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평동교회(1907-)와 이정학목사
이 교회는 1907년 김준기 장로 외 6명이 7칸 한목서 첫예배를 드림으로 시작되여 당시 순회 목회자인 언더우드를 비롯하여 채피득 군예빈 선교사가 돌아보며 지난 100여년간 14대 12명의 목회를 모신다. 역사 오랜만큼 많은 이야기들을 담고 있는 데 청소년들의 배움터인 창신학원을 1923년에 설립하고 시대에 따라 성경구락부와 산업전도부 유치원 보육원을 통하여 변화된 시대에 지역사회 사명을 감당해왔다. 성장의 정점인 김규목사 시무시절엔 과도하다 할 정도로 해외선교에 집중해 러시아등에 많은 교회도 세운다.
역대 목회자중 유재한목사는 2번에 걸쳐 부임한 분으로 1959년 합동과 통합으로 분리된 1960년 첫 총회인 46회 총회장으로 활동한 큰 인물이다. 그런데 갑짝스런 유목사 서거로 부목이던 이정학목사가 후임이 되여 30년 목회하시고 정년퇴직 하신 후 그 후임 김규목사도 20년 이상 시무해 원로가 되었는 대 두분의 장기목회로 인하여 교회는 안정적으로 큰 부흥과 내실을 이룬다. 무엇보다 기록을 중시한 교회로 50년사부터 60년사 80년사를 냈고 100년는 편찬만 하고 내지못하지만 이것이 110년사 기초가 된다.
역사가 긴 교회이나 이정학, 김 규(1993-2016) 현 김경우(2016- )목사까지가 교회역사의 중심이다. 한 때 양평동교회서 교단 총회가 열린 적도 있었는 데 그만큼 중심적 교회였다는 소리다. 또 장신대 15기 대표적인 인물 금영균목사가 이 교회 출신으로 경기노회 청년연합회를 거쳐 전국연합회 총무를 지낸 인물이다. 이정학목사 청빙시 안오려하자 양평가서 보쌈을 해왔다고 한다. 이외에도 부목사로 용덕순, 이만수, 오성환(동두천)목사등이 이 교회출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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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1970년대 이전엔 교역자가 사찰, 수리부장, 연락원, 청소 등의 모든 일을 했으나 이후 교인 증가로 역할을 나눈 것도 특히하다. 또 교회 직원인 제직회나 재정관리 감사 직급간의 업무 규정이나 급여도 일찍이 정한 것도 특징이다. 교회 부흥에 따라 광명교회를 7번째로 분가 개척한 것도 대단한 일이다. 그 외 당회록이나 제직회록 교회학교 기록도 비교적 잘보관된 것만이 아니라 기록도 매우 입체적으로 된 것을 보게 된다.
양평동교회는 당대 어느 교회 보다 주보발행을 먼져했는 데 첫주보가 1945년 11월 4일로 전면에 “조선이 해방 되자 주보가 창간되니 다 하느님의 은혜로다” 라고 썼다. 주보는 창간호부터 보관되였고 당시 신문이나 연락방법이 없던 시절 성도간의 소통과 교제의 사명을 감당한다. 지금보면 별 것 아니라고 할 수 있으나 당시 주보를 내려면 인쇄환경도 그렇고 된 일과 할일을 구분하여 수집하는 등 준비가 많이 필요해 보통 번거로운 일이 아니다. 영등포교회는 방지일목사 부임후 도림교회는 1947년 3월 유병관 목사가 부임하고 주보를 낸다. 이러한 배경엔 당시 영등포시장 인근의 본 교회 김수일장로가 인쇄소에서 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이런 기록도 교회 100년를 준비만 하고 출판하지 못했다가 110년사를 만들어 사집과 문서로 교회 홈피에 모두 올려놔 모든 이들이 볼 수 있도록 한 것도 대단한 일로 보인다. 역시 역사가 있고 잘배운 교회 답다는 생각이다. 후임 김규목사도 연세대를 나와 영락교회 부목사로 있다가 부임해 여러모로 교회의 안정과 성장을 이룬다. 1990년대 이후 공장들이 외곽으로 나가고 주거지가 형성되면서 100주년 기념교육관 완성이나 100년 기념사업이나 110년사 출판을 한 분으로 자신의 치적만이 아니라 선대 이정학목사 시무시절의 활동에 대하여 많이 자료를 넣은 것은 귀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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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학목사와 산업선교
이정학 목사는 고향이 양평군 문호리로 문호리교회를 출석한다. 일제하 경성사범대학을 졸업하고 교사 생활을 하다가 한국신학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용문교회서 1954년 제2대 담임목사로 시무하다가 양평동교회 유재한 목사 권유로 1960년 양평동교회 최초 부목사로 부임하여 34년 동안 양평동교회를 이끌었다. 후임이 되신 후 교회 신축을 했으며 사회선교관과 부목사들의 사택을 마련하였다.
