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장민중교회선교연합 20년 역사(1983-2002)”

                 예장민중교회 선교연합의 선교역사

황홍렬목사, “예장민중교회선교연합 20년 역사(1983-2002)” 

일하는 예수회 20주년 기념출간Ⅱ-, 2004년, 일한는예수회.

산업선교나 빈민선교가 70년대 후반에 이르러 유신정권의 가혹한 탄압으로 인해 교회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실제로 민중선교 참여자들이 반공이데올로기에 의해 정권으로부터 탄압을 받았을 때 그들을 신학적으로 실제로 방어해준 이들은 한국교회였다. 그런데 70년대 민중선교의 중요한 특징이 민중의 발견이었는데, 이것은 어떤 특정 이데올로기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여기에 큰 변화를 초래한 것이 80년 광주민중항쟁이다.
광주민중항쟁을 통해 80년대 민중운동 일반은 70년대와는 달리 마르크스주의 또는 사회주의라는 특정 이데올로기와 긴밀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바로 이런 배경을 통해 80년대 민중선교는 주로 민중교회를 통해 수행되었다. 민중교회라함은 공단, 빈민 지역에 민중중심으로 교회를 지향하는 교회로서 민주화, 통일, 교회갱신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 나라 구현을 목표로 하고, 1988년에 창립된 한국민중교회 운동연합에 소속된 교회를 일컫는데, 기장, 감리교, 예장 세 교단이 주축을 이루었고 한 민중교회 교인 규모는 20-40명 정도다. 황홍렬목사의 학위논문을 중심으로 각 시기별로 사회적 상황을 살펴보고 거기에 대응하여 펼친 활동과 각 시기의 의의와 한계를 다루도록 한다. 그러고 나서 변화된 여건에서 민중선교가 주변 화된 이유, 또 변화된 상황 속에서 예민선의 과제와 전망은 다음에 살펴보고자 한다.

1. 형성기(1980-1987)
1) 시대적 배경
민주화를 향한 국민의 염원이 전두환의 쿠데타로 좌절되고 80년 5월의 광주민중항쟁으로 군부정권이 들어섰다. 이 정권은 유신정권 못지않게 강압적으로 민중을 다스리려 했다.
광주민중항쟁은 80년대 민주화운동이 70년대 민주화운동과 큰 차이를 갖게 했다. 미군의 존재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으로 인해 분단사회에서 변혁의 이데올로기로서 마르크스주의가 부활했다. 수천 명의 대학생이 학업을 포기하고 공장에 취업해서 노동/ 민중운동을 통한 사회변혁을 이루고자 했다. 이때에 세워진 민중교회는 특히 80년대 초에 노동운동을 하고 노동조합을 조직하는 유일한 공간으로서 역할을 했다.

2) 민중교회
(1) 민중교회의 시작
빈민선교 지역 중 성남에서 주민 교회가 1973년에 세워지고 공단지역에서 산업선교로부터 발전해서 부평에 백마교회가 1976년에 세워졌다. 이런 교회들은 11시간 운영하는 탁아소나 주일 진료, 노동자 모임, 신용협동조합, 독서 모임을 했다. 이런 교회들이 후에 민중교회운동연합을 조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민중교회들이 80년대 이후 민중선교를 독점했다는 것은 아니다.
중앙일보는 1986년에 현장교회운동을 특집으로 다루었다. 여기서 현장교회는 개신교 민중교회뿐 아니라 가톨릭과 독립적인 탁아소(신앙인에 의해 운영되는)를 포함했다. 그 신문은 현장교회 목회자들이 주민들과 비슷한 의복을 입고, 비슷한 집에 살며, 비슷한 음식을 먹으며 자신들도 실수 할 수 있고 빈민들의 비판을 받아들이고 그들로부터 서로 배울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공단지역에서서는 현장교회들은 등산, 노래 부르기, 레크레이션, 노동자 교실 들을 노동자들에게 제시하며 노동자들이 설교에도 깊이 참여함으로써 성서가 민중의 책임을 깨닫게 하고 있다고 했다. 이처럼 민중교회가 다양한 방식으로 진행되었지만 개신교 민중교회는 큰 비중을 차지할 뿐만 아니라 80년대 이데올로기 시대에 대응하는 교회 모델과 민중선교의 전형을 창출하고자 노력했기 때문에, 또 70년대 민중선교의 상당부분을 계승하기 때문에 여기서는 민중교회를, 특히 예민선을 중심으로 한 민중선교를 다루고자 한다.
민중교회는 1984년 이후 숫자가 급증했다. 1983년부터 예장 민중교회 목회자 지원자들이 산업선교에 참여했던 목회자들에 의해 훈련을 받기 시작했다. 여기서는 이 훈련과정을 중시해서 민중교회의 기점을 1983년으로 본다. 민중교회의 출발은 교단별로 차이가 있다. 기장은 주로 유신 정권 때에 학생운동으로 인해 투옥의 경험이 있는 목회자들이 핵심을 이뤘다. 그들은 1985년에 한국민중교회선교협의회를 조직했다가 1986년에 한국기독교장로회 민중교회운동협의회로 개칭했다.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이전에 기독청년연맹, 공장, 기독청년운동, 도시빈민선교 등 여러 선교의 장에서 활동을 했었다.

