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재 목사의 농신학에 대하여
한경호 목사(한국농신학연구회 회장) 2023년 1월 30일 세미나 발제(비대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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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들어가는 말
이영재 목사는 우리나라 신학계에서 ‘농’(農)을 열쇠말로 삼으며 구약성서를 해석한 최초의 학자이다. 단편적으로는 언급한 분들이 있지만, 이렇게 일관되게 서술한 학자는 처음이라는 말이다. 아마도 세계적으로도 드문 일이 아닌가 생각된다. 서구는 농경사회에서 벗어난 지 이미 오래되었고, 농을 다룬다고 해도 오늘날의 상황을 반영한 생태적인 측면에서의 접근이 아닌가 싶다(웬델 베리 등). 우리나라에서도 지식인 사회에서는 오늘의 도시산업문명을 당연시하면서 농은 이미 역사발전의 뒤로 밀려난 퇴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최근 기독교계 내에서 이런 시각에 반기를 드는 농신학(農神學) 활동이 태동되었다. 생태신학 등 생명의 문제를 신학의 화두(話頭)로 삼는 영역은 있어도, 그 바탕에 있는 농(農)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이런 움직임이 왜 발생했을까?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겠다.
첫째는, 도시 중심의 현대산업문명이 직면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보다 근본적인 통찰과 사유가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이다. 과학기술 중심의 도시산업문명이 초래한 생태계의 위기는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계 전체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는 바, 그를 극복하기 위한 의식이 싹트면서 인간존재의 근원성과 자연생태계와의 정의로운 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인간 생존의 절대적 요소인 식량생산 토대로써의 땅과 농에 대한 근본적 인식의 전환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바로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하고 있다고 믿는다. 특히 구약의 원역사(창 1-11장)는 오늘 위기에 처한 인간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고 근원을 바라볼 수 있는 안목을 제시해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둘째로, 이러한 성서읽기는 그동안의 주류신학인 구속신학을 탈피하여 창조신학과 신앙고백으로 나아가게 만들 수 있다는 생각이다. 농신학이 구약성경 특히 창세기에 대한 재해석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필연코 하나님의 창조정신과 오늘의 문명과의 관련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구속신앙 일변도로는 오늘의 위기에 대한 답을 줄 수 없는 것이다. 구속신앙은 창조신앙에 의하여 제 위치를 다시 찾을 때에 그 참된 본연의 모습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창조와 구속, 이 두 개의 신학적 기둥을 농신학의 입장에서 결합시켜야 한다는 문제의식이 있는 것이다.
셋째로는, 하나님의 정의는 바로 가장 밑바닥에 있는 민중의 삶의 회복과 직결되어 있다는 문제의식이다. 이스라엘민족사의 출발이 노예를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공의에 입각해 있고, 바벨론 포로들을 해방시키시는 하나님의 역사섭리에 있으며, 갈릴리 민중들과 더불어 살면서 그들을 해방시켜 하나님 나라의 주체로 세우시고, 십자가에 처형된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민중을 생태적 측면으로 확대하면 민초(民草)라고 할 수 있다. 생명계의 가장 밑바닥에서 자연의 흐름에 자기 삶을 온전히 맡긴 채 모두를 먹여 살리려고 먹혀주는 것이 바로 이름없는 풀들이다. 역사 속의 ‘민중’은 생태계의 ‘민초’와 결합될 때에 그 의미를 온전히 획득할 수 있을 것이다. 투쟁적인 민중은 목숨을 내어주는 희생적인 민초의 영성을 가질 때에 모두를 살리는 구원자의 위상을 갖게 될 것이다. 예수는 생명의 떡으로 먹혀줌으로써 모두를 살리는 구세주가 될 수 있었다.
넷째로는, 한국 신학계가 낳은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의 맥을 살려나가려는 의지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민중신학이 형성될 때의 시대상황과 지금의 상황이 많이 다르지만, 그 한계를 극복하면서 근본 취지를 오늘에 살려야한다고 생각한다. 민중신학이 표방하는 성서적 증언은 오늘도 유효하기 때문이요, 산업화시대의 노동자보다는 목하 생명시대에는 그보다 밑바닥에 있으며 생명을 담지하고 있는 민중인 농민과 농업의 존재와 역할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이다. 이것은 사회경제사적, 계급적 측면으로부터의 탈피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토착화신학이 무속, 유, 불, 선 등 우리 민족의 심성 밑바닥에 흐르고 있는 종교적, 영적인 측면에 대하여 기독교신학과의 대화를 통해 많은 가르침을 주어 사고의 지평을 세계적으로 넓혀 주었으나, 민중과의 상호소통에는 진전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문제의식도 있다. 농은 역사적으로 늘 밑바닥에 있어 왔기에 통치이데올로기로 작용했던 종교, 사상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국면들이 있었다. 토착화작업을 통하여 사상적 진전은 있었으나, 그것이 민중의 삶속에 문화적으로, 삶의 양식으로 자리잡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생각한다.
민중신학과 토착화(문화)신학은 서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진지한 대화가 이루어져 왔는가? 기독교농민회의 정의운동과 정농회의 생명운동이 근본에서는 같은 토대에 있으면서도 시대상황에 대한 인식 차이와 현실적 이해관계로 상호 진지한 소통을 못했던 것처럼, 두 신학도 그렇지는 않았는지 모르겠다. “종교는 문화의 핵심이요, 문화는 종교의 외피이다”는 말이 있듯이 이제 기독교는 이 땅의 토착적인, 한국기독교로 정착해야 한다. 그 방향은 민중(초)지향적이어야 하고 그 민중에 의한 새로운 기독교민중생명문화가 창의적으로 나와야 한다. 생명의 바다에서 민중과 문화가 만나야 한다. 이 생명의 시대에 민중신학과 토착화신학은 농과 생명을 사상적, 실존적 토대로 삼으면서 상호 통전을 꾀하며 세계를 구원할 수 있는 지평으로 확대 발전시킬 수는 없는 것인가?
이영재 목사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갖고 농신학을 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에게 성경은 삶과 믿음의 토대이다. 성서신학은 바로 이 성경을 일정한 입장을 갖고 해석하는 신학이다. 따라서 그 성경을 어떤 눈으로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이런 의미에서 이영재 목사의 농의 눈으로 보는 성서 해석은 매우 유의미하다.
성경은 시공을 초월하는 절대의 말씀이지만 시대상황 속에서는 시공에 제약되고, 인간의 언어와 사고체계의 틀 속에 갇혀 상대화된다. 함석헌 선생의 말로는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입안에 있을 때는 절대이지만 인간이 두 손에 받쳐 드는 순간 상대화된다.” 따라서 어떤 신학을 마치 절대의 것인 양 맹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며, 또한 민중신학, 토착화신학, 농신학 등을 단순히 상황신학이라고 평가절하 하는 자세 또한 바람직하지 않다. 나아가 그런 자세는 서구신학을 기준으로 우리 신학을 판단하는 사상적인 식민지 자세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신학은 나라마다, 시대마다, 상황마다 그에 맞는 새로운 꽃을 피울 수 있고, 그래서 다채로운 사상적 정원을 만들어 볼 수 있다. 농신학 역시 그런 작은 역할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이 글은 이영재 목사가 남겨놓은 유고(遺稿)를 중심으로 쓴 글이다. 이 목사 살아생전에 농신학과 관련된 글은 계간 『농촌과목회』지에 실렸다. 그런 내용의 글을 실어 줄 마땅한 매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2007년도부터 2020년도까지 10여년에 걸쳐서 36편의 글을 실었다. 적지 않은 분량이다. 만일 좀더 살았더라면 보다 체계를 잡고 내용을 갖춰서 본인에 의한 농신학 책이 나왔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아쉬운 일이다. 이 글의 내용은 그러므로 유고에 한정되어 있으며 그것도 필자가 성서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비평보다는 전체의 내용을 요약 압축해서 그의 주장을 드러내주고, 약간의 보완과 비평, 그리고 농신학의 과제를 생각해보는 데에 한정하고자 한다.
2. 이영재 농신학의 출발 – 창세기 원역사
창세기는 주지하듯이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지으신 창조주이심을 기록하고, 구원사를 위해 선택받은 족장들의 생애를 기록한 책이다. 앞부분 1-11장까지의 원역사는 모든 것의 기원을 설명해주고 있다. 우리는 먼저 인간의 기원부터 생각해보고자 한다.
