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라스뮈스적인 것’ 의 의미

                                                                    윤재석의 신앙칼럼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1466~1536년)는 네덜란드 태생의 성직자이자 인문주의자이다. 서방교회의 종교개혁 운동에 영향을 준 기독교 신학자다.

이름 뒤에 Roterodamus를 붙여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뮈스 로테로다뮈스로 불리기도 한다. 그것은 그의 라틴어 필명(筆名)이었다. 데시데리우스는 ‘갈망(desire)’을 의미하는 라틴어 명사인 데시데리움(desiderium)의 변형이고, 에라스뮈스는 ‘사랑받는’을 뜻하는 그리스어 에라스미오스(ἐράσμιος)의 변형이며, 로테로다뮈스는 네덜란드 도시인 ‘로테르담의’를 뜻하는 라틴어 형용사다.

 

성직자이자 인문주의자

 

에라스뮈스는 “인문주의자들의 왕자”라는 칭호를 누렸고, 순수한 라틴어 문체를 구사하는 보기 드문 고전학자였다. “최고 영광의 기독교 인문주의자”로도 불렸다.

그는 히브리어와 코이네 그리스어(고대 그리스어) 신구약을 라틴어 성서(불가타·Vulgata)로 새롭게 번역하기도 했다. 이는 서방교회의 기독교 사상에 의문을 표시하면서 서방교회의 종교개혁 찬성파와 반대파가 천주교와 개신교로 분리된 이후에 개혁 반대파였던 가톨릭 개혁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의 다른 작품으로 『우신예찬(愚神禮讚·Moriae encomium)』, 『기독교 기사의 안내서』등이 있다.

그가 살았던 시대는 많은 지식인들이 서방교회 제도로 발생한 성직자의 권한 남용을 비판하던 때였다. 어떤 비평가들은 교황 중심주의의 폐해를 지적했고 새로운 신학 체계를 세웠다. 에라스뮈스도 동시대 주류 서방교회의 신앙과 부정, 관행을 비판하던 교회 개혁가 중 한 사람이었다.

한편, 그는 서방교회 전통인 자유의지(free will) 관념을 지지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사상 중 예정론을 지지하는 칼뱅주의자들과 마찰이 있었다. 그의 이 같은 중립 노선은 마르틴 루터 같은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종교개혁자들과 개혁 반대파인 ‘교황주의자’ 양쪽 모두로부터 실망과 분노를 샀다. 로마 교황청의 부정부패와 성직자의 권한 남용을 비판했지만, 에라스뮈스는 종교개혁의 찬성파인 개신교와 개혁 반대파인 천주교회 어느 한쪽에도 기울지 않았다.

이에 서방교회 개혁 찬성파인 종교개혁가 루터는 그를 경멸조로 조롱했고, 서방교회 개혁 반대 교황주의자들의 트리엔트 공의회는 그를 “불경스런 이교도”로 정죄했다.

이처럼 개신교와 천주교 양쪽 교회들로부터 배척당했으면서도 에라스뮈스는 많은 당대 신학자들의 지지를 받으며 전 유럽에서 대단한 인기를 누렸다. 그뿐 아니라 서구 문학사에서 근대성의 효시로 여겨지는 프랑스의 프랑수와 라블레, 스페인의 안토니오 세르반테스, 영국의 윌리엄 셰익스피어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사제서품으로 성직자 대열에

 

1492년 에라스뮈스는 수도원에 들어간다. 생활고 때문이었다. 그는 그해 서방교회의 사제로 서품받았고, 마지못해 아우구스티누스 교회법에 맹세했다. 그러나 그는 서방교회 사제로서 오랫동안 적극적으로 일할 생각은 없었던 것 같다. 평생 꾸준히 교회의 부정부패에 대해 비판했고, 그 비판에는 수도원 제도도 포함됐기 때문이다.

