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효과적인 전도 전단지
강훈(작가, Simi Valley, CA, USA)

여전히 뜨거운 아스팔트 위에서, 혹은 덜컹거리는 지하철 플랫폼에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외치는 이들이 존재한다. 지나치는 이들의 눈살이 찌푸려지고 사방으로 불편한 기색이 역력하지만,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요즘도 이런 게 있을까 싶은, 조잡한 비닐봉지 속에 담긴 막대사탕 하나와 교회 전단지, 혹은 조잡하게 교회 이름이 박힌 물티슈를 건네는 손길도 여전하다. 솔직히 보는 사람이 더 민망해지는 풍경이다. 가장 고귀해야 할 복음의 가치를, 스스로 가장 하찮고 값싼 콘텐츠로 전락시켜 버린 셈이다.
이 민망한 풍경을 지적하면 그들은 늘 약속이라도 한 듯 똑같은 논리를 들이민다. “그래도 누군가 단 한 명이라도 이걸 듣고 믿는다면, 이 물티슈를 보고 교회에 나오게 된다면 그것만으로도 할렐루야가 아닌가” 하는 착각이다. 하지만 그 질문은 반대로 뒤집는 순간 아주 손쉽게 무너진다. “만약 그런 조잡하고 무례한 방식을 보고 수십 명이 기독교에 마음을 더 굳게 닫아걸었다면, 그 손해는 대체 어떻게 책임질 것인가.” 이 엄연한 역효과 앞에서도 그들은 “그것은 사탄의 방해”라거나 “하나님의 또 다른 방식과 때가 있을 것”이라며 기어이 도망칠 구멍을 만들어낸다.
이 현상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현대 사회학자 울리히 벡(Ulrich Beck)이 말한 ‘조직된 무책임(Organized Irresponsibility)’이라는 개념이 떠오른다. 현대 사회의 거대한 시스템들이 분명히 어떤 문제를 일으키고 있으면서도, 그 누구도 구체적인 책임을 지지 않는 구조를 뜻하는 말이다.
오늘날 교회의 전도 방식이 딱 그렇다. “한 영혼만 구원하면 된다”는 거룩한 명분은, 정작 그 무례한 행위가 사회 전체에 기독교에 대한 혐오와 불신을 심어주는 거대한 부작용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지지 않게 만드는 면죄부가 된다. 사탕 하나를 던져주고 물티슈를 건네는 행위는, 이웃과 관계를 맺고 그들의 고통을 들여다보는 고단한 과정을 생략하기 위한 ‘가장 값싼 종교적 마케팅’일 뿐이다. 한 명의 그럴듯한 성공 사례를 얻기 위해 더 많은 이들의 마음을 돌려세우는 이 모순적인 무책임 속에서, 복음은 당연하게 타락해 간다.
그동안 한국 교회는 수많은 전도 방식과 포교 프로그램을 만들어내고 유행시켜 왔다. 총동원 주일이니, 새생명축제니, 관계 전도니 하는 기획적인 장치들은 난무했지만, 정작 가장 본질적이고 단순한 원리 하나만큼은 실천되지 않았다. 바로 ‘그저 자신의 삶을 정직하게 살아내라’는 원리다.
우리가 세상에 보여주어야 할 신앙의 증거는, 남들보다 특출나게 성공하거나 대단한 권력을 쥐어 기독교의 힘을 과시하는 고지론(高地論)이 아니다. 그저 이웃에게 피해를 주지 않고, 약속을 지키며, 거짓말하지 않는 평범한 소시민 수준의 삶만 살아내도 솔직히 충분하다. 오늘날 개신교의 사회적 신뢰도가 바닥을 치다 못해 혐오의 대상이 된 결정적인 이유는, 기독교인들이 대단한 성자가 되지 못해서가 아니다. 상식적인 수준의 도덕과 평범한 이웃으로서의 예의조차 삶으로 증명해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진정한 전도는 길거리에 뿌리는 조잡한 인쇄물이나 확성기의 소음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냉정한 세상속에서도 정직하게 땀 흘려 일하고, 무한 경쟁 속에서도 내 곁의 동료를 배려하는 우리 삶의 뒷모습에서 시작된다.
우리는 이제 사탕 봉지 뒤에 숨겨둔 영적 이기주의를 내려놓고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지금 예수의 이름을 세상에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나의 종교적 만족감을 위해 이웃의 일상을 침해하고 있는가. 삶이 따르지 않는 구호는 공해일 뿐이다. 확성기를 끄고 물티슈를 내려놓은 그 자리에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정직과 예의를 회복하는 것.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이 시대에 교회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유일한 복음의 증거일지 모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