예장의 경우 60, 70년대 민중선교 참여자들이 민중교회 목회자 지원자들을 훈련시켰는데 1983년에 2명, 84년에 4명이 훈련을 받았다. 처음 두 훈련생은 산업선교 실무자로 훈련받았다. 두 번째 훈련생들은 훈련 내용은 비슷했지만 그들의 과제는 노동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1985년 훈련받은 목회자들 중심으로 예장노동선교협의회를 조직했다. 1988년에 훈련과정없이 노동교회를 하는 목회자들과 함께 예장노동목회자연합을 조직했다. 1989년에 빈민선교에 참여하는 목회자들이 예장도시빈민선교협의회를 만들었다. 감리교의 경우 민중교회를 시작하는 두 유형이 있는데 하나는 산업선교에서 민중교회로의 전환이고 다른 하나는 목회자의 결심에 의해 일반교회로부터 민중교회로의 전환이다.

(2) 민중교회 선교활동
선교활동 소개 전에 예배와 성서연구의 특징을 간단히 살펴보면, 평상시 예배는 다른 교회들보다 덜 강조하지만(심지어는 노동집회나 시위현장 참여로 예배를 대치), 특별예배(광주항쟁기념예배, 전태일 기념예배)는 상당히 강조되었다. 설교는 목회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때로 복음서를 읽고 목회자와 평신도 사이에 복음대화를 함으로써 설교가 대치되기도 하였다. 복음대화는 주로 수요일 저녁이나 주일 오후의 성서연구에서 사용되었다. 예배 후 공동식사를 밥상공동체로 부르고 식탁교제를 중요시 했다. 예배의 일부로서 여겨지고 또 모든 교인들이 공동으로 준비하고 설거지도 나눠했다.

민중교회의 구성상 특징은 목회자와 평신도 이외에 실무자가 있다는 점이다. 실무자란 민중선교 프로그램을 담당하는 자로 상대적으로 교회 내에서 발언권이 큰 편이다. 그러나 실무자의 신앙적 정체성이나 목회자와의 관계는 대체적으로 잘 풀리지 않았던 문제였다. 그러나 실무자의 존재는 민중교회가 얼마나 선교에 주력하는 교회인지를 가늠할 수 있게 한다.
선교 프로그램 활동은 주로 네 가지 종류로 구분된다. 교육 프로그램은 노동자와 지역 주민을 위한 프로그램으로 구분된다. 노동자 프로그램은 야학을 중심으로 주로 수개월 동안 진행된다. 과목은 한글, 역사, 사회, 상식, 한자, 사회적 상황 등이다. 그리고 문화교실에서는 국악기 배우기, 노래 부르기, 기타교실 등이 있다. 교사는 대학생, 대학생출신 노동자, 야학과정을 수료한 노동자들이었다. 지역주민을 위한 교육은 상대적으로 짧은 기간 동안 제공되는데 과목은 한글, 시사, 노동, 건강 등을 다룬다. 한글교실(어머니교실)은 한글을 깨우칠 뿐만 아니라 글을 통해 자신의 인생과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민중의식을 갖게 한다. 시사교실을 통해 주민들은 사회적 현실에 대해 이해하게 된다.