사제서품을 받고 오래지 않아, 캉브레(Cambrai) 지역 주교의 비서직을 제의받으면서, 그는 수도원 밖에서 지낼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 뛰어난 라틴어 실력과 지식인으로서의 명성 덕분이었다. 그는 주교의 비서로 일해야 하는 점과 건강상의 이유로 사제로서의 의무에서 일시 면제됐다. 이후 교황 레오 10세는 이 면제를 영구적으로 허용했다. 당시로서는 상당한 특권이었다.

 

학문 추구와 방랑 생활

 

에라스뮈스는 어느 한 장소에 정주하지 않고 프랑스 파리, 벨기에 루벵, 영국 옥스퍼드·런던·케임브리지, 스위스 바젤 등으로 옮겨 다니면서 활동했다. 1495년 주교의 동의를 받아 생활비와 학비를 지원받으면서 그는 파리 대학의 몬테귀 콜레주(Collège de Montaigu)에 유학했다. 그곳은 잔 스탄돈크(Jan Standonck) 주도로 프랑스 교회 개혁 운동이 일어난 중심지였다. 이전 파리 대학은 스콜라 철학으로 유명했지만, 당시엔 이미 르네상스 인문주의 영향에 놓여 있었다.

1498년 영국에 건너가선 토머스 모어(Thomas More) 등과 사귀었다. 그 유명한 『우신예찬』도 에라스뮈스가 토머스 모어에게 보내는 서신형식으로써 쓴 풍자소설이다.

에라스뮈스는 1499년 영국에서 존 콜렛(John Colet)의 성서 연구법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콜렛의 연구법은 스콜라 철학보다 교부 철학과 유사했다. 불가타(Vulgata), 또는 ‘새 라틴어 성서’를 새롭게 해석하고 더 심층적으로 신학을 연구하기 위해, 에라스뮈스는 케임브리지를 떠날 때까지 그리스어를 익혔다.

1506~1509년 그는 이탈리아에서 학자들과 사귄다. 1506년 토리노대를 졸업하고, 베네치아에선 알두스 마누티우스(Aldus Manutius) 출판사에서 일하기도 했다.

벨기에 루벵에 머물렀을 때 에라스뮈스는 금욕주의적인 학자와 성직자들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그들은 문학 원리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인문주의자의 사고방식에 적대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그는 스위스 바젤에 조용한 집을 구했다. 그곳에서의 환대와 비호 덕분에 그는 자유롭게 자신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다. 1516년 바젤의 유력 출판업자였던 요하네스 프로베니우스(Johannes Frobenius)를 통해 그리스어판 신약성서를 출판했다.

에라스뮈스판 성서는 그리스어 원본과 라틴어 번역을 같이 달아서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으며, 10여 개의 성서 번역본을 참고했다.

에라스뮈스의 성서 번역은 잘못된 성서 해석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교황의 뜻을 따라 성직자가 성서 해석을 독점하던 중세 교황 중심적 서방교회의 극단적인 알레고리 성경해석의 잘못을 바로잡기 위한 교회 개혁운동 중 하나였다.

특히 서문에 나타난 성서 해석 방법인 ‘역사 문법적 해석’은 역사적 성경해석의 회복이었다. 이는 서방교회 교황 중심의 알레고리 성경해석으로 중세까지 내려온 4중 의미의 해석을 비평하고 역사적 성경해석을 서방교회에서 회복한 소중한 공헌으로 평가한다. 특히 신학에 대한 에라스뮈스의 연구는 종교개혁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졌다.

“에라스뮈스는 종교개혁의 알을 낳아 주었고, 루터는 그것을 부화시켰다”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생애 후기

 

다시 영국으로 건너간 그는 케임브리지대에서 『우신예찬(愚神禮讚)』으로 비상한 반응을 얻었다. 그는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에서 떠나 자연만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다”라고 주장하면서 권위주의에 빠진 기독교를 비판하고 직업적인 성직자를 비난했다. 또한 성직자들의 학문 수준이 천박함도 걱정했다.

에라스뮈스는 중년 이후에 당시 본격화되던 루터의 종교개혁에 대해, 교회 권력에 대한 루터의 비판에 호의적이기는 했으나, 극단적인 신앙을 싫어하여 루터와 대립하며 중도를 취하였다. 이것이 원인이 되어 에라스뮈스는 천주교와 개신교 양측으로부터 모두 비난받고 곤경에 처한다.

