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의 일본 선교 50년의 역사와 전망
이원중, 안미연(2011 년 7월 파송, 서울대, 장신대, 동지사대학 박사, 군마현 니지마가쿠엔단기대학 준교수, 동지사대 교다나베 캠퍼스 채플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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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지사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수여식(모친과 가족 선배 이선애목사) | ||
1. 들어가며
본고는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Presbyterian Church of Korea, 이하 PCK 로 줄임)가 일본에 공식적으로 선교사를 파송해서 사역을 시작한 지 50 년을 맞이한 것을 기념하면서, PCK 의 일본 선교가 역사적으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개관하고 분석하며 이를 바탕으로 향후 선교 사역의 방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50 년간의 PCK 일본 선교는 다소의 어긋남과 잘못은 있었다 할지라도 에큐메니칼 선교에 충실한 선교였고, 개교회 중심의 복음주의 선교였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현재 일본의 기독교와 사회가 직면한 현실과 미래를 전망할 때, 일본의 기독교와 사회에 대한 더 깊은 이해,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역의 패러다임 전환, 일본 사회와 국제적 입장에서 샬롬을 추구하는 방향으로 선교가 전개되어야 함을 또한 주장하고자 한다. 먼저 연구의 범위를 설정하고자 한다. 무엇이 PCK 의 선교라고 할 수 있겠는가?
필자는 PCK 의 선교신학을 이해하고 그 신학과 선교 정책에 맞추어 선교활동을 하는 것을 PCK 의 선교라고 부르고자 한다. PCK 가 ‘대한예수교장로회 선교신학 지침’과 ‘우리의 선교신학’이라는 연구 결과를 내어 놓고 채택한 것은 1996 년이었으며 이를 개정해서 ‘총회선교신학’을 발표한 것은 2018 년이다. 그러나 그러한 선교신학으로 명문화되기 이전에도 PCK 는 복음전도와 교회 개척 및 성장을 중심으로 하는 복음주의와 현지 교회와의 협력 관계를 바탕으로 복음의 사회적 적용과 실천에 힘을 기울이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총회의 선교 신학적 근간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므로 PCK 의 선교란 기본적으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 정신이 양립하는 것이 아니면 안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PCK 의 파송으로 일본 선교에 종사하고 있으나 PCK 의 선교를 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PCK 총회에서 공식적으로 파송 받지 않은 채 단독 혹은 개교회의 파송으로 일본에서 활동하고 있으나 PCK 의 선교를 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이렇게 보자면 PCK 출신으로 ‘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일본에서 활동하는 목회자들 전반이 그 연구 대상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시간과 자료, 무엇보다 필자의 능력의 한계로 말미암아 PCK 와 관련된 모든 활동을 다룰 수는 없었다. 그래서 본고에서는 PCK 에서 공식적으로 파송된 선교사들의 활동으로 연구 범위를 제한한다. 그러므로 장신대에서 수학하고 재일대한기독교회 최초의 여성 목회자로 안수를 받고, 여성 총회장까지 역임한 경혜중 목사와 같은 이는 연구의 범위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이 연구의 한계를 명확히 보여주는 바이기도 하지만, 총회가 선교사로 인선을 하고 파송을 한다는 것의 중요성과 의미라는 차원에서는 PCK 의 일본 선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이해의 정확성을 높일 수도 있다고 여겨진다.
이보다 더 중요한 연구의 한계는 여성 선교사들의 사역이 충분히 조명되고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남성 선교사가 독신으로 와서 선교사역을 한 경우는 거의 없을 뿐더러 여성 선교사가 함께 가정을 세우며 목회 사역을 함께 하지 않는 것을 상상하기 쉽지 않다. 여성 선교사가 각 선교 사역지에서 차지하는 역할의 중대성에도 불구하고 이와 관련된 기록과 자료는 거의 남아 있지 않으며 연구의 필요성 조차 제기되지 않고 있다. 그 점에서 본고도 종래의 관점에서 그리 다르지 않으나 다만 이로 인해 본 연구가 절름발이 연구임을 인정하고자 한다.
본 연구를 위해서 PCK 총회 기록,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복음신문』 및 총회 기록, 각 선교사들이 사역했던 교회의 주보 및 공동회의록 등을 참고했다. 또한 각 선교사들로부터 제공받은 이력서, 선교사 지원서 등을 참고했다. 정황을 파악하기 위해 관계자들의 증언을 참고하기도 했으나, 가능한한 모든 내용은 남겨진 기록을 상호 교차 검증함으로 객관성을 담보하고자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술상의 실수나, 기록의 오독 등 모든 문제는 필자의 책임이다.
이 연구가 기획되었을 당시 김충락 목사(재일대한기독교회 사카이교회), 조원철목사(재일대한기독교회 미사와교회) 등과 함께 역사연구위원회를 구성해서 자료 수집에 나섰다. 마감기일에 쫓겨 연구위원들과 함께 원고를 읽고 교정을 보고 수정하는 작업을 거치지 못하고 말았다. 자료 수집에 수고해 준 연구위원들에게 감사와 더불어 사과의 뜻을 전한다. 그런 의미에서 본고의 기술과 주장은 PCK 일본선교회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기보다는 이 연구를 위탁받은 필자 이원중의 개인적인 견해임을 밝혀두고자 한다. 다만 그것은 개인의 감상이라기 보다도 나름 역사적, 신학적 객관성을 담보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인 것임은 분명하다.
마지막으로 자료 수집에 협조해 준 정연원 목사(오사카교회) 김병호 목사(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 이근수 목사(재일대한기독교회관 관장), 홍성완목사(츠쿠바동경교회 목사), 장경태 목사(후나바시교회 목사)에게,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중앙교회의 성도들에게도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본 연구를 제안하고 위탁해 준 일본선교회 회장 강장식 목사(시나가와 교회), 인쇄를 담당해 준 총회세계선교부의 김형호 선교사에게 그리고 원고의 번역과 교열에 함께 해 준 동반자 안미연 선교사에게 심심한 사의를 전한다.
범례
1. PCK 선교사들의 호칭은 기본적으로 ‘선교사’로 통일하지만 한 차례 최초에 선교사의 언급이 있은 후에는 생략한다.
2. 일본어 고유명사의 경우 최초 언급시 한글 표기와 일본어 한자 표기가 있은 후에는 한글로만 표기한다.
3. 일본어는 가능한한 한글로 음역하며 그 원칙은 국립국어원의 일본어 표기법에 따른다. 단, 일본 현지 교회에서 일상적으로 쓰여서 정착된 경우에는 이를 따른다. 예를 들면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 (‘도쿄교회’로 불리지 않음), 재일대한기독교회 츠쿠바동경교회
(‘쓰쿠바도쿄교회’로 불리지 않음)와 같은 경우이다. 하지만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교회는 ‘대판교회’로는 잘 불리지 않으며, 동교회 교토교회의 경우, ‘경도교회’로도 ‘교토교회’로도 불리운다.
2. 전사
1)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시작과 한석진 목사의 파송 1906 년 도쿄에 동경조선 YMCA 가 설립되고 이곳에서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예배가 시작되었다. 평양 장대현교회의 장로였던 정익로는 국한문 옥편 편찬을 위해서 일본을 방문 당시 동경조선 YMCA 의 김정식 총무와 유학생들을 모아서 YMCA 와는 별도의 교회를 설립 예배를 드리기로 했다. 이 때가 1908 년이며 이것이 현재의 동경교회의 설립이며 지금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시작이기도 하다. 처음에 모인 이들은 PCK 의 전신인 조선예수교장로회 독노회에 목회자의 파송을 요청하고 이에 응해 파송된 이가 장로교 최초 7 인의 목사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한석진 목사였다. 한석진은 1909 년 10 월에 도일했다.
독노회는 한석진에게 신문사의 설립과 운영을 맡겼었기에 한석진에게 허락한 일본 전도의 시간은 본래 1 개월이었다. 그러나 한석진은 약 3 개월간 전도하면서 동경교회의 기틀을 놓고 귀국했다. 그 이후로는 박영일 장로, 임종순 장로 등이 교회의 책임을 맡아 교회를 돌보았다. 1912 년 9 월 조선의 장로교회와 감리교회는 연합해서 동경의 교회를 돌보기로 하고 이 교회의 이름을 ‘연합예수교회’로 할 것, 장로교회에도 감리교회에도 속하지 않게 할 것, 번갈아 가면서 전도자를 파견할 것 등의 내용에 합의했다.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처음부터 연합교회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합의에 기초해서 최초로 파송된 목회자가 장로교회의 주공사 목사였다. 이후 역사적 굴곡 속에서 일본의 한인 교회는 1934 년 ‘재일본조선기독교회’라는 독립된 교회로 열매를 맺었다. 그러나 일본제국의 군국주의화와 전쟁 도발 속에서 종교에 대한 탄압이 강화됨에 따라 최종적으로 1941 년 일본기독교단에 합병이 된 채 민족의 해방을 맞이하게 되는 시련을 겪었다.
2) 해방후
1945 년 8 월 15 일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통치로부터 해방을 맞이하였다. 이는 한반도 및 관련 도서 지역이 일본의 식민지 조선이 아닌 독립된 국가를 형성하기 시작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로서 양국간의 관계는 멀어짐을 의미하기도 했다. 종교단체법에 의해서 강압적으로 일본기독교단의 일부가 되었던 과거 재일본조선기독교회는 가장 먼저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 탈퇴하였고 1945 년 11 월 재일본조선기독교연합회를 창립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는 이 교회의 가장 큰 위기이기도 했다. 그 교회의 구성원인 신도와 목회자들이 대거 한국으로 돌아갔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자 나름의 목적과 사정으로 인해 남은 이들에 의해서 교회는 명맥을 유지했고 한국과 일본의 기독교를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은 역할을 했다.
해방이후 PCK 의 일본 선교가 개시되기까지 장로교회의 일본 선교와 관련해서 주목할만한 인물은 세 사람이다. 이종성(1922-2011) 목사, 전영택(1894-1968) 목사, 박영창(1915-2015) 목사가 그들이다. 박영창 목사는 재일본한국 YMCA 의 협동 총무로 활동하였으며 전영택 목사는 6.25 전쟁 기간중 일본에 머물면서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전도활동을 도왔다. 그는 문필가 답게 길지 않은 체류 기간 중에 많은 글을 『基督申報(그리스도신보)』 (재일대한기독교회 기관지 『福音新聞복음신문』의 전신)에 기고했다. 이는 당시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상황과 과제에 대해서 많은 시사점을 보여 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종성 목사는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 및 총장, PCK 의 총회장까지 지낸 PCK 역사상 손꼽히는 신학자이자 목회자이다. 그런 그가 신학공부를 한 곳은 도쿄신학대학이며, 목사 안수를 받은 교회는 재일대한기독교회이고, 첫 목회 사역지는 한일간의 뿌리 깊은 역사를 갖고 있는 시모노세키(下関)였다. 그는 젊은 목회자이면서도 신학자의 소양을 발휘해,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현황, 과제에 대해 통찰력 있는 견해를 피력했다(『그리스도신보』제 24 호. 1952). 특히나 ‘在日大韓基督敎界의 現狀’이라는 제하의 일련의 기사는 심지어 그로부터 70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그리스도신보』제 40 호, 제 43 호, 제 45 호~48 호).
