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네시아와 기독교 선교
정치와 사회
인도네시아는 1945년에 제정된 헌법에 기초를 둔 공화국으로 대통령은 1999년까지는 국민협의회(MPR, Majelis Permusyawaratan Rakyat)에 의해 선출되었으나, 2004년부터 직접투표로 선출되고 있다. 임기는 5년이며 재임된다. 2014년 대통령 선거에서는 민주항쟁당의 조코 위도도가 53%의 득표율로 제7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대통령, 부통령 선거는 국회의원 총선 3개월 후에 실시하는데, 2009년 이후로는 개정된 선거법에 따라 총선득표율 25% 이상 또는 원내 의석점유율 20% 이상인 정당만이 대통령 후보를 배출할 수 있으며,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정당간 연합해야 한다. 의회는 하원과 상원으로 구성되며, 상·하원 의원으로 구성된 국민협의회가 인도네시아 최고입법기구로서 의회의 총괄 기구를 맡고 있다. 주요 정당은 민주항쟁당, 골카르당(노동당), 거린드라당, 민주당 등이 있다.
사법부는 보통법원, 종교법원, 군사법원, 행정법원으로 구성되며 최고사법기구는 대법원으로서 하급 법원 사건의 최종심을 관할한다. 대법원장은 헌법상 대통령 및 국회의장과 동등한 지위를 가진다. 헌법재판소는 헌법재판소장과 부소장을 포함한 9명의 재판관으로 구성되며, 국회, 대통령, 대법원이 각각 3명을 지명하고 대통령령으로 임명된다. 재판관의 임기는 5년이며, 헌법재판소장과 부소장의 임기는 3년이다.
인도네시아는 의료인 부족과 아동의 영양결핍이 난제다. 교육은 1994년부터 초등교육 과정 6년과 중학교 3년 총 9년의 의무교육제를 채택했으며, 고등학교 과정은 3년제로 이루어진다. 고졸자 약 45%정도가 상급학교에 진학하고 공립 및 사립 대학교와 전문대학, 사범대학들이 상당수 있다. 언론은 일간지와 주간지외에 라디오와 TV 방송은 주로 정부가 관장하고 민영 라디오·텔레비전 방송국도 있으며 라디오·전화·텔레비전 신호를 중계하는 통신위성은 원활하다.
문화와 외교
수세기에 걸친 문화적 동화작용의 결과 다양하고 풍부한 문화양식이 생겼다. 8~10세기에는 거대한 대승불교 유적인 보로부두르 및 광대한 힌두 사원 단지들이 자바 섬 중부에 건립되었다. 음악·춤·연극이 결합된 표현양식을 자바 섬과 발리 섬의 유명한 인형극 와양(wayang)에서 볼 수 있다. 방염 왁스를 사용하는 전통적인 섬유 염색법인 납결염색법(바틱)은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인도네시아의 문학사에는 구비문학과 기록문학이 모두 존재한다.
인도네시아와 한국의 관계는 공식 수교를 맺기 전인 1966년 8월 영사관계를 수립하고 1973년 9월 17일 수교했고 북한과는 이보다 앞선 1964년 4월 16일에 외교관계를 맺었고 1981년 전두환 대통령이, 1982년에는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 대통령이 우리나라를 방문하기도 했다. 이후 1994년 김영삼 대통령이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Asia-Pacific Economic Cooperation) 정상회의차 방문했으며,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아세안+3(ASEAN+3, Association of Southeast Asian Nations+3) 정상회의차 2010년과 2011년, 2012년에는 이명박 대통령과 유도요노 대통령이 발리 민주주의 포럼과 아세안+3 정상회의에서 경제개발계획과 에너지 개발사업을 위한 협력에 합의했다.
양국은 모두 G20과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인도네시아는 한국의 앞선 경제발전을 모델로 삼고 있으며 특히 양국의 경제협력 증진에 높은 비중을 두고 있다. 2006년 12월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수립했으며, 2017년 11월에는 문재인 대통령과 조코 위도도 대통령의 첫 정상회담에서 ‘특별 전략적 동반자 관계’로 격상되었다. 최근에는 군사분야 전투기 제작에 투자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도네시아는 교역 6위를 차지하는 데 대인도네시아 수출품은 경유, 휘발유, 편직물, 합성수지, 열연 및 냉연 강판이며 주요 수입품은 천연가스, 유연탄, 원유, 천연고무, 펄프등이다. 양국의 수출입 규모는 2011년과 2012년에 최고치를 기록했다가 최근에는 감소 추세로 2016년 기준 수출은 66억 853만 달러이며, 수입액은 82억 8,534만 달러이다.
