚝선 자취도 있지만  서울장신대학교 학장을 맡아 학훈을 ‘한알의 밀알’ 로 정하시고 신학교로써의 면모를 갖추는 데 기여를 하셨기 때문이다.

 

지난 12월19일(금) 정오 100주년에서  20여명이 모였는 데  102회기 총회장을 지내신 최기학 목사와 임은빈목사등 서울장신 동문들을 중심으로  첫 모임을 갖었다.  그리고  서울장신대 정병준교수가 ‘강신명의 생애와 사상’ 을 듣고 대화를 나눴다. 이 모임에는 전 총회장 정영택목사와 전 장신대 임희국교수, 전 사무총장 조성기목사등도 참석했다.

참석한 이들은 강의를 듣고 함께 회고를 나눴으며 새문안교회 서창석집사와 강신명목사의 5째 자녀인 강석공목사(광야교회 은퇴) 강신명목사 부친이 세운 영주 내매교회 담임 윤재현목사도 친히 상경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동안 강목사님의 생애와 사역에 대해서는 단행본으로 출판된 책들이 있으나 현장 목회자들에게 귀감이 되는 것들은 저평가된 감이 없지 않아 앞으로 여러차원의 연구와 발굴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서울장신대와 강신명목사 정병준 교수 글을 인용할 것 같으며

1979년 11월 3일 박정희 대통령 국장일에 개신교 대표 강신명 목사는 미사여구 없이 성경을 읽어 내려갔다. “모든 인간은 풀과 같고 인간의 영광은 풀의 꽃과 같다.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지만 주의 말씀은 영원히 살아있다.…” 조사(弔辭)에 함께 참여한 종교 지도자들은 박 대통령의 영생과 극락왕생을 빌었으나, 강신명 목사는 인생의 허무와 심판, 믿는 자에게 따르는 부활과 생명에 관해 말씀을 읽고 유가족과 나라를 위한 목회 기도로 마쳤다. 당시 필자는 고등학교 2학년 어린 나이였으나 박 정권의 무서움을 어렴풋이 알았고 그의 조사를 들으며 등에 땀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저분은 진짜 목사님 같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 필자는 강신명 목사가 20년간 교장(1962.9~1982.8)으로 역임하며 발전시킨 서울장신대학교에서 교수 사역을 하면서 ‘소죽 강신명 목사의 생애와 사상’을 썼고, ‘에큐메니칼 운동사’ 과목에서 강신명 목사의 리더십에 대해 강의하고 있다고 하면서

첫째, 강신명은 “양을 먹이라”는 주님의 말씀을 최선의 사명으로 여겼다. 그는 “목사는 반드시 교인을 알아야 한다”고 늘 강조했다. 그의 목회는 성경, 설교, 심방이 연결되었다. 그는 어려서 성경을 “1장씩 읽다가 목회하면서 3장씩 읽고, 지난 3년간은 7장씩 읽고, 여행 때는 10~20장을 읽었다(1964.6)”고 했다. 그는 2~3주 전에 설교원고를 완성했고, 설교 때는 청중의 반응을 보고 포인트 중심으로 설교했다(1979.8). 또한 새문안교회의 모든 교인의 이름을 기억했다.

둘째, 강신명은 총회야간신학교 교장(1962.9)이 된 후, 학교명을 서울장로회신학교로 바꾸고 목표를 ⑴ 성신의 감동을 따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곳 ⑵ 교회가 한국에 존재하는 의미를 알게 하는 곳 ⑶ 교회는 예수의 몸 된 교회라는 에큐메니칼 신학교육을 하는 곳으로 정했다. 그리고 목회자 양성과 평신도 지도자 양성을 목적으로 학교를 운영했다.​

셋째, 강신명은 우리 교단의 에큐메니칼 운동의 방향을 바르게 잡았다. 1959년 당시 경기노회 부회장으로 교단 분열을 목격한 그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증인이다. 그러므로 자기 스승이나 자기 학교나 그룹이나 심지어 교파의 증인이 아니다(1960.3)”라고 썼다. 그가 부총회장이던 1962년 희년 총회에서 우리 교단은 “독선적이고 편협한 신앙의 고집과 태도를 지양하고, 세계장로교회가 지향하는 노선, 삼위일체 신앙을 가진 형제들과 성도의 교제를 갖겠다”고 ‘교단합동원칙’을 결정했다. 1969년 장로교재합동이 어려워지자 한경직, 강신명 두 지도자는 우리 교단이 WCC에 재가입을 결정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넷째, 강신명은 일평생 ‘밀알사상(요12:24)’을 좌우명으로 삼았다. 1942년 그가 부임한 선천북교회가 분규에 처해 있는 것을 보고, 그는 ‘밀알처럼 내가 죽어 교회를 살린다(아사생교회, 我死生敎會)’는 심정으로 목회하여 교회를 회복했다. 그는 밀알사상을 서울장로회신학교의 교육목표이며 건학이념으로 삼았던 것이다. ​