그는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진로를 제시하면서 당시 교회의 문제 세 가지를 지적한다. 첫째, 성경에 대한 지식의 결핍. 둘째, 교회인의 자각의 결핍. 셋째, 복음과 세계와의 관계에 대한 이해의 결핍이 그것이다. 이러한 결핍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특히나 청년층에 건전한 기독교 운동이 일어나지 않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긴다. 그는 역설한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살 방법은 어떠한 처지와 환경에 빠져 있을지라도 복음에 사는 것이며 복음을 먹는 것 밖에는 이 이상에서 찾아 볼 수 없다”(『그리스도신보』 3 쪽, 제 48 호. 1952.). 이종성 목사 이후에도 고 박석규 목사(정릉교회 원로), 고 김기수 목사(안동교회 원로)가 동경신학대학에서 유학을 했고 김수진 목사가 교토의 도시샤대학에서 연구를 하는 등 PCK 와 일본의 기독교는 유대 관계를 맺어 왔다.
3. PCK 일본 선교의 시작과 전개
1) 처음 파송된 3 인의 일본 선교사
대한예수교장로회가 합동(GAPCK)과 통합(PCK)으로 분열된 이후 공식적으로 파송된 최초의 일본 선교사는 이병구 이상희 선교사 부부와 양형춘 선교사 부부, 그리고 독신 여선교사 정영희 전도사이다. 양형춘 목사와 이병구 목사의 공통점은 한국에서 먼저 파송을 받아 일본에 입국을 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일본에서 연구 목회 등의 사역을 하고 있던 중에 파송을 받았다는 점이다. 이병구는 계명대학과 장신대를 졸업한 후 1965 년 도일, 관세이가쿠엔대학(関西学院大学) 신학연구과를 졸업했다. 재일대한기독교회 무코가와(武庫川)교회에서 전도를 하다가 1971 년부터 니시노미야(西宮) 교회에서 전도하던 중 PCK 의 파송선교사가 되었다. PCK 의 기록 상으로는 이병구의 파송 일자가 1972 년 3 월 9 일, 양형춘이 5 월 1 일로 이병구가 약간 앞서지만, 일본의 협력교회에 가입한 것은 양형춘이 먼저이다. 하지만 재일대한기독교회 입장에서는 이 세 사람을 동시에 받아들이기로 했으며 그 임기를 3 년으로 정했고, 단지 행정 및 재정적인 관건이 해결된 순서대로 가입식을 거행했다.
양형춘은 1972 년 10 월 16 일 교토교회에서 열린 재일대한기독교회 제 28 회 총회에서 정식으로 ‘가맹식’을 통해 요코스가(横須賀)교회의 정식 목회자로 위임을 받은 반면, 이병구는 니시노미야교회에서 사역을 하고는 있었지만 생활비의 부담을 어느 쪽이 하느냐가 미정인 상태라 가입이 성립되지 않고 있었다. 이병구의 가입식은 이듬해 1973 년 10 월 11 일 오사카 니시나리(大阪西成)교회에서 열린 제 29 회 총회에서 거행되었다. 같은 달 28 일에는 니시노미야교회 취임식이 이루어졌다. 이병구는 순탄치 않은 과정속에서 1978 년 니시노미야교회를 사임한 후 같은 해 오사카에서 이마후쿠(今福)전도소를 개척했다. 전도소는 순적하게 성장해서 교회가 되었고 이병구는 은퇴할 때까지 이 교회를 섬겼다. 1995 년에는 관서지방회 지방회장, 2001 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목회자로서 공헌하였고 그자녀들도 일본 선교 사역에 헌신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
양형춘이 요코스가교회에서 사역을 시작한 것은 동경신학대학 대학원에서 연구중이었던 1969 년으로 거슬러 올라 간다. 1974 년 3 월에는 교토교회의 청빙을 받아 부임하였으며 이 교회에서 20 년간 목회를 하였다. 그는 일찍이 깊은 재일대한기독교회에 대한 깊은 통찰력을 가지고 있었다. 본인 자신은 한국에서 출생해 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일본 사회에서 재일교포가 겪는 부당한 차별과 고통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으며, 이 교회가 일본 사회에서 재일동포 사회에서 복음을 전하는 책임의 중요성을
진중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복음신문』제 286 호, 제 291 호. 1973.).
그의 이러한 신학과 신앙이 재일대한기독교회에도 인정받았기 때문에, 일찍이 간사이지방회장을 역임하고 1987 년 제 39 회 총회에서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으로 선출이 되었다. 이는 재일교포가 아닌 한국에서 온 선교사로서는 최초로 총회장으로 선출되었기에 더욱 의미 있는 일이다. 양형춘은 1986 년 5 월을 임기 만료로 선교사직은 사임했지만, 교토교회의 목회는 계속하다가 1993 년 10 월 사임후 1994 년부터 2005 년 2 월까지 미국 콜롬버스한인장로교회에서 목회 후 원로 목사가 되었다. 은퇴후 미국에 체류하다가 2014 년 7 월 일본으로 입국, 사위 정연원목사가 시무하는 오사카에서 2021 년 7 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영희 전도사 파송일은 1972 년 5 월이지만, 일본에 입국한 것은 그해 12 월이 되어서였다. 용산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하다가 선교사로 파송 받기 위해서 1972 년 6 월에 사임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세 개의 노회만 있었는데 이 세 개 노회의 여전도회 연합회에서 후원을 담당하였다.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관서신도학원을 통해서 평신도의 신앙 및 신학 교육을 위해 중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 이후에도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필요에 따라 후세(布施)교회, 미즈시마(水島)교회, 와카야마(和歌山)교회, 칙코(築港)교회, 나고야(名古屋)교회, 요코스가교회 등 여러 교회의 상황에 응답하여 무목교회 혹은 사역자가 필요한 교회의 부름을 받아 심방, 설교, 성경공부 등 교인들의 신앙 성장에 꼭 필요한 일을 담당하다가 1985 년 2 월에 사임했다.
2) 1970~80 년대의 선교사 파송과 활동
70 년대에는 앞서 언급한 양형춘, 이병구 정영희 이외에도 박정자, 허달수 선교사 등이 파송되었다. 박정자는 1973 년 5 월 26 일에 KCCJ 와의 협의 하에 오사카교회로 부임했다. 애초에는 예정된 3 년 간의 임기를 마치고 귀국하기로 했으나 히라오카(枚岡)교회에서 적극적으로 박정자의 사역을 요청하였고 재일대한기독교회와 히라오카교회가 소속된 간사이지방회도 이를 양해하여서 부임하는 것이 성사되었다. 1997 년 은퇴하기까지 사역을 지속했다. 은퇴후에도 간사이 지방에 머물다가 2017 년 하늘의 부르심을 받았다. 허달수 목사는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전도 전략에 부응하기 위해서 파송받았다. 재일대한기독교회는 1970 년대 후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소속 교회가 없는 지역에 개척전도를 전개하였고 그 중 하나가 시코쿠(四国)지역이었다. 이에 개척 선교사로서 파송을 받은 이가 허달수 목사였으며 에히메현(愛媛県)에 니이하마(新居浜)전도소를 개척하였고 개척 초기에 예배당을 세우기까지 하였다. 이는 오늘 니하마그레이스교회로 발전하였지만 허달수 목사 자신은 3년의 임기를 마치고 일본을 떠나 대구 내당교회, 전주대 대학교회 등에서 목회를 하였다.
1980 년대 들어서 일본 선교는 다양화되었고 평가할 수 있다. 1980 년대 들어 최초로 파송된 박경화 선교사는 재일교포 보다는 일본인을 중심으로, 교단 또한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아닌 일본기독교단으로, 지역적으로도 간사이가 아닌 홋카이도(北海道)에 파송되어 사역을 시작했다. 사역의 내용 또한 복음 전도 뿐만 아니라 야스쿠니신사 문제, 평화헌법 개악 문제,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차별 문제 등 사회 선교의 분야에도 직접적으로 관여하였다. 1983 년 말에는 효고(兵庫) 교구로 이동해서 1984 년 3 월 니시노미야세코(西宮聖光)교회를 창립하고 교회의 목회를 하면서 여전히 복음의 사회적 실천에 관련된 활동에 깊숙이 관여했으며 2012 년에 은퇴하였다.
또 하나의 다양성은 박창환 목사의 선교사 영입에서 나타난다. 박창환은 일본에서 출생하고 성장한 재일교포로서 일본에서 교육을 받고 츄오(中央)성서학교 및 세이난가쿠인(西南学院)대학에서 신학을 공부한 후 재일대한기독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박창환은 1973 년부터 1 년간 장신대에서 목회연구 과정을 밟으며 서울의 동안교회에서 목회 연수를 받았다. 일본에 귀국해서 가와니시(川西)교회에서 담임목회를 하다가 1980 년에 오사카 인근 도요나카(豊中)부흥제일교회를 개척하였다. 1981 년 본교단의 선교사로서 영입이 되었고 일생을 본 교단의 선교사이자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목회자로 헌신하였다. 후임으로는 박목사 자녀인 박영자목사가 목회중이다.
이러한 다양성은 재일교포뿐만 아니라 일본인을 선교사로 파송하는 것으로도 나타났다. 모휘대(일본명 森田日出夫 모리타 히데오) 선교사는 일류 제약회사에 근무하다가 기독교인으로 일본의 과거 잘못을 사죄하기 위해 1974 년에 한국에 왔다. 장신대 학부와 신대원 74기로 졸업하고 여주 금사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서울동남노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았다. 부인 노다 쇼코(野田笙子) 선교사와 함께 1984 년 12 월에 역파송을 받았다. 광성교회(당시 김창인 목사 시무)의 후원으로 1985 년에 이바라키현(茨城県) 미토(水戸)에서 미토전도소를 개척했다.
1987 년에는 츠쿠바동경( つ く ば 東京)교회를 개척하고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와 광성교회의 협력으로 예배당을 건축할 수 있었다. 츠쿠바동경교회는 이후 조중래 선교사가 1991 년까지 이후 2001 년, 전병옥 선교사가 시무하다가 나고야 미나미교회로 이임했다. 츠쿠바는 동경중앙교회와 더불어 PCK 일본선교회와 가장 깊은 관련을 맺는 교회 가운데 하나가 된다. 모휘대는 이후 재일대한기독교회 소속이 아닌 단독으로 에도사키마치(江戸崎町) 등 두 개의 교회를 더 개척하고 나서 다섯 번째 교회로 이바라키현에 고세(広星)그리스도교회를 개척한 후 일본복음전도교단(日本福音伝道教団)에 소속시켰으며 PCK 선교사로는 은퇴했지만 목회는 지속하고 있다.