노동교실에서는 노동법, 임금문제, 산업재해 등을 다룬다. 건강교실의 목표는 질병예방에 있다. 주민권익을 위한 프로그램은 탁아소, 공부방, 진료가 대표적이었다. 맞벌이 부부를 위해서는 탁아소가 필수적인데도 80년대만 해도 대부분 지역에 탁아소가 없었다. 또 빈민지역의 경우 주민 절반은 방 한 칸에 살기 때문에 어린이들의 공부방이 없었고 부모가 공부를 도와 줄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이런 어린이들에게 공부할 공간을 제공하고 교사가 학습, 인격형성과 공동체 훈련을 지도하는 것이 공부방이다. 병원에 가기 어려운 주민들을 위해 교회에서 의사, 간호사들이 무료로 진료하고 약값만 실비로 제공하는 주말진료 프로그램이 있었다. 양의보다도 한방이 인기가 있었다. 민중교회들이 대부분 비좁고 시설이 낡았지만 이 시기에는 이런 활동을 다른 곳에서는 찾기 어려웠기 때문에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일부 독립적인 탁아소나 소수의 독립적인 공부방이 있었다). 또 추석이나 설날에는 주민잔치를 열기도 했다. 마지막으로 전국적 단위나 정치적 차원 또는 에큐메니칼 차원에서의 예언자적 선교활동이 있었다. 일반 민중운동을 지원하거나 군부정권에 대해 투쟁하거나 교회갱신을 위해 행동하는 것으로 기도회, 금식 기도회및 농성, 가두투쟁에 참여, 주요 이슈에 대한 성명서 발표, 그리고 민정당사나 전경련에 항의 방문하는 정치적 행동으로 지역민중교회운동연합이나 교단민중교회운동연합 뒤에는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 등이 주체가 되었다.
이 시기의 민중교회의 중요한 역할은 노동운동의 외곽 역할이었다. 1983년 이후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이 누구러들기 시작했지만 노동자에 대한 교육이나 노동조합의 결성은 거의 민중교회 바깥에서는 생각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민중교회는 평일에는 야학이나 각종 모임 때문에 붐비다가 주일에는 교인이 별로 없는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그러나 민중과 더불어 사록 함께 고난을 받다보면 조만간 민중이 교회로 자발적으로 찾아들어 올 것이라고 예상했다(낙관주의), 그러나 이런 예상이 잘못된 것임을 확인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에 대한 민중교회의 대처였다.

의의로는 첫째, 80년대 민중진영과 반민중 진영 사이의 첨예한 대립이 있었는데 민중교회운동은 민중운동에 대한 기독교적 대응이라는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둘째, 미국문화와 자본주의적 가치와 반공 이데올로기를 수용한 기성 교회에 대한 반대라는 점이다. 셋째, 고문치사, 성고문, 복지예산 전용들에 관련된 기독교인들과는 대조적으로 교회 갱신의 한 사례를 보여줬다. 넷째 목회자 중심적인 선교기구 중심적인 기독교운동을 극복하려 했다. 다섯째, 민중교회는 소속된 민중교인들이나 민중선교 프로그램을 통해 지역노동운동에 기여했다. 여섯째, 기성교회에 비판적인 진보적 기독청년들로 하여금 민중교회를 통해 민중선교에 참여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반 정도의 민중교회가 이시기에 설립되었다.

2. 발전기(1988-1992)
1) 시대적 배경
87년 6월 항쟁은 대통령 직접 선거를 실현시켰지만 야권의 분열로 노태우정권이 들어섰다. 노태우 정권은 ‘두 국민 전략’을 통해 민중과 중간층으로서의 시민을 분리시키고 시민에 대해서는 유연성을 보인 반면 민중의 저항에 대해서는 가혹하게 탄압했다. 민중운동은 변화된 사회 여건에 적응하지 못하고 경직된 자세로 노 정권에 투쟁했을 뿐만 아니라 시민운동진영과도 연대나 협력보다는 경쟁상대로 여겼다. 시민운동 역시 민중진영과 반목 대립했다. 한편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는 민중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를 무너뜨렸다.

2) 형식적 발전 :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의 창립, 교단 민교와 지역민교 확장
87년 유월항쟁이후 민중운동 부문이 급속히 발전했다. 민중교회운동도 88년 7월에 한국민중교회운동연합(한민연)을 창립함으로 구심점을 갖게 되었다. 한민연은 자주, 민주, 통일과 교회갱신을 주요 목표로 해서 민중교회 성장과 지역 민교의 강화의 과제를 가지고 있었다. 1991년 한민연은 전국적으로 15개의 지역민교와 106개의 민중교회와 약 4,000명의 교인들로 구성되어 있다.