1) 인간론 – ‘농인’(農人)의 창조
인간이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겨났는가? 이영재 목사는 창세기에 의거하여 사람은 하나님의 힘(노동), 흙, 물, 숨 등 네 가지 요소가 합하여 생령이 된 존재라고 말한다. 흙을 물로 반죽하여 하나님의 숨(너샤마)을 불어넣어 만들어진 존재이다. 숨은 하나님과 소통하는 통로이며, 사람이 살아있게 만드는 결정적인 요소이다. 요약하면 “인간은 하나님의 숨을 쉬는 생명체로서 땅의 사정을 잘 알아서 하나님께 알려드리고, 성령의 능력으로 살아가며, 하나님의 운동과 하나가 되어서 창조사역에 동역하는 존재이다.” 생물진화의 관점에서 보면 인간에게 와서 나타난 두드러진 특징은 직립과 두뇌화 현상(뇌용량의 증가)이다. 직립과 더불어 의식작용이 복잡화되는 현상(consciousness complexity)으로 인해 하늘(하나님의 숨)과 땅(흙)을 하나로 연결할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인간은 무엇 때문에 무슨 목적으로 그렇게 지음을 받았는가? 이영재 목사의 농신학적 인간론은 창세기 2장 5절 “여호와 하나님이 땅에 비를 내리지 아니하셨고 땅을 갈 사람도 없었으므로” 의 말씀과 15절의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5절의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말은 영어(NIV)로는 there was no one to work the ground이며, 15절 말씀은 The LORD God took the man and put him in the Garden of Eden to work it and take care of it으로 번역되어 있다. 여기에서 it는 대부분의 한글번역본들이 에덴을 가리키는 것으로 번역하고 있는 데 이영재 목사는 it가 언어학적으로 아다마(흙, 땅)를 가리킨다고 주장하고 있다. 어느 것이든 생명지킴이, 생명돌보미로서의 속성이 담겨있다고 생각된다.
라고 하신 두 절에 크게 근거하고 있다. ‘땅을 갈 사람이 없었다’는 말씀은 인간의 의미와 목적이 무엇인지를 말해주는 것으로, 인간의 역할과 소명이 땅을 가는 존재로 지으심을 받았다고 해석한다. 15절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한다. ‘그것’은 땅(아다마)을 가리키며, ‘경작하다’는 말은 히브리어 ‘아바드’(섬기다, 노동하다)로 땅을 섬기게 하셨다는 말이다. 지킨다는 말은 ‘샤마르’이며 땅을 지킨다는 말이다. 요즘 세계교회협의회(WCC)가 말하고 있는 에코-디아코니아(Eco-diakonia)의 개념이 사실은 창세기의 인간 창조 이야기 속에 이미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그는 15절을 “하나님께서 사람을 데리고 에덴동산에 편히 살면서 흙을 살리며 흙을 보전하는 일을 시키셨다”고 해석한다. 이 말씀을 좀더 확대 해석하여 인간은 땅을 갈면서 땅에서 나는 뭇 생명들을 살리고, 돌보고 지키는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고 본다. 이것은 인간이 타자를 위해 일하도록 지음 받았다는 말이기도 하다. 이영재 목사는 동사 ‘아바드’의 개념을 ‘자신의 존재를 투여하여 타자를 이롭게 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농신학회에서는 이 태초의 인간을 ‘농인’(農人, Homo Colens)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인간에 대한 농신학적 정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은 하나님과 함께 생명을 살리는 농인으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두 번째로, 인간이 땅을 가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는 말은 하나님의 창조 작업의 지속적인 진행을 위한 존재로 지음을 받았다는 뜻이라고 본다. 하나님이 천지만물을 창조하시고 일곱째 날에 쉬셨지만, 들판이나 산야에는 아직 식물들이 다 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창조의 작업은 이후에도 진행되었는데 그 소명을 인간에게 주셨다는 말이다. 인간은 하나님의 생명창조의 조력자로서 모든 타자를 살리는 일을 하도록 지음 받았다.
2) 농인의 타락
하나님은 에덴동산 안에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두시고 다른 열매는 다 먹되 그 열매는 먹지 말도록 금하셨다. 그런데 사람이 그 열매를 따먹고 말았다.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한 것이다. 본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상에는 그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에서 보듯이 악이 없는 곳인데, 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선과 악을 판단하는 또 다른 주체가 생기데 되어 악이 이 세상에 들어오게 되었다. 이 말은 인간이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계를 자기중심적인 눈으로 보고 판단하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하나님 중심으로 사고하는 눈을 상실한 것이다. 이것이 최초의 인간 농인(農人)의 타락이다. 하나님과 함께 평화롭게 살 수 있는 삶의 길을 스스로 버린 것이다.
그 결과 인간은 에덴동산에서 추방되고 말았다.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서 그 사람을 내보내어 그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창 3:23)고 하셨다. 그리고 하와에게는 “내가 네게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창 3:16절)하고 하셨고, 아담에게는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 3:19절)고 하셨다. 먹을 걱정, 입을 걱정 등 아무 걱정 근심 없이 살 수 있는 낙원에서 쫓겨나, 이마에 땀을 흘리고 땅을 갈면서 살도록 된 것이다. 노자(老子)의 말로 하면 태초의 인간의 모습은 통나무와 같다. 인위의 손길이 전혀 닿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다. 도(道)의 경지에 오른 사람을 통나무와 같다고 표현하며 선과 악, 나와 너, 이것과 저것 등 사물을 둘로 나누어보는 구분의식을 넘어선 존재이다. 자기 욕망과 의지에 의한 구분의식으로 인해 불행이 시작된다. 장자(莊子) 역시 사물을 둘로 나누어보는 구분의식과 시비지심(是非之心)이 도(道)에 이르는 데에 가장 근본적인 장애라고 말하고 있다.
이 구절에 대한 농신학적인 설명은 어떤가? 이영재 목사는 창세기 3장 23절의 뜻을 “삶의 목적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먹고 살면서 육체의 결핍을 충족시키기 위한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것이 ‘자신의 근원이 된 땅을 갈게 하시니라’라는 말씀의 뜻이다.” 라고 해석한다. 에덴동산 안에서 땅을 가는 것은 먹을 걱정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하나님의 창조사역에 순종하는 것이었던 반면, 추방된 이후에 땅을 가는 것은 먹을 걱정에 얽매여 자기소욕을 위해 살게 된 것이라는 말이다.
여기서 우리는 선악을 구분하는 주체자가 된 인간이 땀 흘려 노동하여 식량을 얻어야하는 고통, 즉 식욕(먹고사는 일)에 얽매여 살아야 하는 존재로, 그리고 성적인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후손을 낳는 고통을 겪어야 하는 존재로 전락하였음을 알 수 있다. 범죄 이전에 아담과 하와는 ‘나’와 ‘너’의 구별이 없는 하나의 존재였고, ‘내 것’, ‘네 것’이라는 소유의식도 없었으며, 성적인 욕망도 발휘되지 않는 상태였지만, 이후에는 나의 육신을 위한 ‘식욕’과 나의 쾌락을 위한 ‘성욕’을 충족시키며 살아가는 존재로 전락하였다는 말이다. 식욕과 성욕은 생물진화의 역사에서는 본능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것 없이 생존과 진화는 불가능하다. 진화의 정점에 서있는 인간에게는 이 30억년 진화 과정의 무거운 짐이 ‘욕망’으로 지워져 있다. 이 짐을 벗어나는 것이 인간에게 와서 가능해지기는 했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뛰어난 종교인들에게서 나타난 현상이요, 거의 모든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러한 본능의 세계를 성경은 신화적으로 설명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타락한 농인 아담의 잘못은 그 아들 가인에게 그대로 이어졌다. 가인 역시 농부로 살았으나 아버지의 죄를 이어받아 땅을 자기 육신의 소욕을 채우려고 이용하는 이기적인 존재가 되었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자기 농사에 끌어들여 이용하려고 했다. 타락한 농인은 이제 지구 전체의 땅을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육(肉)을 구성하고 있는 한줌 흙을 위해서 사는 존재로 전락한 것이다.
3) 농사(農事) 여기서의 ‘농사’는 ‘땅을 가는 일’의 우리말 표현이다. 히브리어로는 <하라쉬>이다. ‘농업’은 산업으로써의 경제중심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되어 이 말을 썼다. 에 대한 성경의 이해
위의 설명에서 보듯이 에덴동산 안에서의 농사와 밖에서의 농사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동산 안에서의 농사가 하나님과 함께 생각하고 순종하면서 행한 창조의 사역이라면, 에덴동산 밖에서의 농사일은 범죄이후 주어진 것으로 육(肉)을 위한 활동이다. 이제 타락한 농인은 흙을 위한 존재가 아니라 흙을 이용하고 착취하는 존재로 전락하였다. 하나님은 아담의 범죄 후 “네가 네 아내의 말을 듣고 내가 네게 먹지 말라 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은즉 땅은 너로 말미암아 저주를 받고 너는 네 평생에 수고하여야 그 소산을 먹으리라”(창 3:17)고 하셨고, 가인이 범죄 후에는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고 하셨다. 따라서 성경에 의하면 농사는 타락한 인간에게 죄의 결과로 주어진 것이다. 농사에 대하여 긍정적인 표현이 성경에 거의 나오지 않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이 목사는 주장한다.