김승필 선교사는 1982 년 해방교회의 후원으로 오키나와(沖縄)로 파송받았다. 오키나와에서 재일 미군 가족 및 기지와 관련된 일을 하는 교포를 중심으로 사역하다가 1984 년 11 월 오카자키(岡崎)교회의 위임목사가 되었으나 1987 년 일본 선교사를 사임하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한때 일본으로 돌아와 재일대한기독교회 오가키(大垣)교회에서 목회를 했으나 다시 미국으로 건너가 미국장로교(PCUSA) 소속으로 목회를 하다가 2012 년 8 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정연원 선교사는 1983 년 일본 동경신학대학으로 유학으로 왔다가 1972 년 창립되었던 동경한국인연합교회(현재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중앙교회)에 담임목회자로 청빙을 받게 되었다. 정연원은 청빙을 받으면서 이 교회를 재일대한기독교회에 가입하도록 추진하였고 교회는 가입을 결의,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이를 수용하였다. 이에 정연원은 같은 해 부산동노회에서 안수를 받음과 동시에 일본선교사가 된다. 동경국제교회는 주재원, 연구원, 유학생 등이 중심이 된 단립교회였으나 재일대한기독교회와 본교단 간의 협력의 정신이 충실히 실현되었을 뿐만 아니라 재일대한기독교회 안의 교회의 색깔과 성격도 보다 다양해지게 되었다.
동경국제교회는 가입과 동시에 그 명칭을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시나노마치(東京信濃町)교회로 변경했다가 1989 년 동경중앙(東京中央)교회로 다시 개칭했다. 정연원은 이후 오사카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2000 년 12 월에 동경중앙교회를 사임하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2007 년 10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창립 100주년이 되는 해에 제 49 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PCK 일본 선교회 안에서 가장 선임 선교사이자 역사의 산 증인이기도 하다.
문태선 선교사는 1987 년 후원으로 파송되어 재일대한기독교회 가와니시(川西)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문태선은 1961 년 장신대를 졸업한 후 고베(神戸)개혁파신학교에서 연구한 학력을 가지고 있었다. 제주도의 여러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제주노회장까지 역임한 바 있다. 제주노회의 파송으로 입국 1988 년 6 월 가와니시교회에 위임을 받았고, 1995년 제 11 회 서부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2000 년 사임하기까지 한 교회 만을 섬겼다.
서울노회 파송인 박무수 이봉선 선교사는 1988 년 3월에 시즈오카현(静岡県) 재일대한기독교회 하마마츠(浜松)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을 시작했고 하마마츠교회에서 은퇴를 했다.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 1991년 일본인교회에서 예배당을 매입해 단독 예배당을 세웠으며 1995 년과 2001 년 두 차례에 걸쳐 중부지방회장으로 선출되는 등, 묵묵히 자신의 소임을 다했다.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어 2005 년 은퇴와 더불어 명예목사로 추대되었다. 박무수는 2020 년 12 월 주님의 품에 안겼으나 자녀중 딸은 고베중앙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냈으며 아들 박00목사는 한국 높은 뜻 숭의교회에서 부목사를 지내고 중부지방 오가자키교회에서 목회를 하다가 미국으로 이주하여 일본어를 쓰는 이들을 위한 목회중이다.
김병호 선교사는 부산신학교를 졸업하고 1986 년 입국해 어학연수를 마치고 동경신학대학에서 유학중 재일대한기독교회 후나바시(船橋)교회, 우라와(浦和)전도소 등에서 설교 봉사를 해 왔다. 그러던 중 무목교회였던 우라와전도소(현재 오미야大宮교회)에서 담임목회자로 청빙받았다. 김병호와 김점희는 1989 년 4 월 공식적으로 교단 파송을 받았고 1990 년 7 월 우라와전도소의 담임목사로 위임을 받았고 전도소는 교회로 성장했다. 뒤이어 1994 년부터는 재일교포의 유서가 깊은 조후(調布)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사역했다.
2001 년에는 관동지방회 지방회장으로 선출되었고 2005~2009 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의 서기가 되고 이후 2013 년 10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간사가 된다. pck 선교사가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총간사로 선출된 것은 김병호가 사상 처음의 일이다. 2023년 4년 3회(12년) 총간사를 지내고 후임 총간사가 시코쿠에 거주하여 상근이 불가능하여 총회 임시 간사로 봉사중이다.
3) 1990 년대의 선교사 파송과 활동
PCK 는 1989 년 제 74 회 총회에서 전도부의 해외선교위원회를 분리해서 세계선교부를 신설했다. 이러한 가운데 최초로 파송 받은 이는 민영기 장귀란 선교사였다. 민영기는 1990 년 7 월에 파송받아 재일대한기독교회 소속으로 니이가타(新潟)전도소를 설립했다. 전도소는 교회로 성장했고 2000 년 니이가타교회의 목회를 마무리하고는 2006 년 7 월 9 선교사를 사임하고 귀국해서 명성교회 선교담당 목사로 사역을 했다.
조중래 이경애 선교사는 1991 년 8 월 11 일에 파송을 받아 wkd신대 동기인 모휘대 목사의 뒤를 이어 츠쿠바동경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했다. 2001 년부터는 재일대한기독교회 후나바시 교회의 청빙을 받아 담임목사로 사역하면서 히다치교회 개척에 관여하고 미토교회 목회자도 겸임했다. 2003 년에는 관동지방회장, 2013 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장을 역임했으나 2016 년 11 월 다발성골수암이 악화되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아들도 장신대에서 공부후 목사가 되었으며 현재 부친의 뒤를 이어 일본선교사로 사역중이다)
전형구 이인숙 선교사는 본국에서 목회중 가포교회의 후원으로 1992 년 11 월에 파송을 받아 재일대한이아닌 치바현을 중심으로 사역을 시작했다. 그러나 PCK의 선교신학에 바탕을 두고 선교협력 교단과 협력 관계 속에서 사역하기 보다는 개인적인 전도활동으로 1994년 치바현 토미사토(富里)시에 나리타(成田)중앙교회를 설립하고 일본복음동맹(JEA)에 가맹되어 있는 성서그리스도교회에 가입을 했다. 은퇴후 한국으로 돌아갈 때까지 30 년간 치바현을 중심으로 일본인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벌였고 초기에는 PCK 일본선교회와 관계를 갖었으나 이후 교단이 달라 계속적인 교류는 없었다.
박미애 선교사는 1994 년 3 월 왕십리중앙교회의 후원으로 파송을 받아 아시아학원(Asia Rural Institute)에서 연수와 사역을 시작했다. 아시아학원은 선교협력교회인 일본기독교단과 밀접한 관계 속에서 아시아 및 제 3 세계의 농촌 지역에서 활동할 지도자들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이다. 이 교육기관에서 8년간 학생들의 지도와 교육기관을 운영하는 사역을 하면서 지역교회와 밀접한 교류를 나누었다. 일본기독교단 니시나수노(西那須野)교회에서 약 1 년간 담임목회를 하고는 선교사를 사임한 후 귀국했다.
김정주, 박인자 선교사는 개척한지 얼마되지 않은 재일대한기독교회 나가노(長野)전도소에 1994 년 5 월에 파송을 받았다. 전도소는 교회로 승격이 되었으나 2002 년 사임후 2 년간 공식적인 사역이 없음으로 인해 세계선교부에서 2004 년 12 월로 사임처리가 되었다. 김목사는 동지사대학에서 공부하기도 했으며 이후 고향 제주도에서 목회중이다.
정인화 선교사는 1994 년 12 월에 파송되어 이바라키현 히타치(日立)의 히타치전도소에 부임했다. 츠쿠바의 조중래는 인구가 증가하는 히타치 지역에 모여드는 한인들을 위한 성경공부와 예배 모임을 열었다. 정인화의 부임 이후 교회는 한인들과 일본인들이 함께 예배하는 교회가 되며 성장했으나 선교사의 건강 문제로 2017 년 12 월 교회를 사임했다. 안식년을 갖고 건강이 회복된 후에는 2019 년부터 아키타현(秋田県)에 있는 일본기독교단 슈난(秋南)교회를 중심으로 사역을 지속하고 있다.
최홍덕 이성숙 선교사는 1997 년 5 월에 파송받아 일본기독교단 오사카성광(聖光)교회, 일본기독교단 시마노우치(島之内)교회 등에서 동사 사역을 했다. 도시샤대학교 신학연구과에서 조직 신학을 전공으로 신학연구를 하면서 캠퍼스 선교를 하고 박사 학위를 마치고는 2003 년12 월 선교사를 사임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이후 다시 모교인 동지사 대학의 교원이 되고 사카이근교 일본인 교회서 사역중이다.
염덕철 한경희 선교사도 1997 년 5 월에 파송받았다. 동경의 정연원 목사는 요코타(横田) 미군기지 내에 있는 한인들을 위해 예배를 인도하다가 교회가 필요함을 알게 되고 1994 년 요코타한미교회를 개척하였다. 동경중앙교회와도 적극적인 교류를 나누며 협력하는 관계에 있다가 정연원 목사의 권유로 공식적으로 목회자를 청빙하기로 하여 염덕철이 부임하게 되었으며, 1999 년 6 월 요코타교회 역시 정식으로 재일대한기독교회에 가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염덕철의 사역은 오래 지속되지 못해 2005 년에 귀국하였으며 교회도 폐쇄되고 말았다. 이후 니카다교회서 사역하기도 하였으나 이후 소식이 없다.
이재륭 한영애 선교사는 1997 년 11 월에 파송받아 재일대한기독교회 베데스다선교교회를 섬기다 2008 년 사임하고 귀국하였다. 같은 달 오대식 김영숙 선교사도 재일대한기독교회 한사랑교회의 담임목사로 부름을 받아 사역하다가 2000 년 4 월에 사임하여 귀국했으나 2004 년 1 월에 재파송되어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을 시작하고 만 5 년 뒤 2008 년 12 월에 선교사를 사임하고 높은 뜻 숭의굣회로 부임한다.
90 년대는 70 년대에 시작된 PCK 의 일본 선교가 특히 재일대한기독교회를 중심으로 자리를 잡고 인정받는 시대라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총회 및 각 지방회에서 PCK 선교사들이 비중 있는 역할을 맡았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1987 년에 PCK 선교사로서는 처음으로 양형춘이 총회장을 역임했으며, 1995 년에는 관동지방회장에 박무수, 관서지방회장에 이병구, 서부지방회장에 문태선이 선출되기에 이르렀다. 다섯 개의 지방회에서 세 명의 지방회장이 PCK 선교사였던 것이다.
