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일(在日) 2세 오사카 오광현의 생애
이 글은 지난 2017년 일본에서 오구마 에이지, 고찬유, 고수미 편, 슈에이샤 신서, 2016 / 547-560쪽의 제39장 “재일교포 제주도출신자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긴 4.3 사건의 완전해결을!” 위한 제목의 글 주인공 오광현(吳光現)에 대한 얘기로 오사카 가와구치성공회 주임신부 류시경사제가 인용 한 글이다.
취재일 : 2014년 8월 1일 / 출생지 : 오사카부 오사카시 / 현주소 : 오사카부 오사카시 / 생년월일 : 1957년 7월 7일 / 약력 : 양친은 식민지하 조선의 제주 출신. 1983년 오사카 시립대학 문학부 졸업. 이쿠노 지역활동협의회를 거쳐 1992년부터 성공회 이쿠노센터 주사. 2000년부터 “재일본 제주4.3사건 희생자유족회”사무국장을 거쳐 2011년부터 회장. / 취재 & 원고집필 : 쿠조 마모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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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막내 딸과 오광현이 제주 4.3 희생자 부친 오동식(당시 25세) 묘역에서 | ||
필자와 오광현목사는 오랜 지인으로 그는 오사카시립대학을 나와 재일대한 오사카교회에 출석중이다. 그는 청년시절 한국 EYC에 온적이 있으며 오사카 이쿠노지역의 성공회 복지관에서 사역하다가 은퇴했다. 재 오사카 4. 3희생자 단체를 조직하고 회장으로 매년 제주도 방문과 자체 추모제를 하고 있으며 오사카 시텐노지의 통국사라는 절에 제주 4.3 희생자 위령탑을 모금하여 제주 돌을 반출해 건립했다.
* 오광현은 ‘이카이노’ 에서 태어나고 자람
저는 현재 “재일본 제주4.3사건 희생자유족회” 의 회장을 맡고 있습니다. 1957년에 오사카시 이쿠노(生野)구의 옛 지명인 이카이노(猪飼野=이쿠노구 나카가와)에서 6인 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자랐습니다. “이카이노”는 일본 최대의 재일조선인 밀집 거주지로 주민 5명 중 1명은 재일조선인이고 그 중 절반 정도는 제주도 연고자로 알려집니다.
아버지 오구식(吳九植)은 제주도 남부 중문에서 1915년에 태어나 1930년대 초 18세 때에 키미가요마루(君が代丸)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왔습니다. 아버지의 형제는 3명으로 아버지가 장남, 차남 동식(東植)은 4.3사건에서 희생되었고, 3남 남식(南植)이 후계자가 되어 제주도에 건재히 살고 계십니다. 어머니 강두성(姜斗星)은 아버지가 태어난 중문 옆마을 출신으로 해방 후 1945년 가을에 일본에 왔습니다. 어머니의 숙부님도 사건의 희생자입니다.
제주도는 한반도의 남부에 떠있는 큰 섬으로, 화산섬이어서 경작지가 좁은데다가 일본의 식민지지배로 인해 매우 가난해서, 섬사람 중 많은 이들이 조선 본토나 일본 등으로 돈을 벌러 갔습니다. 키미가요마루 등 제주도와 오사카를 잇는 3척의 정기 연락선이 연간 약 3만명의 여객을 실어날라 전쟁 전에는 제주도 인구 5명중 1명이 일본에 살고 있었을 정도였고, 특히 대공업도시 오사카 등지의 가장 밑바닥을 지탱해 왔습니다.
우리 아버지도 어묵공장 등에서 고생하며 일했습니다. 철야 작업이 계속되어서 잠시 숨돌리는 차에 일본인 감독한테 생선용 칼로 머리를 찔리고, 담배불에 지져지는 등 끔찍한 일도 있었다고 합니다. 어묵을 수레로 배달하다가 통째로 도난당하고는 그대로 도망쳐서 이쿠노에 살게 되었습니다. 전쟁 후에도 조선 사탕을 파는 등 여러가지 일을 했습니다. 한국전쟁이 시작되고 진주군용의 구두 수선으로 돈을 번적도 있었던 듯 합니다. 그 후 유리공장을 경영해서 생활이 꽤 안정되었습니다.