성경의 이러한 입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농신학의 입장에서는 타락한 농인에게 초점을 맞출 것이 아니라 범죄하기 이전, 태초의 농인에게 맞추어야할 것이다. 타락한 농인의 후예로서의 자신을 반성하고 돌이켜 태초의 농인을 회복하기 위하여 신앙적으로 결단하고 실천해나가는 존재로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 진정한 농인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땅과의 올바른 관계, 즉 땅의 생명을 살리고 땅에서 자라는 모든 생명체들을 돌보는 관계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 – 인간 – 자연생태계와의 관계를 정상화해야 한다. 에덴동산에서의 농사로 돌아가는 것이다.
4) 타락한 농인(農人)의 또 다른 모습 – 형제 살인
하나님의 숨을 받지 못하고 이기적인 존재가 되어 육(肉)을 위해 살게 되고, 영생의 삶을 잃어버리고 죽음을 맞게 된 타락한 농인의 죄악은 후손에게로 세습되었다. 맏아들 가인이 아버지 아담의 농사일을 계승하였다.
가인의 살인 범죄를 이해하려면 먼저 고려해야할 사항이 있다. 가인의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후 아담이 ‘그 아내와 동침하매’(창 4:1)라는 말이 나오는 데 그것을 이 목사는 직역하여 “그 남자가 자기의 여자 하와를 알았다”로 해석하면서 소유의 관념이 인간에게 발생했다는 점을 지적한다. 선악을 가르는 구분의식은 ‘나’와 ‘너’를 구분하고 결국 ‘내 것’과 ‘네 것’을 가르는 소유욕으로 나아간다.
부부관계가 서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소유욕에 바탕한 관계로 전락한 가운데 태어난 자식이 가인이다. ‘가인’이라는 낱말의 뜻도 ‘획득/ 소득’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이 소유욕이 가인을 통해 인간 전체에게 계승되었다고 본다. 가인은 소유관념의 첫 생산물이다. 반면 ‘아벨’의 뜻은 허무이다. 여기에는 아벨이 허무한 육의 욕심을 채우려는 목적으로 살지 않았다는 뜻이 담겨있다고 이 목사는 보고 있다. 죄를 계승한 가인의 반대편에 부모의 죄를 극복하기 위한 또 다른 아들의 존재가 있었다는 말이다.
가인은 자신의 육적인 욕망을 위해서 흙을 이용하고 심지어는 하나님까지 욕망충족의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그 제물이 하나님께 받아들여질 수 없었다. 반면 아벨은 ‘양을 먹이는 자’ 즉 다른 생명을 기르고 살리는 사람이었으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양의 맏배와 그 기름을 제물로 드렸다. 자기중심적이고 소유욕에 사로잡힌 가인의 제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한 제물, 이 둘 중에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을 받으셨다. 따라서 이 목사는 가인을 농경민의 대표자로 아벨을 유목민의 대표자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못 박고 있다. 학자들 중에는 가인을 농경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아벨을 유목문화를 상징하는 존재로 해석하여 유목전승을 갖고 있는 이스라엘인들이 가나안에 들어와 농경문화와 충돌하면서 유목문화의 우월성을 표현하려는 의도가 있다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이로 인해 가인의 분노가 폭발하였다. 자신을 위해서 살아가는 타락한 농인이 자신의 존재감이 짓밟히고 인정을 받지 못하였을 때 분노가 폭발하였다. 불교에서는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도록 하는 장애물을 3독(毒)으로 인한 번뇌라고 한다. 탐(貪, 탐욕), 진(瞋, 분노), 치(癡, 어리석음)이다. 탐욕은 그칠 줄 모르는 욕망, 자신의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는 망상, 남이 자신을 인정해주기를 바라는 갈구이다. 분노의 바탕은 반항심이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데서 일어나는 반항심, 허망한 자존심에 상처를 받는 데서 일어나는 반항심이다. 어리석음은 자신이 얼마나 탐욕스럽고 매사에 얼마나 화(火)를 잘 내는지 자각하지 못하고, 그 탐욕과 분노의 발생과 소멸에 대해 알지 못하는 것이다.
결국 아벨을 자신의 경쟁자로 보고 그의 존재를 없애버리는 살인 행위를 하였다. 이것은 인간의 삶을 또 다시 불행으로 빠뜨린 사건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한 부모의 죄에 더하여 이웃(형제)와의 관계를 파괴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다.
5) 타락한 농인이 걸어간 길 ① – 도시의 건설
가인이 아벨을 죽인 이후 그는 어떤 인생길을 걸어갔는가? 가인의 폭력으로 땅에 피가 흘렀다. 사람의 피를 머금은 땅은 생명력을 상실하였다. 소통과 사랑의 관계가 파괴되자 땅도 사람과 소통하며 사람을 섬기고 사랑하는 애초의 고유한 능력을 상실하고 만 것이다. “네가 밭을 갈아도(농사를 지어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창 4:12). 이 말씀 속에 농사가 왜곡된 까닭이 들어 있다. 그 결과 가인은 땅을 떠나게 되었다. “너는 땅에서 피하여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땅에 삶을 맡기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랑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자기의 땅에서 소외된 인간의 슬픈 모습이다.
가인은 하나님을 떠나고 땅으로부터 버림받는 길로 나아갔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 동쪽 놋땅에 거주하더니 아내와 동침하매 그가 임신하여 에녹을 낳은지라 가인이 성을 쌓고 그의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니라”(창 4:16-17). 결국 가인은 자신의 가족을 스스로의 힘으로 보호하기 위해 성(城)을 쌓았다. 이것이 인간이 세운 첫 번째 도시이다.
도시의 기원에 대한 이 성경 말씀의 뜻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도시의 건설이 인간의 죄성(罪性)과 긴밀한 관계 속에서 이루어졌다는 말이다. 첫째는, 아벨을 살해한 범죄요, 둘째는, 죽임을 면하게 해주시겠다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창 4:15)을 어기고 자기 스스로 죽임을 면하기 위해 성을 쌓은 불순종이다. 하나님, 이웃, 땅, 세 관계가 파괴된 후 자구책으로 세운 것이 도시이며, 도시문명이다. 따라서 도시는 인간중심적일 수밖에 없으며, 자기욕망 충족적일 수밖에 없는 속성을 지니게 되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폭력을 일삼게 되어 전쟁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이후 도시문명은 어떤 길을 걸어왔는가? 세속역사에서는 도시문명이 농업혁명 이후에 발생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약 1만년부터 시작된 농업혁명은 사람의 생활양식을 서서히 변화시켜 이전의 떠돌이 생활에서 한 곳에 거주하는 정착생활을 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농업혁명 초기의 인류는 농업을 통하여 식량을 비롯한 삶의 조건이 향상되어 좀더 안정된 삶을 누리기를 바랬다. 그러나 식량생산이 점차 증가함에 따라 집단 거주자의 숫자도 증가하였고, 인구가 증가하면서 종교적으로 그들을 다스리는 제사장이 나왔으며, 이후 통치자가 등장하였다. 통치자들에 의한 권력의 출현은 사람들의 삶에 질곡이 되었다. 이영재 목사는 이 통치자들을 타락한 농인으로 본다. 타락한 농인들 중에 힘 있는 사람이 나와 성을 쌓고, 생산물을 독점하면서 지배계급을 형성하였으며,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일반 농부들은 노예로 부렸다. 세금, 군역, 부역 등을 통해 억압과 수탈을 일삼았다. 또한 끊임없이 발생하는 전쟁으로 인해 사람들의 생활은 고난 그 자체였다. 전쟁에서 승리하면 영토를 빼앗고, 재물을 약탈했으며, 패전국의 사람들은 모든 것을 잃고 노예가 되었다.
집단과 사회의 규모가 커지고 도시국가로 성장하면서 왕권체제가 수립되었다. 이것은 전 지구적인 현상이다. 인류가 민주적인 체제를 갖추고 백성이 나라의 주인으로 행세하기 시작한 것은 불과 200년 안팎이다. 아직도 군주제를 취하고 있는 나라들이 있으며, 독재권력이 지배하는 나라들도 많다. 오늘도 여전히 대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국가주의 체제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그러나 세계는 이미 경제교류와 생태계와의 관계에서 국경이 무너지고 있다. 이 국가주의의 한계 속에서 인류는 여전히 불안한 삶을 살고 있다. 양차(兩次)세계대전, 수많은 국지전들, 오늘도 겪고 있는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 등 도시문명과 그에 기반한 국가주의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을 던지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이영재 목사는 성경의 도시문명에 대한 기술을 통해 오늘의 도시문명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가하고 있다.
