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신학원 사태를 통해서 본 언론 역할

                             영남신학대학교 학원 사태를 통해서 본 언론 역할 

아픈만큼 성숙한다.

   
 

영신보도는 예장뉴스가 많은 보도를 했고 반론권 차원에서 C교수의 글과 그 분을 옹호하는 분의 글도 몇 개 올렸다. 한 마디로 문서전쟁이라고 보여진다. 앞으로 어디가 되든지 영신학원 사태와 관련된 자료들을 모아서 백서를 내는 것도 좋다고 본다. 혹자들은 [예장뉴스]가 왜 이렇게 영신문제 보도에 집착하느냐고 핀잔이다. 그러나 언론인으로서 진실이 무엇인지 전할 공적 책임이 있었다. 최근 들어 모 언론이 다른 관점에서 보도를 하고 있는데 반가운 일이다. 누가 되든지 무슨 관점이든지 영신사태가 많이 소개되는 것은 나쁜 것이 아니다.

독자들은 거기에서 사건의 진실을 찾아갈 것이며 언론의 역할도 배우게 되기 때문이다. [예장뉴스]에 대한 비난 중 하나는 한쪽만 옹호한다는 것인데 이는 그 글을 제대로 보았다는 생각이다. 우리는 특정인의 이해를 위하여 글을 쓰지는 않치만  그렇게 보여지는 것은 독자들이 서 있는 자리 때문이다.  독자들은 다양하다. 우리에게 보도의 원칙과 관점이 있듯이 독자들도 자기 원하고 바라보는 관점의 기사를 선호하거나 또 반대한다. 서로 다른 것을 좋아하는 것은 자유다. 이런 다양성이 우리 언론 시장에서는 가장 중요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우리 예장뉴스의 원칙은 정의의 관점이며 약자와 소수자의 처지에서 사건을 바라보자는 것이다.

어느 조직이든지 갈등할 때에 그 조직에서 최고의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늘 문제다. 영신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총장이다. 나는 권용근 총장에게 아무런 감정이나 관심이 없지만 그 분이 총장이기에 언급하는 것이니 너무 섭섭하게 생각하지 마시기를 바란다. 총장에게 국가와 재단이 많은 권한을 주고 예우를 하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분이고 엄중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부패한 사학들이 왜 총장을 실력과 능력있고 지지를 받는 교수들를 선임하기를 좋아하지 않고 친인척이나 맹종하는 허수아비들에게 맡기는지 이번에 알았을 것이다. 총장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많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 사표을 냈어도 수리되지 않으면 징계와 감면, 채용과 해임도 하고 졸업식에서 축사도 한다. 그리고 불리하면 화해와 회복을 한다고 하고 모든 것을 원점으로 돌릴 수 있는 분도 총장이다.  

이러고도 총장이 약자라면 대체 누가 강자란 말인가? 그러나 어떤 결정이든 역사적으로 판단을 받아야 할 것이다. 총장이 어떤 결정을 할 때 이해 당사자들에게 어떤 피해자가 가더라도 그들의 상처와 후유증으로부터 자신의 존엄과 직책을 지키기 위해서는 규정과 원칙을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 면에서 영신사태에 대한 결정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취해야 할 태도와 무책임에 대하여 많이 보았을 것이다. 규정을 무시하거나 벗어난 결정이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고통과 아픔을 주고 큰 일이 되는지를 똑똑히 보았을 것이다. 이번에 영신학원은 많은 시행착오와 오류로 인하여 아픔도 있지만 그에 못지 않게 값지고 귀한 교훈을 얻었을 것이다. 앞으로 이 학생들이 교회의 지도자들이 되었을 때 어떤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일을 해야 하는지 알았을 것이다. 영신의 아픔은 모두를 성숙시켰을 것이다.

