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수노회 순교자 합동 추모식

           여수노회, 순교자 13인 제74주기 추모

여수노회는 매해 9월을 전후해 여수지역에서 순교한 13명을 기리는 순교자 합동 추모예배를 지난 9월 22일 여천제일교회(김동식목사)에서 드렸다. 그 명단은 다음과 같다.

이기풍 목사(우학리교회) 손동인 학생(애양원교회) 손동신 학생(애양원교회) 조상학 목사(주향교회) 윤형숙 전도사(여수제일교회) 손양원 목사(애양원교회) 지한영 강도사(율촌장천교회) 황도백 집사(우학리교회) 허상용 집사(돌산읍제일교회) 곽은진 집사(우학리교회) 안경수 성도(우학리교회) 백인수 성도(우학리교회) 지준철 성도(지한영 강도사의 장남).

   
 

여수, 여천의 도시 개관
전라남도의 시. 북쪽으로 순천시, 광양시, 남쪽으로 남해가 펼쳐져 있고, 서쪽으로 고흥군, 완도군, 동쪽으로 경상남도 남해군과 접해있다. 전남에서 인구가 2위인 269,096명으로 GDP의 절반을 감당하는 핵심도시다. 한려해상, 다도해해상국립공원 두 국립공원 모두 여수시 지역을 포함하고 있다.

여수시는 지난 2010년 대부터 여수엑스포 까지 도시 모습이나 위상이 급변했다. 별 볼일없는 어촌에 불과했던 돌산에 고급 펜션들이 들어서고 인근 섬에 다리를 놓고 경도 2조원짜리 리조트가 들어왔다. 여수의 강남이라는 웅천지구은 그야 말로 남부럽지 않은 주거지와 유흥가로 형성된다. 이로 인한 여수 지역의 교회도 부흥을 맞이하여 대형교회들로 성장했다.

과거 어촌에서 항만으로 그리고 화학 에너지 공단으로 변모하면서 크게 인근 여천지역과 통합된 후 여수 엑스포를 계기로 ktx가 들어오게 되고 공단에서 휴식과 레져의 도시로 발돋음했다. 이미 오동도와 향일암도 전혜의 자연 환경을 보유한 여수는 인근 오동도등과 연계한 연한 바다를 중심으로 한 도시가 된 것이다.

구 여수시와 여천시, 여천군이 통합하지만 구조상 여수와 여천은 터미널, 역 등이 따로 이용한다. 통합되었지만 아직도 공무원들은 구 여수시, 여천시, 여천군 출신별로 모임이 존재한다고 한다. 학교도 그렇고 이질적인 도시 배경의 그림자가 오래간다는 지적이다. 이런 큰 변화가운데 가장 큰 변화는 개신교회들의 부흥과 성장이다.

활력있는 일하는 도시가 되다 보니 많은 인구가 유입되면서 과거 농어촌교회들이 외곽으로 이전하거나 확장하여 대형교회들이 가장 많은 지방도시다. 전남도중 인구도 순천시와 얻치락뒤치락할 정도라고 한다.

   
 

한국전쟁 전후 순교자 나와
해방 이후 지역, 이념, 종교 갈등으로 굴곡진 역사를 간직한 곳중에 하나인 여수는 이곳에 기독교가 꽃피는 근거가 된다. 이런 배경에는 용서와 화해를 강조하는 기독교 정신과 이를 실천한 순교자들의 역할과 그 정신을 이어받는 기독교회들에게 있다고 하겠다.

지금도 여수 율촌면 애양원 교회 옆에 자리한 손양원목사 순교기념관과 중앙에 위치한 손양원목사상에는 ‘감사의 기도’가 적혀 있었다. “미국 가려고 준비하던 아들이 미국보다 더 좋은 천국에 갔으니 제 마음이 안심돼 감사합니다. 내 아들을 죽인 원수를 회개시켜 아들을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

1949년 10월 여순 사건 당시 두 아들 손동인, 동신군이 좌익 학생들에 의해 비극적인 죽음을 당한 뒤 손 목사가 남긴 기도다. 순천사범학교에서 기독교학생회장으로 활동하며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던 아들 동신군이 좌익 학생들에게 친미 세력으로 몰리자 형을 구하려던 동생까지 모두 죽임을 당한 것. 억장이 무너지는 상황에서 손 목사는 다른 선택을 했다.

