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 신학’의 거장 송천성 박사를 추모하며

           王崇堯 목사 (전 대만 타이난 신학교 학장) 

번역/ 전기호목사(인하대, 장신대,중국선교사, 대만 타이난대학에서 함석헌의 씨알연구로 황포오, 김용복박사의 지도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 글은 전남 여수에서 발행되는 겨자씨 신문(발행인 정병진)에 기고한 것을 허락받아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 전기호 목사 부부(대만 타이난신학대학에서) 

서두에

대만 아시아 신학자 송천성 박사가 지난 11월 26일, 9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거의 20년 전 송박사가 은퇴하고 미국에서 대만으로 돌아와 타이난 신학교에서 가르칠 때, 마침 거기서 공부하던 내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난다.  건장한 체구와 서구적 마스크의 송박사는 영어 중국어를 섞어가면서 특별히 아시아의 전통, 문화, 종교들을 많이 얘기했던 기억이 난다.

기억나는 말은 “이제 기독교 역사는 지금 이 자리, 즉 대만에서부터 다시 쓰기 시작해서 예루살렘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텍스트보다 컨텍스트를 강조하는 그의 신학적 상상력이라 하겠다. 에큐메니칼 아시아 신학자의 큰 별이 또 하나 하늘로 돌아갔다. 타이난 신학교의 학장이었던 그의 제자 왕총야오 박사가 쓴 애도의 글을 페북에서 보고 짧은 중국어로 번역해 보았다. 혹시 읽고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면 고맙겠다. _번역자(전기호 목사)

   
                    * 송천성 박사(CS Song, 1929-2024) /사진 출처: CCA

 ▲ 송천성 박사(CS Song, 1929-2024) /사진 출처: CCA
이 글을 통해 나의 스승 송천성 목사 (1929.10.19. – 2024.11.26.)를 추모한다

“영웅들의 생각은 대체로 같고, 거장은 확실히 특출나다!”

송(천성) 목사와 처음 만난 것은 그가 1985년 캘리포니아 퍼시픽신학교를 방문했을 때였다. 거기서 공부하던 나는 타이난신학교 시절부터 그를 흠모해 왔다. 안타깝게도 후에 송 목사가 그곳에서 교편을 잡았을 때, 나는 이미 보스턴대학으로 옮겨 박사과정을 하고 있었다. 처음 그와 이야기를 나눈 후를 기억하면서, 나는 <사랑과 한의 얽힘: 멍장뉘의 눈물 독후감>에 나의 반성을 담았다.

“당시 송 목사가 대만 이야기(호랑이 할머니 이야기 등)가 아닌 중국 이야기를 소재로 정치신학을 설명한 것에 대해 조금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 부끄러운 마음도 들었다. 신학의 지평을 넓혀가면서, 송 목사가 멍장뉘의 이야기를 상징으로 삼아 인민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정치신학을 자세히 해석한 것을 이해 못한 것은, 나의 신학 과정에서 하나의 무지한 비판이었다고 생각한다. 나는 이러한 사과의 뜻을 담아 이 글을 썼다, 또한 스스로에 대한 기대와 함께, 앞으로 대만의 민담에서 민중신학의 생기를 찾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자 한다."

‘도성육신’ 신학과 상황화

송 목사는 1965년 황창휘(쇼키코) 목사의 뒤를 이어 타이난신학교 학장에 임명되자 취임사에서 "타이난신학교가 대만과 아시아 교회와 신자들에게 공헌하고 싶다면 가장 중요한 목표는 ‘도성육신(道成肉身, 말씀이 육신됨)’의 신학, 즉 하나님의 말씀과 인간의 세계가 긴박하고 절실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이어 "교직자가 쇠망치와 호미를 가지고 일꾼, 농부들과 함께 땀 흘려 일하지 않는다면 주일 설교에서 한 말이 소리나는 구리나 울리는 괭과리와 같을 수 있다"며 대만의 신학교육을 반성했다.

