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 한국인 그 고난의 길

              재일 한국인 그 고난의 역사 

 

재일 한국(조선)인 사회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우리학교(김명준, 2007)의 한 장면

   
 

1945년 일제의 패망은 우리 민족은 식민통치로 부터 해방을 맞지만 일본에 가있던 재일조선인들은 그야말로 새로운 상황에 직면한다. 그리고 해방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과거 아픔의 역사를 끝내지 못하고 여전히 고난의 행군을 계속하고 있다

 다시 디아스포라의 삶으로

해방 직후 2백만 명으로 추산되던 재일 조선인들중 거의 귀국을 하나 잔류하게 된 동포만도 60만에 이른다. 그리고 1945년 10월, 재일조선인들은 스스로의 권익을 보호하려는 목적으로 재일조선인연맹(조련)을 발족시켰다. 물론 이 과정에서 지식인 다수이며 조직력이 강한 좌익세력이 주도권을 잡게 되자 이에 반발한 우익인사들은 조련을 탈퇴하여 1946년 10월 재일본대한민국거류민단(민단)을 결성한다. 1948년 본국에서 총선으로 대한민국이 출범하자 민단은 대한민국을, 조련은 북한을 지지하게 된다. 이로써 두 조직은 조국의 남북한이 대립하고 갈등의 진폭에 따라서 재일 한국인의 삶보다도 조직보존과 정치투쟁이 우선인  단체들이 된다.

하나가 되도 힘든 재일한국인 회가 분열하고 비교적 순탄한 조직활동을 펴온 민단과 달리 조련은 미군정 및 일본 정부와 대립한다. 민족교육을 위한 ‘한신(阪神)교육투쟁’을 계기로 해산도 당하고  이후 일본공산당의 산하기관인 재일조선통일민주전선(민전)으로 명맥만을 겨우 유지해오다가 조련이 1955년 재일본조선인총련합회(조총련)으로 재결성됐다. 이런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조련과 그 후신인 조총련은 재일조선인 사회에서는 비교적 폭넓은 지지를 받았는데, 가장 큰 이유로는 우선 북한에서 적극적으로 경제지원을 받았기 때문다.

반면에 남한의 이승만 정부는 일본이 거류 한국인들에게 국제법상의 동등한 지위를 불 것이라는 낙관론에 빠졌는데 이는 자신이 거주한 미국을 생각한 것이다. 즉 그렇게 고생하다가 보면 국적도 갖게 된다는 안이한 생각을 한 것이다. 총련은 북한의 지원으로 신용조합을 세워 대출도 해주고 조선 민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교육을 실시하니 자연히 조선인들은 총련 민간 가릴 것 없이 그 자녀들을 자연히 입학시키게 된다. 그리고 기성세대들은 언젠가는 다시 조선으로 가야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말이나 우리 역사에 대한 교육을 시키고 일본에서의 생활을 일시적인 삶으로 여기며 가주(假住)의식이 강했다.

이는 당시 동포들의 삶을 그린 문학 작품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이 시기에 활동한 김달수, 박원준, 이인직, 장두식 등은 차별과 같은 일본사회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생활이나 민족문제를 주로 다뤘다. <현해탄>, <태백산맥>, <까마귀의 죽음>등의 작품에는 어려운 현실 아래 고민하는 지식인의 모습과 조국통일 같은 문제가 주된 관심사로 등장했던 것이다. 많은 1세대 재일조선인 작가들이 조총련 산하 조직인 ‘문예동’에 가입하여 어려운 여건아래 한글로 작품활동을 한 사실에서도 일본 생활을 청산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려는 재일조선인의 가주화의식을 엿볼 수가 있다.

