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이다.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경기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다. 이 놀이는 약 250년 전부터 사월초파일,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 행사 때에 공연되었다고 한다. 탈을 써 신분을 가린 광대가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담을 하는 가면극. 고려 시대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서 행한 것이 차차 민간에 퍼져 평민들의 놀이로 바뀌었다. 대개 열두 마당으로 구성되며, 바가지, 종이 따위로 만든 탈을 쓴 광대들이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와 재담을 곁들인다. 양반과 파계승(破戒僧)에 대한 풍자, 남녀의 삼각관계, 서민 생활의 어려움 등이 주된 내용이다. 현대 산대놀이 계통의 것으로 양주 별산대놀이, 송파 산대놀이, 봉산 탈춤, 강령 탈춤, 오광대놀이 따위가 전하고 있다.
이중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고을 사람들이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놀다가 사정으로 약속 지키지 못하게 되자 신명이 있는 이들중 그들의 놀이 과장을 본떠 탈을 만들어 놀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놀이는 전체 8과장 8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진하는 길놀이와 관중의 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이 등장하여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양주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라 평가한다. 다른 한국 가면극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반주에 춤이 주가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극적인 몸짓과 덕담 재담이라고 하는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연희 된다. 실제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깨기춤의 경우 관절꺽기나 춤사위가 다른 곳과 달리 과학적이기도 하다.

양주 별산대 역사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시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로 서울,경기 지방에서 전하는 산대놀이 중 하나이다. 삼현육각의 반주로 춤을 진행하는데 원래는 재담에 야한 것이 많고 밤 늦게 마당이 벌어져 여자 출연자가 없음이 특징이라고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탈놀이중 가장 긴 시간을 가지고 공연한다. 송파산대놀이나 퇴계원산대놀이 등과 같이 산대놀이의 공통적 과장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양주별산대놀이가 가장 길다고 한다.
1964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국가무형유산 2호로 일찍이 지정되었으며 2022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탈춤이 지정되며 한국의 여러 탈춤과 함께 그 이름을 올렸다. 양주별산대는 18세기 후반쯤에 양주 사람 이을축(李乙丑)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을축능 주축으로 한 놀이패 일동은 나름 재담이나 춤사위를 독자적으로 진화시키면서 민속명절인 사월 초파일과 단오, 추석 때에 연희하였고, 가뭄 때 기우제 행사로 연출하였다. 서양에서도 사육제도 그렇고 신분을 숨기고 노는 가면놀이가 있다.
중앙무대서의 대뷔는 오래되었는 바 1957년에 이화여고 노천극장에서 제1회 발표회를 하였고 그 뒤로 매년 2회씩 정기공연을 진행한다. 1978년부터 유양초등학교에서 양주별산대교육을 시작하며 현재는 정부가 지원하는 징검다리학교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유양초등학교에서도 전승이 애사당 법고놀이을 중심으로 배운다. 양주별산대놀이마당 유양초등학교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탈의 종류와 별개로 같은 탈로 여러 개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탈과 배역이 다를 수 있다.

놀이 과장
양주별산대놀이는 길놀이로 시작되는데 서낭대와 탈들을 앞세우고 풍물을 울리며 마을을 돈다. 낮 동안은 주로 부유한 집들을 들러 춤과 덕담을 베풀어 흥취를 돋우다가 밤에 탈고사를 지내는 것이 상례이다. 놀이 전의 고사에는 푸짐한 제물이 올라야 하고 제주를 음복하여 취기가 오르면 놀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양반들은 그 날 만큼은 자신들을 비하하는 재담을 허용했고 민중들은 그렇게 양반이나 그들과 결탁해 민중혹세무민하고 수탈하는 직업적 종교인들을 비판하고 조롱하는 것이다.
내용은 크게 8과장 8경으로 나누어져 있으며, 산대도감극과 공통된 내용이며 파계승, 몰락한 양반, 사당, 무당, 기타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의 등장을 통해 현실 폭로, 풍자, 호색, 웃음과 탄식을 보여주며, 주제는 귀신을 물리치는 의식의 춤과 굿, 파계승에 대한 풍자, 양반에 대한 모욕, 남녀의 대립과 갈등, 서민생활의 애환과 실상 등이다. 이것은 이 놀이가 생활중심의 서민극으로서 당시 특권계급과 형식, 도덕에 대한 일종의 반항정신을 보여준다.