1970년부터는 한국의 건설업체들이 진출하여 공사를 수주하고 마두라 유전개발에 참여하는 등 민간차원에서도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고 있다. 2015년 기준 14개의 지역 한인회와 10여 곳의 한글학교가 있으며, 2,200여 개의 한인기업이 활동하고 있다. 2016년 기준 인도네시아에 거주하고 있는 재외동포는 3만 1,091명이며,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인도네시아 국적의 등록외국인은 2017년 기준 3만 7,237명 으로 서로 비슷하다.
인도네시아의 기독교 역사
인도네시아는 이슬람, 힌두, 불교가 이미 들어와 있었고 각 종족이 가진 자신들의 전통적인 민속종교가 이미 뿌리 깊이 내려져 있었다. 15세기에 이슬람과 천주교 선교사 시작되고 네덜란드가 지배를 하면서 기독교가 들어 온다. 이들은 특히 발리를 중심으로 하여 서구인들의 휴양지로 개발하고 교회를 세운다. 그러나 방식은 너희는 미개하고 개화되어야 하며 그것은 기독교를 통해야 한다는 것이다.
식민지 교회란 거의가 식민지 주둔군과 같이 들어와 그들에게 협력하는 사회 엘리트들이 믿고 파트너란 허울 좋은 명목이고 권위적으로 지배한다. 따라서 아시아 대다수의 나라가 그렇듯이 서구 선교사들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다. 15세기 서구의 아시아 식민지 수탈로 인한 무역의 첫 손님은 당시 해상을 점령한 포르투갈인이었다. 그들과 함께 들어온 종교는 포르투칼처럼 구교였다, 그러나 일찍이 들어와 민족 종교로 자리잡은 이슬람은 외래 종교에 대항하면서 더 강해지고 전파되었다.
그들은 포르투갈인들을 적수로 간주하여 싸웠다. 그중에 기독교인들이 된 사람들의 어려움이 있기도 했다고 한다. 그럴수록 이얼리 쳐치는 단련되고 강해지기도 한다. 1605년 네덜란드가 포르투갈을 내어쫓고 지배자가 바뀐다. 이 시기에는 기독교가 큰 영향을 끼치는 기회가 된다. 식민지도 과거처럼 무력과 노예로의 지배가 아닌 적법한 룰을 갖고 활동해야 했다. 그래서 동인도 회사를 통하여 합법적 수탈을 하는 것이다 이런 과정에서 인도네시아 교회도 성장했고 영향과 간섭을 받게 되었다.
네덜란드 동양척식회사(VOC)
교회에 대한 정부(VOC)의 간섭은 교회가 국교회라는 인상을 주게 되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정부도 어려움을 겪었는데 정치적이고 경제에 초점을 맞춘 VOC가 영적인 교회와 갈등을 빚었기 때문이다. 정부는 모든 교회의 상황을 알려 했고 모든 교회가 당면하는 모든 문제나 언도를 휘어잡으려 했다. 예를 들어, 교회에서 한 사람을 교회법으로 다스리려 해도 그가 정부의 요원이면 불가능했다. 그래서 이때 교회 성장은 어색하고 딱딱하기 그지 없었다.
VOC가 들어온 곳에 일반적으로 교회도 세워졌다. VOC는 스스로 교회 안에 권한이 있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교회 안에 모든 영적인 일을 돌보며 아주 사소한 것까지 조정할 권한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과는 여러 어려움이 있기는 했지만 기독교가 정부의 보호 아래 성장케 되었다. 17세기에 자카르타의 목사들이 서부 수마트라와 다른 자바섬의 시골지역들로 파송되고 18세기에는 마장, 중부자바의 서마랑, 동부자바의 수타바야에 교회가 서게 되었다.