또한 PCK 의 배경을 갖고 있는 경혜중 목사가 1997 년 최초의 여성총회장으로 선출되었고, 2001 년에는 이병구가 총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90 년대는 선교사 파송의 양적 성장에 치우친 나머지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른 시기이기도 하다. PCK 총회는 1984 년 한국기독교선교 100 주년을 맞이하며 제 69 회 총회에서 348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기로 결의했고 1989 년 세계선교부의 신설 이래 단 5 년 만에 105 가정 199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였다. 이러한 성장세는 계속되어 10 년 뒤 1999 년에는 단기선교사를 제외하고도 77 개국에 320 가정 600 명의 선교사를 보내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PCK 안에서 이와 같은 양적 팽창 정책은 상당기간 유지되었으며 얼마 만큼 많은 선교사를 파송하느냐 하는 양적 성장이 곧 선교의 성장이라는 인식이 일본 선교에도 적용되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도쿄 요도바시(淀橋)한인교회 관계자들을 대거 선교사로 영입한 일이다. 요도바시한인교회는 1980 년대 중반 이후로 김규동 목사의 열정적인 전도와 강력한 지도력, 엄격한 제자훈련을 바탕으로 유학생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교회였다. 부산동래중앙교회와 세계선교부는 대표격인 김규동 목사뿐만 아니라 관계자들 10 가정 15 명에게 일주일간의 집중 교육과 면접 등을 실시하고 1998 년 7 월, 이들을 ‘현지선교사’라는 명칭으로 총회 파송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그러나 본래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출신의 김규동 목사와 요도바시한인교회의 사역자들은 PCK 의 선교 신학이나 선교 방침에 대해서 이해가 없을 뿐 아니라 굳이 따를 이유 또한 없었다. 이에 명확한 선교 신학과 방침을 갖고 있는 PCK 의 일본 선교회와 잦은 마찰을 빚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결국 세계선교부는 2004 년 1 월에 열린 제 88-1 차 선교사분과위원회에서 김규동을 비롯한 8 가정 12 명의 일본 현지 선교사에 대해서 일본 선교회의 재추천이 없다는 사유로 시무 사임키로 결정한다.
본교단이 1998 년 3 월 일본예수그리스도교단(日本イエス・キリスト教団, Jesus Christ Church in Japan, JCCJ)과 선교 협약을 체결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 교류하는 교회 수의 확장으로 해석될 수 있다. JCCJ 는 영국 성공회의 Church Missionary Society 소속의 선교사 벅스턴(B. F. Buxton)이 창설한 일본 선교 단체인 ‘일본전도대(日本伝道隊)’를 모체로 하는 교회이다. 이는 개인의 회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전도 중심의 교회로서, 성령의 체험을 강조하는 등 순복음교회와 유사성을 갖는 교회이다. 일본에서도 일본기독교협의회(NCCJ)가 아닌 일본복음동맹(JEA), 일본복음연맹(JEF)등에 가입되어 있다. JCCJ 와 PCK 는 신학적, 역사적으로 어떠한 접점이 없을 뿐더러 선교협약에 이르기까지 과정도 대단히 짧고 충분한 논의가 이루어졌다고 볼 근거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선교협약만 있었을 뿐 그 이후로 실질적인 교류, 선교사의 상호 파송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는 성장중심주의적 선교가 선교사의 영입이 아닌 교단간의 협약의 형태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았다고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4) 2000 년대의 선교사 파송과 활동
2000 년 6 월 김수 정정희 선교사가 안산제일교회의 후원으로 21 세기을 여는 내한 일본선교사가 파송받아 오사카의 미나미지역에서 3 년 간 사역하면서 교회통합 신학원 운영등 열정적인 사역을 하였으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된다. 같은 해 12 월 최병구 박은희 선교사가 일본기독교단에서 사역하는 위탁선교사로 위촉되어 었다. 김군식 송명희 선교사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평강(平康)교회로 파송이 되었다가 교단 내서 큰 사건에 연류되여 이후 본국으로 귀국한다 최병구는 합동정통소속 목사였지만 재일대한과 교류가 없어 통합측 선교회에 소속되여 오사카세코(大阪聖光)교회의 담임목사로 일본기독교단에 속하게 된다. 2007 년 본교단의 선교사는 사임하였으나 대한예수교장로회(백석)의 선교사로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다.
배한숙 손은미 선교사가 재일대한기독교회 한사랑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기 위해 도림교회의 후원으로 2001 년 3 월 파송을 받아 같은 해 6 월에 위임식이 거행되었다. 학구적인 목회자로 알려진 배한숙은 201 0 년 12 월부로 일본 선교사를 사임하고 2012 년 12 월 캄보디아 선교사로 재파송되었으나 다시 본국으로 귀국해 목회중이다.
임태호 전혜성 선교사는 정연원이 오사카교회의 담임목회자로 부임하면서 사임하였던 동경중앙교회에서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음으로 2002 년 12 월 파송을 받게 되었다. 임태호는 2017 년 10 월 사임하기까지 같은 교회에서 목회를 하며, 동경중앙교회의 숙원이었던 예배당 건축을 완수했고,장신대 후배들을 단기선교사로 받아 훈련시켰다. 일본선교회의 회장으로도 봉사하였으나 이후 귀국하여 부천노회서 목회중이다.
2003 년 3 월 김용진 강선미 선교사가 단립 오사카시온(大阪 シ オ ン )교회가 재일대한기독교회에 가입하면서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기 위해 파송되었다. 교회 내부 문제로 김용진은 오사카시온교회를 사임하였고, 2010 년 8 월 중국으로 재파송되었다. 중국의 선교사정이 전반적으로 악화되어 감에 따라 2017 년 5 월에는 터키로 재파송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최종복 장현숙 선교사는 2004 년 7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평강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 미약한 교세가 헌신적인 전도로 다소 성장했으나 동교회 오사카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사역을 하던 중 선교사의 건강 악화로 2011 년 11 월 사임하고 한국에서 목회를 재개했다. 그리고 2014 년 6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중부지방회가 치쿠마( ち くま )비전교회를 개척함에 따라 이 교회의 담임목사로 재파송되었다. 역시 건강 문제로 안식년을 갖고는 2020 년 4 월 사임후 한국에서 농촌 목회에 전념하고 있다.
유재무 장석숙 선교사는 2004 년 12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성산(聖山)교회의 담임목사로 파송되었다. 성산교회는 안산제일교회서 파송받은 김수목사가 목회중 다른 교회와 합병을 하면서 오사카서 부흥하다가 사임후 도미한다. 이후 최종복이 인근 오사카제일교회로 이임함에 따라 무목이 될 평강교회와 성산교회를 간사이지방회의 성산교회와 2008년 합병해 부임한다. 그러나 2004년 부터 일기 시작한 미국발 리먼 쇼크의 영향으로 인한 엔고 현상에 더 이상 버키지 못하고 2009 년 4 월 사임하고 귀국의 길에 올랐고 후임으로는 우에마치교회서 부목사로 사역하던 000목사가 사역하게 된다.
전병옥 김진희 선교사는 2005 년 2 월 모휘대가 개척하고 조중래가 시무하던 츠쿠바동경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파송되었다. 동시에 미자립교회인 미토전도소에 설교 봉사를 하며 사역하던 중 동교회 나고야미나미(名古屋南)교회에 청빙을 받아서 2008 년 3 월 사역지를 옮겼다. 이후로 교회가 예배당 건축과 관련해서 갖고 있던 부채를 교인들과 힘을 모아 해결하였다. 지역의 특수성을 살려서 문화선교를 시도하며 재일 브라질인 교회와도 밀접한 협력 관계를 맺고 있다.
김인과 홍영숙 선교사는 2005 년 3 월에 재일대한기독교회 기후(岐阜)교회로 청빙을 받음으로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김인과는 한국에서 목회를 하기 이전에 1983~85 년 동경신학대학 대학원, 1985~88 년 릿교(立教)대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을 연구한 실적을 가지고 있었기에 50 세가 넘었음에도 정식 선교사로 파송을 받기에 문제가 없었다. 2016 년 3 월에는 동교회 후쿠오카(福岡)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강장식 이문경 선교사는 일찍이 동경유학을 마치고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에서 새롭게 일본 선교의 길을 준비했다. 고척교회에서 사역하던 중 재일대한기독교회 시나가와(品川)교회의 청빙을 받고 2008 년 2 월 재파송을 받았으며, 현재까지 같은 교회에서 지역 사회와 호흡하는 교회를 세우고자 노력하고 일본선교회에도 많은 기여를 해오고 있다.
박미애 선교사는 2008 년 3 월에 홋카이도 소재의 라구노가쿠엔대학(酪農学園大学)의 기독교학 담당교수로 청빙을 받았다. 일본기독교단 관계 대학으로서 재파송의 형식으로 사역을 시작하여 5 년간 교수 사역을 감당하였다. 2014 년부터 5 년간은 홋카이도 소재의 일본기독교단 놋포로(野幌)교회의 담임목사, 그리고 놋포로유치원과 방과후 교실에서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가르치는 사역을 완수하고는 2019 년부터 다시금 라구노가쿠엔대학 전체의 종교담당 사역에 열중하고 있다.
이중재 이은경 선교사는 2004 년 3 월 총회 파송이 아닌 개교회 파송으로 일본에 입국, 효고현 히메지(姫路)시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2006 년에는 4 월에 단립 니시노미야(西宮)그리스도제자교회를 개척, 일본인과 재일 한인 전도에 힘쓴 결과 교회가 성장하였고 재일대한기독교 서부지방회에 가입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2010 년 4 월 총회 파송 선교사가 되었고, 니시노미야제자교회는 2011 년 5 월 재일대한기독교회에 정식으로 가입하게 되었다. 한편 같은 지방회의 가와니시교회가 무목교회가 됨에 따라 목회자 부족에
고심하고 있던 서부지방회는 양 교회의 합병을 추진, 2016 년 7 월 가와니시교회라는 이름으로 합병이 성사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혜숙 선교사는 장신대 신학대학원을 졸업하고 2008 년 1 월부터 재일대한기독교회 한사랑교회에서 전도사로 사역을 시작했다. 2010 년 5 월에 목사 안수를 받고 곧 이어 분당구미교회 후원으로 총회 파송 선교사가 되었다. 교회 개척에 뜻을 두어 같은 해 12 월에 한사랑교회를 사임하고 2011 년 3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사랑의(愛の)전도소를 개척, 현재까지 이르고 있다.
