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관아지, 별산대, 향교

                                       양주관아지와 양주 목사 불망비 

고려말 공민왕을 마지막으로 개성에 있던 수도를  한성(한양)으로  이전한 조선왕조 태조 이성계는 무학대사에게  현재 서울의 윤곽을 맡겼다. 그리고 한양서 당시 북으로 가는 관문 양주는 현재 남양주는 물론 성북, 노원, 도봉까지 북부를 관할하는 관청이 된다.  수도권 외곽이 과거 고양과 광주와 같이 양주로 분류된다.  그러나 다른 곳에 비하여 그 규모나 비중이 정치적으로나 지리적으로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중요한 지리적 위치다.

 

또 태조가 태종 이방언과 불화해 한양의 궁에서 나와 기거한 곳은 당시 왕족들을 모시는 회암사로  여기서  국사를 보아 의정부라는 명칭이 생긴 것이다. 의정부 도심도 원래는 양주군으로 파주, 연천, 포천으로 가는 길목이었으나 한국전쟁 이후 군사시설이 들어서도  국도가 설치되고 교통과 관공서의 중심이 되면서 양주군보다 먼져 시로 승격된다. 이렇게 양주는 인근 남양주까지 관할 하였으나 국가주도의 행정개편서 떼어주고도 현재 장흥까지 광범위 하다. 현재 유양리 초등학교 옆의 양주 관아지는 조선 시대 설치되 일제강점기(日帝强占期)까지 417년간 양주목을 다스리던 관청자리다.

양주 관아는 1506년에 고주(高州)에 복구되었다가, 불곡산(佛谷山) 남쪽 유양리로 옮겨졌다고 한다. 양주 관아지에 대한 관련 자료 [경기읍지(京畿邑誌), 양주목읍지(楊州牧邑誌) 등]를 보면 객사·형옥·읍창·진창·군기고·화약고·관청 등 31개의 시설들이 있었다고 한다. 한국전쟁시 양주관청이 의정부시내로 이전하면서 폐허가 된 것을 이후 복원한 것인데 관아지는 약 31개의 시설에 그 규모가 326여 칸이었던 것으로 추정한다.

 

1506년(중종1) 현 위치(유양리)에 설치되어 1922년 시둔면으로 이전 될 때까지 417년 동안 양주목(현 가레비 신산리 백석읍과 의정부 노원 도봉까지 그 관할 범위가 컸다 관아지는 2000년 부터 2017년까지 5차례의 발굴해 건물지 및 담장지, 배수시설, 출입시설 등의 유규와 평기와, 막새기와, 명문기와 등의 기와류 및 청자, 분청자기, 백자 등의 자기류, 상평통보 등 금속유물들이 확인되었다.

                                                                     * 가장 오래된 것으로 1567년 목사 백인걸의 선정비

양주시는 1997년 양주목사의 집무처인 동헌의 복원을 시작으로 그간의 발굴조사 결과를 반영하여 동헌부 부속건물 및 내아에 대한 복원을 추진하였다. 그 결과 2017년 동헌부 부속건물인 동행각, 서행각, 내삼문, 사령청, 외삼문, 중렴성문, 외렴성문과 양주목사의 관사였던 내아 내아삼문에 대한 복원을 완료할 수 있었다.

 

1996년 양주 관아지 일대가 시범 문화마을로 지정됨에 따라, 원골 문화마을 조성 사업의 일환으로 1997년 복원된 동헌 1동과 마당 한쪽에 양주목사를 지낸 관리들의 송덕비 20여 기를 세웠다. 이는 국내 어디에도 보기 힘들 일로 과거 양주 목사 20여명의 불망비 송덕비로 명칭 된 것으로 다른 곳에 방치된 것을 이곳으로 옮겨왔다고 한다. 이처럼 역대 20명의 양주목사의 이름이 새겹진 역사적 유물로 각 시대에 따라 만들어지 돌비의 모양도 특이하다.