두 아들을 죽여 사형 위기에 처한 가해자 안재선을 선처해달라고 청원해 그를 양아들로 삼았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이후 손 목사는 6.25 전쟁 중 북한군이 여수 지역을 점령해 공산주의 교육에 앞장설 것을 요구하자 이를 거부해 1950년 9월 28일 총살당했다. 이 외에도 소위 여순반란사건의 진원지로 이곳에 주둔군 지휘관의 항명과 이를 도운 이들이 무고히 희생되는 국가폭력의 대표적인 희생지역이다.

   
 

이런 역사와 정신을 기리는 이 행사는 지역의 교회와 유족 대표들이 참석한 이 행사는 천대형 여수노회장과 역사통계위원회 이사현 원장이 주관했다. 순교자 유가족과 지역 기독인, 순교자교회 대표자들 등 이날 예식에 함께한 참가자들은 순교자들의 삶을 돌아보며 추모하고 그들이 남긴 신앙의 유산을 톺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이날 예식은 이사현 목사의 인도로, 김동식 목사의 기도, 신길호 장로의 성경봉독, 여천제일교회 시온찬양대의 특송, 전형식 목사의 ‘아프나 영광스러운 이야기!’ 제하의 말씀선포, 신외식 목사의 순교자 소개, 천대형 목사의 축도 등으로 진행됐다.

여수노회 역사통계위원장 이사현 목사는 "한 알의 밀알 되어 복음에 헌신하셨던 신앙의 선배들의 발자취를 돌아보며 새로운 신앙의 각오를 다진 시간이었다"며 "특별히 이번 예식에는 순교자 유가족들이 함께 해 더욱 뜻깊었다. 향후 추모예식에도 순교자 유가족들을 초청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여수의 기독교회 

여수에는 애양원외에도 여수 성광교회, 영락교회등 대형교회가 많은 가운데 여천교회 정훈 목사가 이번 109회기 총회에서 서부지역 부총회장으로 2명의 후보들과 겨뤄 2차 투표까지 가는 접전 끝에 총회 부총회장으로 당선되었다. 아마도 전남동부 지역인 여수노회로는 처음으로 총회장을 배출한 것으로 보인다.   

여수노회 최초 부총회장이 된 정훈는 실제로 선거운동과정에서 여수가 손양원목사의 순교정신과 신앙, 가해자들에 대한 용서와 화해의 정신을 잇는 곳으로 소개하며 총대들에게 호소한 결과 좋은 평을 받은 것이다.

   
                     * 1950년에 창립된 여천교회 성전, 1999년 정훈목사 부임해 4년 째 사역중   

* 여순사건이란

가장 대표적인 사건인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제주도에서의 남한 단독선거 반대운동이 시작되고 이를 진압하는 경찰과 국군의 항명에 지원하라는 파견을 거부한 여수 순천에 주둔하던 부대 제 14연대 의 반란 사건이다. 당시는 이를 반란이라고 하였지만 지금은 역사바로 세우기를 통하여 ‘항쟁(抗爭)’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런 일은 국군 제14연대만의 일이 아니었다. 여수 지역를 장악한 남로당 출신 좌익들과 합세한 세력들은 호남 동부지역 전체로 확산된다. 사건 당일 여순반란사건 첫날인 20일 여수를 점령하고 약 400여 명에 이르는 경찰 및 그 가족들과 우익인사들을 죽임을 당한다. 이후 약 6개월에 자행한 ‘반동분자 숙청’ 결과, 엄청난 수의 양민 학살(虐殺)과 군경(軍警)과 그 가족들의 희생이 있었다는 것이다. .

그러나 이는 이 반란을 진압한 정부의 조사에 국한 된 것이고 이후 부역자들을 향한 무자비한 보복과 살인도 결코 작지 않았다고 한다. 이후 지역에서는 여순반란사건을 ‘여순사건’으로, 숱한 인명(人命)을 살상하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부르던 자들을 ‘봉기군’으로도 표현했다고 한다. 념하는 안내판이 있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민주정부 수립후 국가폭력에 의한 범죄형 살인이나 학살등에 대한 진상조사로 논쟁이 유발된 상태다.​

조정래의 소설 ‘태백산맥’ 같은 대하소설을 통하여 역사의 진상을 그마나 회복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일이나 다시 금 역사 논쟁이 된 것은 유감이다. 소위 빨치산으로 명명된 이들중 상당수는 가족이나 친지등을 도왔다는 이유로 국군이나 경찰에 의하여 낙인 찍히고 쫒겨 산으로 들어간 이들이 허다하다는 것으로 진짜 좌익과는 구분해서 복권해야 한다는 것이 지역 역사가들의 의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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