이원중 안미연 선교사는 2008 년에 도시샤대학 신학연구과에서 일본개신교의 역사를 연구하기 위해 입국했다. 동시에 관서지방회에서 당시 무목교회였던 재일대한기독교회 교토히가시야마(京都東山)전도소에서 설교 목사의 사역을 할 수 있도록 허락을 받았다. 전도소가 성장해 감에 따라 성도들은 담임목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원중을 청빙하기로 결정하여 2011 년 7 월 총회에서 파송을 받게 되었다. 이후 히가시야마전도소는 교회로 승격하였고, 이원중은 2017 년 3 월 히가시야마교회를 사임, 도시샤대학의 전임연구원,
시간강사, 교토남부교회 협력 목사 사역을 하고는 2021 년부터 니지마가쿠엔(新島学園)단기대학에서 교목의 사역을 하고 있다.
김윤희 선교사는 도쿄 유학 시절 요도바시한인교회에서 자비량 캠퍼스 사역을 하면서 일본 선교에 헌신되어 있었다. 귀국후 장신대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목사 안수를 받고는 2012 년 2 월 공식적으로 파송을 받았다. 효코현에서 활발히 전도활동을 벌이고 있는 고베그리스도영광(神戸キリスト栄光)교회라는 단립교회와 협력 사역을 해 왔으나 2019 년 건강 문제로 선교지를 떠났고 2020 년 6 월에 사임한 것이 되었다.
송남현 임혜영은 최종복이 사임한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 2012 년 2 월에 파송을 받았다. 신대원 재학시절 김수진 목사의 영향을 받아 일본 선교에 뜻을 품게 되었고 목회 사역 중에도 일본어와 일본에 대한 공부를 지속하던 중 그 뜻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어린이 전도와 문서 사역 등 개교회에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전도 방법을 시도하고 있다.
최장수 허윤정 선교사는 2012 년 4 월에 파송을 받았다. 나고야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받은 바 있는 최장수는 복음 전도의 뜻을 품어 목회자의 길에 들어섰고, 동일본대재해를 겪은 일본의 재해민을 지원하기 위한 사역을 일본기독교단 및 재일대한기독교회와의 협력속에서 시작하였다. 일본기독교단과의 협력으로 2013 년 4 월부터 2019 년 3 월까지 아키타현에 소재한 일본기독교단 슈난교회를 중심으로 6 개의 예배당과 1 개의 가정 집회를 순회하며 전도활동을 했다. 2019 년 10 월부터는 사이타마현(埼玉県)소재의 동교회 히가시마쓰야마(東松山)교회의 담임목사로 사역하고 있다.
임선형 안혜영 선교사는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제일교회의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아서 2012 년 7 월에 파송을 받았다. 뉴커머가 중심인 교회이지만 지역의 일본인 선교를 위해서 지역 사회와 접촉점을 찾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시도하며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최홍덕 이성숙 선교사도 2013 년 11 월에 재파송을 받았다. 2013 년 6 월에 일본기독교단 이즈미오쓰(泉大津)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는데, 이미 2010 년 4 월부터 자신의 전공을 살려 도시샤대학에서 강사로 조직신학을 가르치기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또한 그라티아(Gratia) 선교센터를 설립, 일본인 청년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는 일을 하고 있다. 일본 교회 목회자들과의 교류, 신학의 발전을 위해서도 다양한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김정모 고애리는 1986 년에 일본에 사회생활을 하며 일본 교회에서 전도 사역을 하고 있었으나 한국 교회의 신학과 신앙에 대한 깊은 이해의 필요를 느끼고 2009 년 한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2013 년 12 월에 파송을 받았다. 오챠노미즈(お茶の水)크리스찬 센터의 일부를 빌려서 생명의말씀(いのちのみ言葉)교회라는 단립교회를 개척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교회 사역이외에도 장애인 돌봄, 노숙자 등을 위한 봉사활동을 실시해 오고 있다.
이윤상 홍향나 선교사는 2014 년 7 월 파송을 받아 동경중앙교회의 협력 속에 장기 사역의 계획을 세우며 준비를 하였다. 2014 년 12 월부터 2017 년 7 월까지 단립 사사즈카(笹塚)그리스도교회와 협력 사역을 하고는 2017 년 8 월부터 2022 년 3 월까지 일본기독교단 고마에(狛江)교회의 부교역자로 사역을 했다. 동시에 동경신학대학 대학원에서 조직 신학을 연구하던 것이 인정받아 더 깊은 신학연구를 위해 안식년을 갖고 독일에서 유학중이다.
윤재필 황금연 선교사는 2014 년 11 월 파송 이래로 특정 교단과 협력 관계를 맺지 않고 개인적인 전도활동을 하다가 올마이티(オールマイティ)교회를 개척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김종탁 강정선 선교사는 2014 년 12 월 파송되어 김종탁은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교회의 협력 목사로, 강정선은 일본장로교회 히가시구루메이즈미(東久留米泉)교회에서 협력선교사로 사역을 해 오고 있다. 교회 사역이외에도 릿쿄대학을 중심으로 캠퍼스 사역을 진행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재일한국다음세대선교회’를 창립했다.
박영철 김강미 선교사는 한국에서 목회를 하던 중 대전노회 설립 60 주년 기념선교사로 2012 년 4 월 쓰시마로 노회의 파송을 받았다. 일본교회와 협력과 배움의 시간을 갖고 2014 년 1 월 ‘대마(対馬)은혜교회’를 개척했다. 때마침 쓰시마 전도를 고려하던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제안에 따라 가입을 추진하였고 양측이 합의하였다. 2015 년 2 월에 공식적으로 총회의 파송을 받았으며 ‘대마은혜전도소’ 또한 2016 년 4 월에 정식으로 재일대한기독교회에 가입하게 되었고, 최근에 예배당 부지를 마련, 예배당 건축을 위해
기도하고 있다.
김충락 박수경 선교사는, 김충락이 2014 년에 도시샤대학에서 어학연수를 받는 것으로 일본에 입국했다. 같은 해 12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교회가 김충락을 부목사로 청빙하기로 결정하였고, 이에 선교협약에 근거해서 2015 년 5 월 공식적으로 파송을 받았다. 성실한 목회 활동이 인정받아 2020 년에는 동교회 사카이(堺)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곽용길 조상예 선교사도 2015 년 5 월에 일본에 파송받았다. 곽용길은 장신대 재학중에 2003 년 8 월부터 1 년간 견습선교사로 파송받아 박미애가 사역한 바 있던 아시아학원에서 연수를 받으며 일본 선교에 대한 뜻을 키워온 것이 열매를 맺게 되었다. 재일대한기독교회 오키나와교회에 부임하여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이승후 박지연은 2015 년 11 월에 재일대한기독교회 동경중앙교회의 협력 목사로 파송을 받았다. 2016 년 2 월에 입국 도쿄에서 어학훈련을 하면서 일본기독교단과의 협력 사역을 준비하던 중, 재일대한기독교회 교토히가시야마교회의 청빙을 받아 2017 년 7 월에 부임하게 되었다. 동교회는 2021 년 교토시 남부로 예배당을 이전, 2022 년부터 교토시온교회로 명칭을 바꾸었다.
조현규 정명진 선교사는 2016 년 12 월에 파송을 받았다. 고 조중래 선교사의 아들인 조현규는 장신대에 진학한 이후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회자가 되기로 결심한다. 목회자에서 다시 일본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필요한 과정을 마쳤을 때 아버지는 영원히 하나님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일본 선교사의 시작은 재일대한기독교회 후나바시교회였으나, 2018 년 11 월 재일대한기독교회 벳부(別府)교회의 청빙을 받아 담임목회를 시작해서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조원철 권한나 선교사는 일본 선교의 뜻을 품고 있던 중 재일대한기독교회 히라노(平野)교회의 김종권 목사와 연결이 되었다. 2017 년 1 월 선교사로 파송받아 히라노교회에서 처음에는 협력 사역으로 2018 년 5 월부터는 정식 부목사로 사역을 이어갔다. 특히 동북지방 선교에 뜻을 두고 있던 중에 동교회 미사와(三沢)교회의 청빙을 받아 2021 년 9 월부터 혼슈 최북단 아오모리현(青森県)에서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김신우 김소연 선교사는 2018 년 5 월에 파송을 받아 재일대한기독교회 오사카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사역을 하다가 2022 년 4 월에 동경중앙교회의 담임목사로 부임하였다. 황남덕 김정희 선교사는 2019 년 1 월 일본그리스도교회(日本キリスト教会)의 에큐메니칼 동역자로 파송을 받았다. 일본선교회 내에서 일본그리스도교회와 협력하는 것도, 에큐메니칼 동역자로 소속되는 것도 처음 있는 기념비적인 사역이었다. 2019 년부터는 동아시아평화센터 후쿠오카 센터의 책임자로 사역하고 있고 2022 년 4 월부터는 후쿠오카의 세이난가쿠인대학 신학부의 교수로도 일하기 시작했다.
유종우 선교사는 오랜 시간 오키나와 선교의 뜻을 품고 있다가 2019 년 11 월에 파송을 받았다. 코로나 판데믹 상황 속에서 도쿄기독교(東京基督教大学)대학에서 오키나와 지역에 대한 신학적 연구를 마쳤다. 박혜명과 결혼, 부부가 함께 파송을 받아 일본기독교단 오키나와교구 이토만(糸満) 교회에서 사역 할 예정이다.
김청곤 김현미 수습 선교사는 코로나가 기승을 부리는 2020 년 12 월에 파송을 받았다. 김청곤은 오랜 시간 일본 선교를 준비하며 신대원 재학중에는 견습 선교사로 경험을 쌓기도 하였다. 재일대한기독교회 요코하마(横浜)교회에서 협력 사역을 하며 장기 사역을 준비중이다.
마지막으로 총회세계선교부의 공식 파송은 받지 않았지만 PCK 일본선교회의 준회원인 현지선교사를 소개한다. 이선혜 선교사는 2006 년 입국해서 도시샤대학 대학원에서 기독교 사회복지의 역사, 특히 가가와 도요히코(賀川豊彦)와 한국의 관계를 연구했다. 연구와 동시에 일본기독교단 라쿠요(洛陽)교회와 협력 사역을 해 왔으며, 재일대한기독교회와도 돈독한 협력과 교류를 지속해 왔다. 현재는 관세이가쿠인(関西学院)대학 인간복지학부의 교수이자 선교사로 사역하고 있다.
