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하나가 되려면”

"우리 하나가 되려면"

한반도 통일에 대한 청춘들의 마음을 헤집을 수 있을까? 

/ 이동춘 목사(비젼교회, 장신대 겸임교수) 

   
 

다음 원고는 이동춘 목사가 지난 3월 21일 장신대 학부 춘계사경회 전체 특강 내용이다. 원 글은 현장감 있는 내용이었으나 지면상 원고형태로 편집했음을 알려드린다. 이 목사는 그동안 장신대를 졸업하고 기독윤리를 전공하여 학위를 한 바 있으며 “통일문제”에 대하여 연구와 강의를 하고 있으며 안양지역의 비젼교회를 담임하고 있기도 하다.

우리 대부분은 ‘하나’가 돼 본 적은 있으나, 그 ‘하나됨’의 지속성에는 자신이 없습니다. 예컨대, 연애가 결혼으로 가지 못하고, 결혼이 유지되지 못하고, 결혼 생활이 형식적이 되는 것을 경험하는 한 하나가 된다는 것에 대해 자신이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인류의 역사 중 일부분만 스캐닝 해봐도 알 수 있습니다. 결합과 결별, 통합과 분열, 일치와 분리가 반복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 학교도 ‘통합’ 지향적 태도를 가지고 있으나 현실은 녹녹치 않습니다. 이러한 현실이 있는데 특강 제목이 ‘우리가 하나가 되려면’이니 제가 내놓을 말에 고민이 많습니다. 혹시 하나가 되려면, 하나를 뺄까요? 그러면 금(金)은 될 수 있겠네요. 

총학에서 제게 주신 ‘전체 특강 기획의도’를 보시면 여러분은 저를 동정하시게 될 것입니다. 「기획배경: 우리의 젊은 세대는 더 이상 통일을 필수적인 민족의 과업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더욱이 북한의 핵 도발과 그를 통한 주변 열강들의 압박은 우리 세대로 하여금 북한을 배척하는 감정의 골이 깊어지게 만든다. 따라서 통일을 바라보는 우리 세대의 굴절된 시각을 바로잡고 우리에게 통일이 왜 필요한지, 또 남북한의 관계가 가속화되어 변화하는 이때에 북한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목표: 급박하게 다가오는 통일의 필요성을 알고 남북의 평화적 통일이 남북한을 넘어 세계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 안다. 또한 급변하는 남북한의 관계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취해야 할 평화적 자세에 대해 알고 취할 수 있다.」 「기대효과: 1. 통일 세대로서 통일을 마주하는 긍정적 태도를 갖는다. 2. 남북한의 관계와, 열강이 보이는 여러 제재를 보는 그리스도인의 성서적 자세를 갖는다.」 

기획배경, 목표, 기대효과… 어마무시하지 않습니까? 특히 이 강의를 듣는 분들이 통일을 민족의 필수적 과업으로 생각하지 않는 세대라면서 이들에게 통일에 대한 긍정적인 태도를 갖도록 강의하라고 하시지, 더욱이 이 강의를 듣는 젊은 세대를 아예 ‘통일 세대’라고 규정함으로 강의자가 강의에 성공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압력을 행사하시지… 그러니 제가 얼마나 고민이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이 고민들을 한방에 날려줄 사건이 생겼습니다. 평창동계올림픽이 성공리에 끝난 것입니다. 폭망 올림픽이 될 수도 있다는 염려를 불식시키고 성공 올림픽으로 더욱이 평화 올림픽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무엇보다 전세계가 주목하고 찬사를 보낸 것은 북한의 참가였고,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단일팀이었습니다. 종전(終戰)이 아닌 정전(停戰) 상태에 있는 분단국가에서, 그것도 최근까지 북한의 핵무기 실험으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되었기에 이런 지역에서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을지에 대한 세계인들의 염려가 컸습니다. 심지어 여러 나라에서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재고하고 있다는 소식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북한의 참가, 남북단일팀의 구성, 북한 예술단의 공연과 응원단의 참가, 북한 고위급의 방남 등과 같은 것들로 인해 불안과 염려는 불식 됐고, 평창동계올림픽은 화해와 평화의 분위기 속에 모두가 인정하듯 성공리에 끝났습니다. 

그런데 이 보다 더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4월 중 ‘남북/북남 정상회담’ 개최와 5월 중 ‘북미/미북 정상회담’ 개최가 공언(公言)(확정은 아닌)된 것입니다. 남북/북남 정상회담도 핫뉴스이지만 북미/미북 정상회담은 세계적인 뉴스가 되어있습니다. 남북/북남 정상회담은 이미 두 차례가 있었지만, 북미/미북 정상회담은 처음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미국에 의해 북한비핵화가 주장되고 이에 대한 압박으로 경제를 중심으로 한 각종 제재가 진행되고 있는 시점에서 비핵화를 수용할 수 있다고 한 북한의 전향적 태도 변화로 인한 북미/미북 정상회담이기 때문입니다. 전세계는 유일한 분단국가인 한반도 내에서 일고 있는 통일과 평화의 급행보(急行步)에 온 시선을 쏟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이 오늘 여러분 앞에 강의할 용기를 얻게 했습니다. ‘이것이 통일입니다!’ ‘이것이 하나가 되는 방법입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확신을 갖게 했습니다. 이제 진짜 수다를 시작하겠습니다. 