특히 그는 루터의 철저한 성경적 종교개혁에 동조하지 않아, 1524년 루터를 비판하는 『자유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를 썼다. 이에 대해서 루터는 에라스뮈스가 자신의 신학에 대해서 핵심적인 비판을 했다고 말했다.

 

루터와의 논쟁서 중립 성향과 중용

 

에라스뮈스는 16세기 종교개혁 논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극단을 지양(止揚)하는 중용의 태도를 견지했다. 서방교회 개혁 반대파인 천주교와 개혁 찬성파인 개신교 간의 대립은 누가 봐도 분명했기 때문에 아무도 두 세력 간의 논쟁에서 빠져나올 수 없었다.

당시 에라스뮈스의 학문적 명성은 대단해서 서방교회의 종교개혁 반대파인 천주교와 개혁 찬성파인 개신교 양 세력 모두 그를 끌어들이기 위해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당파성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성직자의 부정을 비판하면서도 그는 자신이 교회 제도 자체는 인정하며 성직자들에게 악의는 없다고 역설한다. 세상은 그의 풍자를 보고 비웃었지만 그의 작업을 막지는 않았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지식인과 교회 지도자들에게 도움을 줄 것이라 보았다.

마르틴 루터는 신약성서를 독일어로 번역한 직후 에라스뮈스로부터 이를 인정받으려 했다. 1517년 95개 조 논제를 비텐베르크성 교회 정문에 발표하고 서방교회의 개혁에 앞섰던 루터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명망 있는 인물이었던 에라스뮈스의 지지를 받고자 한 것이다.

하지만 그는 “격렬한 언동보다 정중한 중용을 지킴으로써 더 많은 것을 성취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라는 말로 루터의 제의를 정중히 거절했다. 여기서 에라스뮈스가 말하는 중용은 곧 관용에 대한 호소이자 평화의 추구였다.

루터가 교황으로부터 이단자로 선고받게 되었을 때, 루터를 박해로부터 지켜주기 위해 에라스뮈스가 마인츠 대주교에게 올린 진정서는 그가 설파한 중용정신이 어떤 것인지를 명백히 보여준다.

“불화는 인간을 야수로 만든다. 화합은 죽음 이후에 영혼들을 절대자와 결합한다.”

100년 후 유럽 각국이 종교전쟁을 종식하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맺었을 때, 그 조약의 원리는 바로 에라스뮈스가 주장했던 평화와 종교적 관용 정신이었다.

“나는 의견의 대립이 내 천성과 예수의 가르침에 거스르는 것이기 때문에 싫어한다. 나는 엄청난 손실 없이 이 대립이 진정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에라스뮈스는 그의 교리문답서, 『사도신경 해설』을 통해 루터의 교리를 비판했다.

한편, 루터는 에라스뮈스가 의지박약과 소심한 성격 때문에 자신의 의무를 회피한다고 느꼈다. 루터는 니콜라우스 폰 암스도르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에라스뮈스의 교리문답서를 비판하고 에라스뮈스를 “독사”, “거짓말쟁이”, “악마의 입과 장기” 등에 비유했다.

 

자유의지 논쟁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

루터가 에라스뮈스에게 쓴 편지를 유스투스 요나스가 1526년에 독일어로 번역한 것의 일부다.

에라스뮈스가 본격적으로 루터를 비판하기로 결심했을 때 다룬 주된 논점은 인간의 자유의지라는 명제였다. 에라스뮈스는 『자유의지론(De libero arbitrio diatribe sive collatio)』을 통해 인간에게 자유의지가 없다고 본 루터의 견해를 비판했다.

이에 대한 반박으로 루터는 『노예의지론(On the Bondage of the Will)』을 저술한다. 이 책에서 루터는 “에라스뮈스는 기독교도가 아니다”라고까지 주장한다. 이에 대해 에라스뮈스는 ‘수호자’라는 의미를 지닌 『히페라스피스테스(Hyperaspistes)』를 두 편에 걸쳐 쓰며 자신을 변호했다.

