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대 죄악’이라는 거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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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7대 죄악(Seven Deadly Sins)’이라는 용어가 있다. 성서에 나오는 ‘7가지 죄의 씨앗’을 말한다. 보통 7대 죄악, 7 죄악 등으로 불리지만, 공식 명칭은 칠죄종(七罪宗)이다. 라틴어로 septem peccata capitales, 또는 septem peccata mortalia다. 이 개념은 6세기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세가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칠죄종은 교만(pride, 라틴어 superbia), 시기 및 질투(envy, 라틴어 invidia), 분노(wrath, 라틴어 ira), 나태(sloth, 라틴어 pigritia seu acedia), 탐욕(greed, 라틴어 avaritia), 식탐(gluttony, 라틴어 gula), 색욕(lust, 라틴어 luxuria) 등 일곱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
먼저 교만(superbia).
성서에서 교만은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을 부인하는 최고의 죄악으로 간주하고 있다(시편 18편 27절, 잠언 29장 23절, 예레미야 50장 31절). 나는 과연 이 굴레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스스로 생각할 때 적어도 나는 이 항목에서는 다른 여섯 가지 죄악에 비해 덜 가책을 받는다고 자부한다. 왜냐하면 태생이 군림하기보다 군림하는 자에게 반항하는 몸짓으로 살아왔기에 이 굴레에서만은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선 아나키스트인 나는 대부분 약자 편에서 생각하고 행동한다. 버스를 탈 때는 기사에게 언제나 “수고한다”는 인사를 건넨다. 아파트 계단과 복도를 청소하는 환경미화원 아낙과 경비들을 만나도 같은 인사를 한다. 길을 가다가 아직도 더러 목도할 수 있는 ‘엎드린 걸인’을 보면 대략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 연말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자선냄비에 단돈 천 원이라도 집어넣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조금은 남사스럽지만, 국경없는의사회, 굿네이버스, 홀트아동복지회, 주몽재단 등에 소정의 기부를 꾸준히 해오고 있는 것 역시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는 성경 말씀(로마서 12장 15절)을 좇은 겸양이라고 하겠다.
이제껏 70여 년을 살아오면서 난 내가 지닌 재능이나 경력 등을 내세우거나 뽐낸 적이 별로 없다. 소싯적부터 그런 것들이 한낱 하찮은 소품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래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나는 그리 내세울 것 없는 하찮은 존재 아닌가!
물론 내가 그런 것 때문에 세간으로부터 불이익을 받지 않았던 데도 연유가 있긴 하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 이처럼 내가 교만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자평 자체가 교만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든다. 진정한 겸손은 그것 자체를 인식하지 않는 것, 그것이 교만을 이기는 기초 아닐까?
다음으로 시기와 질투(invidia).
시기하고 증오하는 마음을 뜻하는 이 죄종(罪宗)은 분쟁의 원인이 되며 당파심을 야기한다고 성경은 경고하고 있다. “시기와 그로 인한 분쟁이 육신에 속한 자를 따라 행하는 것”이라며(고린도전서 3장 3절), “다툼과 시기와 분노와 파쟁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그로 인한 교만과 혼란을 두려워할 것”을 권하고 있다(고린도후서 12장 20절).
성경은 특히 “질투가 스올(음부) 같이 잔인하다”(아가서 8장 6절)고 그 무서운 파괴력을 경고하면서, 따라서 질투로 인한 분노가 잔인하고 압도적이어서 투기를 이겨낼 자가 아무도 없음을 일러주고 있다(잠언 27장 4절). 결국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게 한다”고 못 박는다(갈라디아서 5장 19~21절).
그렇다면 나는, 내 양심에 비추어 볼 때, 적어도 이 점에 있어서는 자신이 선다. 자질구레한 시기와 질투, 그로 인한 분노가 왜 없었겠냐만 전반적으로 시기 질투엔 대범한 편이다. 아니 무딘 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튼 이점에 있어선 어느 정도 합격 수준이라고 자평하고 싶다.
세 번째, 분노(ira).
분노는 갖가지 죄의 원인이 되며, 결국에 가서 인간을 파멸로 이끌기도 한다. 그래서 성경은 분노를 삼가고 마음을 지키도록 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 특히 선과 악, 진리와 거짓,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생각을 분별함으로써 올바른 길, 곧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길을 제시해주기 위해 쓰인 잠언은, 분노를 제어하라는 권면을 여러 차례에 걸쳐 기술하고 있다.