또 경기도 시흥에 12,000평의 교회 묘지를 마련하였다. 성경구락부를 창설하고 유치원과 맞벌이 가정을 위한 어린이 집도 세운다. 무엇보다 당시 군사정권시대이며 산업화로 근로자들이 늘어가면서 산업선교위원을 하신다. 영등포산선의 위원장으로 교단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무척 어려울 때에 힘을 다하여 산선을 지킨다. 이러한 힘은 바로 목회의 안정과 부흥이었는 데 양평동일대의 공장 증가로 인구가 유입되면서 유입된 교인들을 목회적으로 잘살피려 영성과 논리가 겸비된 감화 설교가 큰 힘이 된다.
교회는 1993년 7월 이정학 목사를 원로로 추대하는 데 1963년 12월 위임목사가 된 이래 전임 목사의 서거로 바로 후임자가 된 것이다. 가족으로는 박정화 사모와 1남 3녀중 장녀와 차녀 외아들이 목사가 되었고 막내 딸은 교사다. 목회자인 부친에 이어 자녀들 다수가 목회자가 되었다. 이정학목사의 일화는 많으나 한가지만 소개하면 당시 상당한 교세로 목회자들이 차량을 탈 때로 교회가 드리려는 승용차를 거부하고 교회 차량을 오랫동안 구입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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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교인 반 이상이 차량이 없는 것을 아시고 심방 때도 그렇고 목회자가 자가용타고 심장간다는 것을 스스로 용납하지 못했던 것이다. 또 먼거리 교인들을 위한 차량제공도 거부하시고 가까운 곳으로 가라고 하신다. 이 청빙한 청빈한 교역자의 삶과 사역을 보고 성장한 교회는 이정학목사에 대한 존경과 사랑을 아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2003년 소천시도 시신을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에 기증하라고 하고 묘역을 남기지 말라고 하셨다고 한다.
그러나 이정학목사라는 이름이나 그가 한 일은 당시 양평동교회나 영등포노회서만이 아니라 총회적으로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산증인이다. 당시 영산의 실무자와 총무를 지낸 현존하시는 인명진목사도 여러차례 후학들에게 이정학목사와 차관영목사가 없었더라면 영등포는 문을 닫을 뻔했다고 하신 바 있다. 비슷한 또래의 교단의 지도자들과 다르게 당시 세계적인 추세인 산업화로 인한 노동자들의 희생과 이를 선교적으로 돌보는 것에 대한 확고한 신앙적 신학적 입장을 갖았던 분들이다.