6) 타락한 농인(農人)이 걸어간 길 ② – 육식과 무기 생산
도시가 건설되면서 인류사회에 새롭게 들어온 것들이 있다. 육식과 쾌락문화와 무기생산이다. 가인의 5대손인 라멕에 대한 성경의 기록을 보자. “라멕이 두 아내를 맞이하였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 아다는 야발을 낳았으니 그는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의 이름은 유발이니 그는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는 두발가인을 낳았으니 그는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요 두발가인의 누이는 나아마였더라”(창 4:19-22)
라멕의 아들 야발은 성 밖에서 가축을 쳤는데 그 가축은 성안의 지배계층에게 고기를 공급하기 위한 것이었다. 권력자는 성을 다스리는 관료들, 치안과 안보를 위한 군인들을 양성하였다. 이들은 농업혁명을 겪으면서 농인으로서의 인간 본연의 역할과 소명에서 완전히 일탈한 계층이다. 그들은 체제유지와 강화를 위해, 그리고 쾌락을 위한 수단(수금과 퉁소)과 식도락을 위한 음식이 필요하였다. 그 대표적인 음식이 바로 고기이다. 가인의 6대손인 야발이 바로 그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영재 목사는 “ ‘가축을 치는 자’란 히브리어로 <미크네>인데 이것은 ‘획득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가축이나 재산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축산을 하면서 소유개념이 더 발달하였다”고 말한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태초에는 육식을 주지 않으셨다.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온 지면의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씨가진 열매 맺는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의 먹을거리가 되리라”(창 1:29). 에덴동산 안에 있는 각종 나무의 열매들이 주식이었다. “여호와 하나님이 그 땅에서 보기에 아름답고 먹기에 좋은 나무가 나게 하시니”(창 2:9)라고 하셨고, 땅을 갈게 된 후에도 곡식과 채소를 먹도록 하셨다.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낼 것이라 네가 먹을 것은 밭의 채소인즉”(창 3:18)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아담과 가인의 타락이후 도시문명의 건설과 함께 육식이 인간 식생활 속에 들어오게 되었다. 축산은 이처럼 도시문명의 발달과 관련이 깊다. 고기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좋아하는 음식인데, 그것은 살생의 본성과 맞닿아있다. ”나의 상처로 말미암아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말미암아 소년을 죽였도다.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 배 일진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 배 이르리로다 하였더라“(창 4:23-24). 도시는 상처를 입히고 죽이는 살생의 장소가 되었다. 도시, 육식, 전쟁, 폭력, 살생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참된 농인은 육식을 금해야 맞다. 불교에서 살생을 금하고 있고 육식을 권장하지 않는 것은 바로 살생의 본성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불교의 경우 승려와 재가신도들이 지켜야할 오계(五戒)가 있는 데 그 오계의 첫 번째가 바로 “생명을 죽이지 말라(不殺生)”는 불살생계(不殺生戒)이다. 이 계는 다른 생명 전체에 대한 비폭력(ahimsa) 선언이다.
육식동물의 경우 장(腸)의 길이가 짧고 성질이 급하고 사나우며 공격적이고 포악하다. 사람 역시 육식을 좋아하고 많이 하면 그런 성질이 강화된다. 따라서 육식은 인간 자신의 평화로운 영성을 위해서도 삼가는 것이 좋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나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육식을 금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영양학을 말하는 책이 아니다.
이영재 목사는 더 나아가 고기를 생산하는 축산업에 대하여 가혹한 비판을 가하고 있다. “축산업은 죄다”라고 주장한다. 이 선언은 현대인들이 선뜻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도시생활과 육식에 익숙하고,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훈련받으며 국가주의 체제 안에서 성장한 현대인들이 도시문명과 육식생활에 대한 비판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깊이 생각할 점이 있다. 육식을 당연시 하고 오히려 영양관리와 건강 유지에 필요하다고 권장하는 것이 정말 성경적으로, 신앙적으로 맞는 것인가? 축산업을 농민들의 생계 및 이익추구와 관련하여 경제중심적 관점에서 보는 것이 과연 성경적으로 맞는 것인가? 돌아볼 필요가 있다. 오늘날 종교를 떠나서 채식주의자들이 증가하고 있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도시의 건설이 인간의 죄성과 관계가 깊고, 도시생활 속에서 타락한 농인들에 의해 이루어진 육식생활 역시 인간의 죄성과 관련이 깊을 수밖에 없다. 육식은 인간 본성 속에 내재하고 있는 폭력성(살생)과 관계있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영적으로 거룩한 생활을 영위하는 데 장애가 된다는 점을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따라서 축산에 대한 이영재 목사의 선언을 오늘의 사회상황과 현실적인 이해관계에 비추어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성서신학적 견해를 밝히는 일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 이 목사도 오늘날 대규모화된 상업적, 기업적 축산에 대한 비판에 초점이 있는 것 같다. 농가에서 몇 마리 길러서 생활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것까지 문제 삼는 것은 아니다.
다음과 같이 쉽게 이해해보자. 즉,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말씀을 지당하게 받아들이지만 실천하지 못하고 사는 것처럼, 그래서 “말씀대로 살아야지” 하고 반성하면서 마음을 다지는 것처럼, 육식과 축산을 금하는 것이 하나님이 뜻이지만 그렇게 실천하며 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면서,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가능하면 육식과 축산을 절제하고 금하면서 살아야겠구나 생각하면서 살아가면 되는 것 아닐까?
다음, 라멕의 또 다른 아들 두발가인은 대장장이가 되어 각종 연장과 무기를 만들었다. 연장은 농사일을 효율적으로 하여 증산에 도움이 되었을 것이고, 무기는 치안과 전쟁에 쓰이는 도구였다. 식량 증산은 지배체제를 더욱 공고히 해주었고, 전쟁의 승리는 부를 축적하고 통치력을 넓히고 강화하는 또 다른 방법이었다. 전쟁은 살생의 행위이다. 가인의 분노로 인한 범죄가 전쟁을 통하여 확대 재생산되었다.
인간의 역사는 전쟁과 폭력의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죽고, 죽이고, 빼앗고, 빼앗기는 역사의 반복이었다. 그 원인의 밑바닥에 타락한 농인(農人) 통치자 및 지배 권력의 탐욕과 분노와 소유욕이 자리하고 있다. 그 역사는 최근까지 이어졌고, 현재도 진행 중이다. 우리나라 역시 과거 수많은 전쟁을 치루었고, 가장 참혹한 6․25 전쟁까지 겪었다. 이런 경험을 하면서도 어찌하여 인간은 도시문명과 전쟁, 그리고 각종 폭력에 대하여 별 문제의식 없이 살아오고 있는 것인가? 치안과 안보를 정치지도자에게 위임한 채 그들이 벌이는 전쟁과 폭력에는 눈감아오고 있지 않는가? 언제까지 이 도시문명 중심의 국가주의의 볼모가 되어 전쟁과 폭력을 용인하면서 살 것인가?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무력을 쓰면 반드시 그 댓가가 돌아오게 마련이어서 군사가 주둔하던 곳엔 가시엉겅퀴가 자라나고, 큰 전쟁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따른다.”(其事好還 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노자 도덕경 30장) “무기는 상서롭지 못한 것으로 군자가 쓸 도구가 아니다. 어쩔 수 없어서 쓸 때에는 염담(노예로 삼겠다든지, 영토를 빼앗겠다든지 하는 욕심 없이 하는 것이)이 상책이다. 이기는 것이 좋은 일이 아니건만 이를 좋아하는 것은 사람 죽이기를 즐기는 것이라.”(兵者 不祥之器 非君子之器. 不得已而用之 恬淡爲上 勝而不美 而美之者 是樂殺人, 노자 도덕경 31장)
6) 타락한 농인(農人)이 걸어간 길 ③ – 도시문명의 확산
가인이 세운 도시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창 6:4). 거인족들과 수많은 용사들이 태어나 도시문명의 지배자들이 되었다. 지면에는 점차 악이 번성하였다. “그 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하나님이 보신즉 땅이 부패하였으니 이는 땅에서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행위가 부패함이었더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이르시되 모든 혈육 있는 자의 포악함이 땅에 가득하므로 그 끝 날이 내 앞에 이르렀으니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1-13). 도시의 번성은 죄악의 관영이었고 그것은 땅의 부패로 이어졌다. 포악함은 폭력적 심리를 말한다. 결국 노아시대에 와서 도시문명은 하나님의 홍수 심판을 받고 멸망당하였다.
그러나 노아의 둘째 아들 함에 의해 도시는 다시 창궐하게 되었다. 창세기 10장 6-14절은 함의 자손에서 니므롯이라는 용사가 출현하였고, 이후 함의 자손들이 애굽, 앗시리아, 바벨론 같은 제국들을 건설하여 온 땅을 도시국가들이 뒤덮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결국 그들은 바벨탑을 건설하였으며 하나님의 언어혼잡 심판 이 심판은 예수 부활승천 후 오순절 다락방의 성령강림사건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한다.