어사대비 (御射臺碑)

 

양주 관아지 뒷편에는 어사대비(御射臺碑)라는 비석이 있는 데 왕이 이곳에 들러 활을 쏘았던 일을 기념한 곳이다. 조선 정조 16년(1792)에 광릉내의 세조의 능을 참배하고 돌아오던 길에 양주에 들려 민정을 살핀 후 근처 사대(射臺:활을 쏘는 위치의 발사대)에서 활을 쏜 뒤 백성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 이를 기념하여 당시 양주목사가 비를 세워두 것으로 당시 양주 목사 이민채가 직접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다고 한다.

양주별산대 전수관과 공연장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다. 이 놀이는 약 250년 전부터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 행사 때에 공연되었다. 기원은 양주고을 사람들이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놀다가 오고가는 사정으로 불편을 느낀 고을 사람들 중 이들의 놀이대본과 탈을 본따 직접 놀기 시작한데서 유래된다.

 

놀이는 전체 8과장 8경으로 시작하기에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공연장까지 가는 길놀이와 관중의 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이 등장하여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등장배역은 모두 32명지만 탈은 함께 사용하는 것이 있어 보통 22개 내외가 활용된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시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로, 서울과 경기 지방에서 전하는 산대놀이 중 하나이다. 삼현육각의 반주로 춤을 진행하는데 여자 출연자가 없음이 특징이다. 또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탈놀이중 가장 긴 시간을 공연한다. 송파산대놀이나 퇴계원산대놀이 등과 같이 산대놀이의 공통적 과장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양주별산대놀이가 가장 길다. 양주시의 적극적인 지원으로 전수회관이 운영되며 공연장의 규모나 위치는 불곡산 아래 위치하고 있어 좋은 환경이다.

 

1964년 12월 7일 국가무형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2022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탈춤이 지정되 한국의 여러 탈춤과 함께 그 이름을 올렸다. 공연은 주로 사월 초파일과 단오, 추석 때에 연희하였고, 가뭄 때 기우제행사로 연출하였다고도 한다. 1957년에 이화여고 노천극장에서 제1회 발표회를 하였고 그 뒤로 매년 2회씩 정기공연을 진행한다. 1978년부터 인근의 유양초등학교서 양주별산대교육을 시작하며 현재는 정부가 지원해 전이 이루어 지고 있다.

양주 향교

 

양주향교는 조선 태종 원년(1401)에 창건되었으며 그 위치는 정확한 기록은 알 수 없으나 양주관아의 역사로 보아 고읍동 일대 어디엔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중종 원년(1506) 폐목되었다가 양주관아, 사직단과 함께 유양동에 복원되었으나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광해군 1년(1650) 재건하였고 숙종 9년(1683)에 향교 부지가 협소하고 목재가 손상되어 비바람을 견디기 어렵다고 본 양주목사 ‘이유’가 경기감사 ‘김우석’에 보고, 예조를 거처 윤허를 받아 현 위치에 이건했다고 한다.

 

숙종 40년(1714) 양주 유생이 위패 차서가 바뀐 것(伯백 叔숙 두 분과 程정子자)을 예조에 상소 윤허를 받아 바로잡은 것은 양주 유림의 자랑이었다.) 철종 원년(1850) 명륜당이 낡아 관비와 유림들의 협조로 중수하였다. 고종 32년(1895) 소학교령이 공포되어 관립소학교로 교육기능이 이관되었으나, 학교 건물이 완공될 때까지 당분간 향교에서 개화된 소학교 교육을 시켰다. 광무 4년(1900) 향교재산 관리규정이 제정되어 부윤 군수가 책임관리하고

 

1945년 미군정법령 제194호로 향교재산 관리법을 제정하며 현재 각도 향교재단이 향교재산을 관리한다. 향교의 교육기능이 소학교로 넘어가고 향교의 책임자를 직원이라 명명하고 직원의 임명은 학부대신이 임명하고 직원은 향사와 삭망분향만을 봉행하였다. 1950년 6·25전쟁으로 향교 전체가 소실된 것을 1957년 유림들의 헌금으로 복원해 1893년 9월 9일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2호로 1984년에는 전교 최병선, 군수 정승우, 유림들의 성금 1,000만원을 들여 명륜당을 복원하였고 2022년에는 양주시의 지원을 받아 홍살문을 다시 세웠다.

