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회와 개혁신앙

                           장로교회와 개혁주의 

장로회주의라는 말은 장로회라는 정치체제를 가리키는 말에서 나온 것이며 성경에서 그 기원을 가지고 있는 가장 성경적인 교회정치제도이다. 그러나 1517년 루터가 종교개혁의 포문을 열기 전 까지 전 세계의 교회는 군주적 감독인 교황의 통치 아래에 있었다. 루터 이 후에 철저히 성경적인 개혁을 부르짖은 칼빈에 의해 장로교가 그 모습을 갖추었고 이 후 존 낙스에 의해 체계화되고 잠시나마 스코틀랜드에서 실현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역사 속에 장로교의 등장은 개혁주의와 뿌리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개혁주의란 16세기 유럽에서 발생한 다양한 종교 개혁 신학과 그 영향을 이어받아 발전한 개신교의 신학 사상을 일컫는 포괄적인 용어이다.1) 종교개혁의 원인은 로마교회가 성경에서 너무 멀리 나아가버렸기 때문이다. 인문주의에 힘입어 사람들이 성경에 눈을 뜨면서 그것을 발견하게 되었고, 따라서 “오직 성경”으로 라는 구호아래 성경 안에 나타난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을 실현하려한 것이다.

따라서 개혁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은 "오직 성경"이며, 가장 성경적인 정치제도인 장로교는 역사 안에서 개혁주의를 담는 중요한 그릇의 역할을 해왔다. 따라서 장로교의 기원과 재탄생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개혁주의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장로교회의 기원을 성경 안에서 찾아보고 교회사 안에서 장로교회의 형성 및 발전과정을 연구함으로 장로교의 신학인 개혁주의에 대해 고찰해보고 장로교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전망해보자. 

Ⅰ. 장로교의 기원

장로교는 가장 성경적인 교회의 정치형태이다. 성경에서 가장 오래된 정치의 형태는 가장이 다스리는 족장정치 였으며, 이집트의 노예 시대 때에 이미 이스라엘 지도자들에게 가돌(gadol) 또는 자켄(zaqen)이라는 용어가 붙여졌다. 이는 ‘손 위’, ‘형’, ‘나이든 장자’ 또는 ‘나이든 사람’이라는 뜻으로 ‘장로’에 대한 다른 표현이었다. 족장제도가 장로제도로 변모하면서 장로들에 의한 대의정치가 시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모세 때에 70명의 장로가 있었으며 이 후로도 이스라엘 사회에서 장로는 성격상 공적인 업무를 수행하는 자로, 백성들은 장로를 공인으로 인정하였다.

구약의 장로제도는 회당, 즉 산헤드린 제도와 함께 신약시대의 교회에 의하여 계승되었고, 그 증거들은 복음서뿐만 아니라 사도행전과 바울서신에서 찾아볼 수 있다. 안디옥 교회에 장로를 세웠다는 기록은 없지만 사도들이 장로들을 통하여 예루살렘 교회에 부조금을 보낸 것을 보면 장로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행 11:30) 바울은 소아시아와 고린도에 장로돌을 세웠다. 또한 2차 선교여행 때는 이고니온, 비시디아, 루스드라 지역에 복음을 전한 후, 금식기도를 하면서 "각 교회에 장로들을 택하여" 세웠다. (행14:23) 바울은 선교여행을 하면서 디도를 그레데에 남겨두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 가운데서 "그릇된 일을 바로 잡고 장로를 세우기 위해서"였다. 

Ⅱ. 교황제도의 등장

2세기의 교회는 외적으로는 로마제국의 박해에 직면하고 내적으로는 영지주의라는 이단에 직면하여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교회를 결속시키는 강력한 지도력이 필요하였는데, 이러한 필요성으로 인해 군주적 감독이 등장하게 된다. 313년 밀라노칙령으로 인해 종교의 자유가 주어지고 박해받던 기독교가 오히려 제국의 국교가 되었을 때 각 교구에서는 서로의 우위권을 주장하기 시작했고, 콘스탄티노플과 로마교구 중 결국 로마교구가 우위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이에 대하여 칼빈은 로마교회가 베드로의 사역에 기초되고 설립되었다는 견해로 인해 호의와 권위를 얻어 ‘사도의 교구’로 불렸음과 제국의 수도였음과 동방교회가 의견대립으로 시끄러웠던 반면 로마교회가 조용했기에 초기 로마교회가 중요성을 가졌었다고 말한다. 2)