또한 "노동자, 농민들과 함께 일하면서 우리 이웃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제대로 체험하고, 우리 이웃의 진정한 생활과 경제상의 필요가 무엇인지 체험해야만, 그들을 구원의 하나님께 다가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결국 우리는 송 목사를 통해 황창휘 목사가 제창한 ‘도성육신’ 상황화(Contextual) 신학의 실천을 보게 되었다. 두 명의 초기 대만 학장들은 타이난 신학교의 두가지 신학 스타일을 구축했다: "에큐메니칼" 과 "토착화"

선교 신학의 재구성

송 목사는 1975년 영어로 출간한 재건의 기독교 선교: 아시아의 분석(Christian Mission in Reconstruction: an Asian Analysis)에서 아시아의 선교가 서양 문화로 구축된 선교 신학을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사라는 신학적 틀에서 벗어나 하나님의 창조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어 아시아 자신의 문화, 역사, 사회변천, 정치 등 4차원으로 아시아 자신의 선교신학을 재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영국의 신학자 존 힉(John Hick)도 1973년 종교 대화가 열리길 주장하면서 기독교 신앙 이전의 예수 중심의 사고를 하나님 중심으로 재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힉은 세계 대종교는 오직 하나의 신성한 실체에 대한 다른 반응, 즉 역사적, 문화적 환경에 따라 신성한 실체에 대한 다른 이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종교세계의 중심은 더 이상 교회도, 예수님도 아닌 하나님이다. 존 힉은 이를 기독교 신앙의 코페르니쿠스식 혁명이라고 부르며 신앙세계의 새로운 이미지를 구축했다. 송 목사는 <도성육신-자기비움의 선교>에서도 선교 목적은 타종교를 물리치고 그들이 주장하는 진리를 무효화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다. 타종교 전통의 깊은 쇄신에 기여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의 영광을 증언하고 그의 전능함이 세상에 임하게 하는 것이라 했다. 따라서 송천성과 존 힉이 기독교 신앙을 하나님을 중심으로 재해석한 것은 1970년대 영웅적 견해로 서로 일치한다.

"출애굽 선교"에서 송천성 목사는, 아시아 선교(宣敎)가 공의, 평화투쟁으로 사회·경제·정치의 애급적 굴레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굴레에서 자유"에서 현대사회의 해방운동을 논한다. 그러면서 교회 선교신학의 재건은 비인간적인 사회 제도와, 순종적 정치의식 형태, 경제요인으로 인간의 가치와 존엄을 결정하는 경제 논리 등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것이라 했다.

선교신학이 강조하는 사회변혁은 억압받는 모든 인간성을 마법의 묶음에서 해방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선교신학은 필연적으로 정치와 관련이 있고, 하나님의 창조는 곧 하나님의 정치적 행동이며 하나님의 권력의 발현이다.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은 말씀과 성령의 형태로 나타나 피조물을 인도한다.

정치와 관련된 하나님의 선교는 반두시 정치적이다. 하지만 정치권력 투쟁의 일부가 아니라 인간에게 놓인 권력 사용과 형태를 하나님의 권력으로 문제 삼아 비판하는 일이다. 이러한 생각은 또한 하버드 대학교 하비 콕스(Harvey Cox) 교수의 "세속화 신학" 관점에 응답하고, 또한 서양과 동양의 기독교인들이 사회 개조의 책임을 지고 "사회변혁"의 신학적 사명에 참여할 책임을 고무시킨다.

하비 콕스(Harvey Cox)는 현대사회에서 이웃사랑이란 공공의 일, 정치에 대한 관심이라고 생각했다. 오늘날 우리가 사마리아인이 되려면 제3세계의 정치, 빈민가의 가난한 사람들, 아랍 세계의 여성들, 그리고 중동의 전쟁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속도시’에서 콕스는 기독교인들에게 현대문명의 세속사회가 가져온 모든 변화를 열렬히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어 교회 안에 숨어서 내적 평안만을 추구하지 말라고 한다. 기독교인들은 용감하게 공적인 일에 참여하고, 책임을 지고, 사회변화의 신학적 작업에 종사하며, 인간의 정의를 만들어 하느님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고 말한다. 아울러 다양한 전공을 사업으로 삼아 다양한 가치 경쟁과, 가치 신념으로 사람들을 신앙으로 이끌도록 독려해야 한다고 했다.

‘제3의 눈’ 신학

송 목사는 ‘신학저널(Theology, 1976)’에 ‘이스라엘에서 아시아로: 신학의 도약'(From Israel to Asia: A Theological Leap)이라는 심오한 선교 신학 논문을 썼다. 여기서 송 목사는 아시아 각 민족, 예를 들어 일본 중국 인도네시아 모두 출애굽 경험이 있고, 포로와 배신, 금송아지 숭배, 가난과 노역, 비인간적인 광야 유랑의 역사가 있다,

따라서 이스라엘을 다른 민족의 역사로 전이시키면 같은 구속의 의미를 담고 있지 않냐고 주장했다. 해방신학자 구스타보 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도 같은 시기에 ‘출애굽 해방 모델’을 제시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은 이전에 소외된 이스라엘인을 이집트에서 구원하셨듯이 오늘날 소외된 현대인들을 억압받는 상황에서 해방시키실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야기 신학자와 해방신학자는 이 점에서 만나 즐겁게 대화했다.