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7) 술 문화의 시작
인간의 역사는 술과 함께 이루어졌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술은 언제 생겼는가? 성경에 의하면 노아가 술을 담아 먹은 첫 번째 사람이다.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창 9:20-21). 노아는 본래 당대에 의롭고 흠이 없는 사람이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이었다(창 6:9). 그래서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심판을 면하고 새 역사를 여는 첫 사람이 되었다. 그 노아가 점차 변하였다. 이영재 목사는 ‘농사를 시작하다’라는 히브리어 원어 <와약할 〜이쉬 하아다마>의 뜻이 ‘세상의 일상생활로 돌아가다’라는 뜻이라고 해석하면서 노아가 늙어가면서 점차 의인됨을 상실하고 조금씩 세속적인 사람으로 변했다고 말한다. 필자는 ‘농사를 시작하였다’는 말을 땅과의 관계를 회복한 사건으로 보았었다. 의인이었던 노아가 홍수심판 후 하나님의 역사를 새롭게 열어가면서 땅으로부터 저주받은 가인의 잘못을 포도농사를 통해 회복한 것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그것은 성서신학적인 것은 아니었고 문맥에 의한 필자 임의의 해석이었다.
‘흙의 사람’이 된 것이다. “노아는 영성이 쇠락하면서 흙을 살리는 생명의 농부가 아니라 흙을 착취하여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타락한 농인이 되고 말았다.” 노아에게 허락된 육식과 그가 생산한 포도주는 잘 아울리는 식품이었다. 그는 술에 취해 장막 안에서 발거벗는 주사(酒邪)를 부렸다.
3. 농의 눈으로 보는 족장사
이영재 목사는 족장사의 시작인 12장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는 말씀을 아브라함에 대한 귀농의 명령으로 이해한다. 아버지 데라가 메소포타미아의 대표적인 도시 우르(Ur)를 떠나 중소도시인 하란(Haran)으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죽은 후, 아브라함은 조카 롯을 데리고 하나님이 명하시는 땅 곧 가나안으로 귀농하였다(창 12:5). 그러나 가나안 땅은 이미 다른 족속들에 의해 선점되어 있었다. 그들은 도시국가의 주민들이었다. 세겜을 떠나 벧엘로 갔으나 거기도 머물 곳이 없었다. 귀농하려면 그곳 도시국가의 농민이 되는 수밖에 없었다. 아브라함은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남쪽으로 내려갔으나 네겝 사막도 아말렉 족속에게 점령되어 있었고, 가뭄이 극심하여 마침내 양식을 구하려 애굽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애굽 도시에서 아내 사라로 인해 겪은 폭력적 사건으로 다시 네겝으로 올라와 벧엘과 아이 사이, 처음 장막 쳤던 곳에 와서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다(창 13:2-4).
이후 아브라함과 롯의 가축이 불어나자 목동들 간에 우물 문제로 종종 분란이 일어나자 헤어지기로 하였다. 롯은 물질의 풍요를 쫓아 소돔성으로 들어갔다.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창 13:10). 롯이 보기에는 소돔과 고모라 성읍과 그 주변이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다. 물질적 풍요에 대한 그의 욕망이 눈을 가렸다. 도시문명 속으로 흡수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대로 남았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내가 너에게 모든 땅을 줄 것인데 자손 대대로 그 땅에 살 것이다”라고 약속하셨다. 물론 이 땅 약속은 당대에 이루어지지 않고 여호수아 시대와 다윗 왕국 시대에 성취되었다. 미래에 대한 땅 약속을 믿고 말씀에 순종하여 꿋꿋하게 지켜나간 아브라함의 삶과 신앙이 참된 농인의 모습이다. 롯은 재물이 약탈당하고 포로로 잡혀갔다가 아브라함에 의해 구출되는 사건을 겪은 후에도 다시 소돔성으로 들어가 살다가 후에 불심판을 당하여 패망의 길을 걸었다. 물질생활이 풍요로운 도시생활을 맛본 롯은 그 삶을 벗어나지 못했다. 롯은 도시를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존재가 아닌가 싶다. 도시로 이농한 롯과 그의 말로(末路), 그리고 도시 밖에서 귀농의 삶을 이어가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에 두고 살아간 아브라함과 이후 받은 축복, 이 두 사람이 걸어간 인생 역정은 오늘 우리에게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아브라함은 인생 행로에서 여러 고난을 겪었다. 애굽에 내려가 살 때에는 바로 왕에게 아내 사라를 빼앗기며 죽을 위험에 처했으며, 롯이 멸망당한 후 그랄 도성에 들어갔을 때도 또 사라가 폭행당할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이삭도 기근이 왔을 때 그랄 도성에 들어갔다가 추방당하는 봉변을 당하였다. 그가 도성 밖에서 씨를 뿌리고 농사를 지어 많은 수확을 거두어 부자가 되었으나(창 26:12) 블레셋 아말렉 왕과 도성 주민들에 의해 쫓겨난 것이다. 우물을 다 빼앗기고 마침내 아버지 아브라함이 정주하던 주변부 브엘세바로 밀려나고 말았다. 야곱의 인생은 어땠나?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에 살면서 고생하여 모은 재산을 형 에서에게 거의 다 빼앗기고 세겜성 외곽지대에 살면서 가축을 길러 세겜성에 공급하였다. 그러나 딸 디나가 세겜성에서 강간당하는 사건을 겪으면서 축산을 중단하였다. 이처럼 도시의 폭력체제는 하나님의 선택된 자녀들인 농인이 살기에는 부적합한 곳이었다.
4. 도시문명체제로부터의 탈출 – 출애굽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가족은 히브리인(하비루)이었다. 히브리인은 어떤 종족에 대한 명칭이 아니라 양식을 찾아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은 하비루(애굽의 토판문서에는 아피루)라고 불리웠으며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노동, 용병 등 어떠한 일이라도 하는 하층민들이었다.
이들은 이집트에도 많이 살고 있었으며 이스라엘도 히브리인이었다. 요셉이후 인구가 증가하면서 번성하던 히브리인은 후에 노예노동자로 전락하였다. 학자들 중에는 애굽이 힉소스족의 침략으로 점령당해 있을 때였기 때문에 요셉이 출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같은 셈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후 힉소스족이 애굽인들에 의해 밀려난 후 이스라엘이 탄압받게 되었다고 한다.
야훼는 주변 도시국가들과 달리 지배자들의 신이 아니라 그들에 의해 억압과 수탈을 당하는 노예들의 신이었다. 야훼는 도시국가체제 하에서 노예노동에 시달리는 하비루들을 해방시키기 위해 모세를 불러 지도자로 세웠다. 바로 왕은 노예를 절대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당시는 노예제에 바탕한 왕권체제였다. 그만한 노동력을 잃는 것은 국가 유지에 커다란 손실이었다. 하나님은 여러 재난을 겪게 하심으로 마침내 애굽에서 탈출할 수 있도록 섭리하셨다.
애굽의 농업은 나일강의 물을 인위적으로 끌어들여 이용할 수 있는 도구를 만들어 생산력이 크게 증대하였다. 그 모든 노동은 노예들이 담당하였다. 생산력의 증대로 왕권은 강화되었다. 요셉시대에는 가뭄이 장기간 지속되었을 때 백성들의 토지를 국가가 사들이고, 백성들은 농업노동자로 전락하였다. 긴 문장이지만 너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어서 인용해본다.
“기근이 더욱 심하여 사방에 먹을 것이 없고 애굽 땅과 가나안 땅이 기근으로 황폐하니 요셉이 곡식을 팔아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있는 돈을 모두 거두어들이고 그 돈을 바로의 궁으로 가져가니 애굽 땅과 가나안 땅에 돈이 떨어진지라. 애굽 백성이 다 요셉에게 와서 이르되 돈이 떨어졌사오니 우리에게 먹을거리를 주소서 어찌 주 앞에서 죽으리이까. 요셉이 이르되 너희의 가축을 내라 돈이 떨어졌은즉 내가 너희의 가축과 바꾸어 주리라. 그들이 그들의 가축을 요셉에게 끌어오는지라. 요셉이 그 말과 양 떼와 소 떼와 나귀를 받고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되 곧 그 모든 가축과 바꾸어서 그 해 동안에 먹을 것을 그들에게 주니라. 그 해가 다 가고 새 해가 되매 무리가 요셉에게 와서 그에게 말하되 우리가 주께 숨기지 아니하나이다. 우리의 돈이 다하였고 우리의 가축 떼가 주께로 돌아갔사오니 주께 낼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아니하고 우리의 몸과 토지뿐이라. 우리가 어찌 우리의 토지와 함께 주의 목전에 죽으리이까. 우리 몸과 우리 토지를 먹을 것을 주고 사소서. 우리가 토지와 함께 바로의 종이 되리니 우리에게 종자를 주시면 우리가 살고 죽지 아니하며 토지도 황폐하게 되지 아니하리이다. 그러므로 요셉이 애굽의 모든 토지를 다 사서 바로에게 바치니 애굽의 모든 사람들이 기근에 시달려 각기 토지를 팔았음이라 땅이 바로의 소유가 되니라”(창 47:13-20)
도시 중심의 왕권체제 하에서 백성들은 땅을 빼앗기고, 종이 되어 농업노동자로 힘겨운 삶을 살았다. 비돔과 람셋은 거대한 식량저장고였다. 통치자들은 식량의 독과점체제를 통해 권력을 강화하였다. 이것은 왕권체제의 폭력성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하나님이 선택하신 히브리인들은 바로 이 체제하에서 노예들이었다.