군주적 감독의 필요성은 교회가 야만족의 침입에 직면함으로 더 절실해졌다. 칼케톤 회의에서 로마주교의 절정의 권위를 주장한 레오 2세는 452년 훈족의 침임과 455년 반달족의 침입을 황제의 대리자로서 협상하여 막았다. 또한 스스로 교황이라는 칭호는 거부했으나 교황의 모든 권세와 특권을 행사한 그레고리 역시 592년 롬바르드 족과의 휴전 협상을 함과 탁월한 정치력과 행정력으로 교황 정치를 안정시키기에 이른다. 그레고리 이후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황 정치는 샤를마뉴 대제 때(752년) 이미 황제와 동일 한 위치에 서기 이르렀고 심지어 황제를 넘어서는 권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나 교황권 아래서 교회는 각종 부정 부패에 찌들 수 밖에 없었고 모든 면에서 성경과 멀어질 수 밖에 없었다. 

Ⅲ. 장로교회의 형성과 발전

1. 종교개혁과 장로교

중세 이후 장로교회는 계속 명맥을 유지했는데 그 예로는 왈도파, 존 위클리프, 얀 후스 등이 있다. 그러나 교황의 권위아래 그 영향력은 미미했다. 교황권의 타락은 여러 가지 비성경적인 제도들을 만들었으며 면죄부도 그 중의 하나였다. 1517년 면죄권의 남용에 항의한 루터의 95개조 논제로 말미암아 일련의 사건들이 발생했고, 그것은 종교개혁의 도화선이 되었다. 이후 2세대 종교개혁자인 존 칼빈은 철저한 성경적 개혁을 단행하며 종교개혁을 체계화하고 국제화 시켰다.

칼빈은 마틴 부처와 카피토에게서 배웠지만 성경에 근거한 장로교 정치제도를 확립함으로 장로교이 최대 공헌자가 되었다. 그는 기독교 강요 최종판 4권에서 교회론을 다루면서 참된 교회의 표지로서 말씀과 성례를 제시하였으며, 고대교회의 형태를 고찰함으로써 성경 안에서 장로교를 발견하였다. 기독교강요 4권 3장 3항에서 칼빈은 감독 즉 치리하는 일을 맡은 장로는 말씀과 성례를 시행하는 것에 자신을 헌신해야 한다고 말한다. 

2. 존 낙스와 스코틀랜드 장로교회

칼빈의 사상을 받들어 장로교회를 체계화한 것은 바로 스코틀랜드의 존 낙스였다. 1533년 에드워드가 죽고 메리 여왕(the Bloody Mary)이 왕위에 오르자, 낙스는 프랑크푸르트로 갔다가 다시 제네바로 갔다. 칼빈이 있는 제네바의 개혁된 모습을 본 낙스는 “사도 시대 이래로 가장 완전한 그리스도의 학교”라고 찬양하였고, 영국 피난민들을 돌보면서 칼빈과 함께 교회 개혁운동을 전개하였다. 1555년 섭정 기즈가의 메리가 잠시 종교적 관용 정책을 폈을 때, 낙스는 6개월간 스코틀랜드 전역을 여행하면서 개혁신앙의 전파에 힘을 기울였다.

여러 사건 후 낙스는 1560년 12월 20일 에딘버러에서 자신을 포함한 6명의 목사와 36명의 장로들과 함께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조직하였다. 총회는 1560년 5월에 낙스가 작성한 『제일치리서』를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정치 원리로 채택하였다. 『제일치리서』는 9장으로 나뉘어져 있지만 중요한 내용은 교리, 성례, 목사와 그들의 합법적 선택, 목사의 준비, 교회의 치리, 교회 정치 등 여섯 부분으로 구성되어있다. 치리서는 성경을 신앙의 궁극적 권위로 인정하였고, 설교를 예배의 중심으로 강조하였다.