인도네시아의 교회성장은 아주 느리게 진행되었는데 가장 큰 요인은 교회 안에 현지인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다. 기독교인이 전도를 위해 파송을 받아도 VOC 밑에서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만 보내졌다. 교회조직, 교훈 그리고 교회생활 네덜란드 교회조직, 신앙고백, 신앙생활, 신안훈련 등이 인도네시아 교회에 그대로 심어져 네덜란드 교회가 인도네시아 교회의 모델이 되고 규격이 되었다.
인도네시아 교회는 칼빈주의에 입각한 개혁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네덜란드 식민통치 밑에서 그들의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큰 고통이었다. 네덜란드로부터 온 교회행정체제는 성 장을 원하는 식민지역에(인도네시아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었다.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은 네덜란드인들의 정치적이거나 식민지적 발상에서 나온 목사들을 그들이 정한 곳으로 보내는 것에 대해 큰 반발을 보였다. 네덜란드 교회들은 인도네시아 교회가 칼빈주의를 벗어나지 못하게 성화가 대단했다.
식민치하의 인도네시아인들의 삶은 모든 분야에서 질서가 잡힌 반면 정부에 의해 너무 제한되어 있었다. 정신적이고 실제적인 면에서 해방하여 자유를 얻을 만한 여력이 없었다. 네덜란드인은 삶의 어느 부분에서건 자유로왔지만 인도네시아인들의 상황은 정반대였다. 인도네시아인 스스로 교회를 세우지 못하며 교회 안에서도 인도네시아인 스스로 무엇을 결정하지 못했다.
VOC의 말할 수 없는 독점으로 인해 경제가 혼란하게 되고 결국 영국과의 해상권력다툼에서 지고 1799년 12월 31일 VOC는 본국으로 돌아간다. 그때 이래로 인도네시아는 더 이상 무역을 미끼로 어떤 조직에 속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네덜란드의 식민통치 하에 있었다. 프랑스 혁명의 결과로서 종교의 자유라는 기치 아래 많은 전도자들이 인도네시아로 들어왔다.
개신교의 영적 부흥은 바로 약 1800년 경에야 일어났다. 전세계의 기독교 사회에서 교회가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책임감에 대한 자각이 있었다. 인도네시아에 들어온 많은 선교사들은 경건과 복음전파를 강조하는 청교도 정신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었다. 그들 경건주의자들로 인해 기독교 기관들과 성경학교가 세워지곤 했다.
새 선교사들이 인도네시아에 들어올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지고 그 들은 인도네시아 교회가 어디서든 성장할 수 있는 뜨거움을 가지고 왔다. J. KAM은 NZG라는 네덜란드의 기구로부터 파송 받은 첫 선교사였다. 그는 말루꾸에서의 사역에서 그가 보인 강인함과 용기로 인해 말루꾸의 사도로 불린다. 그로 인해 인도네시아 교회 내에 새 피가 흐르고 영적 성장으로 이어졌다.
인도네시아 개신교회의 조직
각 종교가 정치와 관계없이 자기의 종교를 확장하고 보존할 수 있는 자유가 정부(인디아 브란다라 불림 : 네덜란드 식민치하의 인도네시아와 네덜란드의 합작정부)에 의해 이때에 주어진다. 이로 인해 더 크게 인도네시아 교회가 성장하게 된다. 더 이상 어느 특정 교회의 교리를 따르지 않아도 되었다. 인도네시아 개신교회는 자립된 교회이다. 그 교회는 인도네시아 교인들로 구성되었고 인도네시아 개신교들을 위해 활짝 열려 있다.
그들은 오직 복음을 전하는데 힘을 합치기 위해 교회가 갈라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기에 목사들은 주일설교계획과 설교장소들을 정부에 보고를 하여 서로간에 조정을 하였다. 그러나 위험한 것은 교회의 행정을 국가가 맡아 하는 격이 되었다. 그래서 결국은 반작용으로 교회가 스스로 해결하여는 반응이 1863년부터 나타나 결국 1935년 교회와 국가의 행정의 분리되게 되었다.
이미 교회가 있었으나 개신교가 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칠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다른 면에서 보면 교회에서 인도네시아 사람 들도 영적인 관리를 하거나 조직을 만들 수 있는 권위가 주어진다. 그러면서도 하나가 되려는 노력은 계속되어 19세기까지 오직 한 개 신교단(GPI)만 있었다. 그리고 영적인 사역을 높이기 위해 1878년 대륙에 신학교를 세웠다.