당시 신학생으로 두 분을 가까이서 뵙고 배월 남에게 듣고 글로 본 게 아니다. 따라서 그분들의 자취를 실감할 수 있었는 바 이정학목사는 얼굴 자체서 사랑과 선함과 뭍어나는 분이라는 생각이다. 맑은 눈과 부드러운 음성의 설교는 누구라도 푹 빠져든다. 내용으로도 신학자 못지 않은 깊이 있는 해석을 하시는 데 당시 마가복음에서 언급된 예수의 곁에서 나오는 백성 혹은 무리라는 단어는 하나가 아니며 가난한자(프토코스)와 대중(라오스)로 구분하시면 설교하신 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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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양평동교회 110년사의 내용중 산업선교 관련
이정학 목사는 영등포도시산업선교회 위원회 위원장직을 맡아 근로자들의 인권과 권익을 위해 노력하였다. 이러한 이정학 목사의 활동에 대해 정부에서는 사상적으로 의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나 이목사의 산업선교에 대한 신학이나 애정은 바로 신앙에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 다음의 글은 영등포노회 40년사에 수록된 ‘영등포산업선교회 40년 약사’에 나온 글를 소개한다.
한국교회는 한국의 공업화가 본격화된 1950년대 후반기부터 산업사회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에게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1950년 초에 공장 내에서 예배드리는 모임이 있었지만 본격적으로 산업전도가 시작된 것은 1957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통합) 전도부 안에 예장산업전도위원회가 조직됨으로 공식화 되었다. 영등포산업전도회는 1958년 4월 19일 경기노회 영등포지구 산업전도회를 창립함으로써 영등포 지역에서 처음으로 산업전도 1965년 초대 산업전도회 회장인 김려성 원로장로다.
영등포산업전도회 초기 활동지역인 영등포 지역은 60년대 후반 까지 한국 최대의 공업생산지역 이었으며(65년 당시 인구 57만 명, 노동자 6만 명) 처음 10년여 동안은 산업전도 활동의 특징은 “전도”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이 시기에 산업전도를 위한 기반을 공고히 하고 영등포지구 산업전도연합회, 도림교회, 양평동교회, 영남교회 산업전도회가 조직되었다. 공장지역에 복음을 전도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출발하여 노동의 신성함이나 산업평화 등에 대하여 교육을 하기도 했으나 점차 노동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통해서 노동인권 옹호 활동으로 선교개념을 확대해 나가게 되었다.
1964년 2월 18일 영락교회 후원으로 산업전도 전임목사로 조지송 목사가 취임하였고 1973년 호주 선교회 후원으로 인명진 목사가 전임목사로 부임하면서 산업전도와 노동운동의 본격적인 장을 열게 되었으며 산업전도회를 도시산업선교회로 공식 채택하였다. 1964년 영등포지구 평신도산업전도연합회를 구성하고 14개 공장의 산업신도와 개인적으로 관련된 공장이 40여개였으며 대동모방(협신회, 방지일, 조지송 목사 인도), 한영방직(한영교회 문학선 목사 인도), 해태제과(양평동교회 이정학 목사 인도), 조선피혁(조지송 목사 인도), 동아염직(박조준 목사 인도), 대한모직, 동신화학(영문교회 통해 전도지 배포), 천우사(조선피혁 신의화와 합석) 등이었으며 초대연합회 고문에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 회장에 김동혁(대동모방)이었으며 산업전도회 위원장에 계호언 목사, 총무에 이정학 목사가 임명되었다.
이정학 목사가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서 활동한 시기는 1974년부터 1990년까지다. 이정학 목사는 군사정권하의 수난기에 영등포산업선교회의 위원장을 맡아 노동자들의 인권옹호에 앞장서서 많은 공헌을 하였다. 우리 교단이 1984년도에 개최한 한국교회 100주년 선교대회에서 이정학 목사는 “영등포 도시산업선교” 라는 주제로 영등포지역에서의 초창기 산업전도 활동과 그 변천 그리고 그가 도시산업선교를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발표를 하였다.
이 지역에서 선지선각자와 같이 일하신 분들은 계호언, 방지일, 유병관 제 씨였다. 이들이 공장전도라는 이름을 가지고 산업사회에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시도는 1958년도였다. 본인이 1960년도에 현 양평동교회에 부임하여 시무하던 중 이 운동에 합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처음에는 심방 가방을 들고 공장을 출입하는 일로 이 방면의 전도를 시도하였는데 각기 자기가 목회하는 교회 근처에 위치한 기업체들을 담당하기로 하였고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그 실황을 보고 하기로 하였다.
