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별산대 놀이 1

           국가 무형문화제 2호 민속놀이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에서 시작된 가면극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중 양주별산대놀이는 서울·경기지방에서 즐겼던 산대도감극(山臺都監劇)의 한 갈래로 춤과 무언극, 덕담과 익살이 어우러진 민중 놀이다. 이 놀이는 약 250년 전부터 사월 초파일, 단오, 추석 등 크고 작은 명절과 비가 오길 기원하는 기우제 행사 때에 공연되었다고 한다. 탈을 써 신분을 가린 광대가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고 재담을 하는 가면극으로 고려 시대에 발생하여 조선 시대를 거쳐 오늘날까지 전해 오는 것이다.

조선 시대에는 궁중에서 행한 것이 차차 민간에 퍼져 평민들의 놀이로 바뀌었다. 대개 열두 마당으로 구성되며, 바가지, 종이 따위로 만든 탈을 쓴 광대들이 풍악에 맞추어 춤을 추며 노래와 재담을 곁들인다. 양반과 파계승(破戒僧)에 대한 풍자, 남녀의 삼각관계, 서민 생활의 어려움 등이 주된 내용이다. 현대 산대놀이 계통의 것으로 양주 별산대놀이, 송파 산대놀이, 봉산 탈춤, 강령 탈춤, 오광대놀이가 전해지고 있다.

이중 양주별산대놀이는 양주고을 사람들이 한양의 ‘사직골 딱딱이패’를 초청하여 놀다가 사정으로 약속 지키지 못하게 되자 신명이 있는 이들중 그들의 놀이 과장을 본떠 탈을 만들어 놀기 시작했다고 전한다. 놀이는 전체 8과장 8경으로 구성되어 있고, 놀이를 시작하기에 앞서 가면과 의상을 갖추고 음악을 울리면서 공연장소까지 행진하는 길놀이와 관중의 무사를 기원하는 고사를 지낸다. 놀이에는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 사당, 하인 및 늙고 젊은 서민들이 등장하여 현실을 풍자하고 민중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이렇게 양주 별산대놀이는 중부지방 탈춤을 대표하는 놀이로서 해서 지역 탈춤과 함께 한국 가면극 중 연극적인 볼거리가 풍부한 가면극이라 평가한다. 다른 한국 가면극의 연출형태와 마찬가지로 음악 반주에 춤이 주가되고 노래가 따르는 가무적 부분과 극적인 몸짓과 덕담 재담이라고 하는 사설 즉 대사가 따르는 연극적인 부분으로 구성 연희 된다. 실제로 경험한 바에 의하면 깨기 춤의 경우 관절꺽기나 춤사위가 다른 곳과 달리 과학적이기도 하다.  

오늘날로 치면 연예인이라고 할 수 있겠으나 그렇게 좋은 대우나 평판은 받지 못했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광대나 피에로등 이름은 달랐지만 그 역할들은 있어 왔다.  볼거리가 없었던 옛날 신명나는 풍악과 재담, 사설, 양반에 대한 비판과 종교(스님)인에 대한 비아냥은 민중들의 속을 후련하게 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마디로 권력과 힘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문화이자 즐길거리다.

오늘 날 BTS가 한국을 대표하여 세계 무대에서 활약을 하는 것도 모두 이러한 지역 속의 민중문화가 뿌리가 된 춤과 끼라고 할 수 있다. 집안에서도 가수나 배우가 되려고 하면 딴따라라고 비하하며 말리던 것도 이젠 옛일로 연예인이라고 하면 이젠 신흥 재벌이다.  

양주 별산대 역사  

양주별산대놀이는 경기도 양주시에서 전승되는 탈놀이로 서울,경기 지방에서 전하는 산대놀이 중 하나이다. 삼현육각의 반주로 춤을 진행하는데 원래는 재담에 야한 것이 많고 밤 늦게 마당이 벌어져 여자 출연자가 없음이 특징이라고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탈놀이중 가장 긴 시간을 가지고 공연한다. 송파산대놀이나 퇴계원산대놀이 등과 같이 산대놀이의 공통적 과장의 특징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그 중에서 양주 별산대놀이가 가장 길다고 한다.