■ 통일(統一), 이 말은 누군가에게는 기대로 인한 떨림을 주지만,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을 줍니다. ‘같은 민족인데 당연히 통일이 되어야지요!’라는 분들에게 통일은 늘 흥분으로 인한 떨림이겠지만, ‘통일, 꼭 해야 하나요? 그냥 이대로 사는 것이 편할 것 같아요.’라는 분들에게 통일은 불편함 그 자체일 것입니다. 

통일(unification or reunification), 어떤 분들은 이 말이 나올 때마다 ‘힘’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어떤 분들은 ‘화해’의 필요성을 강조합니다. 북한은 악한 무리들이기 때문에 힘으로 제압하지 않으면 남한이 먹혀 적화(赤化)된다며 힘의 필요성을 강조하십니다. 반면에 화해를 강조하시는 분들은 힘의 사용은 또 다른 힘의 사용을 낳는다는 힘의 폭력성을 역설하십니다. 

단순 이분법으로 설명을 드리기는 했지만, 이것은 현재 대한민국에서 통일을 이해하는 대표적인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왜/어떻게 이런 상반된 이해가 우리 안에 있게 된 것일까요? 사실은 하나인데 어째서 이런 갈등적 이해가 있게 된 것일까요? 저는 이것의 답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고 불온한 그러나 탁월한 철학자인 슬라보예 지젝(Slavoj Žižek)의 책을 읽다가 만난 이야기에서 풀어보겠습니다. 

유명한 유대교 이야기 중에 이런 이야기가 있답니다. 어린 아이가 랍비에게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를 듣고는 이렇게 질문했다고 합니다. “정말 있었던 일이예요? 진짜예요?” 그러자 랍비는 “진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사실이란다.”고 대답을 했답니다. 랍비의 말의 의미인즉, 실제 있었던 일은 아니지만, 그보다 더 의미가 있는 상징적인 사실이라고 한 것입니다. 이에 지젝은 이 랍비의 설명은 그 반대의 경우를 보태야 완성될 수 있다고 지적합니다. “실제 일어난 일이지만, 사실은 아니란다.” 

우리 안에 통일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이미지, 통일방법론에 대한 상이한 이해와 제시가 있는 이유는 ‘사실 속의 진실을 보게 하는 경험의 상이성’ 때문입니다. 같은 사건을 만났지만 자신의 현실과 입장에 따라 서로가 다른 해석을 갖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해석의 상이함은 통일의 필요성 대(對) 불필요성, 무조건적 대(對) 조건적, 당장 대(對) 봐가며, 같은 민족 대(對) 적… 등과 같은 충돌 개념을 생산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이렇게 충돌하는 개념들 가운데서 두 개의 시간을 만납니다. 현재와 과거입니다. 여기서 현재는 현실이고, 과거는 사건입니다. “현재 북한의 현실을 좀 봐. 세습 국가에, 전체적 공산주의 국가에, 인권 부재의 국가에, 적화 야욕에 인민은 굶고 있는데 핵무기나 만들고… 우리가 좋게 봐 줄 수 있는 현실이 하나도 없잖아? 더욱이 탈북민들의 증언이 너무 생생하잖아?” 그런데 이보다 더 강한 펀치는 사건으로서의 과거에 있습니다. “내가 한국전쟁을 겪어 봐서 아는데…니 말은 다 빨갱이야!” 

우리 중에는 거의가 북한에서 살아 본 적도 없고, 모두가 한국전쟁을 경험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릴 때부터, 좋든 싫든, 동의하든 동의하지 않든, 분단과 통일에 관련된 이야기를 듣고 배웠습니다. 아마 그때마다 이런 질문이 있었을 것입니다. “정말 있었던 일이예요? 진짜예요?” 여러분은 이 질문에 어떤 답을 들으셨습니까? 랍비의 대답? “진짜 일어난 일은 아니지만 사실이란다.” 아니면 지젝의 대답? “실제 일어난 일이지만, 사실은 아니란다.” 

그러나 저는 여러분에게 이런 대답을 드리겠습니다. “실제 일어난 일인데, 사실인 것도 있고, 사실이 아닌 것도 있답니다!” 

■ 우리가 한반도 통일문제를 대할 때, 논쟁의 발화점이 되는 몇 개의 지점이 있는데 그중 큰 것이 ‘한국전쟁에 대한 책임소재’입니다. 한국전쟁의 책임이 누구에게 있느냐는 것입니다. 당연히 북한 아니냐는 소리가 여러분 안에서 당장 들려오는군요. 위키백과를 보니 이렇게 설명되어있더군요.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에 인민군은 242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38선을 넘어 옹진·개성·동두천·춘천·인악(仁岳) 등지의 육로와 동해안을 돌아 삼척(三陟)·임원진(臨院津) 등지에 상륙하여 일제히 공격해 왔다(1)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특정할 수밖에 없는 자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1)https://ko.wikipedia.org/wiki/%ED%95%9C%EA%B5%AD_%EC%A0%84%EC%9F%81