이 후 앤드류 멜빌이 제네바 대학의 교육 제도를 스코틀랜드에 도입하였고 낙스가 작성한 『제일치리서』를 개정하여 1578년 “장로교 대헌장”이라고 불리는 『제이치리서』를 작성하여 의회에 제출하고 승인을 받았다. 멜빌은 칼빈처럼 교회 직분을 장로와 집사 둘로 나누었다. 또한 『제이치리서』에서 국가 권력으로부터 교회가 독립되어야한다고 가르쳤다.

1584년 제임스 6세는 다시 감독주의를 교회 정치 원리로 채택하였으며 1603년 엘리자베스의 죽음으로 제임스1세가 되어 영국까지 다스리게되자 영국 청교들 까지 박해하였다. 찰스 1세 때 박해가 더 심화되자, “엄숙 동맹과 계약”이 영국과 스코틀랜드에 의해 맺어지고,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열리면서 찰스의 입지는 점점 약화되었다. 결국 의회파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는 1649년 1월 의회군에 의해 체포되어 처형당하였다. 독립파인 올리버 크롬웰 이후 찰스 2세로 왕정이 복고 되었을 때, 장로교를 박해한 찰스 2세, 제임스 2세를 지나 네델란드에서 귀국한 메리 때에야 종교 관용령이 선포되었다. 그렇지만 관용령이 모든 종파에게 동등한 기회와 권세를 주었으므로 장로교회가 스코틀랜드에서 더 이상 유일한 정치체제가 될 수 없었다. 

3. 미국 장로교회

제임스 1세 때 강제로 스코틀랜드인드을 북아일랜드로 이주시켰는데 그 후 잉글랜드의 차별적인 경제정책과 국교회의 차별과 탄압으로 인하여 일단의 장로교인들과 미대륙으로 이주함으로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된다. 이들은 대륙에서 종교의 자유를 찾아 온 이들에게 국가로 부터의 교회의 자유을 헌법에 명시한다. 1683년 식민지에 도착한 프란시스 매케미는 미국 장로교의 아버지가 되었다. 그는 1706년 필라델피아에 노회를 조직하였으며 1729년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신앙의 표준으로 채택하였다.

미국에서는 도덕적, 영적 쇠퇴가 있을 때에 두 차례의 큰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그러나 1차 대각성 운동 때와 달리 1781부터 시작된 2차 부흥운동은 여러 가지 신학적 문제들을 야기 시켰으며, 그들의 개혁주의 전통을 수정하기를 원치 않았던 구학파 장로교인들은 교회의 순결을 유지하기 위해 1837년 불가피하게 신학파와의 이별을 선언한다. 초기 미국에는 전통있는 신학대학이 없어 영국이나 독일로 공부를 하러갔다.

그리고 신학문을 배운 이들에 의한 학문의 진보를 받아드리지 못한 이들로 인하여 분열이 가속화된다. 우선 대륙에서 공부하고 온 이들이 미국의 신학대학에서 가르치는 데 고등비평을 도입한 자유주의적 경향이라고 비판한 이들은 교회와 목회엔 성경만으로 족하다는 생각으로 바이블스터디를 연다. 지금으로 말하면 신학은 학문이 아니다라는 반지성주의다.

장로교단은 개혁주의 정통신학을 옹호하고 개척지에 필요한 자격을 갖춘 목회자를 양성하기 위해 1812년 프린스톤 신학교를 세워 성직자와 신학의 발전을 이루지만 여기서도 파벌이 개입한 너머지 당시 미국의 분위기에 편승해 프린스톤을 장악하려다 실패한 존 그레스헴 메이첸등이 이탈하여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를 세우고 이후 ICC라는 보수단체를 만들어 한국에도 지원하여 큰 폐해를 입힌다.   

4. 한국의 장로교회

1893-1983년까지 한국에 종사했던 선교사들의 대부분은 미국인 선교사들이며 그들은 구학파의 신학 노선에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마포삼열, 곽안련, 소안론등 맥코믹 신학교 출신 선교사들은 신학파적 성향을 가진 구학파 장로교 신학을 소유하고 있었다. 또한 유니온 신학교의 이눌서, 구례인과 프린스톤 신학교의 라부열, 어도만, 함일돈은 구학파 장로교인들로 이들 모두 철저한 성경무오 신학사상을 갖고 웨스트민스터 표준문서들을 신봉하는 반지성주의 신학을 가졌었다. 따라서 한국 장로교회의 성격은 구학파와 신학파의 영향이 혼합되어있었다.