저는 3살 때 늑막염으로 의사가 “목숨을 건지기 어렵다”고 치료를 포기할 정도로 병약해서, 1년 중 20일 정도 학교를 결석했습니다. 당시 재일교포는 건강보험이 없어서 의료비를 감당하기도 어려웠습니다. 초등학교 3학년때 유리공장이 도산해서 양친은 폐품 회수 일을 시작, 큰 형도 근처에서 플라스틱 공장을 시작했습니다. 폐품회수 가게에 불이 나서, 이후로는 가족 모두 플라스틱 공장에 집중했습니다.
플라스틱 가공은 작업을 중단하면 기계에 영향이 있어서 24시간 풀가동합니다. 당시 직원들은 대부분 제주도에서 온 밀입국자여서 어머니도 직원들 식사 준비로 분주했고, 형제들도 모두 가업을 거들었습니다. 고교생 때 오일 쇼크로 플라스틱 일이 없어져서 큰 빚을 지게 되었습니다. 빚쟁이들이 매일같이 들이닥치고, 먹을 쌀도 없을 정도여서 어음 수표를 발행하고, 한 때 대학생인 제 이름으로 공장을 이어갈 형편이었습니다.
재일거주 김석범의 소설 “까마귀의 죽음(鴉の死)”과의 우연한 만남
제가 다니던 이쿠노구의 소학교도 중학교도 학생의 약 절반이 재일교포였는데, 출석부에는 먼저 일본인이 남녀 아이우에오 순으로 적혀있고, 이어서 일부러 한 줄 비운 후에 재일교포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학생회 임원 선거에서도 교사가 개표할 때 표수를 부정하게 조작해서, 초중등학교 9년간 조선인이 학생회장이 된 적이 없을 정도로 차별이 만연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조선문화연구회”에 들어가서, 그 때부터 약간 민족의식에 눈떴지만, 테니스에 미친 때라 열심 회원은 아니었습니다. 책을 좋아해서 중학생 때부터 시바 료타로(司馬遼太郎)의 “료마가 간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등 닥치는 대로 읽었습니다. 고교생 때 책방에서 우연히 김석범 씨가 쓴 “까마귀의 죽음”(신흥서방, 1967년)을 발견했는데, 당시 저는 재일교포 작가가 있다는 것도 몰랐고, 조선어 작품의 번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도 고교생이 되어서 감수성에 영향을 주는 사건들과 접하면서 한창 성장하던 때여서 “재일 문학이 있구나”하고 흥미를 갖고 “까마귀의 죽음”을 읽었습니다. 읽어보니 제주도 4.3사건을 테마로 한 소설이었고, 양친이 제주도 출신인 것도 알고 있었기에 아버지한테 “제주 4.3사건이 뭐에요”하고 여쭈었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갑자기 “누가 그러더냐!”라고 불처럼 화내시면서 머리부터 정신없이 맞았습니다.
제가 온후한 아버지한테 맞은 것은 인생에서 딱 두 번입니다. 첫 번 째는 제가 누나와 싸우다 때렸을 때 “손위 누나한테 그러면 못쓴다”며 아버지한테 혼났습니다. 이건 유교의 나라이니 당연합니다. 그런데 제주도4.3사건에 대해 들었을 때, 왜 화내셨는지 도통 알 수 없었고, 큰 충격이었습니다. 그 후 집에서는 “4.3사건”에 대해 전혀 말할 수 없게 되어, 저는 김석범 씨 책에 커버를 씌워서 책장에 숨겨놓고 몰래 읽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소학교조차 거의 안다녔으니 글을 몰라서 제가 무얼 읽는지는 모르셨습니다.
“인권의 마을”을 목표로 활동
대학 시절에는 재일한국학생동맹에 소속해서 학생운동, 조선역사학습, 집안일 돕기로 정신이 없었습니다. 대학 졸업 후는 지역활동을 하고 싶어서 초교파 기독교 관계자가 이쿠노의 인권과 복지활동을 위해 조직한 “이쿠노 지역활동협의회”에서 10년 동안 일했습니다. 당시의 지문날인 거부운동은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1992년에 발족한 “성공회 이쿠노센터”의 주사가 되었습니다.
센터의 뿌리는 재일교포 1세인 장본영 신부님이 1925년에 세운 성공회 성가브리엘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는 전쟁 전 많은 재일교포가 모여 있었지만, 태평양전쟁 발발과 함께 조선인교회는 강제 폐쇄되었고, 일본의 기독교단체도 전쟁에 협력했습니다. 그리고 전후에도 일본성공회로부터 충분한 지원을 못받고, 교회 건물이 없어졌습니다. 그러나 1984년에 일한성공회의 정식 교류로 한국성공회에 공식 사죄한 일본성공회가 “사죄와 화해의 상징”으로 1992년에 성가브리엘교회의 재건과 함께 “어린양 유아보육원”, “성공회 이쿠노센터”를 설립했습니다.