그러나 원인(原因)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과연 북한만이 원인이었을까요? 북한이 6월 25일이라는 특정한 날에 전쟁을 일으켰지만, 이미 소위 적화통일(赤化統一)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이를 추진하고 있었기에 전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남한의 이승만 대통령도 북진통일론(北進統一論)을 공공연히 주장하였습니다. 이를 미국과 UN을 통해 인정/승인 받기 위해 다각의 수고를 하고 있었기에 전쟁은 이미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원인은 이미 남북한 모두 제공하고 있었습니다. 당연히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원인 제공을 남북한 모두가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북한 모두 이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전쟁 발발에 국한해서 전쟁 책임을 묻기보다, 이러한 전쟁이 일어날 수밖에 없도록 한 더 깊은 연원(淵源)을 추적한다면 대답은 또 다시 달라집니다. 한국전쟁은 분단에 연루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분단된 상태에서 한국전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2) 불행하게도 해방과 동시에 한반도는 분단이 되었습니다. 분명 분단이 우리의 소원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해방이었고, 자유를 누리는 삶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소원과는 달리 한반도는 국제정치의 희생제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극체제의 희생물이 되었던 것입니다. 전쟁패자인 일본은 한반도의 희생을 통해 살 길을 찾았는데, 미국과의 타협을 통해 한반도의 분단을 기획했던 것입니다. 결국 한반도의 분단기획은 한국전쟁 발발의 진실이고 깊은 연원인 것입니다(3)

2)어떤 면에서, 한국전쟁은 남북 모두에게 통일전쟁의 성격으로 진행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주변 국가들이 한반도의 통일을 원하지 않았지만 말입니다. 이 문제는 본론에서 좀 더 다루겠습니다.
3)한국전쟁을 어떻게 이해하고 읽느냐에 따라, 6.25전쟁, 6.25사변, 6.25동란, 한국동란, 통일전쟁, 조국해방전쟁, 민족해방전쟁 등과 같은 명칭이 붙습니다. 또한 분단으로부터 그 연원을 따질 때, ‘내전(內戰)인가, 국제전(國際戰)인가, 아니면 복합전(複合戰)인가 혹은 국제전적 내전인가, 내전적 상황을 이용한 국제전인가?’ ‘남침인가, 북침인가, 남침유도인가?’ ‘대리전(代理戰)인가, 제한전(制限戰)인가?’ ‘국지전(局地戰)인가, 전면전(全面戰)인가, 국지전에 의한 전면전인가?’라는 질문이 불가피합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사실에 대한 진실입니다. 그러므로 한국전쟁의 책임을 어느 한쪽에 일방적으로 몰아붙이는 것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소련은 한국전쟁의 책임으로부터 더욱 자유로울 수 없는 국가들입니다(4)

4)우리는 미국을 우방 프레임으로 이해하기에 미국이 하는 일과 말의 대부분이 수용됩니다. 그러나 미국은 우리를 철저히 자신들의 필요에 의해 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소위 ‘친미(親美)’ ‘반미(反美)’ 프레임으로 이념 논쟁을 부추기는 일은 그만 해야 합니다. 필요하면 친미도 될 수 있고, 반미도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는 종미(從美)도 할 수 있습니다. 요(要)는 미국이 ‘절대’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우리가 한반도 통일문제를 대할 때, 또 하나의 논쟁의 발화 지점은 ‘핵무기’와 ‘폭력성’입니다. 북한의 핵무기는 북한을 악의 축으로 설명하는 결정적인 시비꺼리입니다. 악한 나라에 악한 무기가 있으니 북한을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나라라고 규정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북의 ‘비핵화’만이 세계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서 트럼프 정부는 소위 ‘코피(bloody nose) 전략’을 북한 제재를 위한 군사 욥션으로 내세웠던 것입니다. 

그런데 과연 북한만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요?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tockholm International Peace Research Institute, SIPRI)의 발표에 따르면, 2016년 1월 현재, 세계 각국의 핵무기 보유현황은 러시아 7,290개, 미국 7,000개, 프랑스 300개, 중국 260개, 영국 215개, 파키스탄 110~130개, 인도 100~120개, 이스라엘 80개, 북한 10개입니다(5) 북한은 2016년과 2017년 다수의 핵실험이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10개보다 훨씬 많은 수를 보유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 자료를 보시다시피, 북한만 핵무기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개수로도 러시아와 미국에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적습니다.(각주에서 보시다시피, 핵실험도 그렇습니다) (6)

5)최근의 한 연구 기관에 따르면, 러시아 10,000개(핵실험 715번), 미국 9,000개(핵실험 1,030번), 중국 1,200개(핵실험 45번), 프랑스 300개(핵실험 210번), 영국 225개(핵실험 45번), 파키스탄 90~110개(핵실험 2번), 인도 80~100개(핵실험 3번), 이스라엘 80개(핵실험 45번), 북한 60개(핵실험 6번)가 보유되어 있다고 합니다.
6) 2018년 3월 12일자로 스톡홀름국제평화연구소(SIPRI)는 무기수출국들의 무기수출 현황을 발표했는데, 2013-17년에 미국은 전세계 98개국에 무기 수출을 했는데 34%를 차지했습니다. 이 기간 중 미국의 무기 수출은 같은 기간에 두 번째로 큰 무기 수출국인 러시아보다 58% 더 높았습니다.  https://www.sipri.org/news/press-release/2018/asia-and-middle-east-lead-rising-trend-arms-imports-us-exports-grow-significantly-says-sipri