애굽을 탈출한 히브리인들은 광야에서 40년간의 훈련을 통해 노예의식을 버리고 야훼 신앙을 고백하는 새로운 공동체로 변화되었다.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았고, 이후 야훼가 주시는 여러 명령들을 충실히 지키는 계약공동체로 거듭났다. 중요한 내용은 희년법과 안식년이었다. “토지를 영구히 팔지 말 것은 토지는 다 내 것임이니라 너희는 거류민이요 동거하는 자로서 나와 함께 있느니라”(레 25:23). 애굽은 왕토사상 중심의 농업국가였다. 이제 이스라엘 백성이 새로운 땅에 들어가서 실천해야할 것은 땅이 왕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유라는 점과 노비를 비롯한 모든 사람들이 안식일에 휴식을 취하고, 안식년에는 땅이 휴식하며, 희년에는 토지를 무르기하며 노비들을 해방시키는 것이었다. 이런 제도는 주변 어느 나라에도 없는 혁명적인 것이었다. 인간중심적인 도시국가, 폭력에 의해 뒷받침되는 왕권체제, 토지는 왕의 것이라는 왕토사상, 그 체제를 떠받쳐주는 노예제도, 그 체제를 뒷받침해주는 신(神) 등, 이 모든 것들을 뿌리부터 부정하는 출애굽 공동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의 예표였다.
가나안 땅에는 도성들이 서른 한 개가 있었다(수 12:33). 이 도성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는 이야기가 여호수아서에 기록되어 있다. 여리고 성과 아이 성 파괴가 대표적이다. 서른 한 곳의 도성을 모두 진멸하였다. 새로 변화된 출애굽 계약공동체가 이 과업을 수행하였다. 이 가나안 정복 이야기는 하나님의 거룩한 전쟁이다. 여리고는 당시 가나안의 대표적인 도성으로 농업혁명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 여리고를 함락시킨 것은 농업혁명으로 발생한 삶의 행태를 부정하는 것이다. 농민을 억압하고 수탈하는 세상의 질서를 부정하고 새로운 사회적 삶을 추구하는 행진이다. 이것은 실제로 발생한 사건이라기보다 말씀의 전쟁을 나타내는 것이다.
5.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땅 – 젖과 꿀이 흐르는 땅
농신학의 입장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좋은 땅은 어떤 곳인가? 그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출애굽하여 들어가서 살게 될 가나안 땅이다. 흔히 그 땅을 일러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아름다운 땅’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모든 명령을 지키라 그리하면 너희가 강성할 것이요 너희가 건너가 차지할 땅에 들어가서 그것을 차지할 것이며, 또 여호와께서 너희의 조상들에게 맹세하여 그들과 그들의 후손에게 주리라고 하신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의 날이 장구하리라”(신 11:8-9). 하나님의 명령을 잘 지키고 순종하며 살면 그 좋은 땅을 차지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그 땅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아름다운 땅에 이르게 하시나니 그 곳은 골짜기든지 산지든지 시내와 분천과 샘이 흐르고, 밀과 보리의 소산지요 포도와 무화과와 석류와 감람나무와 꿀의 소산지라. 네가 먹을 것에 모자람이 없고 네게 아무 부족함이 없는 땅이며, 그 땅의 돌은 철이요, 산에서는 동을 캘 것이라.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옥토를 네게 주셨음으로 말미암아 그를 찬송하리라”(신 8:7-10).
그러면 그 좋은 땅은 어떤 성격의 땅인가? “네가 들어가 차지하려 하는 땅은 네가 나온 애굽 땅과 같지 아니하니, 거기에서는 너희가 파종한 후에 발로 물 대기를 채소밭에 댐과 같이 하였거니와, 너희가 건너가서 차지할 땅은 산과 골짜기가 있어서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요,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돌보아 주시는 땅이라. 연초부터 연말까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눈이 항상 그 위에 있느니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하는 내 명령을 너희가 만일 청종하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여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섬기면, 여호와께서 너희의 땅에 이른 비, 늦은 비를 적당한 때에 내리시리니 너희가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을 얻을 것이요, 또 가축을 위하여 들에 풀이 나게 하시리니 네가 먹고 배부를 것이라”(신 11: 12-15).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은 애굽의 땅과 근본적으로 다르다. 애굽의 땅은 인위적인 관개시설을 갖추어 사람이 발로 물대기를 하지만, 가나안 땅은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흡수하는 땅이다. 즉 하나님이 내려주시는 빗물로 농사짓는 땅이다. 오늘날로 말하면 천수전답이다. 인위(人爲)의 그 어떤 수단도 허락되지 않는, 온전히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농사이다. 땅의 생산력은 농업기술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땅에서 농사짓는 사람이 얼마나 하나님의 말씀을 잘 지키며 사느냐에 달려 있는 것이다. 이와같이 신명기 저자는 문명의 기술 농업 없이 농사지을 수 있는 땅을 좋은 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인위의 농사를 멀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농인(農人)이 농사짓는 땅이 진정 좋은 땅인 것이다. 땅과 인간과 하나님(道)과의 관계가 어떠해야 되는지에 대하여 근본적인 통찰을 보여주고 있다. 이 말은 장자(莊子) 외편에 나오는 말과 상통하는 뜻을 담고 있다. 장자(莊子) 외편(外篇)의 천지(天地)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자공(子貢,공자의 제자)이 남쪽의 초(楚)나라를 유람하다 진(晉)나라로 가는 길에 한수(漢水) 남쪽을 지나다가 밭에서 일하는 노인을 보았다. 땅을 파서 길을 뚫고 우물에 들어가서 물동이를 안고 나와 밭에 물을 주고 있었다. 힘들게 일하고 있었으나 효과가 별로 없었다. 자공이 말했다. “여기 기계가 있는데 하루에 백 이랑에 물을 줄 수가 있습니다. 힘을 적게 들이고도 그 효과는 매우 큽니다. 노인장께서는 이를 쓰지 않으시렵니까?” 밭일을 하던 노인이 얼굴을 들어 쳐다보며 말했다. “어떻게 하는 거요?” 자공이 대답했다. “나무를 깎아 만든 기계인데 뒤는 무겁고 앞은 가볍습니다. 물을 잡아 올리듯 끌어 올리는데 그 빠르기가 콸콸 넘치듯 합니다. 그 이름을 용두레라고 합니다.” 밭일 하던 노인이 불끈 낯빛을 붉혔다가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우리 스승께 들은 것이지만, 기계가 있으면 반드시 기계로 인해 일이 생기고(機事), 그런 일이 생기면 반드시 효율을 생각하게 되고(機心), 그런 욕심이 마음에 자리를 잡으면 본성을 보전할 수 없게 되고(純白不備), 본성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면 생명의 자리를 잃게 되고(神生不定), 생명의 자리를 잃으면 도(道)가 깃들지 못하는 법이요. 내가 (기계를) 몰라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 쓰지 않을 뿐이요.”
좋은 땅에서 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네 소와 양이 번성하며 네 은금이 증식되며 네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상반절).
오늘날 농사짓기 좋은 땅은 생산력이 높은 땅이다. 농사짓는 사람들은 화학농업, 기계농업으로 땅을 착취하여 생산력을 최대로 높여 돈을 벌려고 한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농사짓는다. 그렇게 해서 돈을 벌어 물질과 소유가 풍부해지면 교만해진다. 하나님을 멀리하게 된다. 인간에게 가장 큰 유혹은 풍요로운 세상의 능률과 번영을 숭상하는 우상숭배의 유혹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풍요와 번영을 약속해주는 신(神) 바알숭배에서 벗어나지 못하여 결국 멸망당하고 말았다. 이 신명기의 말씀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여전히 경종을 울려주는 말씀이다. 따라서 성경이 말하는 좋은 땅은 생산량이 많은 땅이 아니라, 창조주 하나님의 섭리에 모든 것을 맡기고 그 뜻에 따라 모든 생명들을 살리고 함께 어울려 생명공동체를 이루어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농인(農人)들이 사는 땅이다.