센터는 재일교포 고령자의 모임 장소인 “놀이방”과 미술교실, 한국어교실, 일한교류, 라쿠고회 등의 “골목 요새(小路寄席)”, 한신아와지 대재해 지원, 매년 3월 1일(조선독립운동 기념일)과 9월 1일(관동대지진에서 많은 조선인이 학살된 날)의 학습회…… 등, 다채로운 활동을 “일본인과 재일한국조선인이 함께 일하며”,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짊어지며”, “세대를 넘어 살아갈”것을 모토로 운영하고 있습니다.
제주도 4.3사건
제주 4.3사건은 제주도에서 일어난 남북 분단에 반대하는 무장 봉기에서 발단, 그 진압 과정에서 제주도민의 1할 이상인 3만명 가량이 희생된 비극입니다. 1945년 일본의 패전으로 조선이 해방되었지만, 북측은 소련군, 남측은 미군이 진주했습니다. 그리고 국제연합의 신탁통치를 거쳐 조선을 독립시키는 구상이 미소간에 합의되었지만, 남한에서 좌우세력의 충돌 등으로 구상이 실패, 1948년 8월 10일에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시행되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주도에서는 단독 선거에 반대해서 4월 3일에 봉기가 일어났고, 1년 전에 미군정이 제주도 억압을 위해 본토에서 투입한 경찰과 우익 “서북청년회”에 의한 제주도민에 대한 횡포가 무장 봉기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당초 봉기는 소규모였지만, 8월의 대한민국 수립을 거쳐 “초토화작전”으로 불리는 처참한 살륙극으로 발전하였고, 게다가 1950년에 조전전쟁까지 일어나 130여개 마을이 불타고, 적어도 2만 5천명에서 3만명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집니다.
희생자의 8할 가량은 군대와 경찰 토벌대에 의한 것이었지만, 저항하던 민간 무장대에 의한 희생도 1할 정도 됩니다. 이 사건은 역대 한국 정부로부터 “공산 폭동”이라는 낙인이 찍혀, 이 사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오랫동안 금기시되었습니다. 4.3사건을 전후해서 군경의 탄압과 우익의 횡포를 피해 일본으로 밀항한 사람들은 1만명 이상에 달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재일 조선인들 사이에서도 사건에 대해 언급을 꺼리는 분위기가 오래도록 지배적이었고, 4.3사건의 비극은 역사의 어둠에 묻혀왔습니다.
사건을 둘러싼 노력들
이전에는 4.3사건에 대해 쓴 책으로 김석범 씨의 소설 “간수 박서방”(앞의 “까마귀의 죽음”에 수록), “까마귀의 죽음”, 김봉현/김민주 편 “제주도 인민들의 4.3 무장투쟁사 : 자료집”(분유사, 1967년) 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1980년대 한국 민주화운동이 고조되면서, 제주도에서도 “제주 4.3연구소” 창설, 지역신문인 제민일보 연재 기사 게재 등,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움직임이 이윽고 고조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2000년에 “제주도 4.3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고 희생자와 유족의 명에 회복을 통해 인권 신장, 민주 발전, 국민 화합에 기여할 것”을 목적으로 한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 특별법”(제주4.3특별법)이 제정되었습니다. 그리고 국가에 의한 심각한 인권유린이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진상조사 보고서”가 마무리되어,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 권력의 과오를 공식 사과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사건으로부터 40년이 지난 1988년에 처음으로 “추도기념강연회”가 개최되었는데, 저도 참가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오사카에서는 1991년의 추도심포지움이 첫 모임입니다. 그리고 사건으로부터 반세기를 맞은 1998년에 오사카에서도 큰 집회를 하고자 실행위원회가 만들어져, 저도 멤버가 되어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2000년에는“재일본 제주4.3사건 희생자유족회”가 구성되어, 1세인 강실(姜實) 씨가 회장, 2세인 제가 사무국장을 맡았고, 2011년에 강회장으로부터 제가 회장 바톤을 이어받았습니다.
