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삼마, 반전의 묘미(48장)

                              여호와 삼마, 반전의 묘미(48장)  

에스겔과 북토크

   
 

노을 : 이제 마지막 시간이군요. 마흔 번의 만남을 통해, 에스겔과 함께 하며 수준높고 속깊은 이야기를 나눈 것이 얼마나 큰 복이고 선물인지 모르겠습니다.



에스겔 : 마흔 번의 만남은 나에게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나를 되돌아보고, 내가 살던 시대, 그리고 내가 선포하고 기록하고 전수한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하는 기회였으니까요. 내가 선포하고 기록했는데도 불구하고 명확하지 않았던 것들, 내가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그런 것들을 정리하고 명확하게 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들이었습니다. 그런 시간을 마련해주셔서 고맙습니다.



노을 : 아닙니다. 내가 에스겔에게 받은 선물들이 더 많습니다. 신학을 공부한 이후 내 삶은 에스겔과 함께 하는 삶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벌써 많은 세월이 흘렀는데, 대예언서를 소개하는 책을 <여호와 삼마를 향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했고, 박사학위 과정에서도 에스겔서를 연구해서 논문을 썼고, 나중에 <용서와 회개>라는 제목으로 출판했습니다. 한국성서학연구소에서 하는 성서마당에서 에스겔서 강의를 열 번 했고, 그것을 <이 뼈들이 살겠느냐?>라는 제목으로 책을 펴냈습니다. 그리고 에스겔서에 관한 연구 논문들을 많이 썼고, 한국연구재단에서 하는 인문저술출판사업의 지원을 받아서 에스겔과 하이데거를 연계하는 작업을 3년 동안 해서 <예술, 신체, 공간>이라는 제목으로 내년 초에 책을 출판할 예정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에스겔서를 40회에 걸쳐서 에스겔과 북토크하는 형식으로 다루고 있고요. 그러니 내가 얼마나 에스겔에게, 그리고 에스겔서에 빚진 게 많은지 아실 겁니다.



에스겔 : 허허허. 그 정도면 나에 대해서, 그리고 에스겔서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알 것 같은데요. 오늘 이야기할 주제는 무엇인가요?



노을 : 당연히 여호와 삼마에 대한 거죠.



에스겔 : 내가 본 환상들, 내가 그 환상 속으로 들어가서 직접 체험하기는 했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아직 현실은 아니기 때문에, 앞으로 도래할 새로운 세상에 대해서는 노을이 아는 것보다 더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을 것같습니다.



노을 : 끝까지 겸손하시군요. 우선, 여호와 삼마의 의미를 설명해주시지요.



에스겔 : 잘 알겠지만, 여호와 삼마는 "주께서 거기에 (계시다)"라는 의미입니다.



노을 : 나는 여호와 삼마를 생각할 때마다 이 말을 사람들이 얼마나 오해하는지, 그리고 그 말이 갖는 반전의 묘미가 얼마나 큰지를 떠올립니다.



에스겔 : 그래요? 우리는 별로 특별할 게 없는 이름인데요.



노을 : 여호와 삼마가 "주께서 거기에 (계시다)" 잖아요? 그런데 대체로 목회자들도 그렇고 평신도들도 주님이 거기에 계시다는 말을 "주님이 여기에 계시다"로 생각하더라고요. 그래서 차에 여호와 삼마를 써놓은 사람들도 있어요. "주님이 거기에"라는 것은 주님이 그 차에 계시는 게 아니고 다른 곳에 계시다는 것인데, 그들은 그 말을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로 이해하더라고요. 물론 사람들은 임마누엘도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로 이해합니다.



에스겔 : 그렇군요. 그런 오해가 발생할 수 있겠습니다. 여호와 삼마는 실제로는 예루살렘인데, 내가 예루살렘이라는 지명을 싫어해서, 예루살렘 대신에 여호와 삼마라고 하는 겁니다.



노을 : 그러니까 예루살렘은 현실적인 공간이고 여호와 삼마는 환상적인 공간이라고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여호와 삼마는 예루살렘, 즉 범죄로 인해서 심판받은 그런 현실적인 공간을 거부하고, 주님의 가출로 인해 여호와께서 그곳에 계시지 않고 다른 곳에 계시는 섬뜩한 상황을 설정함으로써, 공간을 사건화하고 신학화하는 기능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에스겔 : 그것, 어렵긴 한데, 흥미로운 해석이군요. 