기사에 대한 불만은 당연한 일
우리 신문의 보도에 대하여 불만을 갖는 사람들의 입장은 몇 가지인데 첫째는 자기에게 유리하지 않은 내용들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누구에게 유리하라고 기사를 쓰지는 않는데도 말이다. 둘째는 엄정한 중립성과 객관을 져버리고 한 쪽 편을 든다는 것이다. 이 말도 틀리지는 않는다. 그러나 알아야 할 것은 이 논리가 우리의 언론시장과 정치권력이 세뇌시켜 온 문제라는 사실이다. 아직도 언론학에서는 엄정중립 이것을 가르치는 모르지만 잠꼬대 같은 소리다. 이 논리의 출발은 언론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자들이 만든 트릭이다. 즉 정치와 권력의 합작품이다. 언론으로부터 자유하고 싶고 사람들의 눈과 귀로부터 자유하고 싶은 이들이 만든 논리다. 그러나 지금의 언론 환경은 옛날과는 다르다. 일방적인 종이신문에서, 들리는 소리(라디오), TV, 그리고 인터넷과 SNS로 발전되어 왔고 이제는 1인 미디어 시대이다.

그렇다면 왜 기성언론은 그런 그럴듯한 가치중립적인 보도원칙을 강요했을까? 재벌과 권력은 언론시장이 확장되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여과없이 보도되거나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들은 늘 좋은 일을 하며 신사적이며 애국적이라는 이미지를 얻고 싶어했다. 통제되지 않는 언론을 제어하기 위하여 해석(관점) 없는 보도로 대중의 눈과 귀로부터 멀어지고 싶어했다. 당시는 세계적으로도 언론시장이 커지고 언론의 힘이 강화되어 제 3의 권력이라고 불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의 군사독재자들이 한 첫번째 일은 언론 통폐합이었던 처럼 영신은 홈피 자유게시판 폐쇄였다. 신군부는 연합통신사 제도를 두어서 특히 외신 기사를 독자적으로 접근하거나 생산하지 못하게 하였다. 현장에 대한 직접 취재도 보도지침이나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따라서 지금 시민들이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언론관, 객관적이고 중립적이라는 말은 언뜻 들으면 옳은 말 같지만 그것은 우민화의 악의가 담겨져 있는 지침이다.

예을 들어 미국이나 일본에서는 양대 라이벌 언론들이 있는 데 이들은 정치적으로 시장에서 자기 계층을 명확히 가지고 있다. 우리로 치면 조,중,동과 한겨레, 경향, 문화일보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미국은 언론이 특정 정당과 대선후보를 지지할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정당이나 후보를 지지하지 못하게 하고 언론을 공익과 중립지대에 놓았다. 그것은 기득권이나 집권층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렇게 나라마다 역사적 정치적 경험에 따라서 언론시장의 조건과 위상이 다르다는 말이다. 그래서 정치는 늘 언론사 간부들에게 자리를 주고 언론 선배들을 통하여 언론들을 관리한다. 그렇기에 쉽게 언론은 어떠해야 한다는 말은 주관적이 말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구의 눈으로 보는가?
우리는 언론의 기사들을 볼 때 항상 질문해야 한다. 그것은 "이 보도의 관점이 무엇인가?" 이다. 같은 사건에 대한 보도라도 보는 사람의 자리와 입장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 먼저는 기자의 관점이 있을 것이고 그 다음은 데스크다. 또 하나는 그 언론의 소유자다. 아무리 편집권이 독립되었다고 해도 전주를 외면 할 수가 없다. 그것이 대기업 자본이 언론의 자산을 일정 이상 지배할 수 없도록 하는 이유다. 사주의 이해가 언론에 반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돈을 내서 언론을 하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어떤 언론이 골프는 나이 많도록 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운동이라고 한다. 그러면 골프 매니아층과 골프장 개발업자 그리고 관련 시장에 대해서 우호적인 것이 된다. 그런데 다른 언론에서는 골프는 부유층의 사치라고 하는 관점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주고 지지해 주는 언론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직도 한국에서는 사회적인 발언권이 약한 학생이나 주류가 아닌 소수자, 장애인, ‘을’의 위치에 있는 사람들, 성적 소수자들을 대변하는 언론은 극히 적다고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미국에는 허핑턴 포스트(The Huffington Post)라는 인터넷 신문이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데 이는 미국에서 대자본에 귀속된 주류 언론들에 대한 반향이다. 이미 CNN이 기존의 TV들을 누르고 뉴스 분야에서 독점적 역할을 한지 오래지만 이제는 CNN도 손을 들 수밖에 없다.