그렇게 하다가 점차적으로 일의 분량을 감당 할 수가 없어서 강경구 여전도사를 채용하여 이 일을 전담하게 하였고 여러 분야에서 활동하게 하였다. 그러던 중 공장안에 있는 한영교회를 개척하였고, 그 교회가 지금은 경기노회(현 영등포노회)에 소속한 큰 교회로 성장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태의 공장전도는 60년대가 되면서 춘추전국시대와 같은 형태로 나타나게 되었다. 한 기업체에 예장, 기장, 감리교, 성결교 등 각 교단이 앞을 다투어 공장 안에서 예배 모임을 갖게 되었고 다소 마찰도 있게 되었다.
이 때 태동하기 시작한 것이 연합운동이었고 교단 연합위원회를 구성하면서 그 공장전도의 이름을 산업전도회라 하였다. 이 때 참여한 교단은 예장, 감리교, 기장, 성공회였다. 우선 실무진을 한 사무실로 모이게 하였고, 전도지역을 예장은 영등포지역, 감리교는 구로동지역, 기장은 인천지역으로 분담하게 하고 산업전도회라는 명칭을 산업선교회라 지칭하게 하였다. 이 때 예장의 실무자는 조지송, 인명진 목사였고 감리교는 김경락, 안광수 목사였고 기장은 고재식 목사였다.
이 분들도 처음에는 공장방문, 공장 예배인도와 같은 스타일의 공장 전도였다. 그러면서 후지 후각적인 깨달음이 현재와 같은 선교 스타일로 정착이 되어졌다. 그 위에 70년대가 안고 있는 아픔을 같이 안고 넘어가면서 반체제, 반정부, 용공주의자로 낙인이 찍혀 매도 맞고 복역도 하고 기피 인물로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이는 노동 사회의 비리를 안고 같이 아파하다가 생겨진 본의 아닌 군더더기였다고 생각한다.
70년대가 안고 있었던 우리나라의 사회 상황이 비단 산업 선교에만 시행착오를 낳게 한 것은 아닌 줄 안다. 정치, 경제, 문화, 종교의 각 분야가 안고 있었던 아픔이었던 줄 안다. 그래도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는 총회 산하에 있는지라 이러한 사실들을 그때그때 총회에 보고하여 그 방향 설정과 활동 규범들을 지시받고 그 범위 안에서 괴히 빗나가지 않는 선에서 이 분야에서 활동해 오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조지송 목사가 총회에 보고할 때마다 박수로 격려해 주었고 환영하여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안팎에서 일어나는 시비곡직이 무엇일까? 나는 생각하기를 산업선교를 보다 더 착실하게 착근해 가야 되겠다는 각계의 성원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좋은 현상이고 견해의 차이에서 오는 아집들이 이러한 모임들을 통하여 계속해서 보다 건실하게 착근이 되도록 건설적인 모색들을 해 가야될 것으로 생각한다.
a Scripture와 the Scripture 문제
전통적인 성서관에서 오는 우리의 갈등이 있다. 나는 성서가 축자적으로 영감이라거나 문자 주위에 집착하는 고집이 없는 사람이다. 의문은 죽는 것이요 성령은 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문자에 맹목적으로 교착되어 있기만 하면 예수의 참 제자라고 착각하는 소위 문자 신자가 우리 주변에는 꽤 있고 다른 한편, 성경 지식은 별로 가지지 못한 사람 같은 데 그 마음은 주님으로 말미암아 잡혀 있어 하나님의 사랑이 강력하게 통하고 있는 예수의 참 제자도 있다. 성경은 하나님께 이르는 문과 같다. 성경은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가고 또 하나님이 오시기 위하여 주신 바 열린 문이다. 그런데 교회역사에 있어서 성경이 때때로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을 방해하기 위하여 소용되었던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자가 당착일까? 성서의 이야기대로 착실하게 산업사회에 복음을 전해 보고자 하는 시도가 집권층과 기업주들의 비위를 상하게 했을까?