1835년 국가와 교회행정이 분리된 후 새로운 개신교회 성장의 표식이 나타나기 시작했음을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개신교 총회는 예배순서, 전도전략 등 교회법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는 하나이던 교회가 분열하기 시작하여 1934년, 38년, 48년에 각각 다른 교단이 세워졌다. 지금도 인도네시아에 복음적인, WCC계통의 그리고 오순절적인 교회 등 4개의 큰 조직 하에 약 280 여 교단이 분산되어 가입되어 있다.
식민적이고 제국주의적인 선교
포르투갈 시대에서 네덜란드 식민정책으로 이어지면서 선교의 분야도 같은 양상을 띤다. 정부가 다른 나라 선교사들에게 비자를 잘내 주지 않거나 내주어도 경제 정치적 요충지는 거의 내주지 않았다. 자기 나라 선교사들만 그런 곳에서 선교할 수 있었다. 선교는 어떤 경우 선교사들과 정부의 갈등이 있었지만 정부에 의해 주관되었다. 장소, 교인 수 등 등까지 지정받았다. 현지인 목사들의 수도 적었고 있어 도 네덜란드에서 온 선교사들을 보조할 수 있을 만큼만 교육시켰다.
사실 그때 평신도들로 기독교인이 된 각 학교 선생님들이 교회 봉사 의 큰 역할을 담당했다. 자연히 서구 유럽의 문화들이 강요된 시기이기도 하다. 예배의식, 신학, 술, 담배 등 등… 그러기에 선교사들은 식민치하의 앞잡이이며 첩자란 인식이 자연스레 인도네시아 사람들 에게 깃들게 되었다. 큰 반감을 산 것은 틀림없고 선교의 방해가 컸음도 부인할 수 없다. 오늘날도 서구의 문화(기독교 문화)를 전하는 것이 복음을 전하는 것으로 착각을 일으키는 경우들이 자주 있음은 우리 마음을 아프게 한다. 유럽 선교사들이 들어와 자기 종족이나 중국인들만을 대상으로 선교하기도 했다.
종족간의 전쟁, 2차 대전, 네덜란드 포르투갈의 지역다툼 등은 많은 순교자를 내었고 교회인력이 줄어드는 비극을 초래했다. 게다가 DETTI라는 이슬람 사람들의 인도네시아 이슬람국가화 운동과 1948년, 1963년의 공산당 반란은 기독교 발전에 큰 저해가 되었다. 당시 수하르토는 제 3세계을 중심으로 비동맹(자본주의나 공산주의에 가담치 않는 국가)회의를 반둥대학에서 개최하기도 한다
일본이 1943년에서 45년까지 통치했는데 그 기간 중 목사의 수가 증가했다. 그 이유는 일본 목사들이 많이 와 선교의 대열에 끼었기 때문이다. 이때 일본은 교회 발전에 일익을 담당했는데 특히 교회를 하나되게 하는 데 기여를 했다. 이유는 그 당시 일본은 큰 힘을 기울여 연합군과 대항해야 했기에 어느 부분에서는 분열을 꺼려했고 교 회를 오히려 그런 목적으로 이용했던 것이다. 앞으로 역사적 평가가 어떻게 나든 일본 목사들도 인도네시아 사람들의 눈에는 그런 선상에서 이해되고 있다. 한국에서 교회를 핍박한 것과 비교하면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선교단체
인도네시아는 현재 약 80개의 선교단체(교단선교 포함)의 약 1,500 선교사 가정이 선교활동에 임하고 있고 약 280여 교단이 있다. 미국 선교사들이 많은 숫자를 차지하고 있다. 그중 한국선교사들이 50여 가정 사역하고 있다.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선교는 결코 수직적이 아니다. 그러기에 위에서 아래로 부자가 가난한 자를 돕는다는 선교공식은 성립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의 자료는 선 교사의 수는 국력과 신앙 수준에 비례해 왔다.(싱가폴이나 일본은 선 교사 수는 적지만 전체 기독교인의 수와 선교사의 수를 비교하면 우리보다 훨씬 앞서 있음). 동양에 동양 선교사의 시대가(제 3세계에 제 3세계 선교사가)열렸다고 하지만 대부분 숫자에서는 한국선교사가 지칭되고 있다. 그만큼 한국의 선교열기는 대단하다.