출근해서 일하는 월급쟁이 기자들은 그들을 이길 수가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좋아하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SNS시대와 1인 미디어시대는 실시간(Live or IP 뉴스) 으로 글을 올린다. 관련 기사를 다시 불러오고 탐사보도와 기획기사로 끝장을 낸다. 그래서 과거 기성 언론들이 누렸던 기득권과 전문성은 무너졌다. 그들의 현장성을 따라 갈 수 없으니 뒷북치기 딱 좋다. 그러자 기성 메이저 미디어들은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기사와 뉴스 서비스의 내용이 아닌 인터넷 신문의 기사 완성도나 문장이나 문법, 색깔 들에 관하여 시비를 건다. 또 한 가지 언론은 가치 중립적이고 팩트만 보도해야 하고 독자는 판단만 하게 해야 한다는 헛소리를 다시 해댄다.

이미 언론시장의 기존 질서가 무너졌는 데도 말이다. 그러나 인터넷 신문의 기자들은 출퇴근 시간이 없다. 어디서나 기사를 생산하고 업그레이드하고 심지어 실시간 뉴스를 생산한다. 그리고 그들은 현장의 증인들이나 사건들과 항상 대화한다. 매체의 재정적 여건이나 속성상 정교한 사진이나 교열, 교정을 할 수는 없기에 현장으로부터의 지원을 받는다. 실상은 현장의 증인들이 기자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제 뉴스는 전문가에 의하여 생산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주체들이 생산해 내는 협동의 산물이다. 이것은 취재원들과의 믿음과 공감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소수의 기자로는 그 일에만 매달릴 수도 또 현장을 원활하게 오고 갈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오류와 기사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은 극복해야 할 과제이다.

언론의 소비자가 주인이 되는 시대
과거의 언론 소비자는 봉이었다. 주는 대로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제는 소비자가 선택하는 시대다. 끊임없는 아줌마들의 불만이 우리상품의 질을 높이는 것처럼, 독자들은 기사에 대하여 불만을 표현해야 한다. 그래야 시장이 형성된다. 우리가 보고 싶지 않은 TV의 채널은 돌리는 것처럼 선택을 해야 한다. 우리는 심지어 ‘찌라시’라는 말도 들었다. 그런 반응은 당연하다. 그래도 볼 수밖에 없는 신문이 진짜 신문이다. 인터넷 신문의 효시인 오마이뉴스에는 독자들이 기자에게 점수를 주고 돈도 기부한다. 나도 기부를 하는 기자가 있는데 그것은 그의 활동을 격려하고 지지하는 최소한의 표시이다. 그런 후견인이 있는 한 그 기자는 독자를 배반하지 못할 것이다.

기자가 소비자에게 다가가는 기사를 만들면 소비자는 그 기자를 통하여 자신의 말과 생각을 표현하도록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 신문은 뉴스를 서비스하지만 우리의 기사만이 최고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기자가 아무런 원칙없이 쓰고 싶은 대로 쓴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래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언론의 기본 원리다. 실명의 거론과 무죄추정의 원칙이다. 그리고 사생활 보호와 약자 보호라는 원칙이다. 사건을 피해자와 소수자들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것은 정의의 관점이다. 그 정의는 추상적이지 않다. 공정이라는 말로 왜곡된 것을 거부하고 누구로부터의 어떤 정의인가가 관건이다. 그것은 ‘Subaltern'(하부구조, 하위 주제, 소외된 하위 계층)이다. 그렇고 그런 기사, 안 해도 되는 보도, 가진 자들, 배운 자들, 힘있는 자들에게 부역하는 얘기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이다.

기사는 기자의 경험과 인식의 한계에 의하여 쓰일 수밖에 없다. 그래도 그가 끝까지 유지해야 하는 것은 자기의 색깔대로 글을 쓰되 그것을 거르는 최소한의 객관성이다. 자기의 관점과 자료를 균형있게 사용하는가?이다. 적어도 판단을 위하여 성실히 서로 다른 주장들을 수용하는가?이다. 그 사건의 진실이 무엇이냐는 것으로 끊임없이 인도를 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독자의 몫이다. 그것을 독자들이 잘 판단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는 것이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 문제는 기자도 인간이기에 겸손과 자기 비움이 있어야 한다. 즉 반론권의 보장이나 반대주장에 대하여 성실히 응답하고 오류나 이의제기에 대하여 수용과 수정을 성실하게 해 주는 것이다.