홍석표 전경이 선교사는 소망교회에서 사역을 하던 중 2016 년 7 월 요한동경그리스도교회로 부임했다. 요한동경그리스도교회의 전신은 앞서 언급한 요도바시한인교회이며, 이 교회의 대표였던 김규동 목사의 성추행과 폭행으로 말미암아 큰 혼란을 겪고 있던 교회를 안정시킨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상 2000 년대 들어서 선교의 특징은 먼저 선교사의 사역 기간이 길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는 특히 2000~2010 년 사이에 파송된 선교사들에게 두드러지는 특징인데, 이 시기에 파송 이력이 있는 14가정 가운데, 7 가정이 10 년 미만의 사역을 마치고 귀국 혹은 재파송을 받았으며, 그 가운데 다섯 가정은 한 사역지에서 5 년을 채우지 못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사역의 내용과 대상에 있어서 보다 다양화되었다는 것이다.
이점은 특히 2011 년 3 월의 동일본대재해 이후 두드러진다. 재일대한기독교회를 중심으로 한인 교포 사회를 대상으로 하는 선교 사역이 다수를 이루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으나, 정인화, 박미애, 최장수, 최홍덕, 김정모, 이윤상, 강정선(김종탁) 등은 그 선교 대상이 주로 일본인과 일본인 교회이다. 현재로서는 재일대한기독교회 소속으로 사역을 한다 하더라도 재일대한기독교회의 현실이 대다수 교회가 교회 안에 일본인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국적은 한인이라 하더라도 모국어는 일본어인 교포가 다수이다.
사역의 내용 또한 다양해졌다. 현재의 정인화는 순회전도의 형태로 사역을 하고 있다. 기독교대학에서 사역하는 이들도 대폭 늘어났다. 박미애, 최홍덕, 황남덕, 이원중, 그리고 총회 파송은 아니지만 최병일과 이선혜는 역사가 있는 기독교대학에서 젊은이들에게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거나 혹은 학교법인 혹은 대학 전반의 기독교 교육에 책임을 맡고 있기도 하다. 이는 일본의 기독교가 그만큼 외국인 선교 동역자에 대해서 개방적이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며, PCK 가 50 년의 역사를 지나오면서 그간 쌓아 온 유형 무형의 자산의 결과라고도 볼 수 있다.
5) 총회 차원에서의 활동
PCK 의 일본 선교 활동은 가족 혹은 개인 선교사의 파송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PCK 총회 차원에서 일본의 선교협력 교회와 교류하고 함께 토론하며 입장을 선언하고 여러 가지 운동에 동참하는 방식으로도 나타났다. 1967 년 7 월 26 일~8 월 1 일 일본기독교단 사무실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는 일본기독교단과 최초의 선교 협약을 맺는다. 재일대한기독교회의 대표가 함께 하는 이 협력 관계는 이후로도 수 차례 회의를 거치면서 협력 관계를 명확히 해 나간다. 그 내용은 다소 세부 사항의 차이는 있지만 전도, 교육, 유학생 등의 인적 교류, 자료 및 정보의 교환, 출판 교류, 그리고 한국과 일본의 역사적 관계에 대한 공통의 이해 및 사회 현안에 대한 신학적 입장과 운동의 방향성을 설정하는 것이었다.
한일간의 에큐메니칼 교류 역사에 대해서는 그 자체로 중요한 연구의 과제이기는 하지만, 여기서는 간략하게 PCK 총회가 여러가지 현안에 대해서 어떠한 입장을 표명하고 활동에 관여했는지 약술하고자 한다.
첫째는 일본 사회의 재일 한인 인권과 관련해서 PCK 는 재일한인들의 인권 운동을 상시 지지해 왔다. 특히 1980 년대 재일대한기독교회 최대의 과제는 외국 국적자에 대한 지문날인제도를 철폐하는 것이었다. 당시 한국에서는 주민등록증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문을 찍어야 했지만, 일본에서는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같은 제도가 존재하지 않을 뿐더러 관공서에서 지문을 찍는 것은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일이었다. 그것을 일본 정부는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해 온 재일교포에게도 외국인을 관리하는 측면에서 실시해 온 것이다. 이는 인권에 대한 침해였기에 재일대한기독교회는 피해의 당사자로서, 또한 재일교포의 고난과 함께 하는 선교적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철폐운동을 전개해 왔다.
여기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활동하는 개신교, 가톨릭의 기독교인들이 함께 해 왔으며, PCK 는 이를 시종일관 지지해왔다. 더 나아가 일본 내의 재일동포의 법적 지위 문제에 대해서 1990 년 ‘재일동포 법적지위에 관한 한국교회의 성명’을 예장 합동, 예장 대신, 감리교회 및 기장 등과 함께 발표하고 이를 정부와 여야당에 전달했으며 시위에 재일교포 대표들과 함께 참여했다.
두 번째로 한반도 평화 통일과 관련된 운동에 적극적이었다. 1984 년 10 월 세계교회협의회(WCC) 국제위원회가 ‘동북아시아의 정의와 평화’ 협의회를 도잔소(東山荘) 일본 YMCA 수양관에서 개최했다. 이른바 ‘도잔소 회의’다. 이 회의에는 비록 북한의 대표가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 한국, 일본 세계의 교회가 본격적으로 협의한 가장 중요한 회의로 기억되고 있다. 이로 말미암아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은 WCC 와의 교류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세계에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1986년에는 1차 스위스 글리온에서 관련 회의가 열리고 1988년에는 2차 글리온 회의에서 역사적인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을 위한 글리온 선언’이 이루어진다.
이에 따라 남과 북, 그리고 세계 교회가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누고 교류를 하는 것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러한 교류의 장이 바로 ‘조국의 평화 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동경회의’였다. 이 회의는 1990년 7월 제 1차 회의를 시작으로1996년 6차 까지는 동경에서, 1998년년 10 월 6 차 회의는 오사카에서 2000 년 12 월 후쿠오카에서 7 차 대회가 열렸으며, 다시 8 차 회의는 2002 년 동경에서 개최되기에 이르렀다. 이 회의의 주최는 재일대한기독교회와 재일한국 YMCA 가 담당하였으며 한국 교회에서 가장 많은 대표단을 파견하며 지원을 아끼지 않은 것이 PCK 였다. 이는 엄밀히 말하면 일본 선교의 일부라 보기는 어렵다고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선교에 대한 편협한 시각에 불과하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은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 나라의 실현이라는 측면에서 선교로 볼 수 있다. 또한 PCK 의 일본 선교 협력교회인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주도적으로 전개한 선교 운동에 협력했다는 점. 그리고 양형춘, 이병구, 박무수, 경혜중, 정연원, 김병호 등은 PCK 측이 아닌 주최측인 재일대한기독교회의 일원으로서 대표 혹은 사무국의 역할로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점에서 PCK 의 일본 선교에 특기할 만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는 사회 봉사 및 재해 구호에 관한 활동이다. 일본의 재해에 관해서 총회 차원에서 적극적인 지원에 나선 것은 1995 년 1 월, 고베대지진이 그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지진 발생후 PCK 총회는 구호 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사회부를 중심으로 선교협력을 맺고 있는 재일대한기독교와 일본기독교단, 파송 선교사들 가운데 피해를 당한 이들과 교회에 우선적인 조치를 취하기로 하였다. 그해 5월까지 세 차례에 걸쳐 $70,000 이 피해를 당한 한인 교회와 한인 지역을 중심으로 전달이 되었으며, 개 교회 차원에서도 소망교회 $50,000, 영락교회 $40,000, 온누리교회 $50,000 등이 지원되었다. 이 금액은 주로 재일대한기독교회와 피해를 당한 PCK 선교사들에게 지원되었으며 일본기독교단에 대한 지원이 있었는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PCK 총회의 사회봉사부는 일본기독교단의 일본기독교사회사업동맹과 실질적이고도 깊은 교류를 지속해 오고 있다. 거의 매해 번갈아 가며 상호 방문을 진행하는 가운데 각자의 기독교 사회 봉사 시설을 견학하고 연구회를 개최, 협력을 강화하고 서로 배우는 방안을 논의해 오고 있다. 이러한 교류는 2011 년 3 월 일본에 동일본재진재가 발생하자 신속하게 전국교회 차원에서 모금이 이루어지고 다양한 구호활동이 이루어지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때는 PCK 일본선교사회를 통해서 일본기독교단 총회에 직접적으로 구호금과 구호 물품이 전달되었다. 긴급구호 물품 구입과 현금으로 10 만불이 보내어졌고, 이후에도 일본기독교단 오우(奥羽) 교구에 700 만엔, 오우교구 교역자와 피해지역 PCK 선교사들의 이동수단의 구매를 위해 300 만엔, 그외 연합 사업을 위해 3000 만원을 지출하였다. 2011 년 12 월에는 일본기독교단 총회에 2 억 5 천만원이 전달되었다.
마지막으로 이단 사이비 대책이다. 최근에도 아베 신조 전 수상이 통일교에 의해 가정이 파괴된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하는 사건이 발생하는 등, 일본은 통일교 및 사이비 종교에 의한 피해를 겪어 왔다. 통일교라는 이단 종교에 의해 교회와 사회가 고통을 겪는 공통의 과제를 지닌 만큼 PCK 총회는 이단 ・ 사이비대책위원회를 통해서 일본기독교단의 ‘컬트문제연락회(이전 ‘통일원리문제 전국연락회’)‘와 매해 세미나와 관련 회의를 공동 주최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 왔다.
4. 신학적 특색
1) 선교 활동에 대한 분석
1972 년 이후 2022 년까지 일본에 PCK 총회가 파송한 일본 선교사의 전체 수는, PCK 총회 회의록을 기준으로 견습선교사를 제외하고 108 가정 122 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사임 날짜가 불분명하며 사역 날짜가 3 년 미만으로 추정되는 6 명을 제외하면 104 가정 116 명에 이르는 것으로 파악된다. 가정을 기준으로 했을 때 연도별 추이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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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표를 살펴보자면 1972 년 선교사 파송 이후에 꾸준히 선교사의 숫자가 늘되 1990 년대와 2010 년대 중반 이후에 가파르게 숫자가 늘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990 년대 말의 급성장과 2000 년대 초의 급감소는 앞서 지적한 요도바시한인교회 사역자들의 영입과 이탈에 의한 바가 크며 2000 년대 파송된 선교사들의 재임 기간이 짧았던 바에 기인한다. 재임기간은 1972 년~2012 년 12 월까지 파송된 선교사들을 대상으로 했을 때 평균 14.2 년이다.