먼저 잠언 14장 17절과 29절. 여기서는 노하기를 속히 하는 자와 더디 하는 자의 차이를 극명하게 비교하고 있다. 즉, 속히 노하는 자가 어리석은 데 비해, 더딘 자는 크게 명철하다는 것, 노하기에 앞서 한숨 돌리고 숙고하는 성정(性情)을 가지라는 권고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에 대한 칭송은 16장 32절에도 나온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낫다”고 상찬(賞讚)한다.
이어 ‘시기와 질투’ 편에서 인용했던 27장 4절을 다시 소환해 질투로 인한 분노의 해악을 재차 일깨우고, 29장 22절에선 성내는 자를 아예 범죄자로 규정하기도 한다. 물론 모든 분노가 다 불필요하거나 제거되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한, 아니 반드시 행해야 할 분노도 있다. 바로 불의를 향한 분노다. 이는 곧 하나님의 공의(righteousness)를 이루기 위한 의로운 분노다. 성서를 따라 의로운 분노를 공부해 보자.
먼저 우상숭배에 대한 분노다. 하나님이 주시는 십계명을 받기 위해 시내 산에 올라간 모세의 귀환이 늦어지자, 아론을 협박한 이스라엘 백성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숭배하는 배교(背敎)를 저지른다(출애굽기 32장 19절). 이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사도 바울이 전도 여행 중에 당도한 아덴(현 그리스 수도 아테네)에서 베뢰아 교인들을 기다리다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격분하는 것 또한 신앙인이라면 당연히 뿜어야 할 격분이다(사도행전 17장 16절).
이 같은 정당한 분노를 놓고 볼 때, 나의 삶의 역정은 어땠는가? 대부분 나의 삶은 비겁하고 옹졸한 수준에 머물렀던 게 사실이다. 특히 신앙과 관련해선 상당히 타협적이었다고 토로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비겁했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 신앙을 팔아 혹세무민하는 자들에겐 결코 침묵하지 않았음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특히 그것이 하나님의 명하신 공의나 정의(justice)를 심각하게 훼손했다고 판단했을 경우에 말이다.
비근한 예로 내가 11년 전 당한 고난을 고백하는 게 적절할 것 같다. 2014년 6월 중순 한 대형 교회의 장로가 의문의 극단적 선택을 한 사건이 발생한다. 알고 보니 그의 죽음엔 거액의 비자금 운용을 둘러싼 그와 오랜 친구인 담임목사 간의 갈등이 의혹으로 개재(介在)되어 있었다.
사건은 장례가 치러지고도 얼마간 수면 아래에 머물렀다. 그러다 한 집사의 제보로 그 사실을 지득(知得)하게 되었다. 그 교회는 내가 근 30년을 섬겨온 모교회(mother church)였다. 나는 인터넷 언론과 만든 블로그를 통해 관련 뉴스를 연속 보도했고, 그 파장은 교계를 흔드는 쓰나미로 비화되었다.
교회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담임목사는 시무장로 5명을 동원하여 나와 보도를 주도한 인터넷 언론사 대표(현직 목사)를 기소했다. 항소심까지 가는 3년간의 소송 끝에 법원은 비자금(800억~1천억 원 규모)의 존재를 확인해 주었다. 그러나 나와 언론사 대표에게는 일부 허위 사실 보도와 인신공격 등 부적절한 표현 등을 유죄로 해석해 ‘정보통신망이용촉진 및 정보보호 등에 관한 법률위반(명예훼손) 혐의를 적용, 징역형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최종 선고가 나던 날, 우리의 법정대리인은 “졌지만(유죄가 났지만) 이긴 싸움(비자금 확인)”이라고 자평했고 우리 둘은 이생에서의 전과 기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그것은 적어도 천국 문 앞에선 질타받을 성격이 아닌 영광의 상처라고 생각했기에.
이 같은 행동은 내가 적어도 ‘거룩한 분노’(holy wrath)엔 비굴하지 않게 목소리를 내는 편이라는 기조에 근거한다고 자평하고 싶다. 그리고 얼마를 더 살지 몰라도 그 같은 기조는 계속 유지하고 싶다. 목에 칼이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말이다.
네 번째, 나태(pigritia seu acedia).
게으름, 해태(懈怠)로 풀이되기도 하는 나태는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나쁜 성정(性情) 중 하나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마땅히 일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법으로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지으신 후 그를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창세기 2장 15절), 아담과 하와가 원죄를 저지르고 난 후 벌칙으로 “네가(아담이)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라”(상게서·上揭書 3장 19절) 단언하셨다.
