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사는 지위가 아니라 역할이다”
남양주이주노동자여성센터장 정숙자 목사(재일동포 출신으로 한신대 졸업후 기독교장로회 목사 안수)

팔순을 코앞에 둔 인권운동가가 있다. 1975년 여성운동에 뛰어들었고 1997년 남양주이주노동자여성센터(이하 센터)를 설립하면서 이주여성 노동운동을 시작했다. 정숙자(79·사진) 목사 이야기다. 경기도 남양주 마석 가구공단 안에 있는 센터에서 정 목사를 만났다.
그는 한국 남성과 결혼해 한국에 정착한 재일동포다. 일본 대학에서 영어영문학, 신학을 전공한 후 부모님의 고향 한국을 찾았다가 남편을 만났다.
“시집 온 후 한국 여성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한지 알게 됐어요. 저는 한국말을 몰랐으니 그 어려움이 더 컸죠. 그러던 와중에 1975년 여성의 해를 맞아 문동환 박사가 한국신학대학교(현 한신대) 선교신학대학원 연구과정에 여성분과를 개설했어요. 그곳에서 한국어를 배웠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공부를 시작했죠. 여성학이라는 단어조차 없던 시절이었어요. 여성들이 더 나은 삶을 살아야 한다는 믿음 하나로 열심히 공부했어요.”
1975년 개설된 한국신학대학교 여성연구 과정은 빈민여성, 농촌여성, 여성노동자 등의 세부 전공으로 나뉘었다. 정 목사는 노동문제에 관심이 많아 노동 분야를 세부 연구 주제로 삼고 평화시장 등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 곳을 찾아 다녔다. 현장은 책에서 배운 것과 달랐다. 공장주들은 물건 값이 내리거나 재료값이 올라도 절대 손해 보지 않는다. 손해본 만큼 노동자들의 임금을 깎기 때문이었다. 죽어나는 건 노동자들뿐이었다. 그때를 계기로 정 목사는 평화시장 여성 노동자를 대상으로 야학을 시작했다. 그는 1980년 한국기독교 장로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은 후 교회와 시장을 오가며 여성신학 공부와 여성노동자운동을 병행했다.
“두 가지 일을 했지만, 돈이 안 됐기 때문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실비를 벌기도 했어요. 결혼은 했지만 소명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했죠. 그것이 저를 위한 인권운동이라 생각했거든요. 인권운동은 거창하지 않아요. 제 인권을 찾는 것에서 시작하는 거죠.”

마석가구공단 첫인상 “내가 가해자 된 기분”
그가 이주여성 노동자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1995년 인도네시아에서 열린 제3세계신학자협의회(ETWAT) 아시아 국제 심포지엄에서다. 한 인도네시아 경제학자가 자국에서 활동하는 한국 기업을 강하게 비난했다. 인도네시아 노동자들을 착취하고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당시 정숙자 목사는 “임금이 낮은 이주민을 고용하는 형태는 일본에서 시작됐는데 왜 한국만 비판하느냐”고 따졌다. 이에 “일본은 경제적으로만 착취하지만 한국인은 경제적 착취는 물론 인격 모독도 서슴지 않기 때문에 더 문제”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정 목사는 학자의 말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한국으로 돌아와 이주노동자들이 많이 일한다는 마석가구공단에 가보았다.
“심각하더라고요. 제가 가해자가 된 기분이었어요. 당시만 해도 이주노동자들은 법으로 전혀 보호받지 못했고, 관련 제도도 없었기 때문에 더 열악했죠. 일하다 다쳐도 병원에 못 갔고, 일을 못 하니까 곧바로 해고되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어요. 폭력이 난무한 사업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은 성폭력에도 노출돼 있었어요. 그때 ‘이 사람들과 함께 인권운동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죠.”
정 목사는 1997년 3월 센터를 세웠다. 사회운동의 잔뼈가 굵은 그는 제도적 개선을 위해 다른 이주노동자 단체들과 연대를 시작했다. 이주여성 노동자들의 아지트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작은 공간을 임대해 야학, 탁아방, 한국어·PC 교육을 했다. 목표는 뚜렷했다. 필요한 서비스를 제공해 공장과 집만 오가던 이주여성들을 세상 밖으로 나오게 하는 것이었다.
센터는 2005년 큰 전환기를 맞는다. 정 목사는 그곳에 교회를 세웠다. 이후 수요일엔 성경 공부, 일요일엔 예배를 드리며 이주여성 노동자들과 함께 교회를 꾸리고 있다.
“목사는 지위가 아니라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목사 역할을 해내는 데 여자라고 못할 건 전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신학 공부를 하던 1960~7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어요. 남자는 설교하는 목사, 여성은 전도하는 전도사까지만 될 수 있었어요. 지금은 여성 목사들이 많이 배출됐지만, 큰 교회는 여전히 그때처럼 운영되는 것 같아요. 여성은 남성의 보조 역할에 머물러 있죠.”
사회에선 은퇴하고 노년을 즐길 나이지만 정 목사는 2008년 유방암 제거 수술을 받고 나서도 현장에 남아 있다.
“뒤에서 감독하는 것보다는 앞에서 활동하는 게 속 편해요. 게다가 곧 목사 안수를 받을 큰딸이 저랑 함께 일해주기 때문에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일하고 싶습니다.(웃음)” 현재 남양주의 사역은 기독교장로회 목사가 된 딸이 사역을 이어가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