PCK일본 선교사의 가정수 연도별 추이
여기에는 앞서 언급한 요도바시한인교회의 사역자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10 가정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재임기간도 늘어나며 15 년 이상의 장기사역자들이 큰 비중을 차지함을 알 수 있다. 즉 타지역 선교사들과 비교할 수 있는 자료의 확보가 불가능하지만, 일본 선교사들의 재임기간은 결코 짧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사역의 내용을 분석하자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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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년대 들어서 다양해졌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압도적인 다수가 교회 개척 및 목회 사역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일본 선교사의 100%가 목회자 및 목회자 부인이라는 점에도 기인하며, ‘세계선교운영규정’ 등에서 규정하고 있는 전문인 선교사가 일본선교회에는 존재하지 않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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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에큐메니칼 선교
교회개척 및 목회 대학 대학과 교회 기관
PCK 가 한국내의 다른 ‘대한예수교장로회’와 특징 지워지는 신학적 특색은 에큐메니칼 선교를 지향한다는 점이다. 이는 1996 년 제 81 회 총회에서 승인되었고, 2018 년 제 103 회 총회 때 개정된 ‘총회 선교신학학’에 명확하게 나타나고 있다. PCK 의 선교신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선교하시는 하나님으로 고백하며 교회가 하나님의 선교의 동역자로 부름 받았음을 믿음과 동시에 복음으로 사회와 세상을 변혁하는 것을 추구한다. 선교의 “동반자적 협력은 주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순종에 관한 것이고 그리스도의 몸의 한 부분으로서 상호 연합하는 것이다.”
이에 PCK 의 일본 선교는 자국 교회의 확장과 같은 제국주의적, 자기 중심적 선교를 지양하고 일본의 교회와 선교협력을 맺고 이를 존중하는 데에 중점을 두어 왔다. 1967 년 한일간의 국교가 회복된지 얼마 되지 않아 기독교대한감리회, 한국기독교장로회와 더불어 일본기독교단과 선교협약을 맺었고, 이 협약 내용을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개정해 나가며 긴밀한 유대 관계를 이어 나가고 있다. 1998 년 3 월에는 일본예수그리스도교단과, 2011 년 10 월에는 일본그리스도교회와 선교협약을 맺었다. 특히 일본 그리스도교회와의 관계는 1985 년 10 월 이종성 당시 총회장이 일본그리스도교회의 제 35 회 대회(총회)에 출석해서 교류를 가진 이후 여러 가지 준비 끝에 맺어진 결실이기에 더욱 뜻 깊은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제까지 파송된 100 여명의 선교사 모두가 이와 같은 에큐메니칼 선교에 충실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PCK 의 일본 선교의 주축은 이 신학 노선에서 어긋나지 않았음은 분명하다. 선교사 개인이 협력교회를 무시하고 자기 중심적인 활동을 전개함으로 협력교회의 항의를 받은 적은 있었을지라도 교단 차원에서 선교 활동의 방향성에 대해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또한 각 교단과 교단 간의 회의와 선언 등의 공식적인 활동 뿐만 아니라 각 개교회 차원에서 협력교회와 교류를 나누는 풀뿌리 에큐메니칼 선교가 이루어진
예를 찾아 보는 것도 어렵지 않다.
예를 들면 동경국제교회는 정연원 목사를 담임목사로 청빙하면서 재일대한기독교회에 가입했다. 1984 년 예배당을 일본기독교단 시나노마치교회로 이전하였다. 예배당을 이전하고 나서 두 교회는 정기적으로 연합예배를 드리고 성찬식을 함께 나누었다. 이로서 이 두 교회는 공간을 공유할 뿐만 아니라 신앙과 영성의 공유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또한 예배당을 일본기독교회관으로 이전한 이후에도 성탄예배를 함께 하고, 일본기독교단 관계자들을 설교자로 초대하는 등 풀뿌리 차원의 교류를 이어 나갔다. 1990 년 7 월 8 일 동경중앙교회의 예배는 작지만 대단히 중요한 예배로 볼 수 있다. 조선기독교연맹의 대표 중 한 명인 조길남 목사가 동경중앙교회에서 설교를 했으며, 사회는 정연원 목사가 담당했고, 축도는 부산덕천교회 양경열 목사가 담당했다. 동경의 한 귀퉁이에서 한국과 북한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나가 되는 일이 일어났던 것이다.
비록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PCK 의 에큐메니칼 선교가 구현된 특별한 일이라 보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에큐메니칼 선교의 또 다른 측면인 사회 변혁 선교의 측면에서는 여전히 취약하다는 면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재일대한기독교회를 중심으로 인권운동, 남북교회간의 교류가 활발히 일어났을 때 이에 협력하는 활동이 역사적으로 있었다. 또한 동일본대진재 이후 일시적이나마 구호활동에 적극적이기도 했다. 그러나 21 세기 들어 일본 사회가 직면한 과제와 이를 변혁하는 활동에 21 세기의 선교사들이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보기 어렵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3) 개교회 중심의 복음주의
PCK 선교신학은 에큐메니칼과 복음주의를 배치되거나 대립하는 것으로 보지 않고 통전적으로 구현되는 것으로 이해하려고 하고 있다. PCK 의 일본 선교 속에서 에큐메니칼 선교는 현지 교회와 교단을 존중하는 측면에서는 적절히 구현되고 있으나 실질적인 측면에서 보다 강조되고 있는 것은 복음주의, 특별히 개교회 중심적인 복음주의이다. 특별히 ‘개교회 중심적인 복음주의’라고 일컫는 것은 PCK 의 선교 신학, 선교 방침과 다소 동떨어진 선교활동이 이루어졌음에도 그것이 PCK 의 선교 활동으로 인정받는 이유가 ‘복음을 전하며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재일대한기독교회와 관계가 멀어진 상태에서 개교회 개척활동을 지속해 왔던 모휘대, PCK 선교 협력 교회와는 접점 없이 교회를 개척해서 목회를 해 왔던 전형구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볼 수 있다. 이들은 30 년 이상을 일본에서 복음을 전하며 헌신적으로 교회를 섬겨왔다. 비록 PCK 의 방침과 거리가 있는 활동이라 할지라도 헌신적인 복음 전도와 교회 개척 사역의 의미와 가치를 부인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 개척 및 복음 전도 사역 역시 일본의 선교협력
교회와 상호이해 가운데 긴밀한 협력 관계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원칙으로 삼아야 할 것이다.
개교회 중심의 복음주의는 실질적인 성과를 낸 부분도 있다 특별히 재일대한기독교회 역사 속에서 니이하마교회(1977), 이마후쿠교회(1978), 도요나카제일부훙교회(1980), 미토교회(1985), 츠쿠바동경교회(1987), 니가타교회(1990), 히타치교회(1995)가 PCK 선교사에 의해 개척, 설립되었으며 1972 년 설립된 동경중앙교회(1983)가 가입하게 되었다. 설립 뿐만 아니라 전도소였던 공동체가 PCK 선교사들의 목회 활동 중에 교회로 승격하는 사례를 포함하면 PCK 선교사들의 개교회 중심의 복음주의가 협력 교회 안에 공헌한 바는 결코 작다고 볼 수 없다.
5. 전망과 목표: 다양성과 샬롬의 선교를 향하여
위와 같이 지난 50 년간의 PCK 의 일본 선교의 역사를 개관하고 그 성격을 분석한 목적은 앞으로 일본 선교를 어떻게 해 나갈 것인가에 대해 전망을 하는 것에도 있다. 이에 다음과 같은 선교를 제안하고자 한다.
1) 일본의 기독교와 사회에 대한 심층적 이해
먼저 필요한 것은 일본의 기독교와 사회에 대해서 더 깊이 알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 지면에서 이에 대한 심층적인 분석은 어렵다. 하지만 이미 여러 해 전부터 제기되어 오는 문제가 일본 교회의 목회자 부족, 신도의 고령화였다. 일본기독교단의 경우 지난 1994~2020 년 사이에 신도는 205,306 명에서 161,103 명으로 21%, 교회학교 재적인원은 60,802 명에서 36,973 명으로 약 40%가 감소했다. 2020 년 현재, 교회 총수는 약 1,700. 교회 담임목회자는 1,666 명, 신학교 기독교대학 및 기독교 시설에서 사역하는 목회자가
265 명으로 이미 교회의 수가 담임목회자의 수를 앞지르고 있어서 목회자 부족이 숫자로 쉽게 확인되고 있다. 하지만 이 조차도 상대적으로 양호한 편으로 다른 복음주의 계열 교회의 경우에는 목회자 수급에 더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여겨지고 있다.
교회 뿐만 아니라 일본의 기독교 학교와 사회복지 등과 관련된 시설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 사회 전체의 인구 감소에 의해 일본의 다수의 사립 대학이 학생 모집에 부심하고 있으며 이는 기독교 대학 또한 마찬가지다. 이에 학생들에게 인기가 없는 기독교 관련 강좌를 줄이거나 학교의 구조 개혁 중에 기독교 부분을 축소하는 학교가 늘어나고 있다. 기독교 출판사와 서점들도 생존을 위해 통폐합을 하거나 경영상의 문제로 혹은 후계자의 부재로 문을 닫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 이는 일본 사회의 전체적인 흐름에 영향을 받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되고 있는데 비단 기독교 뿐만 아니라 일본 사회 전체적으로 종교에 대해서 무관심하거나 심지어는 부정적인 인식이 강하다. 특히 젊은 층 가운데 그러한 경향이 뚜렷한데, 기독교 뿐만 아니라 기성 종교가 이러한 젊은이들과 소통하는 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일본 사회를 거시적으로 보았을 때 장기적인 경제 침체 가운데 정치적으로는 우경화가 점점 강화되고 있고 진보적인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고 있다. 인구 감소로 인해 초래되는 노동력 부족을 외국인에 의해 보완하려는 정책과 맞물려서 전체적으로 외국인은 증가 추세에 있다. 아베 전 수상에 대한 암살 사건으로 인해 종교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 경기 침체, 인구 감소 특히 지방 중소도시의 붕괴, 정치 사회적 우경화, 외국인의 증가 등과 같은 경향은 당분간 그 흐름이 바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은 일본의 기독교가 직면한 현실이자 과제이며, PCK 의 일본 선교가 공통의 인식을 가져야 할 부분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회에 대한 객관적 인식을 바탕으로 각 선교 협력교회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져야 한다. 간단하게 한 가지만 언급하자면 일본기독교단과 재일대한기독교회는 교파 교회가 아닌 연합교회(united church)라는 점이다.
일본기독교단 내에는 장로교회 전통, 감리교회 전통, 회중교회 전통, 성결교회 전통 등 역사적으로 개교회가 가지고 있는 전통을 중요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이 전통들이 서로 존중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연합교회가 가진 이 다양성은 불편할 수도 있지만 잘 살린다면 커다란 자산이 될 수도 있다. 재일대한기독교회 또한 한국의 장로교회, 감리교회, 성결교회 등과 선교협약을 맺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시작과 전개에 있어서 연합교회의 성격을 명확히 해 왔다. 그러는 한편 일본그리스도교회는 명확한 신앙고백과 칼빈주의 전통을 중시하는 장로교회의 전통을 고수해 왔다. 이와 같이 각기 다양한 교회의 특수성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있을 때, 참된 협력이 가능하며 향후 선교에 있어서도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 할 수 있다.