송 목사가 1979년 출간한 "제3의 눈의 신학"이란 책에서는 선(禪)의 냄새가 난다. 사실 송 목사는 일본인 선사 스즈키 (鈴木大拙) 저서에서 영감을 받았다. 성서에는 제3의 눈이라는 단어가 없지만 일찍이 마음을 말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너희의 마음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간구하노니, 그가 너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이며, 그 백성에게 약속하신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지 알게 하소서."(에베소서 1장 8절)라고 했다. 간단히 말해서 제3의 눈 신학은 아시아의 문화적 마음의 눈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위대한 역사를 본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심오한 의미를 통찰하며, 측량할 수 없는 성령의 신묘하심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송 목사는 오늘날 우리 대다수가 계승하는 신학을 제1의 눈 또는 제2의 눈의 신학으로 본다. 이는 쌍방향이기 때문에 평면적인 신학이다. 이 신학은 서구의 사상구조와 생활양식에 깊이 영향받은 교회의 역사를 2천 년 동안 끊임없이 확장하였다. 독일의 교리사가 시더그(Seederg)의 말처럼 "종교개혁의 대표자인 독일 정신의 이해 아래에 있는 기독교"를 말하는 것과 같다고 했다.

송 목사는 종교개혁의 신앙에 아무리 결정적이고 영향력 있으며 빛나는 업적이 있더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강요할 이유는 없다고 했다. 그는 특히 다른 사람들에게 독일 기독교인의 관점으로 기독교 신앙을 이해하라고 요구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것이 바로 송 목사가 말하는 ‘제3의 눈’으로 하는 신학, 곧 제3의 방향을 열어보는 신학적 통찰이다.

이러한 관점은 1982년에 쓴 《자비와 연민의 하느님》이라는 책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송 목사는 이를 《전위신학》이라고 불렀는데, 이는 복음이 성경 세계인 팔레스타인에서 "직항"으로 오늘날의 아시아나 대만에 닿는 일을 말한다. 서양의 통로나 다른 문화의 손을 경유해서 더 많은 문화 의식 형태를 가지고 비로소 목적지에 도달하는 일은 불필요하다는 것이다. 송 목사는 ‘뾰족한 코의 그리스도에서 낮은 코의 그리스도’로 이어지는 전위신학이 공간과 시간의 전환(shift in space and time), 소통(communication), 성육신(incarnation)으로 이루어진다고 논하였다.

송 목사는 1981년 인도 방갈로(Bangalore)에서 열린 ‘아시아기독교협의회'(Christian Conference of Asia, 줄여서 CCA ) 총회의 ‘D. T. Niles 기념강좌’에서 중국의 ‘멍장뉘, 만리장성에서 울부짖다’라는 이야기를 주제로 ‘그리스도 안에서 인민과 함께 하는 정치신학'(Political Theology of Living in Christ with People)을 논했다. 이 전문은 후에 《멍장뉘의 눈물》 (The Tears of Lady Meng)이란 책이 되어 송 목사가 후에 발전시킨 이야기 신학의 길을 닦게 된다.

‘이야기 신학’은 ‘제3의 눈의 신학’과 같은 방향성으로, 앞서 기술한 문화와 신앙의 상징이 여기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공통된 외적 형식, 즉 이야기로 대체된다. ‘이야기 신학’에는 10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10편의 민담과 동화 이야기를 바탕으로 깔았다.

이야기들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서아프리카 앙골라(Angola)의 민담 우리 이름을 불러라, 뉴질랜드 마오리(Maori)의 얼굴에 가시가 돋친 전설, 중국의 쥐 한 마리 두 마리 소 우화 등이 있다. 송 목사는 "10개의 글은 다른 시대와 장소에서 쓰여졌지만 공동의 목표가 있다. 즉, 문화·종교·사회·정치적으로 다원화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앙을 어떻게 새롭게 인식하는지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고 했다.

이야기 신학과 서사 신학

1980년대 송 목사가 제창한 ‘이야기 신학’과 예일대가 발전시킨 ‘서사 신학’은 모두 훌륭한 점이 있지만 의미와 주장이 다른 것도 있다. 둘 다 이야기나 작은 인물의 사적을 중시하고, 이야기 중 하느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중시하지만, 서사 신학의 첫 번째 텍스트는 성경 이야기이며, 이야기 신학처럼 성경 이야기와 모든 문화의 이야기를 같이 중시하지 않는다.