1964년 12월 7일 대한민국의 국가무형 유산 1호로 일찍이 지정되었으며 2022년에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탈춤이 지정되며 한국의 여러 탈춤과 함께 그 이름을 올렸다. 양주별산대는 18세기 후반 쯤에 양주 사람 이을축(李乙丑)이 서울 사직골 딱딱이패들에게 배워 양주에 정착시켰다는 것이 정설이다. 이을축능 주축으로 한 놀이패 일동은 나름 재담이나 춤사위를 독자적으로 진화시키면서 민속명절인 사월 초파일과 단오, 추석 때에 연희하였고, 가뭄 때 기우제 행사로 연출하였다. 서양에서도 사육제도 그렇고 신분을 숨기고 노는 가면 놀이가 있다.

중앙무대서의 대뷔는 오래되었는 바 1957년에 이화여고 노천극장에서 제1회 발표회를 하였고 그 뒤로 매년 봄 과 가을 2회 정기공연을 진행한다. 1978년부터 유양초등학교에서 양주별산대교육을 시작하며 현재는 정부가 지원하는 징검다리학교 프로그램을 사용해서 유양초등학교에서도 전승이 애사당 법고놀이을 중심으로 배운다. 양주별산대놀이마당 유양초등학교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등장인물은 탈의 종류와 별개로 같은 탈로 여러 개의 역할을 겸하고 있어 탈과 배역이 다를 수 있다.

산대놀이 유래

산대놀이란 중부지방의 탈춤을 가리키는 말로, 양주별산대놀이외에도 송파산대놀이·애오개산대놀이·녹번산대놀이·구파발산대놀이·퇴계원산대놀이·노량진산대놀이·파주산대놀이 등과 같은 산대놀이 계통이 산대라는 말을 쓰고는 있으나 모두 산대를 만들어 놓은 것은 아니다. 조선 후기에 산대의 전통을 이어서 연행된다는 의미에서 산대놀이 또는 별산대놀이라는 명칭을 쓰게 되었다. 관아의 이속(吏屬)과 연희자, 마을의 책임자들이 행사를 준비하고, 주민들이 공동 추렴하며 놀이판서 장사하는 상인들도 자릿세를 충당했다.

전통적인 놀이판은 사직골(방언으로 새젖골)이었는데, 그곳에는 사직당이 있었고 그 당집 앞 넓은 마당이 공연장소, 주변의 비스듬한 산비탈이 관중석으로 활용되었다. 공연시기 및 공연장소가 농경생활과 신앙생활에 깊이 관련되어 있었을 뿐 아니라, 가면이나 공연 내용도 이러한 측면과 연관되어 있었다. 눈끔쩍이·연잎·신할아비·미얄할미 등의 가면과 상좌마당[科場]의 사방치기춤이나 마지막 마당의 진오귀굿은 구체적인 사례가 된다. 관아의 악사청(樂士廳)을 기반으로 하는 음악적인 지원도 놀이의 발전에 기여했다.

연희자는 주로 관아에서 잡역에 종사하던 하리(下吏)들이었는데, 그들의 신분이 상층인과 주민들, 그리고 악사청의 허락과 협조를 받아내는 데 유리했다. 연희자들은 양주읍뿐만 아니라 인근의 지역을 순회공연하여 오락을 제공하고 수익을 올려 마을을 발전시키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조선시대 이후에는 연희자들의 후예를 주축으로 차차 인근에서 연희에 재능이 있는 서민층으로 바뀌어 갔다. 그리고 국가무형문화제법이 제정된 이후에는 전수자제도를 두워 일정기간과 재능을 보아 저정한다.

전에는 전수자라고 하다가 지금은 전승 교육사제도를 두워 자격 시험에 통과한 개인들에 한해서는 국가가 지원하며 무형문화제로 지정받은 놀이에 대해서도  지자체가 별도로 지원을 한다.  사라져 가는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이 요구된다.

 

 

pckgoodnews

예장뉴스 편집자 계정입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