■ 우리가 한반도 통일문제를 대할 때, 또 하나의 논쟁 지점은 ‘공산주의’와 ‘독재화’에 대한 것입니다. 힘에 의한 흡수통일을 주장하시는 분들은 공산주의의 악랄성(惡辣性)을 강조합니다. 이는 주로 한국전쟁 세대에게서 듣는 말이고, 전승받은 그 후손들에게서 들을 수 있는 말입니다. 하루아침에 재산과 토지를 몰수당한 입장에서, 사상 검증이라는 것을 통해 모든 지위와 관계를 박탈당한 입장에서 공산주의는 결코 양해할 수 없는 사상이자 체제였을 것입니다. 또한 일인 독재라는 통치 체제도 비판의 대상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더욱이 현재 3대 세습으로까지 이어지고, 인권/빈곤 문제 등으로 인해 많은 탈북민들이 생기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이러한 비판은 비판의 정당성 확보 문제가 제기됩니다. ‘너는 비판할 수 있을 만큼 선하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비판의 정당성 지위 확보의 문제입니다. 유감스럽게도 남한(대한민국) 역시 이러한 비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합니다. 북한(조선)의 공산주의와 독재화를 비판하지만, 대한민국(남한)의 자본주의는 자본 독점과 분배의 부정의 등과 같은 많은 문제를 갖고 있고, 대한민국의 정치사에 군부 독재의 시절이 결코 짧지 않게 있었다는 것과 이후 민주화 시절에도 다양한 독재의 잔재들이 활약하고 있다는 것은 조선을 비판하는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들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예수께서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면서 상대방의 눈 속의 티끌을 보고 비판하는 것에 대해 꾸짖으셨다는 점을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7)

7)마태복음 7장 3-5절; 누가복음 6장 41-42절.

■ 자, 이제는 우리의 본색을 드러내는 질문을 좀 하겠습니다: ‘한반도의 분단 현실에서 한반도의 통일을 어떻게 이해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의 바른 자세인가?’ ‘한반도의 통일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은 어떠해야 하는가?’  

1. 성서는 ‘통일’ 개념을 어떻게 설명하고 있을까요? 무엇보다도,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물론 심리적인 하나도 있고, 물리적인 하나도 있지만, 성서가 말하는 것은 통합적 하나입니다.  

대표적인 예(例)가 요셉 이야기에 있습니다. 요셉에 대한 아버지의 편애가 결국 요셉을 사지(死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러나 구사일생(九死一生)하여 급기야 이집트의 총리가 되었습니다. 요셉은 진작 형제들을 용서하고 있었고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완전한 하나됨은 아니었습니다. 후에 용서의 과정을 거치고 온 가족이 함께 되었을 때, 진정한 하나됨이 되었습니다. 심리적 하나와 물리적 하나가 통합되었습니다. 이런 예는, 에서와 야곱의 경우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성서의 통일 개념을 수준 있게 볼 수 있는 곳은 예수의 대제사장의 기도에서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어서 우리 안에 있게 하여 주십시오. 그래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십시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영광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내가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 것은,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것은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셨다는 것과,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과 같이 그들도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복음 17장 21-23절, 새번역)  

그러므로 부정적 의미의 분열(分裂), 분리(分離)로서의 분단(分斷)은 그리스도교가 권장하는 바가 아닙니다. 분단이 아닌 하나됨으로서의 통일(統一)이 성서적이고 신학적입니다.  

2. 그리스도를 따르는 사람들의 통일 방법론은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요? 이는 바로 앞에서 설명한 통일의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부정적 의미의 분열, 분리로서의 분단 개념이 아닌 하나됨으로서의 통일 개념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평화지향적 개념입니다. 요한복음 17장 21-23절이 밝히는 예수의 통일 개념은 전적으로 평화지향적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가 말씀하신 평화 개념을 바르게 이해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검을 사용하지 않는 평화 개념’을 말씀하셨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예수는 소위 ‘비폭력적’ 평화 개념을 말씀하셨습니다.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마태복음 26장 52절) (8)

8) 정의를 추구할 때 저항하는 방식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폭력적 저항, 비폭력적 저항, 비폭력적 무저항. 이 중에 그리스도교가 취하는 방식은 비폭력적 저항과 비폭력적 무저항이어야 합니다.

덜 악한 것으로서의 최소한의 힘의 사용은 불가피하다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이때 예시되는 분이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입니다. 그의 ‘미친 운전사론’은 설득력이 강합니다. ‘미친 운전사를 운전석에서 강제로라도 끌어내리지 않으면 수많은 사람이 다치거나 죽는다’는 본회퍼의 주장은 설득력이 큽니다. 또 한 분이 예시되는데, 니버(Karl Paul Reinhold Niebuhr)입니다. 그의 ‘기독교 현실주의(Christian Realism)’ 또한 설득력이 큽니다. 현실적으로 힘의 사용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니버의 역설입니다. 이 두 분만을 소환했지만, 여러 분들이 더 계십니다.  

일반적으로, 상황은 힘의 사용에 정당성에 부여합니다. 군대를 앞세우고, 핵무기를 장착하고, 강력한 무역 제재를 들고 나오는 ‘힘’에게 ‘힘’으로 대항하고픈 것은 누구나 갖는 생각일 것입니다. 혹자는 우리 속담 중에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말을 인용하며 ‘통일만 되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힘의 사용을 정당화하며 ‘흡수 통일’을 주장합니다. 악을 구원하는 것이라면, 힘을 사용해도 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평화를 만드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신 예수가 “칼을 쓰는 사람은 모두 칼로 망한다.”고 확언하셨다면, 우리의 통일방법론은 무엇을 지향해야 할까요? 힘의 사용일까요? 비폭력적 수단의 사용일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힘의 사용은 아닙니다.  