너무 성경대로 읽고 성경대로 전해서 시비가 일어났을까? 생각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에 나타난 제사장과 레위 계급의 사람들은 수난자에게 어찌할 것이냐를 특별히 연구하고 처신의 방도를 알고 있는 계층의 사람들이었다. 이와 반대로 사마리아 사람은 인간적인 견지대로 하면 충분히 그대로 지나칠 수 있는 사람으로 “저자들이야 말로 우리의 적이다. 이 저주를 받은 유대인이 우리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저들이야 저들의 동족이 도울 것이다” 그럴만한 사람이었다.
이와 같이 인간의 고난이 문제가 되는 경우에는 하나님 편에서 보게 될 때 신자, 불신자, 구교, 개신교, 민주주의, 독재주의 자 그 어느 계층이거나 차별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그 고난의 현장을 노동계층에게서 보아온 것이다. 교회가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의 근본정신을 망각해 버리고 혹 신앙의 교만이나 독선으로 그러한 것들을 도덕적인 규범으로나 사회 혁명을 꿈꾸는 자들의 소행으로 몰아 붙여서는 안 될 것이다.
우리는 심판 날에 우리의 신학사상이 어떠하냐 하던지, 어떤 교파나 단체에 속해 있었느냐 하는 것보다 네가 번민하는 사람들을 도와주었느냐 아니냐를 보다 더 많이 문제로 하실 것이라 생각한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함을 받은 자는 사실 그것을 안다고 하는 일보다 그것을 행한다고 하는 일이다. 만일, 우리 사회에 강도 만난 자의 현장이 기업주라고 할 때 우리는 스피커의 방향 설정을 이내 달리할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누구의 말과 같이 a Scripture를 the Scripture와 같이, the Scripture를 a Scripture와 같이 읽어갈 것이다.
a Christian 과 the christian
우리는 이제까지 외부 사람, 내부사람, 그래서 내부에서 외부에로 국민의 각 계층에서부터 외국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하는 일에 보다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우리가 가진 사명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이 일을 위하여 식사 하실 겨를도 없으신 때가 있었다. 안에서 밖으로 달려 나가시는 일로 여일이 없으셨다. 그러나 예수가 내부사람, 외부사람 하셨을 때 외부적인 조건에 그렇게 집착하지 않으셨다. 물론, 내·외부 사람에게 있는 엄연한 구별이 거의 절대적이라 할 만한 증거를 우리는 확실히 가지고 있다.
문제는 누가 내부 사람이고 누가 외부 사람이냐 하는데 있다. 주께서 “나중된 자가 먼저 되고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리라” 말씀하신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언제 일지 모르나 그 심판 하실 생명책을 펴실 때 우리의 상상을 뒤엎는 차서와 질서가 우리 앞에 전개될 것이다. 주께서 내·외부 사람이란 마치 우리들만이 내부의 사람들이요 비기독교인, 무신론자, 미신에 잡혀 있는 자들은 외부 사람같이 생각해서 우리들이 교회 안에서 스스로 안이한 기분에 잡혀 있어도 좋다는 말씀이 아니다.
예수는 그 당시 소위 경건한 사람들이 외면으로만 내부의 사람이요, 사실은 외부의 사람인 것을 지적해서 얼마나 철저히 저들을 공격하시고 격앙케 하셨는가를 우리는 잘 안다. 그러기에 지극히 겸비한 자세가 우리에게 있어야 한다. a christian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로운 사회 건설에 이바지 할 수 없을까 시도해 보는 것이 좋겠다. 물론 a christian계층의 서먹한 인습과 행동이 우리 안에 섞여 들어올 위험이 있다는 것도 솔직히 인정한다. 사실, The christian안에 unchristian이 얼마든지 있고 a christian안에 christian이 있음을 얼마든지 발견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The king이냐 His servant이냐?