6. 왕국시대의 이스라엘
출애굽공동체는 200년간의 사사시대를 지나 왕국시대로 들어간다. 평등과 평화의 계약공동체는 사사시대 동안 그 정신을 어느 정도 지키고 보전하였다. 위기가 닥치면 사사가 나타나 극복하곤 하였다. 열 두 명의 사사가 나타났다. 그러나 주변국가들, 특히 블레셋이 철기문명을 받아들여 점차 강성해지자 이스라엘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언약궤까지 빼앗기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백성들은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사무엘이 지도자로 있을 때였다. “이스라엘 모든 장로가 모여 라마에 있는 사무엘에게 나아가서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당신은 늙고 당신의 아들들은 당신의 행위를 따르지 아니하니 모든 나라와 같이 우리에게 왕을 세워 우리를 다스리게 하소서 한지라”(삼상 8:4-5).
하나님은 원치 하니 하셨으나 마지못해 허락하셨다. 사울을 초대 왕으로 세웠다. 이후 다윗이 통일왕국을 세웠고, 솔로몬 시대에 영화를 누렸으나 그 아들 르호보암 때에 북쪽 지파들이 떨어져 나가므로 남북왕국으로 분단되었다. 분단 후 계속 서로 티격태격 하다가 북왕국은 앗시리아에 망하고(BC 721년) 남왕국은 바빌로니아에게 멸망당한 후(BC 587년) 포로로 끌려가 70년을 살고 페르시아 고레스왕에 의해 귀환하였다. 이후 완전한 독립왕국을 세우지 못하고 내려오다 로마의 식민지가 되고 말았다.
왕국시대가 되자 이전에 없었던 세금과, 부역(토목공사), 군역(전쟁)이 크게 부과되었다. 왕을 비롯한 지배계층과 그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백성들은 막대한 희생을 강요당했다. 이것이 남북 분단의 원인으로도 작용했으나 무엇보다도 지배계층에 의해 사회 정의가 파괴되어, 많은 농민들이 억압과 착취에 시달렸다. 무엇보다 우상숭배가 근절되지 않았다. 왕국시대에 예언자들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우상숭배와 사회 불의는 왕국체제가 등장하면서 만연하였고 예언자들은 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영재 목사는 이 시대의 예언자들 중 북왕국에서 활동한 엘리야와 엘리사 두 사람에 대하여 많은 글을 썼다. 두 사람을 다 참된 농인(農人)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들이 왕국을 개혁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생존했다면 다른 예언자들에 대해서도 글을 썼으리라 생각된다. 특히 농민들의 입장에서 활동한 예언자인 아모스, 이사야, 미가 등에 대하여는 살펴볼 점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농신학적 관점에서 보면 예언자들의 활동과 함께 벧엘과 예루살렘 중심의 남북왕권체제가 갖고 있는 반(反)농민적 체제에 초점을 맞추어 보아야할 것이다. 사사시대의 평등했던 지파동맹체제가 붕괴되고, 북왕국의 아합 왕 때에는 왕비 이세벨에 의해 왕토사상이 들어와 농민인 나봇의 땅을 강제로 빼앗고 죽이기까지 하는 폭력적인 사건이 발생하였다. 도시중심의 국가체제가 갖는 폭력과 불의가 판치고 불평등, 불공정한 일들이 만연하였다. 결국 사무엘에게 주신 하나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사무엘이 왕을 요구하는 백성에게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말하여 이르되 너희를 다스릴 왕의 제도는 이러하니라. 그가 너희 아들들을 데려다가 그의 병거와 말을 어거하게 하리니, 그들이 그 병거 앞에서 달릴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아들들을 천부장과 오십부장을 삼을 것이며, 자기 밭을 갈게 하고 ,자기 추수를 하게 할 것이며, 자기 무기와 병거의 장비도 만들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딸들을 데려다가 향료 만드는 자와 요리하는 자와 떡 굽는 자로 삼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밭과 포도원과 감람원에서 제일 좋은 것을 가져다가 자기의 신하들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곡식과 포도원 소산의 십일조를 거두어 자기의 관리와 신하에게 줄 것이며, 그가 또 너희의 노비와 가장 아름다운 소년과 나귀들을 끌어다가 자기 일을 시킬 것이며, 너희의 양 떼의 십분의 일을 거두어 가리니 너희가 그의 종이 될 것이라”(삼상 8:10-17).
왕권체제의 억압과 수탈이 만연하게 될 것과 결국은 백성들이 왕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다. 도시중심의 국가체제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이스라엘은 이 왕권국가체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구원역사로부터 일탈하였고, 결국 선택받은 민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데에 실패하였다. 적어도 하나님의 나라는 도시중심의 국가체제에서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7. 이영재 목사의 예수 이해
이영재 목사는 구약성서 창세기의 말씀을 해석하면서 예수와 연관하여 말하였다. “태초의 인간은 ‘땅을 갈 사람’으로 지음을 받았는데 이 말은 히브리어로 ‘흙(아다마)을 섬기는(아바드) 사람’이다. 모든 생명체는 흙이며 따라서 흙은 모든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흙을 섬기는 사람은 모든 생명을 살리는 일꾼이며 타자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이다. 이런 일꾼이 있어야 하나님의 창조작업은 계속될 수 있다. 예수는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사신 분이다. 예수는 창조의 원인간의 삶을 살아내신 것이다. 본회퍼는 예수를 ‘전적으로 타자를 위해 사신 분’(Being for others)으로 정의하였다.”
“예수는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선언하셨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세계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회복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마침내 마지막 날에 하나님은 하늘에서 새로운 도성을 손수 지으셔서 죄악의 도성 예루살렘 대신 새 예루살렘을 내려 주신다. 그때까지 예루살렘의 대안으로 주신 것이 교회이다.”
“죄의 올무에 걸린 타락한 농인이 가인의 때부터 저주받은 존재의 불행을 벗어나려면 모든 타자에게 생명을 주시려고 자신을 십자가 위에서 희생하신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고백하며 사는 길 밖에 없다. 이것이 성경이 일관되게 제시하는 진리의 길, 생명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니(고후 4:4 하반절) 예수를 믿는 성도도 하나님의 향상을 회복하게 된다.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상태는 창세기 1장의 원인간으로 회복된 것이다.”
8. 우리의 생각과 과제들 – 기독론, 신관 등
땅을 갈고 작물을 돌보며 기르는, 농사가 가능한 것은 땅의 기운과 하늘의 기운(비, 바람, 천둥, 번개 등) 그리고 우주의 기운(햇빛, 달빛, 별빛 등)이 생명을 길러주기 때문이다. 이 기운들이 씨앗을 싹 틔우고 성장시켜 열매를 맺도록 생명의 변화를 주도한다. 인간은 약간의 도움과 협력을 가할 뿐이다. 땅과 하늘과 우주는 인간과 생명 전체의 삶을 떠받쳐주는 바탕이다.
인간은 하늘과 땅 사이에 서있는 존재이다. 인간은 농사를 짓기 시작하면서 생명현상을 관찰하고 더 잘 기를 수 있는 능력을 습득하였다. 동아프리카 고원지대에서 출현한 현생인류는 오랜 세월 동안 지구의 여러 곳으로 퍼져 나가면서 그 지역의 기후와 풍토에 맞는 작물들을 발견하고 육종을 통해 농업을 발전시켰다. 기후와 토질의 차이에 따라 기르는 작물도 달랐다. 대표적 주식인 옥수수, 밀, 쌀 등이 좋은 예이다. 그것들은 모양과 성질은 다르지만 인류를 먹여 살리는 주식으로써의 역할을 감당해왔다.
땅은 인류가 함께 딛고 서있는 공동의 자리이다. 농은 땅을 토대로 하는 삶의 보편적인 바탕이다. 인류는 농사를 통해 땅과 하늘과 우주의 기운과 교감하면서 그 경험들을 신화와 전설, 민담 등에 담아서 표현하였다. 관념의 세계가 점차 심화 발전하면서 사고의 수준이 향상되고 마침내 보편적 사상과 종교로 발전하였다. 작물을 길러 육(肉)의 양식을 삼고, 마음을 길러 영(靈)의 양식으로 삼았다. 육의 양식이 지역마다 다른 것처럼 마음과 영의 양식인 사상과 종교도 지역마다 다르게 표출되었다.
땅과 하늘은 경계가 없다. 경계 없는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인간에게도 경계가 있어서는 안 된다. 농(農)도 본질적으로 경계가 없다. 천부경 전문 81자로 되어 있는데, 고대 우리 한민족의 종교관, 우주관, 철학관을 담아 낸 것으로 보고 있다. 다석 유영모 선생도 그 중요성을 인정하여 천부경을 번역하였다.