이처럼 우리가 평화지향적 통일방법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통일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것이 평화이기 때문입니다. 엄밀한 의미에서, 평화가 없는 통일은 통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평화 없는 통일은 누군가에게는 정복(征服) 당함이고, 누군가에게는 지배(支配)일 뿐입니다. 그렇기에 통일은 평화지향적 방법으로만 정의로울 수 있고, 그 결과가 평화라는 정의(正義)로 나타날 수 있는 것입니다(9)

9) 성서에서 평화는 전쟁과 분쟁과 미움과 시기와 질투가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더 나아가 부정의(不正義, unjustice)가 사라진 상태를 말합니다..  

■ 그런데 우리가 처한 국내 정치 환경과 국제 정치 환경은 평화지향적이지 않습니다. 다수가 평화에 대한 관심이 아닌, 자신/자국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는데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사용하고 있을 뿐입니다. 소위 ‘냉전 담론’을 유지, 확장, 재생산함으로 자신의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의도입니다.  

국내적으로는 주로 북한(조선)을 주적(主敵)으로 규정하는 분들에 의해 이런 상황이 전개됩니다. 이 분들은 조선(북한)을 같은 민족으로 이해하고 통일 담론을 생산하는 분들에 대해 불편한 마음을 갖고 있습니다. 공산주의 국가인 북한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적, 그것도 주적이기에 타협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10) 북한은 응징하고 무너뜨려야 할 상대라고 보기에 이분들에게서 평화지향적 통일담론은 생산되기 어렵습니다. 힘의 논리에 의한 흡수 통일담론이 이분들의 지배담론이 됩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행위를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유지, 확대 재생산 하는데 연결시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예컨대, 선거철이 되면 어김없이 메카시즘의 망령을 불러들여 소위 종북(從北) 몰이를 실시합니다(11)  최근에는 방북성과를 나누는 청와대 초청 여야대표회담에서 남북/북남 정상회담, 북미/미북 정상회담의 성사에 대해 ‘북한을 어떻게 믿느냐?’며 이의를 제기했는데 이는 이기적 정치 행위로만 보입니다(12) 이렇듯 분단이라는 상황은 극복되어야 하는 현실이 아니라, 이용당하는 현실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에 평화지향적 통일담론이 들어올 여지가 없습니다.  

10)북한을 ‘주적’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현 상황이 교전상황이고, 북한이 전투당사자라는 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북한에 대한 주적규정은 현상황이 군사적으로 평시를 의미하는 ‘테프콘 5’의 상황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군사적으로는 타당하지 않은 규정입니다. 따라서 북한을 적으로 규정한 것은 북한과 전투행위가 발발하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논리적으로는 남북 사이에 화해와 협력을 추구할 수 없게 됩니다.
11)메카시즘(McCarthyism)은 1950년대 미국에서 일어난 극단적인 반공사상(反共思想)으로 1950년 2월 미국 공화당 상원의원 J. R. 메카시가 국무부의 진보적 성향을 띤 100여명의 추방을 요구하고, 많은 지도층 인사들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공격한 데서 발단이 되었습니다.
12) 2000년 역사적인 6.15 남북 정상회담(김대중 대통령, 김정일 위원장) 직후 한나라당 이회창 총재가 방북 성과에 대한 얘기를 들으러 청와대에 왔을 때, 이 총재는 수고했다는 말 한마디도 안하고는 “국군포로 문제를 왜 해결하지 못했느냐?”고 윽박질렀습니다. 이후 18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모든 일을 정략적으로만 판단하고 정쟁의 대상으로 쓰려고 분들의 태도는 변함없습니다. 참고로 2000년 이후 이회창 총재가 국군포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민주당 김홍걸 의원 페이스북 글 중에서) https://www.facebook.com/permalink.php?story_fbid=512456999151707&id=100011622342253&pnref=story

그런데 국제 정치의 현장은 더 심각합니다. 한반도의 분단 현실은 한반도의 분단에 관여한 국가들의 정치적 손익관계와 그들 간의 이해 득실관계 가운데 여전히 놓여있습니다. 분단에 관여하고 자국의 이익을 계산하는 국가들은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입니다. 더욱이 이들 중 한반도 통일에 동의하는 국가는 표면적으로만 있을 뿐입니다. 어쩌면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반도의 영구적 분단을 기획 중일 수도 있습니다.  

이상의 설명을 드렸다시피, 통일보다는 분단의 연장을 기대하거나 기획하는 국내외적 현실과 평화적 행위는 정치적 술어일 뿐 실제로는 힘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국내외적 현실입니다. 여기에 한국교회의 일부도 한몫하고 있습니다. 물론 표면적으로는 통일 문제를 놓고 기도하고 애를 씁니다만 실제로는 통일을 훼방하고 분단의 연장을 조장하는 듯합니다.  

■ 과연 이런 국내외적 상황과 한국교회의 태도로 볼 때, 통일, 될 수 있을까요? 된다면, 평화를 구축하는 통일이 될까요? 어떤 시각을 갖느냐에 따라 답은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통일이 하나님의 뜻이자, 그리스도교가 지향하는 가치라면, 답은 갈라질 수 없을 것입니다. 답은 하나일 수밖에 없습니다: ‘통일은 되어야 합니다. 그것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한국교회의 시대적 사역입니다.’  