따라서 이 ‘노동명령’은 비록 하나님이 성서를 통해 내리신 문화명령(Cultural Mandate, 또는 위임통치명령), 대위임령(the Great Commission), 지상대명령(The Great Commandment, 또는 선교명령) 등 3대 명령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해도 창세기에 엄연히 등재된 필수 수행 명령에 속한다. ‘제4 명령’이라고 볼 수 있다.
인간에게 노동은 신성한 의무다. 창조주가 동식물 등 다른 생명체에겐 노동의 권한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배신하는 등 불완전하게 창조된 존재이지만 일할 권한이 부여된 것은 축복이다. 게으름은 바로 이를 위협하는 암적인 존재다.
나는 대체로 부지런한 삶을 살아온 편이다. 학창 시절엔 과외 아르바이트로 학자금과 용돈에 보탰으며, 그 와중에 야학교사로도 활동했다. 군 전역 후 직장 생활하면서도 야간대학원엘 다니거나 야학교사로 나름 재능기부도 했다.
물론 내게도 두 번 정도의 ‘게으른 시간’이 있었다.
첫 번째 게으름은 대학 2학년 때 도래했다. 당시 전공이던 화학에 대한 애정이 식어 문사철(文史哲)에 몰입하다가 어느덧 아나키즘에 심취하게 되면서 학점이 곤두박질치는 등 매사가 뒤죽박죽이던 차, 10월 유신이 단행되자 나는 정처 없는 유랑 길에 나섰다.
농촌 활동을 나갔다 사귄 친구는 충남 예산의 후미진 마을 구석에 있는 자기 집에 나를 한동안 붙잡아 두고 꿩고기에 민물고기 매운탕이며, 어죽 등 별의별 시골 특식을 먹여 가며 영양을 보충해 주었다. 내가 엄청난 방황 중임을 알아채고 나의 우울에 기꺼이 동참하기도 했다. 친구 덕분에 난 정처 없는 방황을 생각보다 일찍 종료하고 귀가해 심기일전 학업을 지속할 수 있었다. 그 친구와는 반세기를 훌쩍 넘는 지금도 꼬박 서로 애경사를 챙기고 이따금 상면도 한다.
두 번째 게으름은 앞서 ‘분노’ 편에서 소개한 소송 후에 찾아왔다. 실정법상으로 유죄가 나와 전과자(前科者)가 되었지만 동지인 목사와 나는 짐짓 엽엽(曄曄)했다. 그도 그럴 것이 신학대학 교수들의 집단 응원을 비롯해, 직간접적으로 우리의 도발(?)을 정의롭다고 평가한 수다한 교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씩씩함은 그리 오래 가질 못했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음흉한 기세로 서서히 나를 향해 공격을 시작한 사탄의 공작이 나를 서서히 ‘침잠(沈潛)의 늪’으로 밀어 넣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공황장애(panic disorder)에 따른 광장공포증(agoraphobia)이 엄습했다. 자연 외출을 삼가게 되었다. 누구보다 사람 만나기 좋아하는 내가 외출을 마다하게 되니 곧바로 대인기피증(sociophobia)이 찾아왔다. 친구나 지인들로부터 한결같이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 “천하의 윤 아무개가 외출을 꺼리다니?”
그건 대충 견딜 만했다. 더욱 괴로웠던 점은 칩거하는 동안 내가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한 존재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을 스스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신문사에 근무하는 동안에도 부수적으로 활발하게 방송활동을 했는가 하면, 각종 학회에 나가 강연을 경청하거나 때로 연자(演者)로 강연에 나서는 등 누구보다 활달했던 내가, 그토록 처참하게 우울의 굴혈(窟穴) 속 침잠에 빠지다니. 이젠 스스로 용납하기조차 어려운 ‘죽음에 이르는 병’을 안고 씨름하게 된 것이다. 현실은 냉혹했고 나는 어찌할 바 모르고 칩거를 계속했다.
가장 미안한 대상은 가족이었다. 그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체, 내 증상의 깊이를 잘 모르면서도 아는 체를 하는 것으로 관심과 애정을 대신했다. 그건 어쩌면 그들 스스로의 합리화일 수도 있었고, 진정성일 수도 있었다. 아무튼 그런 세월이 7년 동안 계속되었다. 무려 2500여 일이라는 긴 기간 동안….
우울의 터널을 빠져나오기 위해 사용한 방법은 두 가지였다. 새벽기도 및 중보와 성경 필사(筆寫).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상히 다루겠지만, 이 두 가지가 아니었으면, 난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거나 헤어드라이어 줄에 목을 매달았을지도 모른다.
