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론자유와 기독언론
언론자유의 한계
예장뉴스가 1차적인 보도 대상으로 삼는 것은 PCK이다. 그것과 관련된 연합기관과 기독교 일반이며 이에 관여하는 유명세를 타는 지도자들을 주시한다. 평범한 목회을 하는 교회나 지도자들에게 까지 지켜볼 여유가 없다. 그런데 초 대형교회에서 수석장로가 자살을 했다? 그런 것은 모든 이들의 궁금증을 자극한다. 그리고 독자들은 그 이상의 내용을 요구한다. 더군다나 그런 불상사를 당하고도 아무일도 없는 듯이 나온다면 더욱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명성교회와 김삼환 목사에게 관심을 갖는 것은 그런 이유다. 교회는 사인을 거짓말했고 그의 역할에 대하여 은폐하려고 하였다. 우리 독자들이 진실을 원한다. 그래서 드러난 사건보다는 본질과 이면에 더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렇고 그런 얘기들은 또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다른 신문에 낸 것도 관심없다. 공리를 내걸지만 영리를 추구하는 신문들과 근본적으로 차별성을 갖는다. 우리는 광고나 구독료에 의존하는 유가지가 아니기에 더 당당히 사익보다는 공익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고 그렇게 많은 기독신문과 인터넷 언론이 있어도 사람들에게 외면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특히 우리교단의 기독공보만 해도 올해 연초부터 한 일은 창간 70주년 기념 크루르즈 여행 선전이었다. 사실 그것은 돈벌이다. 여행사들이 하면 된다. 그러고도 절기마다 성탄절, 부활절, 창립기념 유료광고 장사에, 노회가 끝나면 임원들 얼굴내고 이름내는 유료광고를 유치한다.
교권 판에 이름을 올리고 유명해지고 싶은 이들이 교인의 헌금으로 돈을 내고 자기 교회와 자기 이름을 낸다. 도대체 언제까지 그런 일을 할 것인가? 구독료 다 주고 또 유료 광고를 내 가면서 하는 일들이다. 교단지가 이런 전근대적인 일을 하니 장로회보, 남선교회, 지역신문들도 따라서 한다. 잘난 목사를 둔 교회는 이중, 삼중, 사중 과세다. 하루 빨리 없어져야 할 관행이다. 이렇게 하기 위해 공보는 필요없는 지면이 너무 많다. 하루 빨리 본연의 교단지로 규모있게 돌아가야 한다.
왜 언론인에게는 국가기관이나 관공서, 민간기업, 학교, 병원, 대학 등에서의 출입을 자유롭게 허용하고 취재와 보도의 편의를 부여하는가? 그것은 두 가지다 언론자유의 보장을 통하여 시민적 알권리를 충족케 하고 취재 대상의 자기 변호와 홍보를 돕기 위해서다. 모든 민주주의는 언론의 자유를 전제로 성립되는 제도이다. 어떠한 이유를 불문하고 언론자유가 손상되거나 억압된다면 결코 민주체제라 할 수 없다.
그래서 언론은 사실대로 기술돼야 한다. 언론보도가 사실(Fact)을 담보하고 있지 못하다면 언론의 자유도 누릴 수 없다. 그러나 언론의 보도로 문제가 된 이들은 진실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감추려는 일을 한다. 그들은 돈과 힘으로 명예훼손이니 모욕이니 하여 언론을 여러가지로 불편하게 한다. 그러나 이에 굴하지 않고 맞서서 싸우는 것이 언론이다. 진실은 반드시 구현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언론인이라 하여 특권을 가져서도 안된다. 언론보도의 대상이 되는 개인 또한 공인으로서 표적이 되지만 그의 인권도 중요하다. 특정 보도로 인하여 피해를 입었다면 이에 대한 구제도 중요하다. 언론중재위원회에 조정을 의뢰하거나 대화와 타협을 도모하여야 한다. 그러나 사회적으로 용납될 수 없는 문제들을 감추려는 의도로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말한다.