2) 사역의 패러다임 전환
앞서 살펴보았듯이 지난 20 여년간 일본기독교단을 비롯해서 일본의 교회와 기독교 학교, 기독교 시설은 적어도 양적인 면에서 퇴보해 왔다. 그리고 현재와 장래의 여건은 그 퇴보를 역전시키기에 결코 호의적이지 않다. 이는 달리 말하면 이제까지와는 다른 사역의 내용과 형태가 요구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먼저 교회중심주의를 탈피할 것, 전문성을 향상시킬 것, 평신도 전문인 선교사를 동원할 것을 제안한다. 오랜 시간 PCK 선교사들의 선교란 신앙의 공동체로서 교회를 세우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한 교회란 믿는 사람들의 거룩한 공동체였다(Church of Holiness). 이제 그러한 교회를 지키는 선교에서 교회를 모든 이들과 공유하는 선교(Church of Commonness 및 Church of Wholeness)를 지향해야 한다고 본다. 교회가 주일이나 수요일등 집회가 있을 때만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 지역 주민들이 신뢰할 만한 문화 공간으로서 자리 잡도록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교회에 대한 신학의 변화가 목회자와 성도들에게 필요하다. 또한 그것이 일본인과 한국인 뿐만 아니라 중국, 베트남, 남미 등에서 각자의 목적을 가지고 일본에 온 외국인들에게도 열린 공간으로 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일본 교회는 이 점에서 좋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많은 교회에서 일년에 한 번 바자회를 여는데 이 때는 지역 주민들이 교회를 쉽게 찾는다. 매일같이 물건을 거래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이와 같이 지역주민들에게 열린 공간으로서 바자회를 일상화 시키는 것이다.
두 번째 선교사들의 전문성을 향상시킬 것이 요구된다. 일본은 선진국의 하나이기 때문에 선교 현장에서 대학원 교육, 현장 경험을 통해서, 신학 뿐만 아니라 다른 인접 학문, 회사 경영, 사회복지, 예술, 스포츠 등에서 전문성을 확보할 수가 있다. 이러한 전문성을 획득하는 것은 획득하는 과정에서 또 그 전문성을 살리는 가운데 교회 밖의 사람들과 깊은 신뢰 및 우호 관계를 만드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만난 이들을 교회로 데리고 오는 것 만이 선교가 아닌 그렇게 만난 이들의 기독교에 대한 인식을 바꾸고 일본 사회와 세계, 한국과의 관계 등을 보다 건전하고 평화 지향적인 것으로 바꾸는 것도 중요한 선교 사역이 될 수 있다. 또한 그러한 전문성의 접촉점에서 함께 성경을 읽고 기도하는 가운데 예배의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다면 그야말로 복음주의와 에큐메니칼이 아우러지는 통전적인 선교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세 번째로 앞서 말한 전문성의 향상과 관련해서 목회자들 만으로 이루어지기에는 한계가 있을 수 있다. 이에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들의 동원과 협력이 바람직하다. 평신도들은 다만 보내는 선교에만 그쳐서는 안된다. 이미 한국 교회에서는 다수의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들이 세계 각지에 파송되어 활동하고 있지만, PCK 선교사회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한국과 일본은 경제와 학술, 사회복지 등 사회 각 방면에서 교류가 많은 만큼 앞으로도 이러한 관계를 살려서 평신도 선교사들의 입지를 확보해 주고 신학과 목회적인 차원의 협력과 지원을 통해 일본의 기독교에 공헌하게 할 것을 제안한다.
3) 샬롬의 선교
히브리어 ‘샬롬( וםֹל ָׁש‘(이 의미하는 평화는 평화학자 갈퉁(Johan Galtung)의 용어를 빌자면 전쟁과 분쟁이 없는 소극적인 평화가 아닌, 폭력이 없는 적극적인 평화에 가깝다. 일본이 현재 어떤 특정 국가과 전쟁을 벌이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소극적인 평화가 실현되고 있는 나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일련의 상황과 사건들은 일본이 적극적인 평화의 실현과는 여전히 거리가 있음을 보여준다. OECD 국가에서서 상위권인 상대적 빈곤률, 평화헌법을 개악하려는 정치권, 빈부격차의 심화, 역사 문제에 대한 우경화의 심화, 고위 정치인들의 야스쿠니 참배, 고교무상화 정책에서 조선학교를 제외하는 정책과 이를 확정하는 사법부의 판결, 통일교와 정치권의 결탁 등이 그것이다. 일본의 기독교는 이러한 과제들과 씨름하며 적극적인 평화, 샬롬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향후 PCK 의 일본 선교는 일본 기독교의 이러한 노력을 공감하고 격려하며 함께 하는 동반자 선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동반자는 주도권을 가져오려 하기 보다도 낮은 자리에서 섬기며 필요를 채우는 것이다.
이러한 샬롬의 선교를 위해서는 함께하고 협력하는 대상이 반드시 기독교인으로 제한될 필요는 없다. 무종교인, 혹은 다른 종교를 가진 개인이나 단체라 할지라도 일본 사회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들과 함께 하는 교류하는 개방적이고 폭 넓은 태도와 관점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이들을 위해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예수께서 복있다 말씀하신(마태복음 5:1~12) 샬롬의 선교를 위해서 필요한 자세일 것이다. 또한 국제적인 차원에서 샬롬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것도 PCK 선교사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발휘하는 길이 될 것이다. 일본 사회 자체뿐만 아니라 한국과 일본, 더 나아가 대만, 홍콩, 싱가폴, 다른 아시아 국가들 간의 교류를 갖는 것이다. 이를 위해 교단의 대표, 담임목사나 장로 등 기성 세대가 아닌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을 중심으로 미래를 이끌어 갈 세대들이 열린 생각과 자세를 가지고 교류를 갖는 기회를 만들 것을 제안한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PCK 선교사들의 네트워크를 활용한다면 미래를 이끌어 갈 아시아의 젊은이들과 청소년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교류하는 기회를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할 것이다.
6. 나가며
필자는 올해로 선교 50 년의 역사를 맞이하는 PCK 의 일본 선교사들을 연대기순으로 간략하게 나마 소개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사역의 내용을 통계적으로 간략히 분석하며 선교의 신학적 특색으로 에큐메니칼 선교, 개교회 중심의 복음주의를 언급했다. 한편으로 미래를 전망함에 있어서 요구되는 것을 세 가지 주장했다. 하나는 일본의 기독교와 사회에 대한 더 깊은 이해이다. 둘째로 선교 사역의 패러다임의 전환이 필요함을 주장한다. 그 내용으로서 먼저는 개교회 중심주의를 탈피하고 지역 주민과 호흡하며 지역 주민을 섬기는 문화 공간으로서 교회에 대한 이해를 전환할 것. 신학 및 목회 뿐만 아니라 여러가지 분야에서 활용 가능한 전문성을 배양할 것, 그리고 평신도 전문인 사역자를 받아들여서 협력하는 것이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선교는 일본 사회의 샬롬, 그리고 일본과 한국을 비롯한 국제 사회의 샬롬을 추구하는 선교가 되어야 함을 말했다.
이상의 본고의 논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지만, 필자 자신이 10 여년간 현재의 일본 선교회의 일원으로서 현재 일본선교사들에게 바라는 바를 실례를 무릅쓰고 나눔으로 본고를 마무리 하고자 한다.
첫째, 자신의 사역과 관련된 기록을 정확하게 남기고 자료를 보존하는 것이다.
일본선교회라는 조직 자체의 결성도 늦어지기는 했지만, 과거에 어떠한 일들이 있었는지, 어떠한 선교보고가 있었는지 역사적인 자료를 찾기가 불가능했다. 자료가 있는데 못 찾는 것이라면 연구자의 능력 부족에 기인한 것이지만 기록 자체가 없다면 그것은 연구자의 능력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역사 속에 살지만 기록되지 않은 역사는 역사로 남지않는다. PCK 일본 선교의 70 년사 혹은 100 년사를 쓰기 위해서는 지금부터 자료의 보존과 수집, 디지털화, 데이터베이스화를 추진해야 한다.
둘째, 안식년을 갖는 것이다. 이 역시 통계적으로 비교할 수는 없지만, 어쩌면 일본선교사는 다른 지역의 선교사들과 비교해 가장 안식년을 갖지 않기도 하면서 갖지 못하기도 하는 선교사일 것이다. 대부분이 교회의 목회를 하다 보니 1 년은 커녕 반 년, 아니 삼 개월의 쉬는 시간을 갖는 것도 불가능해 보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러나 안식년의 부재로 말미암아 선교 사역을 객관화하고 질적 향상을 가져올 수 있는 기회를 놓치는 것도 사실이라고 여겨진다.
셋째, 자신의 사역을 객관화하고 질적 향상을 갖는 것이다.
선교 사역 혹은 일본에 대해 연구를 하고 그 결과물을 구체적으로 내어 놓는 것이다. 그것이 꼭 학술 연구와 같은 것이 될 필요는 없지만 학문적 검증을 받는 것은 객관화하고 심화하기 위해 유용한 것도 사실이다. 본 선교사회 출신으로 임태호의 “요한일서 1 장 5-2 장 1 절에 나타난 빛(φѿς)의 선교적 연구 : 일본 선교 적용을 중심으로”(주안대학원대학교 박사논문, 2014)의 연구가 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이들에게 인식되지 못하고 있다. 추상적이기보다 구체적이며 실질적으로 일본 선교와 관련된 연구에 도전해 볼 것을 제안한다.
넷째, 국제적인 에큐메니칼 감각을 갖고 활동하는 것에 열려 있기를 바란다.
일본 사회가 세계와 고립되어 갈라파고스화 되어 가는 문제를 지적하기도 하지만, 일본 선교사들도 유사한 문제를 가지고 있다. 즉 세계 선교의 흐름, 동향, 과제 등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고 연구하며 그것이 일본 선교에 어떤 의미가 있는가에 대해서 고찰하고 선교지에 적용하는 이들이 많지 않다. 개교회의 문제, 각자에게 맡겨진 목회 사역에 충실하느라 교회 밖의 세상, 일본 선교 이외의 선교, 세계 교회와의 교류 등에 대해서 닫혀져 있을 뿐만 아니라 열고 자신의 것을 나눌 생각 조차 못하는 경우가 많은 듯 하다.
다섯째, 안정적인 재정의 확보. 대부분의 선교사들이 재정적으로 궁핍해 있다.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개교회의 목회와 각 가정의 생활에 쫓기기에 연구나 일본 밖 교회 연수, 견학, 교류 등은 언감생심이다. 먼저는 그와 같은 일상 사역을 넘어서는 사역에 대한 뜻과 의지가 필요하겠지만, 그러한 사역이 가능하도록 하는 재정을 확보하는 것을 일본선교회의 과제로 제시하고자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