또한 서사 신학도 역사적 예수 구성을 정립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 이야기가 사실적 서술에서 우리에게 어떤 도리를 말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다. 그래서 요점은 성경이 말하는 것이 진실인가? (What the Bible say is true?) 성경이 진실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가? (What the Bible truly say? )이다.

조지 린드벡(Geroge A. Lindbeck) 은 ‘교리의 본질: 자유주의 이후 시대의 종교와 신학(The Nature of Doctrine: Religion and Theology in a Postliberal Age)’의 마지막 부분인 ‘자유주의 이후의 신학을 향하여(Toward a Postliberal Theology)’에서 "문화 언어학"(the cultural-linguistic)이라는 인식으로 종교 교의의 본질을 새롭게 이해한다.

그는 "명제와 인지"(the propositional-cognitive) 및 "경험과 표현"(the experiential-expressive)으로 종교를 이해하는 것은 잘못이며, 우리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이 필터를 통해 결정된다는 것을 잊거나, 언어의 필터가 경험을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경험보다 먼저라는 것을 잊고 있다는 것이다.

문화 언어학(the cultural-linguistic)의 관점에서, 종교는 일종의 문화 언어학의 틀 혹은 중개자로 사람들의 생활과 사상에 영향을 준다. 종교는 말과 형상이 있어야 종교 사상과 확신이 생긴다. 말과 형상이 있어야 사상이 생기고, 말이 없으면 종교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외적인 언어로 우리의 종교경험을 형성한다. 그래서 우리가 누구냐고 물으면, 사실 우리는 공통 종교의 세계관에 얽매게 된다. 이것은 단지 우리가 보는 것을 결정하는 필터만의 문제가 아니다. 필터는 의미를 확정하고 또한 우리가 보는 것에 그 의미를 부여한다. 종교적인 언어와 이야기는 우리가 사는 세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조지 린드벡은 우리가 받아들인 종교 언어와 우리가 가진 종교적 경험을 형성하는 것이 필터이자 망원경이라고 하며, 의미를 정할 뿐만 아니라 우리가 보는 것에 의미를 부여한다. 린드벡은 모든 종교는 서로 다른 경험을 가지며, 종교의 자극이나 경험은 다양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각 종교는 각각의 방식으로 동일한 경험을 설명하지 않고 각각의 방식으로 다른 경험을 설명한다. 그러므로 종교의 차이는 한 종교의 언어를 다른 종교의 언어로 번역하려고 시도한다고 해서 이해되는 것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각 종교에서 언어 이면에 있는 문화는 번역할 수 없으며, 이는 넘을 수 없는 한계다. 불교의 언어는 기독교의 언어가 될 수 없다. 종교의 핵심 가치인 ‘사랑’이라는 언어로 말하자면, 종교마다 다른 의미를 지니고, 종교의 단어는 자신의 언어 체계 안에서만 의미가 있다.

이야기 신학과 서사 신학의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이야기는 일반적으로 고통받는 대중의 공통된 마음을 표현하고 심지어 신학이 이야기를 고쳐 쓰는가 하면 이야기가 신학을 바로잡을 수도 있다. 송 목사가 2011년 쓴 영문서 ‘옛날 옛적에 이야기가 있었다 (In the Beginning Were Stories, Not Texts: Story Theology)’는 이런 심도 있는 견해를 제시한다.

책에서 예수가 아브라함의 자손을 돌로 일으켜 세우겠다고 한 것은, 야곱을 사랑하는 이스라엘 하느님 신학, 곧 관방 족장 신학을 해체하라는 의미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예수의 신학은 이스라엘 관방 족장 이야기를 재구성했다. 하느님은 야곱을 사랑하고, 또한 에서를 사랑했고, 하느님은 그리스도인을 사랑하고, 비그리스도인을 사랑했다.

요나의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니느웨 성 전체가 뉘우치자 하느님은 다시는 심판하지 않겠다고 마음을 바꾸셨다. 이때 요나는 자신의 선택 신학 때문에 이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하느님은 이스라엘 백성과 니느웨 성 백성들을 같이 사랑한다. 우리는 또한 안식일에 예수가 병을 고친 이야기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안식일 신학을 바로잡은 것을 안다. 안식일 신학으로는 하느님도 안식일 율례를 지켜야 하지만, 안식일 이야기에서 예수는 병자를 치료했다. 안식일 이야기가 안식일 신학을 바로잡거나 재해석한 것이다.

이야기의 경계를 넘어: 아시아와 세계 신학의 융합

송 목사는, 이야기는 곧 사람이 사랑을 찾고 희망을 찾는 것이라 생각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 크로니클의 편집자 알리시카 파렛(Alicia Parlett)이 2000년에 유방암에 걸린 이야기를 예로 들어 야이로의 딸을 치료한 마가복음 5장을 설명한다.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는 한 여인이 예수의 옷을 만져서 치료 받았다.