"명예훼손"이니 "모욕"이니 하면서 막강한 재력으로 송사를 벌여 적잖은 심적 압박을 시도하는 식으로 언론에 재갈을 물리려는 것은 사실상 언론 탄압이다. 이는 언론자유를 부정하는 것이요 반 민주적인 발상이다. 그런 자들은 교계의 대형언론들과 공생하면서 제왕적 목회와 관행에 익숙하여 다른 언론도 자기 교회 자기 맘대로 목회하듯 처신한다. 돈으로 막고 인맥으로 막으려고 한다. 그러나 그래도 안 되는 일도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언론보도가 자기 맘에 안 든다고 소송부터 하는 데 이것은 상식 이하다. 자신의 명예가 훼손됐다면 이를 회복할 방도를 찾는 것은 필요하다. 적극적인 반론권 주장을 하기 위한 노력과 대화다. 그래도 안된다면 명예회복을 위한 법적 조치 노력을 탓할 수는 없다. 그러나 이런 것들도 사실은 신종 언론 탄압이다. 독재정권 시대에는 비판적인 언론을 길들이기 위해서 권력기관을 동원, 언론사엔 세무조사와 광고주 압박 등으로 굴복시켰다. 그러나 최근 언론에 대한 기업과 권력자들은 과거의 그런 물리적 폭력이 불가능하게 되자 거액의 손해배상청구등을 통해서 경영을 어렵게 하여 언론을 길들이고 기자들을 괴롭히는 신종 언론탄압을 가한다.
비판정신과 기독언론
언론 중에서 종교계 언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교계나 교계 언론, 언론 종사자 모두에게 근원적인 자기성찰을 하게 하는 도구다. 그러나 그 동안 교계언론을 둘러싼 언론관이나 언론철학은 빈곤하기 짝이 없었다. 언론이란 원래 “시민적 알권리와 공인에 대한 감시”가 그 목적이다. 즉 지도층에 대한 감시 기능이다. 이를 달리 말하면 “비판과 대안”의 정신이다. 언론의 존재 의미는 보도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그 내용의 비판정신이다.
그것이 홍보물이냐 언론이냐를 가늠한다. 언론이라고 하면서 정보나 주고 장사나 하고 논평과 비판이 없다면 그것은 저널리즘에 기초한 언론이 아닌 찌라시에 불과하고 볼 수 있다. 자기 입맛에 맞지 않는다 하여 찌라시라고 혹평하는 것이 아니다. 언론의 가장 중요한 비판정신이 없는 신문이므로 찌라시라고 하는 것이다.
종교언론이라고 해서 자기 종교를 무조건 비호하거나 무조건 헐뜯고 비판만해서는 안 된다. 종교의 긍정적인 측면과 미담도 중요하다. 그러나 지금 독자들과 사회는 이런 현상보다는 내부의 자정과 비판의 기능에 더 목말라 한다. 그런데도 소위 메이저 신문들은 온통 대형교회와 목사들의 일정 소개가 다반사다. 종교의 본질과 함께 사회통합적 기능과 그 역할에 대해서는 손을 놓고 있다. 종교 내부의 자정을 위한 비판정신과 치열한 정화를 선도하는 사명과 책임을 포기한 것이다. 그 이유는 대형교회의 자본과 교권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 동안 우리 예장뉴스는 세련되지 못한 보도 문제로 문제가 된 적은 있었으나 진실 추구를 향한 노력이 독자들에게 문제가 된 것도 또 그것을 포기한 적도 없다. 이런 것들을 두려워 하거나 위축되지 않는다. 가장 최근에 명성교회 김삼환 목사로부터 “명예훼손 혐의”로 소송을 당하여 원치 않는 재판에 임하고 있지만 이 소송은 보도내용상의 문제나 일부 과한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저들이 감추려고 하는 것과 폭로하려는 것과의 대결이라고 보면 된다.