 

최종 평가

 

에라스뮈스는 ‘세계주의적 정신의 소유자’, ‘근대 자유주의의 선구자’로 유럽 문화에서 자유주의 전통을 형성하는 데 기여했다. 또 기독교 복원을 위해 당시 교황 중심의 서방교회 제도를 비판하고, 성서를 교정하며, 고대 그리스 학문과 예술을 적극 수용하여 경직된 사고방식을 시정하려 함으로써 르네상스 시대 인문주의가 나아갈 길을 제시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루터는 『탁상담화』에서 에라스뮈스를 가리켜 “세상을 욕되게 한 자들 가운데 가장 사악한 자”라고 비난했다. 또 “그는 모무스(Momus·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조롱과 비난의 신)과 같아서, 신이든 사람이든, 교황 진영이든 개신교 진영이든 아무에게나 닥치는 대로 비판하고 조롱하지만, 교묘하고 이중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아무도 자신의 속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게 은폐한다”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에라스뮈스는 이미 르네상스와 종교개혁기 스타 중의 스타였다. ‘최상과 최대(optimum et maximum)’라는 말에 꼭 걸맞게 ‘만물박사’, ‘학문의 군주’, ‘견줄 데 없는 인간이자 불멸의 박사’로 평가받았다.

신학자이자 성서 번역가, 고대 언어학자이자 작가로 각계각층의 존경과 찬사를 한 몸에 받았다. 그는 인문주의(humanism)의 이상이 국가와 인종과 민족을 초월해 유럽을 통합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 ‘최초의 의식 있는 세계주의자’였다.

‘에라스뮈스적인 것’은 다양한 측면이 있지만 공평무사한 정신을 으뜸으로 친다. 패를 짜지 않고 한쪽 편을 들지 않으려는 중립 정신이다. 평화애호가 에라스뮈스가 미워한 단 하나의 적은 흔히 증오나 폭력과 연계되기 쉬운 광기와 광신이다. 독단과 편협으로 똘똘 뭉친 광신이야말로 어리석음의 대명사이기에 그는 타협을 거부하고 극단적인 경우 전쟁으로까지 내모는 광신에 맞서 자유와 관용과 화해와 조화를 추구한다.

종교개혁이 본격화되면서 시대는 그에게 편들기를 강요했다. 왼편과 오른편, 교황파 루터파, 이 패거리 저 패거리에 가담하기를 요구했다. 타고난 싸움꾼인 루터는 때로 자기편을 들지 않고 모호하고 겁쟁이처럼 보이는 에라스뮈스를 “지난 1000년 동안 존재한 적이 없었던 그리스도 최대의 적”이라고까지 매도했다.

이렇게 에라스뮈스가 균형을 잃지 않고 중재자의 일을 자처하다 보니 양쪽 모두의 협공을 받아 배로 핍박당한다. 하지만 그 어떤 회유와 협박도 그를 흔들지 못한다. “난 결코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는다”라며 끝까지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는 자유인으로 남는다.

에라스뮈스는 정신과 이념에서는 승리했으나 현실에서는 패배했다. 결단과 추진력이 부족했고 그의 정신이 민중의 삶에까지 구체적으로 파고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빠지기 쉬운 독선과 편견, 광신과 증오, 폭력과 전쟁에 맞서 화합과 조정을 구했다는 점에서는 승자였다.

오늘도 당파심과 광신은 증오와 폭력과 맞물려 그리스도적인 일치와 평화를 위협한다. 광기의 시대일수록 이성과 도덕과 자유의 힘에 희망을 건 ‘에라스뮈스적인 것’이 더욱 절실하다.

그는 스위스 바젤로 돌아가 말년을 보내다가 1536년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7월 12일은 에라스뮈스가 소천한 지 490주년 되는 날이다. ‘에라스뮈스적인 것’에 대한 성찰(省察)이 다시금 되새겨지는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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