작은 아버지 동식 씨가 4.3사건에서 희생된 것을 안 것도, 1982년에 처음 제주에 조상 성묘를 갔을 때입니다. 숙부님의 묘는 그때까지는 아직 없었고, 1992년에 갔을 때에는 “제주도 사건으로 파란만장한 젊은 삶을 마쳤다”라고 새긴 묘비가 서 있었습니다. 그 시점에도 숙부님이 어디에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는 아직 몰랐는데, 2006년이 되어서야 마침내 알았습니다. 하지만 숙부님의 제사조차 허락되지 않는 세월이 오래도록 계속되어, 우리 아버지가 일본에서 제사를 지냈습니다.
숙부님의 아들은 사건 당시 숙모님의 뱃속에 있을 때였고, 58살이 되어서야 겨우 아버지의 기일과 묘의 위치를 알았습니다. 제가 제사를 드리러 제주도에 갔을 때, 사촌이 “광현아, 나도 이제 효도할 수 있게 되었다”라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자기 아버지의 기일도 모른 채 제사도 드리지 못한다는 것은, 조선의 유교문화에서는 엄청난 불효이기에, 환갑이 다 된 사촌에게, 그제야 “기억”이 돌아온 사건이었습니다.
2000년의 “제주4.3특별법” 제정이 있고 나서, 같은 해 봄 오사카에서 52주년 기념집회를 열어 시인 김시종 씨와 작가 김석범 씨가 “4.3사건에 대해 왜 써왔는가, 왜 쓰지 못했던가”를 테마로 대담회를 하였습니다.
50주년인 1998년에 오사카에서 처음 열린 위령제에서는 제주도로부터 전통종교인 “신방(神房=샤머니즘)”을 초대했습니다. 당초 “비과학적인 신방을 부른다?”라는 반대 의견도 있었지만, 저는 4.3사건 희생자와 유족의 치유되지 않은 한을 풀기 위해, 제주도 고유의 신방 의식을 꼭 하고 싶었습니다.
위령제에는 저희 어머니를 포함하여 재일교포 1세가 수백 명 이상 오셔서 다들 울고 있었습니다. 어떤 할머니들은 “50년 동안 기다렸다”며 시작하기 몇 시간 전부터 행사장에 오셨고, 마친 후에는 “오늘 정말 기분 좋다”라시며 가셨습니다. 이런 무겁디무거운 한이 우리들 재일교포 안에 오래도록 가라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무거운 침묵을 깬 유족의 증언
2008년의 60주년을 앞두고 열린 오사카에서의 첫 증언 집회에서는 A씨가 반세기의 침묵을 깨고 처음으로 증언했습니다. 그녀의 숙부인 이덕구 씨가 민간 무장대의 2대 총사령관이었기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를 포함한 일가족 20여명이 군경에 의해 희생되었습니다. 이덕구 씨의 7살짜리 장남 등2명이 토벌대에 끌려가, 가족이 사살되는 총성을 듣고, 자신도 죽는구나 생각했는데, 아는 아주머니가 “이 아이들은 일족과 관계없다”고 말해준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고 합니다. 집은 불태워지고 밭도 재산도 모두 빼앗겨 어른아이 할 것 없이 죄없는 사람들이 차례로 죽임을 당했습니다.
더우기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A씨의 오빠도 “빨갱이”라고 밀고당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제주도를 떠나라”는 오빠의 유언을 듣고 당시 11살이었던A씨는 죽음의 공포에 떨며 섬을 떠돌며 피난한 끝에 일본으로 밀항해 왔습니다. 그러나 체포되어 오오무라수용소에 수용된 후, 오사카에 와서 다방을 경영해 왔습니다. 2007년에 겨우 다시 고향땅을 밟고 숙부와 친척을 추도한 그녀는 “나만 살겠다고 일본으로 도망친 사연도 있고, 두 번 다시 한국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대통령이 사죄했다는 말을 듣고, 반세기만에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증언했습니다.
“유족회” 전 회장인 강실 씨는 일본에서 태어나, 전후 곧바로 고향 제주도로 돌아가 사건을 접했습니다. 경찰대가 밤중에 마을에 와서 기족 모두 연행되어 강씨가 울면서 엄마를 따라 나섰지만, 어머니는 2살이던 여동생을 업은 채로 연행되었습니다. 이게 마지막으로 본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강씨는 그때부터 매일 사체에 흙을 덮는 작업을 강제로 하였습니다. 약 1년반 뒤에 어머니가 매장되었다는 곳을 발굴해보니, 어머니는 등에 여동생을 업은 채로 죽어 있었습니다. 학교에서는 “폭도의 자식”, “빨갱이의 자식”으로 따돌림을 당해, 제주도에서 사는 것을 견딜 수 없어서 부산고등학교에 입학했는데, 예비 검속을 당할 것이 두렵고, 가까운 이들에게조차 사건에 대해 말도 못한 채, 정신이상이 될 것만 같아 1958년에 일본으로 밀입국해온 것입니다.