예수는 “천국은 한 임금과 같다”(마18:23)하셨다. 이 말이 현대인의 구미에는 잘 맞지 않는 말이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최선의 정치 제도인지 아닌지에 관하여 성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으므로 이 문제에 대한 정당한 비판은 우리가 내려야 할 것이나, 인류가 피렌체에서 가지고 출발한 꽃다발 속에는 천국은 종과 셈을 밝히시려는 한 임금과 같다는 말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 있어서는 오직 하나인 의지만이 시행되어야 한다고 했다.
그곳에 있어서는 하나님만이 무한 절대의 군주이시다. 물론 비유이나 우리는 그 의미하는 바를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하나님 나라는 하나님의 뜻만이 행해지는데 있다. 따라서 그 나라에 있어서는 무조건적인 복종만이 있지 단서를 첨부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우리의 창조주시오, 아버지시오, 주인이시오, 왕이시다. 우리는 그의 소유이며 그의 백성이다. 우리의 소유는 모두가 하나님의 것이요. 다만, 우리는 그의 뜻이 아버지의 나라에서 이루어지신 것과 같이 우리에게서 이루어지게 하는 일 이외의 다른 일을 꾀해서는 안 된다.
현대인은 약삭빠르기 때문에 종교 없이도 우리가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는 거의 없다. 그러나 현대인은 하나님을 왕으로 모시려는 종교보다 그 왕을 자기 속에 소유하려는 종교를 가지려고 한다. 우리에게 마주 서서 명령하는 하나님이 아니라 우리를 왕좌에 모셔 앉혀 주는 하나님을 가지려 하는 게 현대인의 신이다. 그것은 타락설화에 있는 것과 같다. 비유에도 소작인인 우리가 포도원 주인을 무시하고 스스로 주인인 체 하려는 포도원 비유에 있는 소작인 같이 행동하는 오류가 있다(중략)
이 점에서 선지들과 예수님은 촌보도 양보하지 않으셨다. 예수는 나에게 엎드려 경배하면 천하만국의 영광을 너에게 주리라”한 마귀의 제언을 일언지하에 “사단아 물러가라”하시면서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하셨다. 우리는 대체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신학 이해에 젖어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근자에 일어난 성서를 역사적인 배경에서 뿐만 아니라 정치나 사회적인 배경에서까지 이해하려는 운동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폰 라드(von Rad)는 모세의 이야기를 구속사적인 입장에서 본 무산자의 운동으로 보았다. 즉, “무산자의 신학”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존을 위한 해방이 필요했다. 이들은 해방을 위해서 부르짖었으며 이때 여호와께서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구원시킨다는 해방신학을 믿었다. 이 사건이 출애굽 사건이다.
웨스터만(L.Westerman)은 이를 “축복의 신학”이라고 했다. 처음 선교사들이 가지고 와서 한국에 가르친 신학이 바로 이 신학이었다. 그것은 자기들은 가진 자이고 당시 한국인은 가난한 자들이었기 때문이다. 선교사들이 아프리카에 가서는 예수 믿고 천당 가서 잘 살라 했고 우리에게는 천당 가서 복 받고 잘 살라 했다. 이 결과 우리는 피안적인 도피주의의 망령에 잡혔고 아프리카의 흑인의 땅은 99%가 백인의 땅이 되고 말았다. 민중신학을 못마땅하게 생각한다.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통치 영역이 인간의 삶의 현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두 개의 전승을 하나로 만든 부르지맨(W. Brueggemann)은 소위 샬롬(shalom)의 신학이라고 한다. 무산자들이 해방을 쟁취하면 가진 자들을 숙청하는 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공의와 평화가 이뤄지는 샬롬의 세계가 오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신학에서는 꼭 중보자가 필요하다고 했다. 모세, 예언자들, 예수가 이러한 중보자라 했다. 이제 오늘의 교회 성직자의 위치를 어디에서 찾아야 할까? 권력과 금력을 가진 자들을 위해 부르심을 받은 종들일까? 아니면 가나한고 억눌린 사람들을 위해서 부르심을 받은 종들일까?