가주화에서 정주화 시대로

그러나 1세대들의 가주화의식은 1960년대 들어서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그 이유로는 재일조선인 사회의 세대교체, 조국의 정치현실, 그리고 한일회담 등을 들 수 있다. 해방 후 2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면서 1세대는 일선에서 후퇴하고 일본에서 나고 자란 2세대들이 재일조선인 사회의 주류로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남북이 분단 대치되면서 북은 일당독재와 김일성부자의 세습체제로 굳어져가고 남한 역시 이승만 독재와 4·19, 5·16, 박정희의 유신체제로 이어짐에 따라 통일전망이 더욱 어두워졌다. 덧붙여 1965년 이뤄진 한일협정은 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한일회담을 계기로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의 차별이 철폐되기를 기대했으나 무위로 그치고 말았다. 이에 재일조선인들은 조국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기민(棄民)’이라는 말을 사용하며 본국 정부에 대한 불신감을 표현했다. 더우기 박정희 정부는 노골적으로 총련을 견제하기 위하여 전국적으로 민단의 건설자금을 보내고 조국에 방문 할 수 있는 여권의 발급위한 인증허가권을 민단에 주었다. 그래서 민단은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크게 성장하는 계기가 되여 총련과 대등한 조직이 된다. 

이들 사이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서 정착할 수밖에 없다는 정주화의식이 확산되자, 이제껏 보이지 않던 일본 사회의 차별이 이들의 눈에 더 들어오게 되었다. 일본인들의 재일조선인 차별은 일본인들이 서양인들에 대한 열등의식을 조선인에게 보상받고자 하는 심리에서 기인한 것이다. 재일조선인들은 일본 사회에서 공적, 사적 차별로 많은 고통을 받아왔다. 일본 사회에서 차별이 문제시된 것은 1950년대 후반에 일어난 이진우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어 1960년대에서 1970년대로 넘어가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

김희로사건(1968), 박종석사건(1970), 김경득사건(1977)이 발생하고, 조선인 모욕, 취업 차별, 공무원 임용거부, 지문날인 등이 사회문제로 대두된 것이다. 이에 일본에서의 정착을 모색하던 재일조선인들은 뜻있는 일본인들과 연대하여 지문날인과 취업 차별, 임용거부 등에 대해 거리시위와 법정투쟁 등의 방법으로 일본정부와 사회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한편 일본 사회의 변화는 재일조선인 사회에도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그것은 일본 사회에서 좌익의 퇴조현상과 더불어 북송선을 탄 조선인들의 실망과 북조선의 실상이 밝혀지면서, 조총련의 신뢰가 무너지게 된 것에서 기인하며 남한의 급속한 경제성장도 한몫한다. 또한 일본으로 귀화한 사람들을 ‘반쪽바리’라고 부르면서 민족반역자라고 비판하던 1세대들의 의식에도 변화가 나타났다. 즉, 귀화하고도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간다는 ‘제3의 길’이 많은 찬반의 논란 속에 1970년대 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나 상급학교로의 진학과 일본 주류사회에 진입을 위해서 일본대학교로의 입학이나 결혼 취업들으로 전면적인 진출을 하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재일조선인 작가들 사이에서도 나타났는데, 김달수, 김석범, 이회성과 같은 이들을 조직 안에 흡수하여 통제하려는 조총련과 갈등을 빚었으며, 많은 작가들이 조총련에서 이탈했다. 이들은 <비망록>, <왕생이문>과 같은 작품에서 조직과의 갈등을 다루기 시작했다. 특히 아쿠다가와상을 수상한 이회성의 단편 <반쪽바리>는 귀화를 했다는 이유로 일본 사회와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동시에 따돌림 당한 청년이 결국 분신자살하고 마는 이야기로 당시 일본 사회에서 살아가는 재일조선인들의 아픔과 정체성 문제를 파헤쳤다.

   
 

‘제 3의 길’을 통한 공생의 시대

1980년대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재일조선인 사회는 세대교체와 정주화현상이라는 커다란 변화를 겪어왔다. 한국에서 태어났거나 조국에 대한 지향의식을 가지고 한국인으로 살아온 1, 2세대들은 이미 작고했거나 노령화로 사회 활동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반면 일본에서 나고 자라서 일본인과 같은 정서와 의식을 가지고 있는 3, 4세대의 수가 늘어나 이들 사이에 세대교체가 일어나 공동체 의식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새로운 의식과 사상이 분출되고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대한 문제가 논의되기 시작했다. 소외감과 소속감의 문제는 한국과 일본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소속감을 찾지 못하고 방황하는 젊은 세대들에게 많이 나타났다.