띄어띄엄이긴 했지만 집사람을 따라 나간 집 근처 교회의 새벽기도회가 나를 죽음의 심연으로부터 살짝 끌어올려 준 것만은 확실하다. 다음으로 식구들의 중보. 그들은 가장 노릇을 손 놓은 채 망연자실 앉아 있는 못난이를 애증이 엇갈리는, 그러나 궁극적인 사랑의 시선으로 감싸주었다.
최종 병기는 성경 필사였다. 2023년 10월 3일 생일, ‘태초에~’로 시작한 성경 필사는 절묘하게도 부활절 사흘 전인 2024년 3월 28일 ‘아멘!’으로 마침표를 찍었다. 178일 만이었다.
때로 지겹다고 생각하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필사는 대체로 순조로웠다. 처음엔 기계적으로 쓰다가 중간부턴 이따금 눈에 들어오는 구절을 음미하면서 썼다. 요절을 골라 따로 적어 놓기도 했다. 30분도 좌정하기 어려웠던 초기를 지나니 나중엔 서너 시간을 앉아서 버텨도 끄떡없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내 나름의 분석으로 구약에서는 이사야서가, 신약에서는 로마서가 성경의 진수(眞髓)를 담고 있다고 판단되었다. 기독교식 점오점수(漸悟漸修) 수행법으론 이만한 게 없다는 생각이다. 이 역시 기회가 되는 대로 소상히 다루겠다.
그렇게 해서 작년 부활절을 기해 드디어 나는 침잠의 심연(深淵)으로부터 솟구쳐 놀랐다. 그것은 오랜 나태로부터의 탈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아무튼 나는 두 번째 나태로부터 겨우 탈출한 후 예전의 페이스(pace)를 되찾아 활발한 글쟁이 활동을 재기했다.
앞으로도 나태가 엄습하면, 나는 두 가지 무기로 대항하려 한다. 바로 새벽기도와 성경 필사. 이번엔 새국제번역본(NIV‧new international version)이다.
다섯 번째, 탐욕(avaritia)
성경은 여러 곳에서 인간의 탐욕을 질타하고 경고한다. 작자 미상의 시편 119편 36절에서 시인은 자신의 마음을 주의 증거들에게 향하게 하시고 탐욕으로 향하지 말게 해달라고 주께 간구한다. 심령의 방향성에 관한 바른 지적이다.
그런가 하면, 예수와 그 제자들은 탐욕에 관해 강력한 어조로 경고하고 질타한다. 먼저 예수께서는 “탐욕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인간의 일반적인 속성”이라고 가르치시고(마가복음 7장 22절), 결국 “사람의 생명이 소유의 넉넉함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탐욕을 물리치라”고 권면하신다(누가복음 12장 15절).
베드로의 경우 “탐욕에 단련된 자는 저주의 자식”이라고 단언해(베드로후서 2장 14절), 예수의 가르침을 잇고 있다.
그런가 하면 사도 바울은 “탐욕은 그 이름조차도 부르지 말라”하고(에베소서 5장 3절), “탐하는 자, 곧 우상 숭배자는 다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서 기업들 얻지 못한다”(상게서 5장 5절)고 강하게 경고하고 있다. 그는 특히 감독과 집사 등 교회의 직분자들의 기본 요건으로 탐욕이 없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디모데전서 3장 2~3절 및 8~9절, 디도서 1장 7절).
나는 과연 탐욕으로부터 자유스러운가? 인간이기에 탐욕이 없을 수 없겠지만, 맹세코 명예나 권력, 물질 등에 탐욕을 부린 기억은 별로 없다고 밝히고 싶다. 그건 앞서 고백했듯이 나의 오랜 아나키스트 이력 때문이다.
아나키스트는 명예나 권력, 물질을 탐하지도 않지만 그로부터 노예가 되는 것도 지극히 경멸하기 때문에 자칫 그런 유혹에 빠지기라도 할 것에 대비해 성찰을 게을리하지 않는 삶을 추구한다. 그런 습관이 체질화되어 있는 것 같다.
여섯 번째, 식탐(gula)
탐식(貪食), 탐도(貪饕), 탐람(貪婪)이라는 용어가 있듯이 음식에 대한 탐심은 예부터 많은 논란이 되어 왔다. 특히 질펀한 주지육림(酒池肉林)에 빠지는 향락의 수단이자 무질서한 욕심을 촉발하고 절제를 붕괴시키는 원흉으로 치부되어왔다. 이는 절제와 현명의 결핍에서 오는 것으로 이성적인 고상한 욕구와 저질의 충동적인 욕구와의 불균형은 결국 영육의 무질서를 초래한다.