이와 같은 증언처럼, 4.3사건은 제주도에서 일어났지만, 일본에서도 사건 후 도망쳐온 사람이나 친척이 희생당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현지에서는 4.3사건과 관련한 여러가지 운동이 일어나고 있지만, 재일교포 관계자의 경우는 그렇지 않습니다. 몇 년 전 친척 누님이 “우리 아버지도 그 때 희생당했다”라고 하기에, “체험담을 증언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가슴이 미어져 말할 수 없다”며 고사했습니다. 우리 어머니도 한낮에 조선시장에서 4.3사건에서 죽인 쪽 사람과 가족이 희생된 유족이 우연히 마주쳐서, 서로 죽일 듯 싸우던 모습을 목격했다고 합니다. 재일교포 사건 관계자 중에도, 당시부터 있었던 이데올로기 대립이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어, 사건에 대한 거부반응이 뿌리깊이 남아 있습니다.
한국에서는 “제주4.3사건특별법”으로 운동이 시민권을 얻어, “제주4.3 평화재단”과 “제주4.3평화공원”이 생겼습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에서는 여당도 야당도 “4.3사건 완전해결”을 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된 박근혜 대통령은 2014년부터 4월 3일을 “국가추도일”로 제정했습니다. 그런데 “완전해결”의 내용이 문제입니다. 특별법을 만드는 단계에서 당시의 김대중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화해와 통합을 위해, 이 법률은 성립시키지 않으면 안됩니다.”라고 여야당을 설득해서, 만장일치로 성립시켰기에, 정권이 보수파로 바뀌었어도 특별법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이 법률은 여야당의 타협의 산물이고, 토벌대의 희생자는 국가공로자로 인정되어 유족에게 연금과 장학금까지 지급되고 있는데, 민간 무장대의 간부였다는 이유 등으로 피해 신고가 “불인정”되거나, 신고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는 등의 한계도 있습니다. 재일교포유족회로서도 제주도의 운동과 강하게 연계해서, 사건 진상 규명, 재일교포 관계자나 유족의 발굴 조사 등을 추진해서, 사건의 완전해결을 실현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비극을 두 번 다시 반복하지 않기 위해, 3세나 4세에 교훈을 계승해 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4.3사건과 일본
제가 4.3사건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제가 최초로 자기 자신을 재일한국 조선인으로 의식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던, 김석범 씨의 소설 “까마귀의 죽음”과 만났던 때의 “재일 조선인에도 작가가 있다”라는 충격, 숙부님이 4.3 사건으로 죽었다는 사실, 숙부님이 어디서 돌아가셨는지를 2006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알았다는 점. 그것들이 제가 4.3사건에 집중하는 원점이고, 계속 집중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제주도와 4.3사건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해서 알게 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인류에 대한 범죄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시아인들에게는, 원폭으로 전쟁이 일찍 끝나서 아시아가 해방되었다는 현실도 있습니다. 실은 제주도도 히로시마, 나가사키와 관계가 있습니다. 본토 결전을 앞두고 일본군은 “다음은 제주도 결전이 될지 모른다”라고 생각해서, 제주도에 군대를 증파하고, 비행장과 해안가 참호 진지를 만들어 전투기와 인간 어뢰를 감추었습니다. 그 중 하나는 일본군이 인간 어뢰를 감추기 위해 제주도민을 동원해서 만든 동굴로, 드라마 “대장금”에서 제주도로 유배당한 주인공이 숨어있던 장면을 촬영한 곳입니다.