정직하게 밝히면 될 것을 감추려고 하기에 이 지경이 된 것이다. 이것은 정의와 불의의 문제다. 그 동안 보도했던 기사들의 가치와 논점들을 돌아보면 개인들에게는 미안하고 가혹했지만 그로 인하여 그 반대의 급부를 우리가 누리거나 이익을 본 일이 없다는 점에서 정직한 언론임을 자부 하고 있다.
언론자유 논쟁
한국 기독교는 이제 소수자가 아니다. 보호 받아야 할 약자가 아니다. 우리 내부적으로 권력화된 교회와 탈선한 지도자들을 감시하고 자정의 노력을 게을리하면 안 된다. 그들은 아직도 돈과 힘만 믿고 누구가를 지배하려고 하는 데 그런 전근대적인 사고는 바뀌어야 한다. 이런 권력지향적 사고와 승자독식의 태도가 늘 문제인 것이다. 사회주의 국가인 소련에는 프라우다가, 중국에는 홍기가, 북한에는 노동신문이 있다, 이 언론들은 자기 지도자들에게 대하여 국가에 대하여 비판을 하지 못한다.
지나친 우상화와 애국주의에 매몰 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것은 언론이 아니다. 우리교단을 기반으로 한 언론이 있지만 공인에 대한 감시와 비판이 없이 미담만을 소개하는 것을 언론으로 알고 있다면 그것은 대단한 무지로 인한 착오다. 언론의 자유는 모든 자유의 출발이기 때문이다. 칭찬만 하고 비판할 수 없다면 그것은 언론이 아니라 홍보지 혹은 회보라고 불러야 한다.
지난 6월 21일 새문안교회에서 열린 고 강신명 목사의 30주기 추도예배에서 총회장 정영택 목사는 이런 설교를 했다. “지도자가 되는 순간부터 개혁의 대상이다. 나도 개혁 좀 한다는 사람이었는데 총회장 되고부터 개혁대상이다.” “지도자가 되기를 원한다면 개혁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받아 드려야 한다.“ ”누가 나에게 ‘비판보다는 격려와 위로가 필요합니다.’ 라고 하길 래 예수님이 당시 종교지도자들에게 위로와 격려를 하셨던가?“ 라고 되물었다. 주님은 위로는 커녕 추상같은 비판과 거의 욕설 비슷한 말을 ‘화있을 진져, 독사의 자식들아’고 하셨다. 지도자가 돼서도 위로와 격려, 대우를 받으려 한다는 말인가?“
그렇다. 그런 소리 안 듣고 싶으면 좀 조용히 살라고 말하고 싶다. 명성교회는 봄, 가을로 방송 3사를 동원하여 회사 당 1억 원의 돈을 주고 자신들의 새벽기도회를 중계방송하기도 했다. 왜 그런 돈을 드려서 그런 일을 할까? 그것은 투자 대비 남는 것이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광고는 자기네 교인들 듣고 보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남들 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오라는 것이다. 한 마디로 양 도둑질이다. 명일동의 모든 교회들에게 물어보라. 이게 과연 성공한 대형교회가 할 수 있는 일인지를. 교인이 적거나 없어서가 아니라 더 모으기 위해서다. 거액의 광고비로 새벽기도회라는 상품을 쇼핑몰에 올려놓고 판매하는 것이다.
호객꾼으로 정치가와 전 총회장들, 신학대학교의 총장과 교수, 교계인사들을 강단 앞에 앉혀 놓기도 한다. 이들 또한 무료로 불러낸 것이 아니다. 권력자들과 기업가들도 등장한다. 이 그림의 의도는 "우리 교회로 오시오. 오면 이들을 만날 수 있다" 는 것이다. 이렇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보도해 주고 광고물이나 받는 게 언론인가? 그것은 적어도 우리가 생각하는 언론은 아니다. 다른 언론들은 몰라도 기독공보는 교단의 역사성있는 총회 기관지이기에 전국교회를 바라보고 나가야 한다.안가난한 교회, 어려운 교회, 힘든 교회를 보고 가야 한다. 잘 되는 교회, 부자교회. 대형교회는 그냥 둬도 잘 가는 교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