교회는 지나간 전통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오늘의 특수성을 이야기해야 한다. 노동자들이 가난한 것은 그들이 잘못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가 태어난 곳이 잘못 되어져 있기 때문임을 알아야 한다. 셋째는 교회가 무산자인 노동자 농민에 의해 육성되고 소중히 여김을 받도록 노력해야 하며 넷째로 교회는 변혁을 소중이 여겨 사회적인 개혁과 발전의 정신을 길러 주어야 한다. 다섯째로 교회는 하나님의 뜻인 공의와 사회 정의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과거의 신학은 가진 자의 신학이었으나 이제는 무산자의 신학을 강조해야 한다. 그래서 양자의 균형이 잡힌 샬롬의 신학이 이루어져 하나님의 나라가 여기에 임하도록 하여야 한다. 아직까지 우리는 가지고 있는 자의 축복이라는 왕권의식에 차있는 보수신학에 젖은 사람들에게 교육을 받았고, 그 그늘에서 안주하려는 안일주의에 빠져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대체의식의 의식화 작업이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중략)
위험 수위가 우리에게 없는 것은 아니다. 첫째는 a scripture, a christian하다가 세속화가 세속주의로 전락하지나 않을까 하는 위험 수위가 있다. 둘째는 폭력화 할 위험 수위도 있다. 국가는 법을 침해 하려는 자에게 권력을 사용하여 질서를 보존할 수 있으나 교회는 일체의 강요나 허다한 압박의 수단을 구사해서는 안 된다. 셋째는 민중이 메시야로 승격되어질 위험 수위이고 넷째는 피렌체의 대열에 꽃다발을 던지거나 합류할 위험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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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등포 산업선교회관 건립 이야기
1960년대 후반기에 태동되어지기 시작한 산업선교회의 회관건축 계획은 왕성한 선교활동의 필요성을 충족하기 위해, 자체 회관건립을 추진할 만큼 산업선교회가 성장하였음을 말해준다. 영등포 산업선교회관 건립을 위한 계획 중에는 산업선교관을 양평동교회 대지위에 연합건물 형식으로 건축하려고 하는 계획이 있었다. 양평동교회 당회는 1970년 5월 중에 많은 논의를 거쳐 당회에서 다음과 같은 결의를 하고 연합 건물을 건축하는데 협력하기로 하였다.
양평동교회는 현재의 교회의 대지 중에서 일부를 산업전도회관의 건물의 부지로 내주기 위해서는 많은 고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정학 목사의 뜻에 따라 당회는 1970년 5월 17일에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허락하기로 결정하고 연합건물을 건축하는데 협력하려 하였다. 1. 본 당회는 영등포지구 산업전도를 위한 연합건물 건축 대지 약 100평을 허락하기로 결의하다. 2. 해 대지의 재산은 연합 건물에 투자하는 형식을 취하되 해 건물의 재산 보호와 관리는 장차 구성되어지는 해 재단 이사회와 해 건물 관리위원회가 작성하는 규약에 따르기로 한다.
위의 자료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정학 목사는 산업선교회관을 양평동교회 내에 건축하려고 할 만큼 남다른 열정이 있었다. 아울러 양평동교회 당회원들도 이정학 목사의 남다른 열정과 소신에 감복하여 연합건물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교회 부지를 내주기로 할 만큼 이정학 목사를 믿고 따랐다. 양평동교회는 100평의 대지를 대고 건축비는 서독 교회가 담당하기로 하고 1971년 4월에 기공하기로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타 교단 위원들의 비협조로 와해되었다. 결국 양평동교회는 1977년에 독자적으로 교회당 건축을 시작했고 영등포산업선교회는 1978년에 산업선교회대로 회관건축을 시작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