그러나 이전세대 후반에 나타난 ‘제3의 길’이 점차 일반화되면서 ‘귀화는 개인의 선택에 맡긴다’는 생각 또한 크게 확산되고 있었다. 국적과 상관없이 본명을 밝히며 한국인 또는 한국계 일본인으로 당당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도 크게 늘어났다. 이들의 인권운동도 종래의 차별철폐를 위한 투쟁 방식에서 일본인과의 공생을 위한 참정권 운동 등의 더욱 적극적인 방향으로 바뀌어 갔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귀화 혹은 귀국이 끊이지 않는 대데도 재일한국인의 숫자는 줄어들지 않고 있었다. 그것은 뉴커머(한일 기업교류, 공무원, 주재원, 유학생등) 들 때문이였다.

한편 재일조선인 사회의 또 다른 커다란 변화는 일본 사회에 한국의 경제발전과 북한의 경제 파탄이 알려지고 북한의 일본인 납치사건, 핵문제 등이 대두되면서 조총련이 크게 약화되고 민단이 주도권을 잡게 되었다는 것이다. 동시에 조총련은 자신들의 권익을 위한 조직이 정치화되면서 재일조선인 사회의 분열을 조장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따라서 최근에는 정치를 배제하고 마침 일기 시작한 韓流열풍에 따라서 전 재일한국인들의 단결을 모색하는 ‘원코리아 운동’이 일어나 크게 호응을 얻기도 한다(문화중심의 행사로 한국연예인들과 일본내 예술단체들을 모아서 대 규모 공연, 당시 민화협을 통한 한국정부의 경제적인 지원도 있었음)  그리고 민단도 종래의 명칭에서 거류를 삭제한 재일대한민국민단으로 명칭을 바꿨다.

이는 재일조선인 사회가 과거의 조국 지향적이던 가주화 시대에서 일본에서의 공존을 모색한다는 정주화 시대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2007년인가는 혁명적인 일이 일어났는데 민단에 의장에 당선된 사람이 과거 총련계 학교를 다닌 비교적 진보적인 인물이 당선되면서 노무현 정부의 초청을 받고 총련과의 합병등으로 몸살을 앓게 되지만 보수적인 지방의 민단 원로들의 반대에 부딛쳐 실험으로 끝난다. 

이러한 변화와 함께 새로운 세대의 문인들다이 등장해 재일조선인 문학에도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이양지, 유미리, 현월과 같은 아쿠다가와상 수상 작가들이 등장하자 일본 문단에서도 재일조선인 문학에 대한 관심이 크게 높아졌다. 이들 문학은 과거 1세대의 김달수, 김석범의 조국지향적이며 민족적 성격의 문학과는 달랐다. 양석일 작에 교포라고 알려진 성격파 감독겸 배우 키타노타게시(北野武]) 주연의 <피와 뼈>, <밤에 어둠을 걸고>에서 조국 대신 재일조선인들 삶의 실상을, 이양지는 <나비타령>과 <유희>에서 아이덴티티의 문제를 담아냈다.

또한 유미리는 <풀하우스>, <가족 시네마>를 통해 가정의 붕괴와 유년시절의 트라우마를, 현월은 <어둠의 그늘>등에서 공동체의 붕괴를 다뤘다. 이들은 재일조선인 문학의 주류를 이뤄온 민족과 차별저항과 같은 주제에서 이탈하여 새로운 작품세계를 모색하고 있는 자신들의 문학을 재일이라는 기존의 틀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재일조선인 사회의 변화를 단적으로 반영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이한창 / 전북대 일어일문학과 교수의 글에 도움 받음)

   
 

일본에서의 한인 기독교회의 역사와 역할

재일한국인의 역사 가운데 빠질수 없는 것이 재일한국인 교회이다. 역사적으로 처음 일본에 온 이주의 역사는 임란이후로 잡고 그 이전의 백제후예들도 언급하기도 하지만 가깝게는 대동아전쟁이후 강제 이주다. 이들은 광산이나 방직공장에서 근로했다. 예을 들어 관서의 대표적인 교회인 오사카교회는 징용으로 오사카에 온 한인 여공이 자기 기숙사에서 처음으로 예배를 시작한 것으로 그 역사를 찾고 있다. 그때 이미 고베신학원에는 한국인 목사들이 유학을 왔는데 김우현 목사가 최초록 황의생이라는 여공과 그의 친구들과 예배와 심방을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오사카교회 역사)