언론은 진실만을 보도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보도는 진실이 아니라 정보를 주는 것이다. 즉 진실을 찾아가는 길잡이를 하는 것이다. 진실은 보도와 비판 반론을 통하여 진실에 가깝게 다가간다. 비틀즈의 멤버 죤 레넌은 말했다. “당신이 진실에 다가 갈수록 사람들은 당신은 싫어 할 것이다” 라고. 진실은 법정에서 가릴 일이지 기자가 그것까지 다 확인하고 기사를 쓸수는 없다. 또 기사는 자기 독자들만을 위하여 쓰여지는 것은 아니다. 적대자와 반대자, 중립자들도 고려해야 한다. 보도라는 차원을 넘어서서 교훈과 관점을 제공하고 상상과 직관의 세계로 각자 자기들의 일을 합리적으로 하도록 유도하는 것이다. 되어질 일들의 영향과 결과를 예측하고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판단하게 한다. 그리고 누구에게 좋은 것인가를 판단하게 한다. 어떤 일에는 그 일로 가장 이득을 얻는 가자 가장 반동적인 경우가 많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적 효과다. 그래서 언론은 객관적일 수 없다는 것이다. 앞으로 동일한 일과 과정을 거칠 모든 사람들에게는 메시지가 되어야 한다.

기자의 역할에 대하여 영어로 Watchdog이라고도 한다. 독자(주인)를 위한 경비견일 것이다. 그런데 침입자(도둑)를 지키는 개가 침입자를 보면은 짖어야 하는데 그가 먹이를 던져준다고 해서 꼬리를 치거나 고개를 돌린다면 그 개는 보신탕감일 것이다. 독자들은 많은 부분 생업과 자기 일에 바쁘다. 그러나 그들에게도 알 권리는 있다. 바쁜 사람들에게 장황한 얘기로 중언부언 할 것이 아니라 정리하고 축약하고 해석해서 보도해 줘야 한다.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그 개인의 몫이다. 그래서 불만이 있다면 외면하고, 좋다면 돈을 지불해서 그 소리를 보존하거나 육성하는 것이다.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는 말은 사실이다.

   
 

지금 일반 언론도 홍수지만 교계 언론도 각 교단의 기관지, 연합지 등으로 인하여 포화상태다. 그러나 주류 신문들은 아직도 거의가 대형교회 광고에 가시적인 목회 성공자들의 일상과 상업화된 광고물들로 들어차 있다. 그리고 교권주의자들 이사회 총장 노회장 총대들이 동향이 주를 이룬다. 그래서 바닥을 보고 묵살되고 무시된 것을 수면 위로 올려서 사건을 만드는 인터넷 언론들이 주목을 받는 것이다. 인터넷 언론은 작은 회사이고 능동적으로 움직인다. 나름대로의 관점이 없다면 살아남기 힘들다. 광고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물주가 있는 것도 아니다. 독자들의 후원만 기다리기도 어렵다. 그래서 쉽게 자본의 유혹에 넘어갈 수 있는 취약함도 있다. 그러나 그 신문의 색깔과 관점을 지지해주고 격려해주는 이들이 있다면 존재의 의의가 있다.

지금 우리 신문이 한 대형교회로부터 보도 내용으로 명예훼손을 했다는 소송을 당하였다. 나의 주장은 "당신들의 명예는 중요하고 다른 사람들의 명예는 안중에 없냐" 는 것이다. 또 하나 영신학원의 14인 서명 교수 중에서 최초로 탈퇴을 하신 분의 글을 보도한 것에 대하여  표적기사라고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를 당했다. 그 분이 그렇게 공개적으로 말하고 가버린 일에 대하여 비판한 것에 우리가 진영논리에 갇혔다고 하기도 하고 자신의 명예가 훼손되었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시민적 알권리와 공인의 언행이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무엇이 진실인지 한 번 판단을 받아 볼 것이다. 영신사태를 보도한 언론은 처음엔 예장뉴스 외에는 없었다. 지금은 조금 늘었고, 사실 많지 않은 것이 좋을 일이지만 어떤 식으로든  한국 교회개혁의 무풍지대였던 신학교 문제가 수면위로 올라왔다는 것은 큰 의미가 있다.