다른 선교사들과 같이 한국 선교사들도 종교나 선교사가 아닌 인도네시아 정부방침에 따라 교수 비자(도센)만 준다. 그렇기에 현지 스폰서가 있어야 비자를 받을 수 있는데 인도네시아 신학교들이 이를 감당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신학교가 있는 교단과 함께 힘을 합하여 교회개척 등에 참여하고 있다. 선교사들은 비자의 한도 내에서만 활동이 가능하므로 직접전도, 교회개척 등은 어렵다고 한다.
그러기에 늘 인도네시아 사람들을 앞세워 더욱 그들과 긴밀한 교제가 요구된다. 요즘 들어 한인들의 인도네시아 진출이 많아지면서 공장전도를 위한 평신도 선교사들의 노력이 엿보이는 초기단계에 있다. 그러한 한국의 선교열기에 비해 고무적인 평가와 비판적인 평가가 동시에 일고 있다. 하나님이 축복해 주셔서 우리가 선교에 쓰임 받아야 하는 것만은 옳다든지 하며 명분만 내세우거나 선교 파송자의 주장만 관철시키려 하고 피선교지 상황을 염두에 두지 않는 무조건 무엇을 모을 수 있다는 자가당착에 바진 선교 영웅주의로는 안된다는 교훈이다.
또 선교를 물질로 하려는 선교나 파송 교회의 힘(POWER)을 추구하는 파워 게임형식의 선교를 해서는 안된다. 한국 선교사는 그들 특유의 스타일이 있는 데 다른 나라 선교사들로는 너무 독특하다는 인상이다. 단일 문화에서 자란 특유성 즉 동역이 힘들거나 자기 것을 너무 주장하거나 급한 성품들이 많이 노출되는 면이 있다(대개 서양 선교사들의 지적). 서양 선교사들이 저지른 잘못을(서양 선교사들은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즉 물질로 선교한다든지, 문화적, 인종적 우월의식이 강하다든지(문화를 배우고 적응해야 한다고 크게 주장하는 사람들이 그들이면서도)라는 잘못을 한국 선교사들이 그대로 밟고 있다는 비판도 있다.
그것은 선교사들 의식 가운데 파송 교회의 기대를 채워야 하는 강박관념도 크게 작용하리라 본다. 인도네시아 정부는 공개적으로는 빤짜실타라는 국가 통합 이념으로 인하여 종교의 자유를 표방하지만 사실상은 중립적이다. 그러나 문화적으로 이미 이슬람 사람들이 사회를 지배하므로 기독교들중 명목상의 기독교인이 될 수 밖에 없다. 그중 극단적 이슬람들은 인도네시아를 인도네시아를 이슬람 국가화하려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그들은 열광적인 자들로 기독교를 심히 미워하며 억압하는 그룹으로 소수이며 대부분 지하조직으로 그 영향력은 크다.
또 정부는 이슬람인들에게 특권을 주는데 외국에서 박사학위까지 공부하도록 이슬람교도들에게만 허용하고 있다. 그들이 나중에 정부 주요 요직에 앉게 되거나 교수요원들이 되는데 똑똑하고 요직에 있는 그들의 목소리는 클 수 밖에 없다. 나중에 기독교 학생들이 갈 수 있는 학교는 몇 안되는 기독교 학교 밖에는 없을 것이다. 또 자바섬에 너무 많은 인구가 살아 인구분산정책을 쓰는데 아리얀자야 같은 거의 기독교인들로 구성된 곳들에 이슬람 사람들을 강압적으로 집어 넣고 있다.