저는 많은 분들에게서 다음의 질문들을 받습니다: ‘통일이 뭐죠?’ ‘통일, 해야 하나요?’ ‘통일이 필요한가요?’ ‘통일, 될 수 있나요?’ ‘통일 되면 뭐가 좋죠?’ ‘통일, 누구를 위한 것인가요?’ ‘통일 되면 북한이 좋을까요, 남한이 좋을까요?’ 이 질문들은 거의 부정적인 질문입니다. 그럼에도 저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네, 통일은 평화롭게 함께 사는 것입니다. 네, 통일은 될 수 있습니다. 아니, 되어야 합니다. 통일은 남과 북/북과 남 모두에게 좋습니다.’ 제가 이렇게 대답하는 데는 이유가 분명합니다. 저는 그리스도를 믿고, 성서의 지침을 따르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앞에서 설명 드렸듯이, 통일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여,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저들도 하나 되게 하소서!” 통일은 누가 좋은 것도, 누가 더 좋은 것도 아닌, 하나님이 좋아하시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좋은 것입니다. 참으로 그 어떤 설명도 이 이유를 능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혹시 누군가 저의 이 단호한 입장 표명에 ‘당신, 너무 이상적 아닌가?’라는 이의를 제기하실 것 같습니다. 솔직히 제게는 이것에 대한 고민이 늘 있습니다. ‘신학, 이상(理想)에 기댄 학문일까, 현실(現實)에 기댄 학문일까?’ ‘그리스도교는 이상에 기댄 종교일까, 현실에 기댄 종교일까?’ 현실주의적인 분들이 볼 때, 신학과 그리스도교는 이상적인 말만 하는 것으로 보일 것입니다. 자본주의가 현실이고 경쟁사회가 사실인데, 정의와 분배의 공동체를 주장하니 이 얼마나 감각 떨어지는 집단으로 보이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오해입니다. 신학과 그리스도교는 결코 현실을 무시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현실을 잘 이해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상을 말할 수 있고, 말해야 합니다. 이상을 말한다는 것은 현실에 문제가 있기 때문이지 현실을 몰라서가 아닙니다. 그렇기에 이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그리스도교 신학은 기도만 하지 않습니다. 현실을 보고 기도도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힘의 사용을 정당화하는 폭력에 물든 세상을 향해 ‘우리가 사는 길은 평화적인데 있다!’고 말해야 합니다.  

한국교회 일각에는 트럼프 정부에서 주장하는 ‘코피(bloody nose) 전략’에 동의/동조하시는 분들이 제법 계십니다. 이분들은 코피 전략을 ‘물고기 몰이 전략’이라고 재해석하십니다. 물고기를 잡을 때 한곳으로 몰며 쉽게 잡을 수 있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제가 보기에 코피 전략은 실패하는 ‘쥐 몰이 전략’입니다. 쥐 몰이는 고양이가 쥐를 잡을 때 구석으로 몰아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나 고양이는 쥐가 빠져 나갈 구멍 없이 막무가내로 몰아붙이지 않습니다. 쥐가 돌변하여 공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국제사회의 대북제재가 일정한 효과를 얻고 있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북한의 핵무기 확보는 제재만능론이 가져온 결과입니다(13) 

13) 유엔의 대북제제는 2016년 3월 이후(유엔결의 2270) 대량살상무기 관련 선별제재에서 무차별적 포괄제재로 변화되었고, 대북제재의 키를 쥐고 있는 중국의 제재 이행강도도 매우 강력해졌습니다. 이에 따라 2018년 북한의 대중 상품수출은 2017년 대비 약 94% 감소한 1억 달러 내외로 예상됩니다.(임수호 「글로벌 협력과 북한경제성장」, 2018. 2) 그러나 제재가 일정한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고 해서 “제재의 강도를 더 높이고 지속하면, 김정은은 더 변하고 무력충돌 위험지수도 낮아질 것”이라는 보수언론과 야당 일각의 제재만능론까지 용납되는 것은 아닙니다. 제재만능론으로의 경도가 위험한 이유는 무엇보다 현재의 제재조차 북한의 민생을 직접 타격하는 과도한 수준일 뿐만 아니라, 더 이상의 추가 제재는 북한의 핵 폭주와 돌발적인 현상타파 시도만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 제재만능론의 기저에는 북한 조기붕괴론과 같은 잘못된 정세인식이 존재합니다. ‘조만간 붕괴할’ 대상과 진지하게 협상할 이유가 없다는 오판은, 지난 북핵 역사가 증명하듯, 오늘의 북핵문제를 만들어낸 최대의 공로자입니다. http://magazine.changbi.com/180221/?cat=2466

그러므로 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통일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이 길의 출발점은 핵을 생존과 ‘발전’의 보검으로 생각하는 북한과, 핵 독과점체제에 근거한 미국의 세계운영전략 사이의 모순을 ‘협상 가능한 아젠다’로 변환시키는 노력입니다. 한마디로, 만나서 대화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만나고 대화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만나서 대화하는 일을 수 없이 하다보면 길이 보이고 문이 열릴 것입니다. 최근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만나기 시작하니 계속 만나게 되고 대화가 되지 않습니까? 길이 보이고 문이 열리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것을 ‘협상’(協商, negotiation)이라고 말합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구축하는데 필요한 것은 협상이지 ‘협박’(脅迫, threatening)이 아닙니다. 협박이라는 추위로는 결코 북한의 위협적 외투를 벗길 수 없습니다. 협상이라는 햇볕으로만 평화를 만들 수 있습니다. 이 방법은 오랜 세월 동안 갑론을박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가장 성서적인 방법이라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에 그리스도교인인 우리는 북한을 바라보는 태도에 금지해야 할 태도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북한을 ‘불쌍하다’는 입장에서 바라보는 태도입니다. ‘가난하니 불쌍하다, 인간답게 살지 못하니 불쌍하다’는 등의 태도는 전적으로 자본주의적 관점입니다. 북한은 자본주의 국가가 아니라 공산주의/사회주의 국가입니다(14) 각자의 정치 및 경제 체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특히 여기에 자본주의는 선이고, 공산주의는 악이다는 태도를 가지고 북한을 바라보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성서적이 아닙니다. 자본주의가 선이라고 믿는 것은 일종의 타락입니다.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이 시대의 악들을 안다면 자본주의를 선이라고 부를 수 없습니다.