알리시카 파렛은 고난을 통해 하느님의 궁극적 은혜를 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경보 공익 활동에 계속 참여할 것이며 믿음과 희망으로 살아갈 것이라고 했다. 성서의 옛 혈루증 여인과 오늘날의 알리시카 이야기에서 사랑과 희망은 언제나 고난의 위안이었다.

또 송 목사는 인도네시아 포소족의 이야기를 인용해, 성서의 아담, 이브의 이야기에 빗대 죄의 의미를 해석했다. 이야기에서 태초에 하늘과 땅이 멀지 않아 조물주가 밧줄로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선물을 내렸다. 어느 날 조물주가 인간에게 돌을 선물하였으나 남녀의 시조는 원하지 않았다.

그러자 조물주는 돌을 다시 끌어 올리고 바나나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바나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수명이 바나나와 같게 되고, 바나나 나무에서 바나나가 열리면 어미 가지는 죽는다고 했다. 만약 그들이 처음부터 돌을 선택했다면 그들의 생명은 돌처럼 영원할 것이었다. 포소의 이야기에서 인류는 바나나를 선택하여 먹은 후 결국은 사망에 이르게 된다. 창세기에 나오는 선악의 생명나무와 흡사한 이 이야기는 인간이 자유의지의 선택으로 하느님을 떠난 것을 말한다.

이야기 중에는 변화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다. 인류의 비극이 하늘의 기쁨으로 바뀌기도 한다. 송 목사는 힌두교의 옛 경전인 리그베다의 기도문을 기독교의 떡과 술의 성찬과 연관시켰다. 리그베다의 기도문에는 "우리는 소마주를 마셔서 영원히 죽지 않게 되었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었다"고 되어 있다.

소마는 산스크리트어로 압착을 의미하며, 버섯 음료 일종이기도 하며, 상상력의 원천이다. 즉, 소마를 마신 후 불가사의한 현상이 나타나거나, 소마를 제사 중 화염에 부었을 때 연기가 신에게까지 닿을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소마주는 성찬주와 마찬가지로 신성한 물질로 변해 영원한 생명을 가져다준다.

송 목사 역시 예수의 모습이 바뀐 이야기로 변화에 대해 이야기했다. 순결의 변신 이야기는 하느님의 사랑하는 아들 이야기로 변화된다. 혹은 제자들이 교회의 지도자로 변신한 이야기, 그 이야기 속에 변화의 힘이 담겨 있음을 말한다.

송 목사는 이야기란 일종의 실천신학이라고 말한다. 유태인이 그들의 고난의 역사를 서술할 때 고난의 역사를 경축의 이야기로 바꾸어 기념한다. 이 경축 이야기가 세대와 세대를 이어 민족의 이야기 신학이 된다. 그 후손의 후손들은 이야기로 생존의 능력, 공동체의 의미, 그리고 민족의 한 개체로써의 책임을 감당한다.

『대만 문화 구축을 위한 신학』에서 송 목사는 다음과 같이 마쳤다.

내가 이런 식으로 아시아 이야기를 읽었을 때 나는 더 이상 이야기의 방관자가 아니라 내부자가 된다. 예수의 이야기, 하느님의 나라 이야기는 그 이야기들 속에 풍부하게 반영되어 있다. 그 이야기들 역시 예수의 이야기, 하느님의 나라 이야기에 충분히 반응한다. 그러나 두 개 서로 다른 이야기를 어떻게 공통적, 공감적인 인류 보편 경험으로 조합할 수 있을 것인가?

송 목사는 또 말한다.

나는 이 두 이야기를 조화시키기 위해 하나의 신학적 구조를 가정할 필요가 없다. 나는 또한 둘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기 위해 신학적 규범과 범주를 만들 필요가 없다. 더욱이 하나의 표준을 확립해 ‘정확’하게 두 그룹의 이야기를 선택함으로써 그것을 ‘신학화’ 할 필요가 없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편견 없는 신학적 영성이고, 교회 밖의 아시아 이야기에 대한 선입견을 갖지 않는 것이다.

존경하는 송천성 목사께, “어느덧 스승으로 모시고 평생토록 은혜를 입었다”고 이 글을 빌어 말씀드린다. 또한 나는 신학 여정 중에 에큐메니칼 신학자들의 "영웅들의 생각은 대체로 같다"는 모습을 계속해서 보았다. 특히 송 목사를 통해 "거장은 확실히 특출나다"는 사실을 몸소 체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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