법도 이슬람 편이다. 모든 서류를 갖추어 결혼신고를 해도 전에 기독교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결혼성립이 되지 않는(공무원이 트집을 잡으면)경우가 있다. 이슬람교인과 기독교인이 결혼신고 하는 곳이 다르다. 또 한가지는 국가 건설에 공이 크고 지금 정부요직의 굵직한 자리에 있는 분들 중 신실한 기독교인들이 몇 있다. 그나마 그들이 기독교를 용감히 비호해주고 어려운 일들을 많이 해결해 주었는데 그들이 나이가 많이 들었기에 차세대에 대를 이어 그렇게 해줄 만한 사람 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외적인 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을 쉽게 예견할 수 있다. 기독교인들이 발 붙일 수 없도록 전도의 문이 닫혀 버릴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 모든 상황을 열면 닫을 자가 없고 닫으면 열 자가 없는 그분께 맡기고 이 위급한 상황에 위대하고 큰 일을 시급히 열심으로 이루어 나가는 길 밖에 없다. 인도네시아 신학교육 사역은 중요하다. 교역자가 태부족이고 시골의 사역자들은 그나마 연장교육의 혜택도 받지 못하고 있다. 교회를 개척해 나가는 일도 중요하지만 이곳 상황에 맞게 좋은 지도자를 많이 배출해 내는 사역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시골지역은 보수적이고 전통종교와 사회적 결속이 강해 어려운 면도 있지만 순박하고 열려진 상태이다. 가난과 병과 낮은 교육으로 고난 당하는 지역이기에 더 복음이 필요하다. 지금 인도네시아는 산업화 시대로 접어 들면서 자연히 도시화 현상이 일고 있으며 일어나리라 예상된다. 그때를 대비해 시골을 더 복음화해서 그들이 도시로 갔을 때 도시의 세속적인 환경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 도시에서는 이들 현상이 두드러지기 전 준비에 철저해야 한다.
인도네시아 지역과 이슬람 연구
인도네시아는 늘 기독교 인구를 10% 내외로 발표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더 많다. 그러나 그런 숫자가 알려질 경우 이슬람의 자존심을 건드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라 더욱 조심하고 있다. 그렇지 않더라도 10%만 가지고도 거의 2천만이 된다. 또 지도를 놓고 봐도 반을 갈라 동쪽은 기독교가 강하고 서쪽은 이슬람이 강해 지도상 반은 그래도 기독교가 차지한 듯 보인다. 그러나 교회와 이슬람 사원의 숫자만 비교해 보아도 비교가 되지 못할 만큼 교회의 숫자가 적음을 본다.
그것은 아직 인도네시아에 복음이 너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다시 선교를 종족적으로 볼 때 그리스도의 이름을 들어 보지도 못한 종족들이 너무 많다. 그래서 그런 지역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그러면서도 강하기는 마찬가지이다. 이런 이들에게 몇번의 전도로 끝을 내려는 우를 범해선 안되겠다. 성령의 강한 능력에 의지하며 사랑하는 것이 이슬람 선교에 가장 좋은 방법임을 자타가 공언한다.
지난 1991년 10월 말 한인선교사 수련회에서 "어떻게 선교의 멍에를 같이할 것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인도네시아 지도자들이 발표한 한국 선교사들을 향한 목소리가 나온 바 있다. 적응의 어려움 : 한국 선교사들이 인도네시아 언어, 종교, 문화 등에 적응을 못하면 그 선교사가 하는 일은 한국적인 것일 수 밖에 없음을 강조. 선교사 자신의 정확한 이해 : 일을 많이 하려 하지만 어느 일을 하여도 결정된 정확한 정보와 이해 필요.
선교사란 자기이해 필요. 그렇지 않을 경우 다른 데에(편지쓰기, 자리 메꾸는 데 만족, 외국에 소풍온 기분) 만족하고 말 것임. 선교사는 한 교회의 목회자가 안다. 좀더 넓은 안목이 요구됨. 전도와 교회개척 : 인도네시아에서 복음을 한번도 듣지 못하는 많은 사람을 위한 노력 요구. 동역 관계 : 주 안에서 하나됨. 그리스도의 일을 위해 함께 일함. 덧붙여 기도의 동역과 헌금의 동역을 요구.
시급한 지식의 이양 : 이것 위해 신학교 강화, 시골지역 목회자 교육, 성경학교 운영 등 요구. 신학교 질 높이는 작업 필요 : 몇몇 권위있는 신학교가 있는가 하면 많은 군소 교단의 신학교도 있음. 그런 반면, 인도네시아 전반적인 분위기가 교수층 자체로도 석사학위를 줄 수 있는 분위기이기에 선교사를 전체 분위기에 맞게 그리고 질을 더 높이기 위해 석사 학위보다는 높은 학위가 요청하고 있다고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