14)또한 우리보다 가난하니 불쌍하고, 우리보다 못사니 불쌍하다는 생각도 다르지 않습니다.

그리고 분명히 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남한이 하나의 국가이듯 북한도 하나의 국가라는 사실입니다. 남과 북/북과 남은 국가 대 국가로서 만나야하고, 대화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남한에는 북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남한에서 갈라져나간 부족(部族)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북한은 이미 국제사회에서 인정된 하나의 국가입니다. 더욱이 7·4 남북공동성명, 12․13 남북기본합의서, 유엔동시가입, 6․15 남북공동선언, 10․4 남북정상선언 등을 통해 남한은 북한을, 북한은 남한을 하나의 국가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므로 남북기본합의서 제1조에 규정한 것처럼 상대방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함으로써 대화·협상·합의·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이로써 이질화되고 독존(獨存)화되는 남북관계의 원심력을 극복하고 민족공동체로서의 구심력을 강화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협상 테이블을 자본주의 분위기로 판을 짜는 것, 그리고 남한 혹은 미국 위주의 분위기로 만드는 것은 협상이 아닌 협박이 되는 것입니다(15) 이것은 국제관계학에서 말하는 협상의 ABC도 모르는 태도입니다. 더욱이 성서적이지 않은 태도입니다.  

15)용어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한미동맹, 분단체제, 분단해소 등은 마치 분단의 고착화를 도모하는 듯한 용어들입니다. 이 기회에 한미동맹은 한미관계, 분단체제는 분단사회, 분단해소는 분단체제 극복 등으로 바꿀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더 나아갈 수 있다면, 대북제제와 북의 비핵화라는 용어도 순화(純化)할 필요가 있습니다.

■ 이제 저는 평화지향적 통일방법론을 추구하는 입장에서 통일을 이루어가는 저만의 방식을 제안하고자 합니다. 하나는 ‘일단 만나’이고, 하나는 ‘역사 너머 신앙입니다. 사족은 ‘연애로서의 통일’입니다.  

1. 얼마 전에 너무 좋은 노래를 하나 만났습니다.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가수 ‘리쌍’이 부른 「우리 지금 만나」(feat 장기하와 얼굴들)라는 노래입니다.  

우리 지금 만나 (만나) 아 당장 만나 (당장 만나) 우리 지금 만나 (만나) 아 당장 만나 (당장 만나) 휴대전화 너머로 짓고 있을 너의 표정을 나는 몰라 (몰라 몰라 나는 절대로 몰라) 우리 지금 만나 (만나) 아 당장 만나 (당장 만나) 우리 지금 만나 (만나) 아 당장 만나 (당장 만나) 말문이 막혔을 땐 니가 웃는지 우는지 나는 몰라(몰라 몰라 나는 절대로 몰라)

분단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키는 ‘일단 만나’야 얻을 수 있습니다. 상상(想像)은 경험이 아니기 때문에 비현실적입니다. 그러나 만남은 경험이기 때문에 현실적입니다. 오해(誤解)는 만나기 전에 생기는 일이고, 이해(理解)는 만난 다음에 생기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일단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2. 구체적인 방법까지는 못 갔지만, 저는 여러분에게 그리스도교인으로써 어떤 처신을 하는 것이 옳은 통일관인지를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슬쩍 흘린 이야기가 있습니다. 통일을 위해 기도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최선을 다하되 우리는 ‘한계를 가진 존재’임 인정해야 한다는 의미였습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니버(Reinhold Niebuhr)의 다음의 고백을 좋아합니다.  

모든 역사적 세력들이 우리를 세계공동체라는 방향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은데 이것은 인류의 최종적 가능성이자 불가능성이다. 그것을 성취하는 과제는 모든 역사적 성취들의 단편적이고 파편적인 성격을 이해하면서 동시에 그 성취들의 의미에 관한 확신 중에 있는 신앙의 견지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신앙은 인간사의 완성이 하나님의 권능에 달려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원은 인간의 자원보다 훨씬 방대하고, 하나님의 참으시는 사랑(suffering love)은 인간의 노력이 갖는 중요성을 부정하지 않으면서 인간의 성취에 담겨있는 타락의 요소들을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16)  

16)Harry R. Davis and Robert C. Good. ed., Reinhold Niebuhr on Politics-His Political Philosophy and Its Application to Our Age as Expressed in His Writings, 342.