 

다섯째, 강신명은 국가와 교회의 관계를 바르게 이끈 지도자였다. 그는 1953년 프린스턴 신학교 유학시절 유명한 선교사이며 에큐메니칼 지도자였던 매카이(John Mackay) 학장의 지도 아래 ‘일제하 국가-교회 관계’에 대해 논문을 썼다. 5.16 군사정변의 직후 그는 “그리스도인은 정부의 보호를 받고 살아가는 만큼 정부를 지지해야 한다”고 하면서 “때로는 적극 참여하여 나라가 바로 되고 잘 되게 하는 것이 실은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것으로 바치는 일이 아닐까”라고 말한다. 그는 1969년 삼선개헌을 반대했으며, 1975년 민주회복은 민주헌정(民主憲政)으로 돌아와야만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현실 참여를 거부하고 영혼 구원에만 집착하는 폐쇄적 신앙을 우려했다.​

여섯째, 강신명은 회개와 반성을 숨기지 않는 지도자였다. 해방 이후 강신명은 신사참배 죄를 회개하며 1간 설교단에 서지 않았다. 1980년 전두환의 국보위에 위원으로 참석한 것에 대해 “자신이 속았다”고 반성했으나 변명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그의 교회를 위해 하나님이 길러내신 꼭 필요한 지도자를 공급해 주신다. 요즈음 교단과 신학교의 미래를 생각할 때 강신명 목사님 같은 지도자가 무척 그립다.

강신명의 밀알신앙과 서울장신 정체성 찾기

서울장신대는 1954년 총회가 성장하는 한국교회의 목회자 수급을 위하여 야간으로 개설한 신학교였다. 이미 대전과 대구 부산 광주에는 비슷한 처지의 학교들이 있었다. 그리고 도시화로 상경하여 수도권의 인궆팽창과 교회증가는 정규학교인 장신대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이에 총회는 교회에서 봉사하며 미래한국교회의 지도자급으로  목회적 비전을 꿈꾸는 이들에게 패자 부활전을 위한 신학원을 열어 목회 길을 열어주었던 것이다.

 

처음은 미약하였으나 평범한 목회자들을 많이 양성하였고 다른 지방신학교와 같은 입장에서 학부 4년을 졸업 후 장신대 목연으로 이어지는 연구과정이었지만 선배들의 학업 열정과 목양일념은 전국 노회로 흩허져 가장 많은 동문들을 배출하게 된다. 그후 한국교회의 발전과 교회 성장에 따라 서울장신 학력만으로 만족하지 못한 이들은 일반대학이 방송대 해외 신학교등으로 못다한 학업에 대한 목마름을 체워갔다. 이는 상대적으로 사회나 교계도 고학력 선호에 대한 응답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서울장신대가 정식 4년제 대학으로 인가나 나면서 정 교수들로 인하여 정식 대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면서 모교에 대한 자부심과 정체성을 일기 시작한다. 그동안 서울장신을 나오고도 말못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지만 선배들의 교회와 교단을 위한 헌신과 기여가 평가를 받자 자부심도 생기게 된다. 2025년 지난 달에는 서울장신대 학부를 나온 후배들이 학교가 자리한 지명을 딴  ‘안골’ 이라는 모임으로 그 정체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는 데 이것도 달라진 모교에 대한 자긍심과 동문의식의 발로로 보여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모임은 전체적으로는 강신명이라는 큰 어른에 대한 한국교회와 교단의 기여와 함께 서울장신에 기여한 분들이 여럿이지만 강신명목사에 대해 그간 앞서서 뜻을 기리는 이들과 함께 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 모인 분들을 중심으로 준비위원회를 조직하여 앞으로 계속해서 저평가된 강신명목사의 신학과 사상 그리고 목회적 마임드와 교훈을 발굴할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  그의전생애를 관통하는 ‘밀알신앙에’  에서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지를 찾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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