이 일이 원만하게 끝나기를 원했던 이들은 모든 일이 자기가 원하는 대로만은 가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을 것이다. 그 동안 학생들은 학원사회에서 엄연한 주체임에도 그 위상과 역할이 저평가 되어 왔다. 이번 일로 신학교에서도 일반대학처럼 학생들이 학원의 주체로 자임하고 성장되었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만큼 성숙한 것이다. 총장의 직무와 교수들의 역할에 대해서도 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이사회의 직무와 역할에 대해서도 제대로 된 관점에서 볼 수 있는 기회였다고 본다. 또 영신가족 모두는 이렇게까지 된 것이 최선의 방법이었을까 하는 것도 평가해야 한다. 모두가 자기의 자리에게 선택한 선한 결심과 행동에서 과도한 것은 없었는지 반성할 점은 무엇인지 찾아야 한다.

너무 많은 비용을 지불했다면 문제다.   
영신문제는 교수 문제에서 교수와 총장과 이사회 문제로, 다시 이사회와 총장, 교수와 재학생, 졸업생들의 문제로 그리고 총회의 문제로 확대되어 왔다. 사람들이 하는 일에 갈등이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을 극복한다면 귀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가 너무 크다면 무의미하다.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이 진정한 승리라는 말이 있다. 14인의 서명 교수들이 수적인 우위로 자만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탈한 교수들과의 소통에는 문제가 없었는지 돌아봐야 한다. 총장이 규정과 서명 교수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진행한 C 교수강의 개설에 대한 저항도 꼭 그렇게 밖에는 할 수 없었을까 하는 아쉬움도 있다. 이것은 결국 이사회가 표적이 되었고 전선을 넓힌 것으로 불필요한 대결이 되어 파행으로 가게 했고 원치 않는 불상사가 난 것은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다. 또 소속된 지역노회에서의 교수들에 대한 무관심은 무엇을 말하는 지도 자문해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을 통하여 평소의 인간관계 동역자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를 알아야 하고 교수들은 지역노회의 회원들과 교회와  좀더 긴밀한 관계를 설정해야 할 것이다.

영신학원의 이번 갈등은 어떻게 보면 승자도 패자도 없는 싸움이 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이 대목에서 지도자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새삼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자기 직무에 대하여 고도의 윤리성과 전문성을 담보하지 않은 채 상승하려는 욕구를 가진 모든 이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어찌 되었건 책임과 권한이 많은 이들이 더 고민하고 희생하고 문제를 풀었어야 했다는 말이다. 이 보도로 인하여 개인적으로 마음이 상한 분이 있다면 정중히 사과하고 싶다. 그리고 영신은 반드시 난관을 극복하고 일어서기를 바란다. 그러나 우리신문은 영신 대하여 어떤 방향으로든 공헌을 했다고 자부한다.

학생들의 순수함 그리고 대견함도 보았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의 자리와 처지가 다른 신학부와 일반학과, 신대원과 목연, 대학원, 만학도들이 일체가 되어 같은 주제에 대해 마음과 생각을 소통한 것은 소중한 경험이다. 신앙의 토대 위에서 진실과 정의에 대한 욕구는 제대로 배웠다는 생각이다. 그리고 영신 동문들의 스승과 학교에 대한 사랑도 돋보였고 신실한 용기도 귀한 자산이다. 어느 학교에서도 본 적 없는 애교심과 의리 그리고 패기를 보았다. 사건의 결과가 무엇이든 영신학생들이 자기 학원을 사랑하는 마음을 보였다는 것은 귀한 자산이다. 그리고 서명 교수들의 의연함은 학생들의 존경심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이런 일은 한번으로 족할 것이다. 빨리 학생과 사제 사이의, 그리고 교수들 사이의 갈등이 해소되어 모든 것이 회복되기를 바란다. 신입생도 더 들어오고 석.박사과정 학생들도 학교를 떠나지 말고 재학생들도 모두 등록도 하고 이사회와 총장이 선정을 베풀고 모든 징계를 완화하기를 기도한다. 총회 신학교육부와 조사위도 모든 것을 소상히 총회에 보고하고 발표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고 회복 되기를 바란다. 아픈 만큼 성숙해진다는 평범한 이야기를 믿고 싶다. 많은 권한을 가진 이들이 마음을 열고 우리 총회의 주제인 "치유와 화해와 생명"(치-화-생)을 실천을 하는 신학교가 된다면 감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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