화산섬인 제주도에는 오름(기생화산)이 많고, 일본군은 오름 속에 나가노현의 마츠시로에 있는 것과 같은 지하 사령부를 4군데 만들었습니다. 그 중 한 곳이 지금은 평화박물관(제주 전쟁역사평화박물관)이 되어 있습니다. 그 곳의 관장은 강제노동으로 터널 공사를 했던 자기 아버지의 한을 풀고 싶다는 생각과, 이런 일이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된다는 마음을 담아 박물관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제주는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깊고, 만약 오키나와전투와 같은 일이 일어났다면, 제 가족들을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을 것입니다. 그런 점들이 일본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4.3사건은 동서냉전 하에서 일어난 한반도의 남북분단에 의해 일어나게 된 커다란 비극이기에, 사건의 철저한 진상 규명을 위해, 남북 분단의 문제를 더욱 깊이 생각하고 싶습니다. 조국의 남북분단은 민단(재일본 대한민국민단)과 조총련(재일본 조선인총연합회)의 대립 등, 우리 재일교포에게도 커다란 영향을 주어 왔습니다.
애석하게도 재일교포 사회는 상호 조직의 반목과 본국 추종의 자세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조직에서 이탈해 갔습니다. 재일교포의 처우를 포함해서 대동단결해서 권리, 이익을 추구해야 함에도, 그게 불가능한 상태입니다. 조선학교의 무상화 문제 등도 포함해서 재일교포의 많은 과제를 일치단결해서 싸워야 합니다.
일본 국가와 사회는, 조선반도의 남북분단으로 인해 커다란 이익을 얻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 커다란 슬픔과 피해를 입은 4.3사건을 재일교포의 존재의 관점에서 깊이 살펴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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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어 해설
김석범(金石範)/ 작가. 1925년 오사카 출생. 쿄토대학 문학부 미학과 졸업. 1957년 “문예수도”에 ‘간수 박서방’, ‘까마귀의 죽음’을 발표. 총련 관계 일에도 종사했으나, 1967년 ‘까마귀의 죽음’을 단행본으로 출판한 후, 조직을 떠남. 1975년 이후 필생의 작업으로 제주도 4.3사건을 테마로 한 작품을 집필. 그 집대성인 대작 “화산도”는 제1부가 오사라기 지로(大佛次郞)상 수상, 전집 7권이 마이니치 예술상을 수상했다. 2015년, 한국의 <제1회 제주4.3평화상> 수상.
민단(民團)/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의 약칭. ‘재일본 조선인 연맹’(조련)의 좌익적 경향에 반대하는 조선인이 결성한 ‘조선건국촉진 청년동맹’(건청)과 ‘신조선 건설동맹’(건동)이 주축이 되어, 1946년 10월에 “재일본 조선거류민단”으로 창단. 1948년에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1994년에 “재일본 대한민국 민단”으로 개칭.
총련(總連) / <재일본 조선인 총연합회>의 약칭. (=조선총련, 조총련). 전후에 결성된 ‘조련’(재일본 조선인 연맹), ‘민전’(재일 조선 통일민주전선)에 이어, 1955년 5월에 새로 결성된 조선인 단체. 북조선의 해외 공민으로서의 입장을 견지하며, 조국 통일, 민족적 권리 옹호, 민족교육 촉진 등의 운동을 추진,
조련(朝連)/ <재일본 조선인 연맹>의 약칭. 1945년 10월에 조선인이 결성한 단체. 조국 귀환과 민족교육 활동 등을 추진했으나, 49년 9월 점령군 연합사령부(GHQ)의 지령으로 일본 정부가 단체규정령을 적용해서 해산시켰다.
민전(民戰)/ <재일본 조선 통일민주전선>의 약칭. 1950년 5월에 한국전쟁이 발발한 후, 1951년 1월에 조선인이 조직한 단체. 반전 투쟁 등을 하였으나, 일본 공산당의 지도 아래 과격한 일본 혁명투쟁을 전재하게 되어 노선전쟁이 일어나 1955년 5월에 해산.
한청(韓靑)/ 1945년에 결성된 ‘건청’(조선건국촉진 청년동맹)은 1950년에 민단 산하 단체가 되어 ‘대한청년단’으로 개칭되었다. 1960년에 한국에 4.19학생혁명이 일어나자 ‘대한청년단’이 개편되어 <한청>이 결성되었다. 그러나 ‘한청’은 다음 해 한국에서 쿠데타가 발생한 후, 민정이관 요구 운동과 일한 법적지위 요구 관철운동, 민단 민주화 투쟁 등을 했다는 이유로 1972년에 민단에서 산하단체 인정이 취소되었다. 1973년 ‘한민통’(한국민주회복 통일촉진 국민회의) 결성에 참가,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전개. 1989년에 ‘한민통’이 ‘한통련’(재일 한국민주통일연합)으로 개편된 후에도 회원단체로서 조국통일운동 등 폭넓은 활동을 하고 있다.