그러나 한인들의 첫 모임과 예배공동체는 동경에서 시작되였고 매우 진보적인 결사체엿다. 그래서 본국에서는 장로교, 감리교 연합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기에 이른다. 춘원 이광수도 그때의 멤버였다. 1919년 3,1 운동 보다 이르게 2.8 독립선언문을 낸 것도 기독청년들이다. 그후 다른 도시들에 와 있는 조선인들이 예배처소를 시작한다. 나고야 고꾸라 후쿠오카등에 교회들이 생기기 시작한다. 그때 재일한인 교회는 신앙과 더불어 한국인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는 조직이였다. 교회도 이미 전쟁중에 일본법에 의하여 모든 종교를 통합하는 수모를 겪고 일본기도교단 3부에 들어가게 되지만 해방후 독립하여 재일조선기독교회로 조직하여 교회들을 재건한다.

   
 

재일 대한기독교회의 역사(총간사 박수길 목사 글에서 도움)

생성기

일본에 한인교회가 설립된 것은 도쿄에 유학생들이 모이게 되는 것을 시발로 한다. 1908년에 도쿄에 있는 학교에 유학한 학생수는 270명 정도였고 1910년에는 420명으로 늘어났다. 당시 도쿄YMCA의 2층방 하나를 빌려서 도쿄조선기독청년회를 발족시키고 성서연구를 중심으로 유학생들이 주일예배를 시작했다. 평양에 있던 정익로 장로가 1908년에 도쿄에 오게 되어 김정식 YMCA총무와 10여명의 유학생이 예배 후에 모여 YMCA와는 별도로 교회를 설립하자는 데 의견이 일치되어 도쿄교회가 설립되었다. 1909년 10월에 한석진 목사가 일본으로 파송되어 도쿄교회는 더욱 활기를 띄게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8) 이후에 일본의 경제가 호경기를 맞이하여 노동력이 부족하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인해 농지, 토지 등을 수탈당한 수많은 한인들이 일감을 찾아 고베와 오사카를 중심으로 하는 관서 지방으로 도일하게 되었다. 1920년대에는 30만명이 넘는 한국의 남녀 노동자들이 일본으로 건너왔는데 한인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관서지역에도 교회가 설립되었다. 그후 일본의 큐슈지방에도 많은 한인들이 공장과 탄광을 찾아 모여 들었다. 이로 인해 1927년에는 후쿠오카, 고꾸라교회 등 여러교회가 설립되었다. 이들 교회의 신자들은 유학생이나 노동자들 할 것 없이 조국을 일본의 식민지로 빼앗기고 일본에 건너와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앙만은 철저했다.

수난기

어려운 환경 가운데서 살아온 재일한국인의 삶이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나라를 빼앗기고 농지를 잃어 양식을 구하기 위해 일본에 건너온 한인 노동자들은 이곳에서도 멸시와 차별을 받으며 살아왔다. 교회는 마음의 안식을 갖게 하고 고향의 소식과 민족의 아픔을 나누는 신앙공동체의 역할을 해왔다. 또한 조국의 해방을 위해 기도하고 우리말과 일본어를 습득하는 배움의 장이 되기도 하였다. 1934년에는 "재일본조선기독대회" 창립총회가 개최되어 독립된 교단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일본 교회에 대해 전쟁의 승리를 바라는 마음을 한곳에 모은다는 명분 아래 교단을 통폐합하는 종교단체법이 1939 년에 성립됨으로 일본에 있는 한인교회는 존속의 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한국교회는, 1940년에는 "일본기독교회"에 흡수합병되고, 이듬해 "일본기독교단"의 성립시에는 제1부에 편입되었다. 이때부터 1945년 해방을 맞이하게 될 때까지 재일조선기독교회라는 명칭은 없어지고 일본이 태평양 전쟁에 돌입하는 가운데 교회에 대한 탄압은 더욱 심해지고 말았다. 설교나 공식기록에 일본어 사용이 강요되어 많은 신앙의 선배들이 희생과 고난의 길을 걸었다. 재일한인교회에 속해 있는 목사들에게는 일본의 고등계형사들에 의해 탄압이 가해졌다.