앞놀이는 마을을 순회하는 길놀이와 탈을 놓고 제사하는 탈고사로 시작한다. 본 놀이는 완전히 연극적인 부분으로서 상좌춤, 상좌와 옴중놀이, 옴중과 목중놀이, 연잎과 눈끔쩍이놀이, 염불놀이, 침놀이, 애사당법고놀이, 파계승놀이, 신장수놀이, 취발이놀이, 의막사령놀이, 포도부장놀이, 신할아비와 미얄할미놀이 등의 마당으로 구성된다. 놀이는 연희자와 관중들이 함께 어울리는 화해와 유흥의 잔치이다. 전체 등장인물을 보면 절반 정도가 대사를 하는 탈이고, 나머지는 춤과 몸짓으로 무언극을 하는 탈이다.
놀이에 사용되는 악기는 삼현육각(三絃六角)으로서 피리 2, 대금 1, 해금 1, 장고 1, 북 1 등으로 편성되며, 반주로는 자진한잎·영산회상·염불·타령·굿거리 등이 연주된다. 이러한 음악 편성은 타악기만으로 공연이 가능한 오광대탈놀이나 들놀음류와 큰 차이를 갖는다. 장단도 굿거리가 아닌 3박자 장단이 주류고 춤은 우아하고 섬세한 중부지방의 무용적 전통을 전형적으로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춤사위가 매우 분화되고 종류도 다양하여 한국 탈춤을 대표할 만하다. 전반적으로 염불장단의 거드름춤이 발달되어 있으며 정중동(靜中動), 답지무(踏地舞), 감치고 조이는 손춤사위 등이 특징이다.
산대놀이 유래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양주별산대놀이외에도 송파산대놀이·애오개산대놀이·녹번산대놀이·구파발산대놀이·퇴계원산대놀이·노량진산대놀이·파주산대놀이 등과 같은 산대놀이 계통이 산대라는 말을 쓰고는 있으나 모두 산대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 산대의 전통을 이어서 연행된다는 의미에서 산대놀이 또는 별산대놀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다. 관아의 이속(吏屬)과 연희자, 마을의 책임자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주민들이 공동 추렴하며 놀이판서 장사하는 상인들도 자릿세를 충당했다.
전통적인 놀이판은 사직골(방언으로 새젖골)이었는데, 그곳에는 사직당이 있었고 그 당집 앞 넓은 마당이 공연장소, 주변의 비스듬한 산비탈이 관중석으로 활용되었다. 공연시기 및 공연장소가 농경생활과 신앙생활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가면이나 공연 내용도 이러한 측면과 연관되어 있었다. 눈끔쩍이·연잎·신할아비·미얄할미 등의 가면과 상좌마당[科場]의 사방치기춤이나 마지막 마당의 진오귀굿은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 관아의 악사청(樂士廳)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적인 지원도 놀이의 발전에 기여했다.
연희자는 주로 관아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하리(下吏)들이었는데, 그들의 신분이 상층인과 주민들, 그리고 악사청의 허락과 협조를 받아내는 데 유리했다. 연희자들은 양주읍뿐만 아니라 인근의 지역을 순회공연하여 오락을 제공하고 수익을 올려 마을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연희자들의 후예를 주축으로 차차 인근에서 연희에 재능이 있는 서민층으로 바뀌어 갔다.

하회탈춤과의 비교
하회탈춤은 경상북도 안동 하회마을에서 유래된 전통 탈춤으로, 중요무형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후기부터 전해져 내려온 이 탈춤은 주로 양반 계급을 풍자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회 지역 주민들이 마을 행사나 세시 풍속 중 하나로 공연하였다. 탈춤에는 양반, 선비, 백정, 각시, 초랭이, 할미 등 다양한 계층의 인물이 등장한다. 인물은 고정된 계급 질서를 풍자하며, 특히 양반의 위선을 드러내는 것이다. 각 인물은 동작과 대사는 관객의 웃음을 유도하면서도 날카로운 사회 비판을 담고 있다.
하회탈춤은 8마당으로 구성된 무언극 형식이며, 반주로는 전통 국악기인 꽹과리, 장구, 북, 피리가 사용됩니다. 무언극이지만 익살스럽고 역동적인 몸짓을 통해 내용이 충분히 전달되며, 관객과의 적극적인 상호작용이 특징입니다. 하회탈춤은 당시 억압된 서민의 정서를 대변하며, 권위적인 지배계층을 해학적으로 비판함으로써 사회적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기능을 가졌습니다. 또한 오늘날까지 전통문화 체험과 교육자료로 널리 활용되며, 세계적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은 직접 참가한 과장 대사를 소개한다.