성서는 “탐욕자의 하나님은 배(腹)이며”(빌립보서 3장 19절), “식탐자는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자아)만 섬긴다”(로마서 16장 18절)고 질타하고 있다. 또 “방탕함과 술 취함 같은 식탐은 심령을 둔하게 하여 종말을 덫처럼 임하게 하니”(누가복음 21장 34절),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을 갑옷을 입어 낮처럼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으며(로마서 13장 12~13절). 에베소서 5장 18절도 “술 취하지 말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권면하고 있다.
이 부문에선 내가 별로 할 말이 없다. 식탐은 물론이요, 주탐(酒貪)이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식탐이야 웬만한 사람이면 차이는 있지만 대략 특정 음식에 대한 탐도가 있을 수 있으니 그렇다 치자.
주탐은 그야말로 식탐 중에서도 대책 없는 식탐 종류다. 우선 한국 개신교가 금기시하는 항목임에도 난 아직도 주탐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아니 벗어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벗어날 생각이 거의 없다. 이것이 가장 큰 문제다. 스스로 주탐이 몸에 유익하지 못하다는 걸 잘 알지만, 이른바 인간관계, 즉 사교적 측면에서 볼 때, 이보다 더 효과적인 도구가 없다고 생각해 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술이 일만 악의 뿌리라는 사례는 성서에도 여러 번 등장한다. 그중 압권은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장막 안에서 벌거벗고 자고 있을 때, 작은아들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두 형제에게 알리는 망발을 저지른 사건(창세기 9장 21~22절)이다. 이 때문에 함은 저주를 받아 대대로 그 형제들의 노예로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어쨌든 난 지금도 술의 노예로 살고 있다. 그리고 언제까지 이 굴욕적인 상황을 지속해야 하는지 스스로 좌절하고 있다. 심각한 기도 제목이다.
마지막으로 색욕(luxuria).
경기 성남으로 시집와 ‘분당댁’이 된 중국 여배우 탕웨이 주연의 영화 ‘색, 계’는 영문명이 ‘Lust, Caution’이다. 탕웨이와 양조위의 접촉 각도 상 실제가 아니냐는 루머가 분분했을 정도로 격렬한 정사 씬으로 입소문이 났던 영화다. 7대 죄악 중 마지막 색욕을 논하기에 앞서 얼핏 그 영화가 생각났다.
성경은 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처럼 색욕을 따르지 말라고 경고하고(데살로니가전서 4장 5절), 그런 사람(색욕에 빠진 이)은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대못을 박아버린다(유다서 1장 4절).
그럼 나는 어떤 인간인가? 성경에 따르면 나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부문에 있어서는 정말 자신이 없다. 대학 시절까지 숙맥이었던 나는 장교로 군 복무를 하면서 자연 주색(酒色)에 가까워졌다. 첨엔 무슨 이런 세상이 있나 신기했다. 그러다가 신문사에 취직하고 나선 점차 주색에 빠지기 시작하더니 어느샌가 중독(?)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한때 ‘영웅호색(英雄好色)’이란 용어를 무슨 전가(傳家)의 보도(寶刀)처럼 생각해서 마구 휘둘렀다. 그건 결혼하고 나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언론은 적당히 부패해 있었고, 또 적당히 타협적이었다. 나도 그런 시류에 편승해 있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다. 또 당연(?)했다. 언론사에도 존경할 만한 크리스천이 없지 않았다. 그런 분들은 주색은 커녕, 술을 동반한 회식 자리에서 콜라나 사이다로 건배를 대신함으로써 우리를 감동케 했다.
하지만 나를 비롯한 대부분은 그런 전범(典範)을 따르지 못했다. 오히려 니나노집이다, 단란주점이다, 룸살롱이다 해서 ‘인간 육림(肉林)’에 빠져 휘청거리면서 희희낙락했다. 집사람 속이 숯검정이 되었을 건 뻔한 이치. 그런 가운데도 지금껏 내 곁을 떠나지 않는 걸 보면서 정말 좋은 배필이라는 생각을 하곤 한다.
이제야 화려했던(?) 바람둥이의 삶을 청산하고 인생의 뒤안길에서 옛일을 회고하고 있지만, 지금도 스멀스멀 기어오르는 리비도(libido)의 공격으로부터 육신을 보전하기 위해선 작지 않은 인내와 수행이 필요함을 절감한다. 성서에 나타난 수다한 ‘색정(色情) 스캔들’을 상고하면서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