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과 이상백

                                        김인주의 "역사속의 오늘"

 1948년 7월 29일 런던에서 올림픽이 열렸다. 아직 대한민국은 아직 건국전으로 출범하지 못한 상태였지만, 올림픽은 출전했다.  동계올림픽이 앞서 겨울에 생모리츠에서 미리 동계대회를 치렀고, 여기에 한국 선수가 소수나마 참가했으니, 첫 올림픽은 아닌 셈이다. 금메달은 없었지만, 성적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인도에 이어서 아시아 2위라는 결과를 얻었다. 이상백(1904-1966)은 막판에야 임원으로 이름이 오르는 처지였지만, 한국체육계의 실세였다. 184cm의 당당한 체구의 만능스포츠맨으로서, 아직도 대학농구의 한일교류전은 그의 이름을 붙이고 있다.

   
           고   이상백

대구에서 부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독립군 이상정, 시인 이상화가 그의 형들이다. 와세다대학 시절 농구부를 창설하여 주축이 된 그는, 미국 원정팀을 조직할 정도로, 발군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일본농구협회의 상무, 일본체육회의 전무로서 1936년 베를린 올림픽의 실무자로 국제무대에서 활약한다. 브런디지와 쌓은 친분은 해방 후에 한국이 올림픽에 참가하는 결정적인 인맥이 되었다. 1944년 올림픽개최지로 도쿄가 선정될 정도로 그의 역할은 눈부신 것이었다. 전쟁으로 무산된 게임이 되었고, 종전 이후에 전범국가들은 올림픽 참가가 금지되는 벌칙을 받아야 했다.

해방 이후, 친일파라는 의혹이 있었지만, 그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여운형을 지지하다가 그의 피살이후, 정계를 기웃거리는 일은 그만 두었다. 서울대학교 사회학과의 창설교수로도 큰 몫을 감당했다. 여말선초의 국사 연구에도 좋은 실적을 보였다. 현재 한국 지식인들의 정도전에 관한 이해는 그의 연구에서 비롯된다. 이방원과 대립하는 삼봉의 정치사상이 귀족적 공화제에 가깝다는 주장이다. 해방 이후 이승만의 독주를 막으려는 당시 지식인, 정치인들의 생각이 투영된 것이라 본다. 유진오가 기초한 헌법도 내각책임제였으나, 우남의 고집으로 대통령제로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아직도 제왕적 대통령제의 굴레에서 벗어나자 못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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