양주 순교성지

 

양주 순교성지는 『치명일기』의 기록을 통해, 병인박해 때 다섯 분이 순교한 치명지를 2004년 의정부교구 설립 뒤에 새롭게 찾아내 성역화를 진행하고 있는 성지다. 그러나 현 장소와는 특별한 인연은 없으나 양주관아지와 국가 무형문화제 양주 별산대 놀이터와 양주항교와 맞대고 있어 지리적으로나 역사적으로 아주 좋은 장소로 점유하고 있는 셈으로 국가유산 인근에 그것도 뒤 늦게 특정 종교단체가 자리한 것에 대해서는 의아해 하는 분들이 많다. 이 토지의 원 주인이 개인이라면 몰라도 만약 국가였다면 과연 문화재 인근토지를 매도할 수 있었는 지 조사가 필요해 보인다.

 

이곳을 순교성지로 명명한 이유로 증언을 통해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다는 이유인데 2016년 의정부교구에서 이 토지를 매입하여, 교구장 이기헌 주교의 주례로 성지 선포 미사를 봉헌하며 성역화를 시작했다. 현재 5명의 순교성인을 기리고 있으며 순례자를 위한 매일 미사와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 관광지로 역할을 하고 있다. 순교 성인이라고 하는 다섯 분에 대한 조사나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아 치명일기 기록 이상의 내용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만 “순교지”라는 표지석이 있었다는 증언을 바탕으로 마련된 지금의 땅은, 순교자들의 삶과 영성을 묵상하고 배울 수 있는 성지로 꾸며가고 있습니다. 양주에는 초기 신앙을 지키기 위해 박해를 피해 숨어든 신자들이 모여 살며 이룬 교우촌들이 있었는 데 우고리, 신암리, 갈곡리(파주)로 이어지는 외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온다.

회암사지 

회암사는  태조 이성계의 절이라고 할 만큼 그의 가문과 조상들을 모시는 사찰이자 궁궐로  당시 국제적으로 인정된 최고의 명당에 있었던 장엄하고 어마어마한 규모의 절로 몇천명이 거주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건물 기단에 남아 있는 불에 탄 주초와 발굴된 유물만 남아 있다.  다만  박물관에서 발굴된 자료들을 연구하여 상당한 기록을 남겼다.  고려는 불교가 국가종교여서 불교나 승려들이 많은 특권과 대접을 받았다. 그러나 조선개국 공신들중에는  유교신봉자들이 많아 억불숭유이 된다. 그러나 왕족은 고대로 부터 불교에 위패가 있어 왕사로써 역할을 하지만 이성계가 죽고 불교의 힘이 약해지면서 회암사 주지로 임명된 나홍선사까지 태로를 당하는 등 큰 화를 겪는 다. 

민간이 근접할 수 없는 위치로 이후 절은 방치되 목재와 돌까지 필요한 사람들이 가져가 폐허가 되는 데 이런 연유에는 한 때 유생 청년들이 불을 질러 태웠다는 기록도 있다. 이처럼 종교간의 갈등은 폭력적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고려시대 당시 회암사가 있는 곳인 양주를 당시는 견주(見州)라고 불렀른 데 양주(楊州)라는 이름은 오늘날 서울 지역에 할당된 이름이었다. 조선조에 들어서 오늘날 궁자리에 살던 사람들을 이주시켜 만든 도시를 양주읍이라고 부르도록 했는데, 바로 오늘날의 구읍이다. 

조선 시대에도 도시 개발로 인하여 거의 사람들이 살지 않턴 강북 성북을 지내 의정부(녹양)으로 이주민 단지가 있었던 셈이다. 회암사는 현재 양주읍의 북쪽에 있다. 연천으로 가는 국도에서 동두천에 이르기 전 동쪽으로 가거나, 제2외곽순환도로 옥전나들목에서 나와 작은 개울을 건너야 한다. 개울을 건너면 바로 정면에 박물관이 보이고 그 뒤편으로 절터가 넓게 펼쳐진다. 그 개울이 속세와 절터를 갈라놓는 듯하다. 그리 높지는 않지만 맑은 기운으로 절터를 둘러싸고 있는 산이 바로 천보산 자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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