재건기

1945년 8월 15일을 기해서 일본천황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였다. 이 날 일본은 패배의 슬픔에 잠겼으나 조국뿐만 아니라 일본의 한인에게는 해방의 기쁨이 넘치는 날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귀국하는 가운데 일본에 남게된 몇 명의 목회자와 300여명의 신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재건되었다. 1945년 11월 15일에 창립총회를 열고 강제적으로 편입되었던 구 일본기독교단으로부터의 탈퇴를 결의하고 통고문을 발송한 후 "재일조선기독교연합회"를 성립시켰다. 1948년에는 "재일대한기독교회총회"라고 명칭을 변경하였다. 그 후 1950년에 발발한 한국전쟁으로 인한 상처와 아픔은 일본에 사는 한인사회에 크나큰 문제를 안겨주었다. 그 후 오랜 세월동안 일본의 한인사회에서도 이데올로기 의 이해차이로 이분화현상이 계속되었다. 남과북이 분단된 조국의 현실이 일본의 한인사회에서도 역력히 나타난 것이었다. 이러한 불행의 실태 속에 재일대한기독교회는 화해자로서 책임있는 태도를 취하지 못했다는 깊은 반성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1968년10월에 선교 60주년을 맞이하면서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에"라는 표어를 세우고 "재일동포사회에 변혁을", "세상에 희망을"이란 부제를 걸고 다시 전진하게 되었다.

   
       2008년 8월 13일 100주년 기념행사를 주관한 당시 총회장 정연원 목사(오사카교회)

성장기

1968년도 60주년 표어 "그리스도를 따라 세상에" 는 재일교회와 청년들에게 큰 도전이 되고 도약하는 기회가 되였고 1978년 10월에 선교 70주년을 맞이한 재일대한기독교회는 “우리들의 희망이신 예수그리스도”라는 표어를 세우고 더욱 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1983년인가 청년국장 강영일 목사가 주관한 해외동포(미국 카나다)청년들과 본국, 일본 재일청년들과의 세미나 참석과 나가노에서 열린 "재일을 고백하는 청년" 이라는 주제로 모인 전국 여름 수련회에 직접 하여하면서 경험한 것은 나중에 기술하기로 한다.

이후1988년10월에는 “우리에게 새 힘을 주시는 예수그리스도”라는 표어와 “선교정책이 념”을 발표하였다. 이듬해 7월에는 제1차로 조선그리스도교련맹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평화적인 조국의 통일을 바라면서 금년 5월18일~25일에 제4차 로 조선그리스도련맹을 공식적으로 방문하게 되었다. 1990년7월에는 조선 그리스도교련맹을 비롯하여 한국의 여러 교단 대표자들과 에큐메니칼 관계자들을 일본으로 모이게 하여 제1회 “조국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를 개최하였다. 남북한의 긴장을 재일본 한인교회가 중재를 하는 형식으로 장소도 중립적인 위치이 일본 도잔소에 모였는데 이는 획기적인 일로 길이 남을 일이다. 

 이 회의도 계속 재일대한기독교회가 주관하면서 제8회 “조국평화통일과 선교에 관한 기독자 도쿄회의”를 개최하기에 이르렀다. 1998년10월에는 “일어나 예수그리스도의 빛을 발하자”라는 표어를 세워 100교회 7000명에 달하는 신자들로 일본 전국에 5개 의 지방회를 이루고 있으며 지금 일대한기독교회는 2008 드디어 100주년을 맞이했다(박수길 목사(전 KCC 총간사 현 聖ヶ丘教会 Hijirigaoka Church  주임목사의 글에서 도움)

   
                       2008 년 재일대한기독교회 100주년 기념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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