사실 분단의 현실은 그 자체가 비관적입니다. 갈등과 불안을 유발하는 분단이 낙관적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이러한 현실에 대해 비관적이지만 않는 것은 신앙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이 인간의 부족한 부분을 해결해 주실 것이며, 하나님의 정의가 집단적 이기심과 허세에 개입하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히려 이러한 믿음을 현실적이라고 해야 할 것입니다. 고백하건데, 우리의 인생사 중에 우리의 힘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여기에 통일문제는 더욱 그렇습니다. 통일문제는 더욱 더 하나님께 구원을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3. 이제는 사족(蛇足)입니다. 논쟁을 불러일으킬만한 생각이라 사족 처리를 하였습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의 개념의 재설정에 대해서입니다. 통일의 염원을 말하기는 하지만, 분단비용과 통일비용에 대한 비교를 통해 통일을 설득하기도 하지만, 73년의 분단의 세월이 가지고 있는 이질감은 어쩔 수 없습니다. 어느 날, 어떤 드라마를 보다가 ‘결혼은 부담돼서 싫지만, 연애는 좋다.’는 대사를 듣게 되었습니다. 이 대사에 번뜩인 것은 통일 개념이었습니다. 부담되는 물리적 통일 보다 ‘분단 상태로 협조할 수 있는 것은 협조하고, 만날 수 있는 것은 만나게 하면서 사는 것도 일종의 통일 아닐까?’라는 생각이었습니다. 굳이 물리적 하나됨만을 통일로 규정하지 말고 결혼이 아닌 연애도 통일로 보자는 것입니다(17) 너무 나갔나요?  

17)이 사족은 김대중 대통령-김정일 위원장 시절에 합의되었던 ‘낮은 단계의 연방제’ 개념의 시대적 재설정이라고 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 통독 경험을 가진 독일의 학자들이 남한을 방문할 때 빼지 않고 하는 충고가 있습니다. ‘통일은 쓰나미처럼 어느 날 갑자기 온다. 당장 준비해야 한다.’  

이 충고는 우리가 북한과 만나고 대화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부정적으로 봐서는 안 된다고 쐐기를 박습니다. 일각에서는 북한이 문재인 정부를 이용하여 트럼프 정부 남은 3년을 버티거나 혹은 남북관계 개선과 핵 보유 상태의 병행을 추구할 속셈이라며 걱정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북한이 남북관계조차 포기하고 핵과 군사 대결의 외길로 폭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히려 분단을 고착화시키고 불안을 볼모로 평화 만들기를 방해하는 비관적 정치가 아닌 비핵화를 위한 관여와 규율을 확대하는 새 길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것은 만남과 대화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제가 그리스도교의 통일담론을 연구하면서 늘 염두에 두는 문서가 있습니다. 1988년 2월에 발표된 「민족의 통일과 평화에 대한 한국기독교회 선언」(이하 「88선언」)입니다. 이것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이하 NCCK)가 발표한 것으로 지금까지 발표된 그 어떤 선언문보다 탁월한 성서적·신학적 선언문이라고 생각합니다. 30년 전의 문서임에도 불구하고 그렇습니다. 지난 3월 7일 「88선언」 30주년을 맞이해 NCCK는 ‘88선언 30주년 기념 선언문’을 발표했습니다. 이 선언문의 마지막 부분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한반도의 긴급한 위기를 인식하며, 우리는 한반도 갈등에 관계된 국가들을 대화의 장으로 부르고, 갈등의 경계를 넘어 평화적이고 인간적인 관계를 형성하는 일에 협력해줄 것을 세계 에큐메니칼 공동체에 촉구한다. 특별히, 이 협의회에서 진행된 토론을 기반으로 작성된 액션 플랜을 이행해주기를 요청한다. 에큐메니칼 공동체는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는 모든 곳을 위한 정의 없이는 결코 어디에도 평화가 존재할 수 없다는 믿음에 기초한다고 확언한다. 실제로 세계평화는 한반도 평화실현에 달려있다. 88선언이후 30년 동안 우리는 평화를 심기 위해 노력해왔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온 인내하는 과부와 같이, 우리는 인내의 열매인 희망을 외칠 수 있다. 우리 협의회에서는 이를 “치열한 인내”라고 표현했다. 바울은 갈라디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낙심하지 말고 꾸준히 선을 행합시다. 꾸준히 계속하노라면 거둘 때가 올 것입니다.”(갈 6:9)라고 권면했다. 우리는 현재 우리가 마주한 정치적 사건들을 카이로스적 순간으로서 인식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와 함께 가능성의 끝자리에 서있다. 우리는 한반도 평화를 위한 시간이 바로 지금임을 선언한다.   

분명 한반도의 평화는 동아시아의 평화와 더 나아가 전세계의 평화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세계인의 평화와 연결되어 있는 한반도 평화 만들기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일은 샬롬의 왕이신 그리스도의 제자들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유념할 것은 힘이라는 정의가 아니라 화해(和解)라는 정의로 평화 만들기에 앞장서야 할 것입니다. 분명 위의 문서가 말하듯이, 우리가 하나가 되려는 이 일은 “치열한 인내”를 필요로 합니다. 다양한 어려움, 그 중에서도 다양하고도 교묘한 방해가 있을 것입니다. 자국의 이해득실을 계산하는 이들에 의해 한반도의 분단 현실은 시소타기를 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기도를 멈출 수 없습니다. 평화 만들기도 멈출 수 없습니다. 이것은 대한민국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숙명인 것 같습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북한만을 문제 삼는 것일까요? 더욱이 폭력에 관한한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은 세계 곳곳의 분쟁/전쟁의 직간접 당사자가 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세계가 동의하지 않는 행위인데 미국, 러시아, 중국 등은 자신들이 일으키는 분쟁/전쟁에 대해 정의롭다고 변명을 하고 있습니다. 과연 이 변명이 정당하다면 북한은 왜 정당하지 않은 것일까요? 미국이 취하는 태도와 행동은 다 정의로운 것일까요? 

   
* 2017년에 출판한 이동춘 목사 저작 통일관련 저서 
   
 

예장뉴스

예장뉴스 관리자 계정입니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