기장, 예장, 감리교는 각각 교단 민중교회운동연합(교단민교)을 조직하였다. 지역 민교 사이에 차이가 있는 것처럼 교단 민교사이에도 역량이나 규모에 차이가 있다. 감리교는 1992년에 조직되었지만 1993년에 해체되었다. 예장의 경우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것은 목회자 훈련과정 때문이었다. 1991년에 예장노동목회자연합과 예장도시빈민선교협의회가 연합하여 예장도시민중교회목회자연합을 조직했다. 기장은 기장민중교회운동협의회에서 전국규모로 조직을 확대하면서 기장민중교회운동연합이라고 개칭했다.

3) 실제적인 일
대부분 민중교회는 이 시기에 정치로부터 목회로, 운동의 관점으로부터 교회론의 관점으로 지향점 또는 우선권을 변경했다. 90년대 초에는 대분분의 목회자들이 신앙훈련과 목회를 강조했다. 그러나 민중교회는 수적 정체와 재정적 어려움에 직면했다. 이런 속에서 민중교회의 구조적인 문제는 목회자가 목회에 집중하려 했지만 지역사회와 민중교회운동으로부터 과동한 요구를 받기 때문에 목회에 집중이 어려웠고, 교인들은 대부분 초신자 20대, 30대의 20-40명으로 구성된 작은 교회이며, 실무자 상당수는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이어서 민중선교를 통해 만난 민중을 교회로 인도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런 구조적 문제는 민중교회 자신에게서 유래하기 때문에 극복하기가 쉽지 않았다. 교인들은 이 문제와 관련해 공장에서 노동문제, 투쟁, 임금 문제 등에 대해 들어왔는데 주일날 교회에서 똑같은 문제를 듣는 것은 피곤하다고 하며, 변화된 시기에 목회자들의 자기이해 부족과 잘못된 관성으로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시민운동의 역할이나 이것과의 연대에 대해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거나 실제로 연대를 잘 이루지 못했다.

한민연과 지역민교는 민중운동과 기독교운동에 기여했다. ‘냉전종식’이후 민중운동 활동가대부분이 민중현장을 떠나 정당이나 화이트칼라 노조나 시민운동으로 장을 옮겨 민중교회 목회자 외에는 현장에 남은 자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민중교회는 큰 기여를 했다.
민중선교 프로그램 중 일부(탁아소와 공부방)는 제도화되어 국가의 사회복지 제도로 반영되었다. 일부 민중교회는 환경운동을 통해 시민운동에 기여하기도 했다.

3. 변형기(1993-1997)
1) 시대적 배경
동구권 사회주의의 붕괴도 민중운동 진영에는 충격이었지만 ‘문민정부’의 등장은 더 큰 충격을 주었다. 이로써 민중운동은 자신의 이데올로기적 근거뿐만 아니라 사회학적 근거도 상실했다. 대통령선거에서의 계속되는 패배로 대부분의 민중운동 활동가들이 좌절하고 민중현장을 떠나 화이트칼라 노조나 정치의 장이나 시민운동의 장에서 활동했다. 거의 유일하게 민중 현장에 남은 자들이 민중교회였다. 민중교회 목회자들은 신앙의 정체성에대한 대안과 ‘민중’에대한 보다 깊은 이해와 실천적 대안을 제기할 것을 요청 받았다.

2) 위기와 대응
‘냉전 종식’과 ‘문민정부’의 등장은 90년대 민중운동의 이데올로기적 근거와 사회적 기반을 무너뜨렸다. 80년대의 민중선교는 내용과 관계없이 도덕적 우위나 사회적 지지를 받았던 데 반해 90년대 민중선교는 불필요하거나 시대에 뒤진 것처럼 보였다.
1995년에 한민연은 민중교회 희년선언을 발표했는데 여기에서 민중의 외연이 확대된 것을 알 수 있다. 민중은 노동자, 농민, 빈민 뿐 아니라 장애인, 여성, 양심수, 외국인 노동자까지 확대되었다. 지역 민교는 인천지역외에는 거의 해체되거나 무력화되었다.

3) 민중선교의 다양화
변형기의 특징은 민중교회운동의 구심력의 약화와 원심력의 강화다. 조직적, 구심점이 약화되면서 상대적으로 개교회의 다양한 활동이 펼쳐졌다.
민교목회자 훈련 경험의 확산, 산업선교의 확산, 주민선교의 변화, 여성민중선교, 도시민중과 농촌민중 사이의 연대와 생명선교, 해외선교사 파송 등이 있다.