제 4과장 : 연잎과 눈끔적이
* 양주 별산대놀이 62회 정기공연 ② – YouTube
(연잎과 눈끔적이는 5~6보 가량 장중으로 들어서서 연잎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눈끔적이는 양손으로 장삼 자락을 잡아 연잎 머리위에 얹어 가리고 선다)
옴중 : 녹수청산 깊은 골에 청룡황룡이 꿈트러지고! (옴중을 따라 7명의 먹중들이 깨끼 춤을 추면서 등장하여 반달형으로 선다)
완보 : 양양소아 제 박수하니 난가쟁창 백동제라! (깨끼춤을 추고 먹중들 앞에 가서 삼현을 중지시키고는)
얘 이놈들아. 너희들은 대관절 명색이 뭐냐.
먹중들 : 중이다(다 같이 한목소리로)
완보 : 중이야, 중이면 깊숙한 절간에서 염불이나 부르고 있을 것이지 여기 떵쿵하는 인가에는 웬일들이냐.
옴중 : (완보에게 다가가며) 얘얘. 너 모르는 소리 하지 마라. 우리들이 겉은 중이로되 속은 아주 멀쩡한 오입쟁이 중들이다. (완보 이마를 옴방망이로 때린다)
완보 : 아 그래. 네놈들이 겉은 중이로되 속은 멀쩡한 오입쟁이 중들이란 말이지.
옴중 : 암, 영락없지.
완보 : 이놈들이 떵쿵하는 인가에 내려와 모두 덧이 났구나 덧이 났어. 야 이놈들아. 아무리 오입쟁이 중이라도 중이면 어딜 가나 중 행세를 해야하는 법이다. 허니 내가 염불을 할테니 따라들 해라.
원먹 : 얘얘. 염불이고 고뿔이고 다 집어 치우고 저기, 저기 좀 건너다 봐라(완보 어깨를 끌어서 연잎이 있는 쪽을 가리키며) 저기 아주 괴상한 것이 나와 있구나.
완보 : 그래. 어디(옴중이 가리킨 쪽을 바라본 후) 어이쿠. 얘, 정말 괴상한 것이 나와 있구나. 허면 누가 가서 알아보고 와야겠는데. (원먹 에게) 얘. 네놈이 가서 한번 알아보고 오너라.
원먹 : 그래라. 금강산이 좋단 말을 풍편에 넌즛 듣고! (깨끼 춤을 추면서 연잎과 눈끔적이를 보고는 깜짝 놀래어 멍석말이로 완보에게 와서 호들갑을 떤다) 어이쿠. 얘얘, 아주 끔찍끔찍하다. 산중 대망이가 내려왔구나.
완보 : (원먹의 이마를 때리며) 엑끼, 못난 놈 같으니라구. 아니 그래 사내대장부가 사불범정이지. 무엇을 보고 무서워 어이구 어이구 호들갑을 떨고 지랄이냐. 이번 에는 (옴중을 가리키며) 얘, 네 놈이 한번 다녀 오너라.
옴중 : 그래라. (춤을 추려고 문구를 부른다) 녹수청산 깊은 골에 청룡황룡이 꿈트러지고! (깨끼춤을 추고 연잎 앞으로 가서 눈끔적이가 가리고 있는 장삼자락을 훽 제쳐 버린다. 연잎과 눈끔적이는 깜짝 놀래어 먹중들을 잡으려고 이리저리 쫓아 다닌다. 먹중들은 놀래어 가지고 역시 이리저리 쫓겨 다니다 뿔뿔이 흩어져 퇴장한다. 이에 연잎은 부채놀이와 깨끼춤을 추고 퇴장하고 눈끔적이는 돌단춤을 추며 퇴장한다)
탈춤에 대하여
1996년 12월 16일 교수신문에 실린 채희완 서울대 민속가면극연구회 초대회장의 글
탈춤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뛴다. 그리고 철이 들 무렵부터 이제까지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은 지난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고, 흘러가면서 또 다가온다. 탈춤은 내게 학문이나 예술이기 전에 이미 인생이었다.
느지막히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재수할 때부터 품었던 생각대로 탈춤연구회를 조직하였다. 교련반대, 삼선개헌반대, 유신철폐 등 학생시위로 대학휴교령이 잦았던 때라 마침 강의가 드물기도 했다. 강의가 있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기에 시간이 남아돌아 못다푼 한이라도 있는 듯이 마냥 한껏 탈춤에 빠져들 수 있었다. 가르치시는 보유자 선생님들도 대학동아리로선 처음이어선지 참으로 열정적이셨다. 71년 가을 노란 은행잎이 보료처럼 깔린 서울대학교 문리대 교정에서 횃불을 밝히고 봉산탈춤을 창립공연으로 올렸다. 대학탈꾼만으로 대학교정을 마당판으로 삼아 뒷풀이까지 곁들여 스러진 옛 탈판의 정경을 재현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동아리 지도교수로서 그동안 지도와 편달을 아끼지 않으셨던 정병욱, 이두현 교수도 대학탈춤, 나아가 대학문화의 가능성과 밝은 전망에 흐뭇해하셨다.