에 “인간 속에서 하늘과 땅은 하나이다”(人中天地一)는 말이 있다. 시대적으로도 모든 것이 하나를 향해서 나가고 있다. 지역마다 서로 다른 생활과 풍습으로 상이한 문화가 형성되었지만, 그 모든 것이 인간 속에 하나로 들어 있다. 특정 종교나 사상이 전체를 포괄하고 지배하는 시대는 지나갔다. 다르게 보이지만 하나의 공통세계가 담겨 있음을 생각하면서 자기를 내어놓고 타자를 받아들이면서 하나 됨을 깨달아가야 하는 시대이다. 기독교 신학과 교리를 절대화하지 말고, 경계와 차별이 없는 땅과 하늘처럼, 그 기운으로 이루어지는 농처럼, 타종교와 사상 속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생명의 세계를 발견해가면서 내 속에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이런 생각을 바탕으로 먼저 기독론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예수가 하나님이 창조하신 태초의 원형적 존재라는 이 목사의 주장에는 동의할 것이다. 예수는 첫 사람 농인(農人)이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회복한 제2의 농인이다. 그래서 모든 인간에게 구원자가 될 수 있으며, 기독교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고백한다.
그런데 농신학적 입장에서 생각할 점이 있다. 그 구원이 대속적(代贖的)인 구원인가, 자속적(自贖的)인 것인가 하는 점이다.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되는 것인가? 믿는 것, 구원받는 것,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는 것 등 이 세 가지가 다 동열에 설 수 있는 것인가? 제일 중요한 것은 믿음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은 절대순종이요, 완전한 자기부인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는 믿음이 이러한 믿음인가? 믿음의 차원과 경지에 대한 말이다. 깨달음이 동반되지 않는 믿음이 진정 나의 죄를 대속할 수 있는가? 나아가 이렇게 자기의 죄를 타인이 대신 속죄해주는 것이 맞는 것인가? 여기에 자속론이 나온다. 자기 죄는 자기 스스로 속(贖)하는 것이 맞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이때 예수는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는 참된 스승이 된다. 그가 가신 길을 열심히 따르고 쫓아가려는 제자가 되어 그를 닮아가려고 힘쓰는 것이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예수는 이미 자속의 길을 가르쳐주셨다.
대속론은 사도바울의 신학이다. 그의 선교 여정 속에서 새롭게 수립한 신학적 체계이다. 바울이 처음 쓴 서신인 데살로니가전서에는 대속사상이 나오지 않는다. 이후에 형성된 것인데 예루살렘교회의 예수의 직계 제자들로부터 견제를 받는 등 선교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고심 중에 창안한 것이 대속사상인 것이다.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의롭게 된다)”는 신앙은 사람들로 하여금 복음을 쉽게 받아들이도록 해주었다. 갈릴리 농촌지역에서 예수를 따르려고 애쓰던 수도공동체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점차 약화되어 간 반면, 도시 중심의 바울 선교는 이 대속신학으로 선교의 활기를 띠게 띠고 확산되어 나갔다.
매우 위대하고 탁월한 신학이다. 기독교는 이 바울의 대속론 위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인간 구원의 길이 이 길밖에는 없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대속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대속의 뜻을 좀더 깊이 받아들이자는 것이고, 그 길 이외에도 또 다른 구원의 길이 있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자는 것이다.
초대교회와 수도원이 남긴 문서 중에 도마복음서가 있다. 이 복음서는 공관복음서와 그 성격이 많이 다르다. 믿음을 통한 구원보다 깨침을 통한 구원의 길을 말하고 있다. 아타나시우스는 아리우스와의 논쟁에서 승리한 후 신약경전을 만드는 과정에서 27권외의 모든 책들을 다 불사르라고 명령하였다. 그러나 이집트 파코미우스 수도원의 수도사들이 차마 없애지 못하고 땅속 항아리에 묻어둔 문서 중에서 도마복음서가 발견되었다. 도마복음은 예수 사후에 그를 따르는 제자들 중에 깨침의 길을 통해 구원의 길을 가려는 수도적인 무리들이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 기독교도 이 전승을 이단시 하지 말고 수용하여 구원의 산을 오르는 또 하나의 길로 삼았으면 한다. 도마복음서를 영지주의 문서로 보고 이단시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것은 또한 동양종교의 사유와도 상통하여 종교간 대화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농신학적 입장에서 신관(神觀)은 무엇이어야 할까? 전통적인 서구신학의 신관, 절대적이고 초월적 존재로서의 배타적 유일신관을 그대로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동양의 사유방식을 포용할 것인가? 특히 동학의 수운 최제우 선생의 신(神)체험과 김경재 교수는 수운 선생의 신 인식을 범재신론(Panentheism)이라고 칭한다. 초월적 유일신론과 범신론을 극복하여 신의 초월과 내재를 동시에 체험한 신론이라는 것이다. 이정배 교수는 다석 유영모 선생의 신 체험도 최수운 선생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말한다.
다석 유영모 선생, 함석헌 선생의 기독교 사상, 그리고 조상들의 경천사상(敬天思想)에 대한 연구가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사막의 유목문화권에서 형성된 신관이 정착생활 중심의 농경문화 속에서 형성된 사상과 같을 수 없을 것이다. 인간이라는 근본 뿌리를 통해 신(神)에 이르는 길을 오르다보면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도의 인위적 과학기술과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대도시중심의 국가체제가 전쟁과 생태적 위기를 초래하고 있는 이때에, 무위자연(無爲自然)을 통한 도인(道人)으로의 길을 말하고 있는 노장사상은 위기 극복을 위한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띠라서 성서와 노장사상과의 대화도 농신학의 입장에서 필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한 가지 덧붙인다면 오늘날 크게 발달한 자연과학적 진리에 대한 이해가 신학적 사유에 매우 중요하다는 점이다. 자연과학의 두 기둥은 물리학과 생물학인데 현대물리학은 미시적 세계에 대한 연구를 통해 고전물리학의 틀을 깨고 과학혁명을 일으키며 물리학의 새로운 세계를 구축하였다. 양자론과 상대성이론은 기존의 사고방식에 커다란 도전과 충격을 던져준다. 과학기술문명의 발달은 이를 토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두 학문에 대한 상식적 차원의 이해라도 하는 것이 신학 연구에 도움이 될 것이다.
9. 나가는 말
지금까지 이영재 목사의 유고(遺稿)를 중심으로 그가 주장한 내용들을 간략하게 생각해보았다. 인간은 태초에 농인(農人)으로 창조되었다. 아담과, 가인, 그 후예들에 의해 타락의 길을 걸어 도시문명의 건설과 확산 그리고 육식생활이 인간의 삶속에 자리 잡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이 원하시는 구원의 길이 아니라는 것이 성경의 증언이다. 하나님은 도시문명에 대하여 경고하셨고, 심판하셨다. 도시 문명의 속성은 폭력과 전쟁, 억압과 수탈, 불평등과 차별, 쾌락 추구와 질병, 우상숭배가 만연한 곳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세상을 호령하는 오만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는 곳이다. 도시문명이 건설되기 시작하면서 농민들은 지배계층의 노예로 전락하여 오랜 세월 고난의 삶을 살아왔다. 농은 도시에 속박되어 도시를 먹여 살리는 식량공급기지가 되었다. 진정한 구원은 이런 도시문명을 극복하고 새로운 삶의 양식과 사회체제를 형성하는데서 이루어져야 한다. 그 구체적인 방안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지속적인 논의가 필요하고, 운동으로 전개되려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지지 않아야 한다.
먼저 사람들이 ‘농인’으로 회복되어야 한다. 회복된 농인들이 생명의 길을 닦아야 한다. 폭력과 우상숭배와 죽음의 세력과 대결하여 생명을 살리고, 하나님의 정의를 높이 세우며,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가야 한다. 모든 차별이 사라지고, 모든 생명들이 풀을 뜯으며 평화를 누리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생존에 쫓기어 도시체제에 예속되어 살아가는 농민들이 많이 있다. 이들이 상업적 농민에서 벗어나 참된 농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기독교인들부터 농인으로서의 자기정체성을 분명히 가져야 한다. 큰 농인이신 예수의 뒤를 따르며 타자를 살리는 작은 농인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가 꿈꾸는 이상사회에 대하여 이사야는 이미 말하였다. 동양적인 표현으로는 농인(農人)은 곧 도인(道人)이다. 그리고 도인이 사는 곳이 바로 장자가 말하는 이상향인 무하유지향(無何有之鄕)이다. 그곳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도(道)가 행해질 때 도래하는, 생사도 없고 시비도 없으며, 인위적인 것도 없는 참으로 행복한 곳이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 아이에게 끌리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 뗀 어린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 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 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사 11:6-9).
야훼를 아는 지식이 충만한 세상이 오면 생명세계가 다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보듬고 돌보며 평화롭게 살아갈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요 농인들이 바라는 이상향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