구로민교 때문에 노동운동과 이데올로기 측면을 강조해 왔던 새터교회는 여성민중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활동에 주력하고 있다. 작은교회는 노동선교에서 지역사회 선교로, 다시 생명선교로 강조점이 바뀌어왔다. 유기농직거래를 실시하다가 유통과 교육, 생산을 통합시켜야 함을 깨닫고 도시선교와 농촌선교를 연결시켰다. 빈들 교회 역시 생명선교의 중요성을 깨달아 ‘작은자’(한부모 자녀, 장애인, 독거노인, 창녀, 실직자, 전과자, 일용노동자)들이 자선의 대상이 아니라 유기 농장과 생태마을 건설에 앞장서서 공동으로 일하고 살며 독립적인 생산 공동체가 되고 도시에는 기독교인과 시민으로 구성된 소비자 공동체를 만들어 유기농, 생태 마을 생산물을 소비함으로써 작은자 공동체를 지원하게 하려하고 있다. 이들 교회를 통해 민중의 외연이 확대될 뿐 아니라 생명 지향적 삶, 사고방식의 전환을 엿볼 수 있다.

4) 민중선교 다양화의 이유와 의의
동구권 사회주의 붕괴와 ‘문민정부’의 등장이 민교운동의 이데올로기적, 사회학적 근거를 무너뜨렸음은 이미 위에서 언급했다. 또 지역성이 변화되어 해당 민교에 큰 변화가 불가피 해졌고 지방자치제의 실시는 민교에 새로운 도전과 과제를 제시했다. 민중교회가 80년대에는 20, 30대 민중과 민중지향적인 지식인들로 구성되었던데 반해 90년대에는 30, 40대 민중지향적인 지식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민중선교의 분화로 민중선교의 다양화는 그동안 진행해왔던 민중선교를 심황, 발전, 전문화 시킨 것이다. 둘째, 이것은 시민운동이나 영성이나 기존 교회의 활동들을 받아들임으로써 가능했다. 셋째, 기독교 신앙의 정체성을 강조하고 동시에 각 민중교회의 한계를 받아들임으로써 다양화가 가능했다. 넷째 목회자들은 ‘생명’이 ‘민중’보다 포괄적임을 받아들였다.

4. 전문화의 시기(1998-2002)
1) 시대적 배경
50년만의 평화적 정권교체가 이루어졌지만 경제 위기가 함께 닥쳐 국제통화기금관리체제로 들어가면서 새 정부는 구제도, 질서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체제를 수립하기 보다는 경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오히려 과거의 질서를 이용하거나(관료체제, 재벌체제) 그것을 개혁하는데 한계를 보였다. 그래서 노동자, 농민, 빈민, 여성, 장애인 등을 희생시키는 해고 중심의 ‘구조조정’으로 경제위기를 대처해가다 보니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더 심화되어 중산층이 붕괴되고, 20:80의 양극화 사회를 낳게 되었다. 이런 양극화의 이면에는 지구화, 지구자본주의라는 전대미문의 세계경제 질서가 있다. 지구 자본주의의 두 가지 특징은 초국적 자본이라는 것(전세계 자본시장의 95-98% 장악)인데 이것이 신자유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런데 이것이 1999년 11월- 12월 시애틀에서 도전을 받고 이어서 전지구적으로 계속해서 도전을 받고 있다. 크게 보아서 중간층중심의 시민운동이나 민중운동은 지구자본주의에 대항하는 연대세력을 지역, 국가, 대륙, 지구적 차원에서 어떻게 건설, 연대하느냐 하는 것이 그 운동의 내용(민중, 시민, 여성, 환경, 지역 등)과 관계없이 큰 관건이다. 그리고 국제통화기금 관리 체제 이후 급증한 실업자와 노숙인을위한 각종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직장에서 해고되었다가 임시직, 계약직, 비정규직으로 재입사하는 경우가 급증하고 있다.