관제문화, 고급문화, 상업대중문화에 대항하는 새로운 청년문화의 한 대안으로 대학탈춤이 제시되기도 했다. 1969년에 이미 부산대에 전통예술연구회가 생겨나 탈춤을 비롯해 우리 것에 대한 대학가의 관심을 보여주고 있었지만 1971년에 서울대본부에 민속가면극연구회가 등록되고, 73년 이후 이화여대, 서강대, 연세대 등에 탈춤동아리가 생겨나면서부터는 전 대학의 탈춤화라는 열풍이 거세게 일었다. 그 바람을 불러일으키기도 하고 또 거기에 몸을 실리기도 했으니 그땐 세상만사가 온통 탈춤뿐인 듯했다. 그런가 하면 봉산탈춤, 강령탈춤, 은율탈춤, 양주별산대놀이 등의 예능보유자 선생님들이 어여삐 여겨 이들의 정기공연, 초청공연, 순회공연, 민속경연대회에 전수자가 아닌 전수자로서 여러 차례 함께 무대에 서 보는 영광스러움을 맛보기도 했다.
탈춤동아리의 동료 가운데는 당시 대학운동권학생들의 본거지라 할 만한 ‘후진국사회연구회’의 회원들이 많았다. 그 동아리는 도시빈민운동, 노동운동, 농민운동의 이론과 실천을 아우르는 학생운동의 총본산이었다. 1970년대 당시 광주대단지사건과 노동자 전태일 분신사건은 학생운동의 향방을 가름짓는 일대 충격적인 사건으로 다가왔다. 낭만적 민족주의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탈춤운동도 자연스럽게 시각조정을 하게 됐다. 민족의 실체인 민중의 삶의 문제영역 속에서 탈춤을 보게 되고 현장공연에 주력하게 된 것이다. 유신 선포와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은 이를 더욱 부추겼다. 역사민속학적 접근의 성과를 결집한 이두현 저 ‘한국가면극’과 함께 ‘민중의식의 성장’이라는 관점에서 탈춤의 내용과 양식적 특성을 해석한 조동일 교수의 논문들은 탈춤관계 논의들과 실천행위의 튼튼한 논거점을 제공해 주었다. 이후 탈춤과 민중, 탈춤과 민중문화운동, 탈춤과 민족예술운동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반자관계로서 하나의 개념틀을 이루었다. 미학을 전공한 나로서는 탈춤을 통해 한국미학, 민중미학, 민족예술론의 기초를 입론하는 일이 지상과제가 아닐 수 없는 터였다.
대학원에 진학하고서도 학업에 전념하기보다는 탈춤활동에 몰두했다. 그리고 민족문예전통의 현대적 재창조라는 다소 거창한 이념을 앞세우고 창작활동에도 관여했다. 이애주, 이종구, 김민기, 임진택, 김석만, 홍석화, 김영동, 장만철 등과 공동작업으로 음악극 ‘소리굿 아구’와 춤극 ‘땅끝’을 무대에 올렸다. 앞의 작품은 기생관광을 소재로 일본의 정치 ․ 경제 ․ 문화적 재침탈 야욕을 드러낸 것이고, 뒤의 것은 외딴 섬을 장악하고 있는 섬주의 처녀공출을 통해 폭압적인 정치 상황을 묘사한 것이었다.
우리들 공동노선의 배후에는 늘 김지하 시인의 역사관, 종교관, 조직론, 실천론, 예술철학 등이 혈과 맥을 잡아 그윽한 형국을 이루고 있었다. 자생적인 생활문예투쟁조직인 두레패연희와 문화선전조로서 전문예인집단인 사당패연희, 민족의 민중적 세계관과 서구 과학체계, 이 둘의 ‘탁차통’(탁월한 차원에서의 통일)이 화두였고, 동학, 민중신학, 주역 이야기는 김지하 설법의 중심내용이었다. 밤과 아침 사이, 어둠과 밝음 사이의 희끄무레한 배움의 길이라는 ‘夢’ 대한 주역적 풀이와 ‘신생철학’은 광대무변한 새로운 세계를 열어젖히는 후천개벽과 같은 것이어서 내게 더할 수 없는 감동과 함께 학문적 의욕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70년대 한국지성사의 고난을 상징하듯 김 시인이 재수감으로 우리들 곁을 한동안 떠나게 되면서 우리는 연극, 음악, 춤, 영화 등 자기분야를 찾아 각개약진하게 됐다.