노을 : 내가 보기에 여호와 삼마는 일종의 유토피아입니다. 유토피아는 어딘가에 있을 것같지만, 말 그대로 하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죠. 여호와 삼마도 그런 곳이라는 거죠. 여호와 삼마는 현실적인 공간, 지금 이곳의 공간을 부정한다는 점에서, 즉, 여기가 아닌 거기에, 지금이 아닌 그때에 나타나는 공간이라는 점에서 유토피아입니다.



에스겔 :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을 사용하는 것 자체가 예루살렘에 대한 거부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럴 겁니다, 그리고 여호와 삼마는 여호와 삼마, 즉 여호와가 여기가 아닌 "거기에" 계시기 때문에 여호와 삼마는 항상 다른 곳을 가리킵니다. 이런 점에서 여호와 삼마는 예루살렘을 부정할 뿐만 아니라 여호와 삼마 자체도 부정하는 거죠. 여호와 삼마에 대한 서술에서 인상적인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노을 : 여호와 삼마에 대한 언급이 "그 성읍의 출입구는 이러하니라"로 시작하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리고 여호와 삼마라는 성읍에 대한 이야기를 출입문에 대한 것으로 다 채우더군요. 그 성읍 각 방향으로 문이 세 개씩이어서 문이 모두 열두 개인데, 각각의 문들이 각 지파들을 위한 문이라는 것을 상세하게 밝히는 것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에스겔 : 열두 문이 여호와 삼마에 대한 거의 유일한 정보라고 하면, 그게 도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걸까요?



노을 : 우선, 한 성에 그렇게 많은 문, 즉 모두 12개의 문을 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일단 문이 많으면, 쳐들어 오는 외적들을 막아내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래서 실제로 성읍을 건설할 때는, 대체로 동서남북 각 방향으로 문을 하나씩 두는 게 관례였을 겁니다. 그런데도 문을 열두 개나 설정했다는 것은 여호와 삼마라는 성읍을 문들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의미이겠지요. 각 지파에 문 하나씩을 할당해서 각 지파가 할당된 문으로 출입하는 것은 각 지파를 동등하게 여긴다는 것이죠. 그리고 문을 12개나 만든 것은 그만큼 자유로운 출입과 소통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에스겔 : 알겠습니다. 실제로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은 하나님이 에스겔에게 마지막으로 알려주신 이름입니다. 그 이전까지 그 성읍은 이름이 없었어요. 그런데 앞에서 살펴본 대로, 그 성읍은 여호와 삼마라는 이름을 갖는 동시에 여호와 삼마, 즉 하나님이 거기에 거하시지 않는 곳이 되는 얄궂은 일이 발생합니다.



노을 : 그게 여호와 삼마의 태생적 아이러니겠지요. 여호와 삼마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우리가 에스겔서 끝에 이르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제는 에스겔서 북토크를 마칠 때가 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요. 그동안 이 특별한 만남에 흔쾌히 참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에스겔과 북토크를 시작하면서 과연 끝까지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걱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북토크를 40회를 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에스겔 : 나도 그렇습니다. 덕분에 재미있었어요. 북토크라는 게 처음이어서 시작할 때는 아주 어색했는데, 지금은 꽤 익숙해졌습니다. 온라인으로 북토크를 하다가, 내가 직접 이곳에 와서 좌충우돌하기도 했고, 유랑시인처럼 여기저기 떠돌기도 하고, 노을과 마주 앉아 에스겔서를 통해 개인적인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이런 경험은 앞으로 다시 하기 어려울 겁니다.



노을 : 에스겔과 북토크를 하는 것은 에스겔과 에스겔서 연구자인 나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행복한 일이지요. 마흔 번의 만남을 통해서 많은 것을 깨달았거든요. 감사합니다. 잘 돌아가시고, 나중에 다시 뵙기를 바랍니다.



에스겔 : 그래요. 노을이 그리울 겁니다. 연구하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언제든 나를 부르세요. 만사 제쳐두고 달려오겠습니다. :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나중에 뵙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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