2) 예민선의 활동
전국적으로 노숙인, 실직인을 위한 단체가 116군데가 되는데 실제로 활동을 제대로 하는 곳은 민중교회들이다. 노숙인을 위한 쉼터(영등포산선, 안양 청지기교회, 수원한벗교회, 대전새나루교회, 대구 구민교회, 전주 나실교회, 부산 새날교회) 여성전용쉼터(성수삼일교회)와 실직자를 위한 자활센터(대구구민교회)가 있다. 전국적으로 7군데의 노동상담소가 있다. 외국인/ 이주노동자 선교활동을 하는 곳도 4군데 있다. 장애인 선교를 전담하는 곳도 있다. 영등포산업선교회는 50년 산업선교를 경험으로 아시아의 교회와 나누고자 아시아 URM 디아코니아 훈련원을 세워 아시아 도시농어촌 선교 실무자들을 지속적으로 훈련시켜 지도자로 양성하고 있다.

한편 노동자, 빈민에 주목했던 과거와 달리 생태계의 위기와 관련해서 생명에 대한 관심 속에서 농촌의 생산공동체 속에서 대안적 목회, 대안적 선교를 찾으려는 흐름도 있다. 그래서 과거 민중선교에 주력했던 목회자들이 농촌으로 가서 직접 농사를 짓거나, 도시의 노동자(소비자)와 농촌의 농민(생산자)을 연대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이들의 관심사는 생산 공동체, 생활 공동체의 영성이다.

5. 분화의 시기(2003-2010)
성수삼일교회는 1983년 10월 셋째 주에 유재무목사가 훈련을 받고 시작했다.
내일의집(청소년 노동자 선교) 야학을 시작
1988년 3월 정태효목사 훈련받고 부임
1988년 9월 슬기아이방 개원(지역탁아소연합과 동부지역 어머니대회를 통해 영유아보육법 따내는 역할 함께 함)
1990년 5월 우리들공부방 개원(서울공부방 연합회와 지역아동센터로 전환하는 운동함께)
1997년 여성교실(한글, 컴퓨터, 키타반등)
1998년 9월 성수삼일교회내일의집(모자노숙인 쉼터) 시작
1998년 11월 실직여성가장 지원사업 시작(한국여성단체연합 동부지역 창구로 400여 성동 구, 광진구, 중랑구 여성실직가장 만남) -99년까지 10만원 전달체계함.
2001년 녹색나눔터 운영시작
2006년 예나의 집 운영시작(위기여성센터) – 중장기 쉼터로 예정
2007년 생명살림터 시작
2008년 우리들공부방 지역아동센터 독립해 나감(8,000만원 정부 전세지원 받음)

성수교회 역사
197년대 전태일씨의 분신이후 한국교회는 노동현장에서 생존권을 지키는 민중의 울부짓음에 귀를 기울여 ‘수도권도시산업선교회’를 결성한 후 각 노동현장(동일방직, YH무역 등)을 지원하면서 전략적 지역센타를 세우게 되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산업선교회’가 임흥기목사(산업선교회 전 총무)를 성수동에 파송해 ‘성수산업선교센터 – 성수교회’를 세웠다. 1984년 8월 19일 이후 이춘섭목사(1986년 12월)와 김현기목사(2001.12)가 현재까지있다.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삶속으로 교회가 들어가기로 하고 세워진 성수교회는 야학(새앎터교실)을 통해 노동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신 고귀한 선물이요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고유한 가치임을 당시 노동자들에게 인식시키는 교육문화활동을 했다.

1987년 이후 민주화운동이 확장되면서 자연스럽게 노동운동의 세력과 공간이 넓혀졌고, 이제 더 이상 합법적 공간으로서 교회를 등에 업고 운동하지 않아도 되는 조직적 기반과 자생력이 우리사회 저변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는데 문제는 그들의 자녀문제인 탁아문제였다.
당시 불의의 화재로 아이들이 생명을 잃기도 하면서 사회적 큰 충격으로 여성단체와 교회가 나서서 탁아문제를 사회와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적 틀을 마련하는 지역탁아소연합회가 꾸려졌고 이 단체와 결합하여 개나리동산 어린이집- 1987년 3얼30일 개원해서 현재까지 하고 있다.
1989년 7월 미취학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탁아에서 초등학교로 보내는 아이들을 방과후 동안에 돌봐줄 사람이 없어 어깨동무공부방을 시작했다.

1984년 한국산업선교회에서 성수교회 세움(임흥기목사)
1984년 12월2일 새앎터교실(노동자 야간학교) 1기 개설
1985년 1월 노동청년회 조직
1986년 12월 이춘섭목사 취임
1987년 4월 개나리동산 탁아소 개원
1989년 7월 어깨동무공부방 개설 입학식
2001년 12월 김현기목사 부임해서 현재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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