한편, 대학의 탈춤운동을 사회 속으로 확장시키는 연계고리의 하나로서 탈춤반 출신을 중심으로 한국문화연구모임 ‘한두레’가 결성됐다. 한국문화현실의 실천적 대안을 논의하고 당대 지성을 대표하는 인물들의 업적과 행적을 비판적으로 검증하는 연구활동이 중심내용이었으나 기실은 범민중생활문화운동을 위한 사회 공동체 형성이 본래의 취지였다.
탈춤을 지역사회와 민중생활 속에 환원시키는 작업은 도시 외곽지역과 농촌, 공장 등 현장 창작공연 등으로 나타났고, 크리스챤 아카데미라든가 가톨릭농민회, 기독교농민회 조직을 통해 현장이 확보됐다. 공장의 노동조합 문화패 건설도 빼놓을 수 없는 현장작업이었고, 기독교단체나 사회단체의 모임에도 공연됐다. 지역현장운동에 실천적 관심을 지닌 작가 황석영 선생과의 공동작업은 일을 규모있고 능률적으로 수행하는데 안성맞춤이었다. 그의 소설 ‘장길산’은 이러한 실천적 성과와 늘 더불어 있는 것이었다. 그의 투철한 작가 정신은 문예활동가의 산 지표이기도 했다.
느슨하기 짝이 없는 대학원 생활은 미학과 조교일을 맡게 되면서, 어느 정도 긴장감을 되찾는 계기를 맞았다. 예술기원론, 미적체험론, 형태심리학을 비롯해 브레히트, 루카치, 크로체, 주역, 민족종교사상, 神氣論 등 그동안 미루어두었던 밀린 공부거리가 산더미 같이 한꺼번에 닥쳐왔다. 미학이라는 학문이 결코 약소학문이 아닐뿐더러 인문과학의 순수학문으로서 그 독자적 영역이 확보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1969년 철학과로 통폐합돼 생산력없는 학문으로 강제낙인 찍힌 이후 약소학과로서 학문적, 대학행정적으로 부당 대우에 그 서러움이 어지간하지 않았는데 캠퍼스 이전 과정에서 당한 수모는 지금까지 사무친 원한이 되고 있다.
그러나 미학과는 어느 학과보다도 먼저 새로 단장한 대학캠퍼스에 새로운 학문세계를 예축하는 고사굿을 거과적으로 치렀다. 그때 그 기억이 새삼스럽다. 그해 출구없이 꽉 막힌 유신정권의 뒷덜미를 치듯 대학탈춤반이 중심이 돼 농대생 김상진열사 추모행렬굿을 벌인 이른바 ‘오둘둘’ 사건으로 경찰서 출입과 학교출근이 반반쯤이다가 이윽고 남영동을 거쳐 남산까지 갔다온 후 처음 실시된 교수재임용제도가 말단 조교에까지 영향력을 미쳐 짧은 조교생활을 마치게 됐다. 학문생활의 초입에서 좌절당한 아픔보다도 당대 실천하는 지식인이라면 누구라도 겪었던 시대적 고통에 동참하게 되어, 사지멀쩡한 것이 남부끄러웠던 태를 다소나마 씻게 된 것이 오히려 다행스러웠다.
그러나 고민은 계속 남았다. 학문의 길을 밟을 것인가, 연행예술가의 길을 갈 것인가. 말하자면 선비냐 광대냐인데, 이에 균형감각을 갖도록 알게 모르게 북돋워주신 이는 김윤수 교수와 신경림 시인이었다. 그러나 아직도 갈등은 갈등대로 남아 낮에는 강단에서 학자연하고 밤에는 무대에서 광대연한다. 연구활동으론 석사논문의 제목이 말해주듯이 ‘집단연희의 민중적 미의식 연구를 위한 예비적 고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못해 민족미학, 생명론적 미학을 내세우더라도 ‘예비적 고찰’에 머무르고 있을 뿐이다.
또 연행활동으론 마당극, 민족극, 민족굿이라하여 창작도 해보고 연출도 해보지만, 민중신명에 불지피는 신통한 광대노릇한번 제대로 못했다. 대립되는 두 항의 “탁차통‘은 내게 과연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 접근할 수 없는 두 틈서리에서 어떤 신기로 노닐 것인가. 탈춤이 내게 던져준 과제는 정치적인 것도, 예술적인 것도 그 다음이고 어떻게 살 것인가 하는 인생론적인 것이 먼저였다. 곧 민중공동체적 삶과 나는 한 몸일 수 있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