구프린스톤신학에 뿌리박은 신학자인 박형룡은 미국의 근본주의와 현대주의 논쟁이 한국에서 재현되는 주역이 되었는 데 신학대학교 건축비의 사기를 피해가기 위하여 총회네 신학논쟁을 붙혀 면죄부를 받으려고 했다. 겉으로는 보수주의를 수호하는 정통장로교회의를 표방한다. 이후 일제하 신사참배로 인하여 해방후인 1946년에 부산 경남을 지역으로 고려신학교를 세우기에 이른다. 한국의 초기 교회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친 이 두 신학자는 메이첸의 영향을 받았고 정통 장로교회를 표방하지만 실제로는 분열의 한 축이 된다.  

Ⅳ. 개혁주의와 장로교회 (장로교회가 나아갈 길)

교회정치제도는 크게 교황제도, 감독제도, 장로제도, 회중제도로 나눌 수 있다. 로마교회는 여전히 교황제도를 채택하고 있으며, 영국의 성공회는 감독제도이다. 회중제도와 장로제도는 종교개혁이후 여러 나라에 걸쳐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교회사에서 신학에 대해 느슨하게 대처한 회중교회와 달리 장로 제도를 채택한 교회는 항상 "성경의 최고 권위"를 주장하며 개혁주의 신학을 지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 한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성경적인 개혁을 시도한 칼빈, 성경을 신앙의 궁극적 권위로 인정하는 『제일치리서』를 작성한 낙스, 자유주의에 맞서 끝까지 성경의 권위를 지키며 분리주의 메이첸과 그의 후광을 받은 박형룡, 박윤선 이들 모두는 장로교인들이기는 했으나 결국은 조국 장로교회를 분열시키는 지도자들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그리고 나중에는 두 분 조차도 헤어졌고 이후 보수 장로교단의 분열은 계속된다. 

성경제일주의라는 주관적 망령으로 인하여 타인을 정죄하고 자기 의를 강화한 나머지 예수가 그토록 경계한 바리세주의에 물든 것이었다. 이런 개혁운동은 종교개혁시기에도 성만찬으로 분열한 루터나 쯔윙글리도 마찮가지였다. 결코 인간들이 하는 일은 하늘 아래 새것이 없다는 말씀 처럼 된 것이다. 우리가 본 받을 것은 종교개혁이든 개혁신앙이든 그 정신이지 개인의 우상화가 아니다. 그들에게도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장로교의 창시자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칼빈의 제네바도, 한 때 위그노라는 개혁주의 신학을 가졌던 사람들이 한 시대를 풍미했던 프랑스도, 장로교회가 채택되었던 스코틀랜드도 현대에는 장로교회가 쇠퇴한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장로교회가 가장 꽃피었던 미국역시 복음주의라는 틀 안에 장로교라는 정치제도는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인식되는 것이 현실이다. 장로교를 하나의 정치체제로만 본다면 이러한 국제적인 장로교의 쇠퇴와 이것이 가진 여러가지 문제점을 목도할 때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장로교가 가진 신학을 바라보며, 장로교가 성경에 최고의 권위를 부여한 개혁주의 신학을 담은 그릇이라고 여길 때 그 중요성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종교개혁 이후 계속된 자유주의의 도전이나 신정통주의의 도전 앞에 우리는 개혁주의 신학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정통적 교리에 대해 하나씩 타협하고 수용하다보면 결국 이 땅에 교회와 그리스도의 복음이 설 자리는 없어질 것이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지니지 않은 교회라면 아무리 부흥하고, 회원수가 많을 지라도 전혀 가치가 없는 단체가 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장로교회가 완벽한 정치체제는 아니지만 우리는 이것을 버리기보다 더 성경적으로 개혁해나가면서 장로교회가 가진 신학을 계속 지켜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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